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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진찬의례의 설행과 군문 재정을 통한 비용 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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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ic year: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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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세기 진찬의례의 설행과 군문 재정을 통한 비용 확보 박사과정 최우혁 <目次> Ⅰ. 머리말 Ⅱ. 헌종대 진찬의례와 군문의 재정 활용 Ⅲ. 철종대 이후 군문 재정의 감소와 내하전의 증가 Ⅳ. 맺음말. Ⅰ. 머리말 進饌儀禮란 궁중에서 국왕·왕비·대비 등 왕실 어른에게 음식을 올리는 의례를 말한다. 19세 기에 이르러서 진찬의례는 순조대 3차례, 헌종대 1차례, 철종대 1차례, 고종대 5차례로 총 10 차례 설행되었다. 진찬의례는 규모가 큰 행사였던 만큼 많은 비용이 필요하였다. 이 때문에 진찬소가 설치되면 여러 관청이나 군영으로부터 재원을 移來하여 진찬의례에 필요한 비용을 마련하였다. 특히 헌종대의 경우에는 헌종의 친위군영 역할을 한 군문인 總衛營의 재정이 진찬의례에 활용된다. 헌종은 1846년(헌종12) 8월에 숙위의 소홀함을 이유로 摠戎廳을 개편하여 총위영을 창설하였고,1) 이후 총위영은 헌종의 숙위를 담당하는 친위군영의 역할을 하게 된다. 2년 뒤인 1848년(헌종14), 대왕대비 순원왕후의 六旬과 왕대비 신정왕후의 望五를 기념하기 위해 진찬 의례가 설행되었다. 이때 총위영의 재정이 진찬의례를 주관하기 위해 설치된 진찬소에 이래되 었다. 군문은 대부분 군인에게 지급하기 위한 용도의 米·布·錢 등을 비축하고 있었으므로 군문의 米布는 국가에서 비용이 필요한 일이 있을 때 다른 용도로 사용할 수도 있었다. 그리하여 17 세기 후반 이래로 기근에 따른 진휼을 위해 군문의 미포가 사용되었고, 18세기에 이르러서는 북벌론의 약화 등으로 인해 군문의 군사적 역할이 줄어들게 되면서 군문의 미포 활용이 본격 화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 행해진 국가의 주요한 행사에도 군문의 재정이 활용되었 다.2) 진찬의례의 재원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총위영의 재정이 활용된 것 또한 이러한 상황에서 비 롯되었다. 군문의 재정이 국가 행사에 활용될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져 있었던 데다가 헌종대 의 경우에는 총위영이 헌종의 친위군영 역할을 하였으므로 왕실 행사인 진찬의례에 총위영의 재정이 더욱 쉽게 활용될 수 있었다. 1848년 진찬의례의 설행을 위해 마련된 비용의 대부분 이 총위영에서 이래된 것이었다는 점도 이와 관련이 있다. 조선후기 군문의 재정과 관련해서는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져 왔다. 특히 재정 확보라는 측 면에서 각 군문이 둔전과 환곡의 활용, 삼수미세의 징수, 18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시행된 停番 收布 등을 통해 재정을 확보해나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확보된 재정이 호조로 획급되거. 1) 『헌종실록』 권13, 헌종 12년 8월 5일 (정사). 2) 나영훈, 「17~18세기 도감의 고가 마련과 군문재원의 활용」, 『역사와 현실』 103, 2017.. - 1 -.

