안동의 김문은 유력한 노론계 가문과 결혼을 통해 확고한 결속을 맺었다. 이처럼 근친혼으로 연결된 유력 가문의 지지는 유력 정치인인 안동 김문에게 중요한 정치적 기반이 되었다.
조선후기 가문의 정치적 성장
위의 인용문에서 순조는 자신의 嫌家에 관한 기록이 있는지 궁금했는데, 가장 많은 嫌家를 소유한 것으로 지목된 안동 김문 김창집의 둘째 아들의 경우에는 실제로 기사환국과 신이목사 회원들에게 불행을 안겨준 소론 직원과 후손들의 명단이 '반緇'이라는 책으로 집안에 간행되었다.16) 정조대에 두 번째로 시장점유율이 높았던 연안이씨. 2품 이상 12명을 배출해 정조대에는 13명을 배출해 2위를 유지했으나 정조대에는 2명으로 급감했다. 헌종년에는 순위가 하락한다.
세도정치기 안동 김문과 국왕과의 관계
안동 김문의 위상과 정치적 영향력의 실제
헌종과 철종때 혼인한 왕족 중 왕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철종의 사생아들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세도정치기 국민혼인의 대부분은 이족들과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36) 조선후기에는 안동김씨의 정계승진이 김창집이 신옥사로 공부한 이후 한동안 중단되었으나 영조말에 다시 재개되었다. 망자의 후손을 임명하기 위해 시행된 장력(忠良科)은 충의와 정의가 상실된 정조대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9세기에도 자신이 권력을 쥐고 있다고 말하는 이들은 가족이 아닌 개인이었고, 가족이 특정한 강력한 가족을 낳았다고 해서 가족 전체가 '통제할 수 없는 가족'으로 인정되지는 않았다. 42)
수렴 숙청이 끝나기 전에 이루어진 이 예송은 결국 안동김문이 철종대에 아무런 통제세력 없이 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50)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위치에 있던 순원왕후 예송에 대해 편지에서 주장했습니다. 논쟁의 중심에 있는 김흥근에게 권돈인의 주장을 쉽게 설명하고 판례를 수정하여 알려달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김흥근은 양측 모두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논쟁을 뒤로하고, 그에게 자신이 통제하는 세력을 제거할 기회를 제공합니다. 더욱이 19세기에는 경제 현안이나 이론 등 국정에서 논의되는 문제들이 더욱 복잡해졌다.
효명세자 대리청정기 안동 김문과 국왕의 정치적 공조
또는 행방불명자 명단에 직접 이름을 써서 임명하는 방식도 있었는데, 이는 국왕의 인사에 대한 뜻을 직접적으로 반영하는 방식이었다.69) 김조순의 경우에는 국왕의 핵심 인물이다. 기존 조사에서는 효명세자 때 김조순이 정부와 소원해진 사실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72) 대리청소가 시작됐을 당시 김조순은 이미 60세가 넘었다. 성과가 있어도 정치적 부담이 크다는 점에서 효명세자는 안동김씨를 벼슬에 적극적으로 등용하는 등 정치에 앞장섰고, 이는 이러한 특권을 활용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또한 순조와 신하들이 갈등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순조의 입장을 분명히 지지하였다.97) 따라서 순조 사후에는 “시아버지와 사위 사이에 있었지만, 주인도 섬겼다' 또는 '하나로서 일을 맡기시고 의심하지 아니하셨다'
세도정치기 안동 김문의 혼인 관계
통혼의 특징
전주이씨와 한산이씨는 정조대와 강력한 정치시대와 관계없이 안동김문과 함께 자주 보고되는 성이다.108) 한편, 정조대에는 전주이씨가 그 뒤를 이었다. 달성서씨, 연안이씨와의 통혼을 통한 유대관계는 지방정부의 안정적인 기능에 기여할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108) 전주이씨의 경우 조선왕조의 국호를 점유하였다. 지배계급의 중요한 부분이자 지배계급의 주요 인물이었다. 통혼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안동 김씨 가문뿐만 아니라 다른 유력 가문들과도 통혼 빈도가 훨씬 높은 것을 보여주는 성이다. 그 중 이건명의 후손들과 여러 대에 걸쳐 통혼이 이어졌고, 김창집의 아들 대에서도 통혼이 이어졌다. 112) 김조순의 아들 김원근도 이건의 딸과 결혼했다. -명씨의 후손 이해성.
고종초기 안동김문이 김병학에게 순조릉에 조영용을 봉안해 줄 것을 요청한 것도 안동김문과 풍양조씨가 긴밀한 유대관계를 유지했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119) 마지막으로 안동 김문이 유력 정치인임에도 불구하고 통혼 빈도가 낮은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안동 김문과의 먼 혼인에 속한 성관으로 분류할 수 있다.
유력 가문과의 혼적 결합과 19세기 세도정국의 운영
먼저, 강력한 정치 시대에 가족이 정치적 단위로 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을 살펴보았다. 안동의 유력 정치인인 김문은 결혼을 통해 유력 노론계 가문과 굳건히 결속되었다. 이처럼 혼인으로 연결된 유력 가문의 지지는 유력 정치인 안동김문에게 중요한 정치적 기반이 되었다.
한편, 효명세자는 안동 김씨 관직을 특혜를 받아 관직에 임명하는 일에 앞장섰다. 집권기 왕과 안동 김 사이의 정치적 협력도 이러한 상황의 결과였다. 안동김문은 막강한 정치시대에 왕과 신하 사이의 중재자로서 왕의 보좌관으로서 존재하였다.
또한 그는 중복혼을 통해 유력 노론 가문과 연결되었고, 이들은 안동김 가문의 정치적 기반으로 존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