(2) 나 도감의 운영비로 사용되었다는 점도 충분히 논의되었다.3) 다만 군문의 재정이 19세기 왕 실행사인 진찬의례에서는 어떻게 활용되었는지, 19세기 중에서도 세부시기에 따라 어떤 차이 가 나는지에 대해서는 연구가 부족한 편이다. 헌종대 창설된 총위영에 대한 연구도 등장하였는데, 주로 총위영의 창설 배경과 편제 및 임 무를 중심으로 군제사적인 특징을 다루고 있다.4) 군제사적인 접근이 이루어진 반면, 재정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설명이 미흡한 면이 있다. 재정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충분한 논의가 이루어졌다고 보기는 힘들다. 진찬의례를 다룬 연구도 있다. 그중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서는 규장각 소장 조 선시대 의궤에 대한 해제 작업을 진행하였다.5) 이 연구를 통해 조선후기 진찬의례의 설행 배 경 및 경과를 비롯해 진찬의례에 사용된 비용에 관한 전반적인 정보를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연구 성과를 검토해 본 결과, 조선후기 군문의 재정 운영과 활용 양상, 총위영의 군제사적 특 징, 진찬의례의 특징 등이 밝혀졌다. 그리고 의례를 비롯한 각종 왕실 행사에 군문의 재정이 사용되는 경우도 여러 차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진찬의례는 왕실 어른들이 모두 참여하는 행사였으며, 규모가 컸던 만큼 상당한 비용이 드 는 행사였다. 또한 총위영은 헌종이 왕권 강화를 위해 창설한 친위군영이라는 점에서 헌종대 와 19세기 정치사를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기구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기존의 연구 성과를 토대로 우선 헌종대 진찬의례에 활용된 친위군영의 재정이 어느 정도 규모였는지 검토하고자 한다. 이어서 철종대 진찬의례의 비용 규모를 간략히 살피고, 마지막으로 고종대에는 진찬의 례에 활용된 군문의 재정 비중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검토하고자 한다. 연구를 위해 연대기사료와 『進饌儀軌』 등을 활용할 것이다. 현재 남아있는 『진찬의궤』들은 표제가 모두 동일하므로 각 연도별 『진찬의궤』를 구분하기 어렵다. 이 글에서는 해당 의궤의 앞에 간지를 표기한 기존 연구를 참고하여 각각의 의궤를 『[戊申]進饌儀軌』 등으로 구분하고 자 한다. 또한 의궤의 원활한 내용 파악을 위해 『[무신]진찬의궤』의 국역본6)을 참고하고자 한 다. Ⅱ. 헌종대 진찬의례와 군문의 재정 활용 헌종대 진찬의례는 1848년(헌종14)에 한 차례 설행되었다. 이 해는 대왕대비 純元王后 (1789~1857)가. 六旬이. 되고,. 翼宗(孝明世子,. 1809~1830)의. 비이자. 왕대비인. 神貞王后. (1808~1890)가 望五가 되는 해였다. 그리하여 한 해 전인 1847년(헌종13) 11월 15일 憲宗 3) 이태진, 『조선후기의 정치와 군영제 변천』, 한국연구원, 1985; 송찬섭, 「정조대 장용영곡의 설치와 운 영」, 『한국문화』 24, 1999; 이광우, 「19세기 전반기 삼군문의 재정 운영 실태」, 『군사』 89, 2013; 송 기중, 「17세기~18세기 전반 어영청 재정의 운영과 변화 -『御營廳舊式例』를 중심으로-」, 『군사』 101, 2016; 유현재, 「조선후기 금위영의 재정운영과 그 성격」, 『역사와 현실』 102, 2016; 나영훈, 앞의 글, 2017; 박범, 「정조대 장용영의 군제와 재정 운영」,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8. 4) 최효식, 『조선후기군제사연구』, 신서원, 1995. 5) 김종수, 「1848년(헌종14) 순원왕후 육순 경축 연향과 『[무신]진찬의궤』」, 『규장각 소장 의궤 해제집』 1, 2003; 임종훈, 「1868년(고종5) 신정왕후 주갑 경축 연향과 『[무진]진찬의궤』」, 『규장각 소장 의궤 해제집』 1, 2003; 임종훈, 「1877년(고종14) 신정왕후 칠순 경축 연향과 『[정축]진찬의궤』」, 『규장각 소장 의궤 해제집』 1, 2003; 김종수, 「1887년(고종 24) 신정왕후 팔순 경축 연향과 『[정해]진찬의 궤』」, 『규장각 소장 의궤 해제집』 1, 2003; 김종수, 「1892년(고종 29) 보령 41세와 즉위 30년 경축 연향과 『[임진]진찬의궤』」, 『규장각 소장 의궤 해제집』 1, 2003. 6) 전통예술원, 『국역헌종무신진찬의궤』 1, 민속원, 2004; 전통예술원, 『국역헌종무신진찬의궤』 2, 민속 원, 2005; 전통예술원, 『국역헌종무신진찬의궤』 3, 민속원, 2007.. - 2 -.

(3) (1827~1849)은 이 경사를 기념하기 위해 연석에서 시임대신·원임대신·예조의 당상과 함께 순 원왕후와 신정왕후에게 존호를 올릴 것을 의논하였다. 헌종이. 경사를. 기념하기. 위한. 의절을. 행하려는. 뜻을. 보이자,. 영중추부사. 趙寅永. (1782~1850)은 존호와 진연은 이미 이전부터 행했던 彝典이라고 답하였고, 헌종은 막대한 경 사에는 告布와 宴饌 등의 의절은 마땅히 행해야 한다고 하였다. 또한 헌종은 순원왕후의 존호 를 加上할 경우, 조부 純祖(1790~1834)와 부친 익종에게도 존호를 追上할 것을 주장하였다.7) 대신들과 예조의 당상이 이에 동의함에 따라 순조·익종의 추상존호와 순원왕후·신정왕후의 가 상존호를 거행할 것을 명하는 전교가 내려졌다.8) 존호에 이어서 진찬에 관한 논의가 이어졌다. 그런데 진찬은 순원왕후에게만 올리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신정왕후의 경우, 아버지 趙萬永(1776~1846)의 상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진찬을 받지 않겠다고 하였다. 이에 판중추부사 權敦仁(1783~1859)이 私家의 상제는 心制이 므로 여기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다고 하며 신정왕후의 진찬의례 참석을 건의하였지만,9) 결국 신정왕후는 불참하고 상차림만 마련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1848년(헌종14) 1월 1일 헌종은 인정전에 나아가 순원왕후와 신정왕후에게 致詞를 올렸 고,10) 3월 15일에는 순조와 익종에게 ‘體聖凝命欽光錫慶’, ‘體元贊化錫極定命’이라는 존호를 올렸으며,11) 3월 16일에는 순원왕후와 신정왕후에게 ‘隆禧’, ‘獻聖’이라는 존호를 올렸다.12) 존호를 올린 다음날인 3월 17일에는 창경궁의 통명전에서 진찬의례가 설행되었다.13) 진찬의례가 끝나자, 1848년(헌종14) 4월 2일 헌종은 진찬의궤청의 당상과 낭청을 임명하여 『진찬의궤』의 편찬을 지시하였다.14) 진찬소와 진찬의궤청은 모두 총위영에 설치되었는데, 이 를 건의한 인물은 총위사를 역임한 徐憙淳(1793~1857)이었다.15) 진찬소와 진찬의궤청이 총위 영에 설치된 이유는 진찬의례에 사용된 대부분의 비용이 헌종이 창설한 총위영의 재정이었다 7) 『[戊申]進饌儀軌』 卷1, 「筵說」 丁未 11月 15日. ··· 寅永曰今日卽冬至令節也. 明年大王大妃殿寶籌, 恰躋六旬, 竊伏想聖心, 慶祝曷有其極. 臣等歡忭之忱, 尤無以形達矣. 上曰不勝欣祝矣. 飾慶之節, 多有 國朝已行之典禮, 果何如. 寅永曰尊號進宴, 俱是已行之彝典矣. 上曰當此莫大之慶, 告布宴饌等節, 卽 是當行之事矣. ··· 上曰東朝尊號今當加上, 而兩聖朝追上尊號之禮, 亦當義定矣. ··· 8) 『[戊申]進饌儀軌』 卷1, 「傳敎」 丁未 11月 15日. 傳曰明年卽我大王大妃殿恰躋六旬, 王大妃殿望五之慶 年也, 予小子歡欣頌禱之忱, 容有極哉, 摸聖德於玉牒, 祝寶齡於瑤觴, 卽亦我家已行之典禮, 政合援用 於今日, 而况我純宗大王, 曁我翼宗大王盛德大業, 比如天地高厚, 環東土億萬蒼生, 至百世有不能忘者, 而尙朱有發揮闡揚之擧, 予小子攀慕靡極之情, 尤當如何. 今當亞歲令節, 招見時原任大臣及禮堂, 以此 大典下問, 則僉議詢同, 一辭稱慶, 亦已仰稟于兩慈殿矣. 純宗大王追上尊號都監, 大王大妃殿加上尊號 都監, 翼宗大王追上尊號都監, 王大妃殿加上尊號都監, 合設擧行. 政官牌招開政, 都監堂郞差出. 9) 『[戊申]進饌儀軌』 卷1, 「筵說」 丁未 11月 15日. ··· 上曰今番則欲以進饌爲之, 進饌與進宴豊約, 雖少 不同, 而儀節則別無所殊, 且東朝盛德, 不欲張大, 必以省約爲敎, 予小子不得不仰體聖意, 而慈殿以有 異於常時, 不欲受進饌之禮, 縷縷下敎, 到今亦不可不承順慈敎矣. 敦仁曰國朝典禮, 未嘗以私制爲拘, 今此聖敎, 雖出於仰體慈衷, 而臣等區區下情, 實不勝缺然矣. 上曰慈敎旣如是, 不可不承順矣. 仍命書 傳敎曰上號翌日, 當進饌于大王大妃殿矣, 諸般儀節, 令禮曹稟旨磨鍊. 10) 『憲宗實錄』 권15, 헌종 14년 1월 1일 병자. 11) 『憲宗實錄』 권15, 헌종 14년 3월 15일 기축. 12) 『憲宗實錄』 권15, 헌종 14년 3월 16일 경인. 13) 『憲宗實錄』 권15, 헌종 14년 3월 17일 신묘; 『[戊申]進饌儀軌』 卷1, 「儀註」. 14) 『[戊申]進饌儀軌』 卷1, 「傳敎」 戊申 3月 22日. 傳曰禮曹判書金興根, 吏曹參判金鼎集, 直提學趙秉 駿, 檢校直閣尹致英, 竝進饌儀軌堂上差下. 戶曹正郞洪鍾序, 副司果金益鼎, 漢城主薄徐相鼎, 竝郞廳 差下; 『[戊申]進饌儀軌』 卷1, 「傳敎」 戊申 7月 30日. 傳曰行戶曹判書徐憙淳, 進饌儀軌堂上差下. 前 牧使鄭憲容, 瓦署別提徐承淳, 竝郞廳加差下. 口傳下敎曰自明日, 進饌儀軌廳堂郞仕進, 依例爲之事, 分付. 15) 『[戊申]進饌儀軌』 卷1, 「筵說」 丁未 11月 18日. 憙淳曰本所處所, 不得不以闕內近處爲之矣. 今於總 衛營設所擧行何如.. - 3 -.

(4) 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2년 전인 1846년(헌종12) 8월 헌종은 숙위의 소홀함을 지적하면서 총융청을 개편하여 총위 영을 창설하였다.16) 헌종은 규정을 만들어 총위영의 기강을 엄격하게 하거나,17) 군병과 수문 군의 상태를 점검하는 일18) 외에 재정 운영에 대해서도 직접 관여하였다. 총융청 때와는 달리 총위영의 재정을 독립적으로 편성하였고, 훈련도감이나 장용영처럼 재정만을 전적으로 담당하 는 종사관도 별도로 두었다.19) 그리고 창설 직후 총위영에서는 군수에 필요한 물력으로 돈 50,000냥, 무명 20동, 베 5동을 즉시 구획해줄 것을 청하였다. 총위영의 요청에 대해 비변사에서는 경외의 저축이 텅 비어있 으므로 호조에서 획급한 금위영과 어영청의 減番錢 중에서 50,000냥, 병조의 무명 10동, 선혜 청의 무명 10동, 베 5동을 구획하도록 하되, 지금 당장은 番錢을 가져다 쓸 수 없으니 우선 선혜청의 돈으로 그만큼의 액수에 맞춰 획급하고 총위영으로 하여금 차차 갚아나가게 하자고 하였다.20) 그러나 선혜청 역시 재정적으로 여유가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비변사는 우선 別置錢 중 선 혜청에서 13,000냥, 호조·병조에서 각 8,000냥, 훈련도감·금위영·어영청에서 각 6,000냥, 사복 시에서 3,000냥을 총위영에 빌려줄 것을 청하였다. 총위영은 재정적으로 선혜청·호조 등에서 지급받아 조직을 정비함으로써 군영을 정예화하였 다.21) 총위영의 재정을 마련하기 위해 각 관청과 군문에서 큰 액수의 돈을 빌려오게 된 배경 은 총위영의 규모 확대와도 관련이 있다. 군문의 명칭이 廳에서 營으로 승격되면서 그 규모도 확대되었고, 재정도 과거의 총융청이었을 때보다 최대 5배까지 늘어났던 것이다.22) 당시 중앙 관청들이 재정적인 여유가 없는 상황에서도 총위영에서는 이들 관청으로부터 돈을 빌려옴에 따라 총위영의 재정은 점차 증가하였다. 그리하여 진찬의례를 설행하기 위해 필요한 비용의 대부분을 총위영에서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무신]진찬의궤』 권3의 「財用」을 보면, 1848년의 진찬의례에 들어간 비용을 구체적으로 파 악할 수 있다. 헌종은 진찬의례를 계획하면서 필요한 물력을 호조와 병조에서 2,000냥에 한하 여 정하고, 부족할 경우에는 행사에 들어가는 비용에 따라 총위영에서 지급하도록 명하였 다.23) 진찬소에 마련된 비용은 총 27,623냥 7전 2푼으로서 총위영에서 25,723냥 7전 2푼, 호 조에서 400냥, 병조에서 1,500냥의 돈을 옮겨왔다.24) 총위영의 재정이 진찬소의 이래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높았음을 알 수 있다.25) 16) 17) 18) 19) 20). 『憲宗實錄』 권13, 헌종 12년 8월 5일 정사. 『承政院日記』 2455책, 헌종 12년 9월 20일 임인. 『憲宗實錄』 권14, 헌종 13년 12월 13일 무오. 최효식, 앞의 책, 1995, 199쪽. 『備邊司謄錄』 233책, 헌종 12년 8월 19일. 司啓曰, 卽見總衛營所報, 則以爲本營新設之初, 軍物與軍 需, 不可不措備, 所入物力錢五萬兩, 木二十同, 布五同, 請卽區劃矣, 設營之初, 不可無軍需措劃, 而京 外枵儲, 着手無處, 就戶曹劃送今年條兩營停減番錢中五萬兩, 兵曹木十同, 惠廳木十同, 布五同, 許令 區劃, 而番錢捧入, 期在冬春, 無以及今取用, 姑先以惠廳錢, 準此數貸劃, 待其錢捧, 次次還報之意, 分 付各該衙門, 何如. 21) 최효식, 앞의 책, 1995, 193쪽. 22) 『備邊司謄錄』 233책, 헌종 12년 9월 21일. 23) 『[戊申]進饌儀軌』 卷1, 「傳敎」 戊申 3月 初7日. 口傳下敎曰, 稧屏, 依己丑年例爲之, 儀軌廳處所, 更 待下敎, 而物力, 令戶兵曹, 限二千兩區劃, 如或不足, 自總衛營隨所入上下, 員役則會同日, 量宜酌定 事, 分付. 24) 각 연도별 이래전 현황은 <부표 1>을 참조할 것. 25) 『[戊申]進饌儀軌』 卷3, 「財用」. 移來錢[總衛營錢二萬五千六百八十六兩九錢七分, 爐炭七十三石七斗五升, 折 錢三十六兩七錢五分. 戶曹米一百石, 折錢四百兩. 兵曹錢一千五百兩]二萬七千六百二十三兩七錢二分內.. - 4 -.

(5) 한편 앞선 시기인 순조대에는 진찬의례가 1809년(순조9) 2월, 1811년(순조11) 윤3월, 1829 년(순조29) 2월로 총 3차례 설행되었다. 이 가운데 1809년과 1811년의 경우에는 의례에 들어 간 비용이 얼마인지 나와 있지 않거나 의궤가 남아있지 않아서 의례를 설행하는 데에 비용이 얼마나 들어갔는지 확인할 수 없다. 다만 1829년 효명세자의 주도 하에 설행된 진찬의례는 『[기축]진찬의궤』를 통해 비용을 파악할 수 있다. 당시 진찬소의 이래전은 호조 9,320냥, 병조 1,700냥, 내숙설소 8,352냥으로 총 19,372냥이었다.26) 군문이 아닌 호조와 내숙설소에서 대 부분의 비용을 마련한 것으로 나타난다. 총위영과 같은 친위군영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 던 것으로 보인다. 총위영의 재정 규모는 총위영의 군제 및 재정에 관한 내용이 수록된 『總衛營事例』를 통해 대략적인 파악이 가능하다. 『총위영사례』 중에서 총위영에 소속된 43곳의 둔전이 기재되어 있 는 「各屯來歷」을 보면 각 둔전마다 수취하는 물품과 그 액수가 함께 나타나 있다. 1808년을 기준으로 총융청에는 총 26곳의 둔전이 있었는데, 돈 2,965냥 정도, 쌀 33석, 각 종 겉곡 2,460석 정도를 거두어들였다.27) 이후 총융청이 총위영으로 개편되면서 17곳의 둔전 이 추가되어 수취 액수도 증가하게 된다. 수취 항목도 더 다양해져 돈[錢], 벼[租], 콩[太], 조 [粟], 기장[稷], 참깨[眞荏], 들깨[水荏], 들기름[法油], 볏짚[穀草], 이엉[蓋草], 뜸[草芚], 멍석 [網席], 밀[小麥], 표주박[瓢子], 찰벼[粘租], 生麻, 熟麻, 鐵 등이 추가되었다.28) 이 중에서 돈, 벼, 콩, 기장이 수취 액수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데, 이를 돈으로 환산하기 위해서는 19세기의 물가를 먼저 파악해야 한다. 우선 『[무신]진찬의궤』를 보면 1848년 당시의 쌀값은 1석에 4냥이었다.29) 1808년(순조8)에 편찬된 『萬機要覽』에 따르면 1800년대 초에는 쌀 1석에 5냥, 밭벼쌀[田米] 1석에 4냥, 벼 1석에 2냥 5전으로 정해져 있었다.30) 또한 1878년 (고종15) 고종대의 武衛所 소속 둔전인 德池屯의 수입과 지출 내역이 실려 있는 『德池屯米錢 捧下成冊』에 따르면 쌀 1석에 6냥 7전 5푼, 콩 1석에 3냥 4전으로 나타난다.31) 19세기 후반 의 물가가 19세기 초에 비해 쌀 1냥 7전 5푼, 콩 9전 정도 상승한 사실이 확인된다. 그러나 19세기 후반의 환산식을 적용하여 1848년의 물가를 환산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고종 초에는 경복궁을 중건하는 과정에서 當百錢이 발행되고 개항이 이루어지면서 이전 시기 보다 물가 변동의 폭이 컸기 때문이다. 19세기 초의 환산식 역시 1848년과는 약 50년이라는 시간 차이가 나므로 그대로 적용하기는 어렵다. 한편 1867년(고종4)에 편찬된 『六典條例』에 따르면 쌀 1석에 5냥, 찰벼 1석에 5냥, 콩 1석 에 2냥 5전, 밀 1석에 2냥 5전, 벼 1석에 2냥 5전 등으로 나타난다.32) 그리하여 1870년대 이 후에 비해 물가 변동의 폭이 보다 낮은 19세기 초의 『만기요람』과 1860년대 중반의 『육전조 례』, 그리고 『[무신]진찬의궤』에서 확인되는 물가를 기준으로 1840년대 후반 총위영 소속 43 곳의 둔전에서 거두어들인 돈과 쌀, 찰벼, 벼, 콩, 밀, 기장을 돈으로 환산한 금액을 더하면 약 48,900냥이 나온다.33) 26) 『[己丑]進饌儀軌』 卷3, 「財用」. 移來錢[戶曹錢八千八百兩, 米一百三十石, 折錢五百二十兩, 兵曹錢一千七百 兩內下, 內熟設所錢八千三百五十二兩]一萬九千三百七十二兩內. 27) 『萬機要覽』 軍政 3, 「摠戎廳」. 收錢二千九百六十五兩零, 米三十三石, 皮各糓二千四百六十石零. 28) 『總衛營事例』 卷4, 「各屯來歷」. 29) 『[戊申]進饌儀軌』 卷3, 「財用」. 移來錢 ··· 戶曹米一百石, 折錢四百兩. 30) 『萬機要覽』 財用 2, 「收稅」. 元作錢, 米一石五兩, 田米一石四兩, 太一石二兩五錢. 31) 『德池屯米錢捧下成冊』. 錢文參伯拾壹兩壹分, 米肆拾陸石壹斗壹升壹合價[每石陸兩柒戔伍分式] ··· 錢文 參拾參兩捌戔玖分, 太玖石拾肆斗參升價[每石參兩肆戔式]. 32) 김재호, 「조선후기 중앙재정의 운영: 『六典條例』의 분석을 중심으로」, 『조선후기 재정과 시장-경제 체제론의 접근』, 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 2010, 50쪽.. - 5 -.

(6) 이 항목 외에도 철, 참깨, 들깨, 생마, 숙마 등의 물품까지 계산한다면 50,000냥이 넘을 것 으로 예상된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1848년 진찬의례의 총 비용 약 27,000냥 중에서 총위영에 서만 약 25,000냥이 마련되었다. 그리고 이 25,000냥은 총위영의 둔전 수입인 약 50,000냥의 절반에 해당하는 많은 비용이다. 이처럼 총위영은 각 관청으로부터 빌려온 돈과 둔전 경영 등을 통해 상당한 규모의 재정을 축적해나갔다. 총위영이 창설된 지 2년만인 1848년 진찬의례 설행에 필요한 비용의 대부분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은 이와 같은 배경 속에서 가능하였다고 할 수 있다. Ⅲ. 철종대 이후 군문 재정의 감소와 내하전의 증가 철종대에는 1857년(철종8) 3월에 1차례 진찬의례가 설행되었다. 그러나 현재 철종대 진찬의 궤가 남아있지 않아 진찬의례의 설행에 들어간 비용 및 진찬소가 설치된 곳 등을 자세히 파악 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있다. 다만 『哲宗實錄』과 『承政院日記』 등을 통해 간략하게나마 진찬 의례의 준비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1857년은 순원왕후가 69세가 되고, 신정왕후가 五旬이 되는 해였다. 그리하여 1856년(철종 7) 11월 좌의정 金道喜(1783~1860)가 이를 기념하기 위해 두 慈殿에게 존호를 올리고 爵을 드릴 것을 건의하였고, 哲宗(1831~1863)은 진찬의례를 계획하였다.34) 그런데 철종대 진찬의례 에서는 헌종대와 달리 군문의 역할을 확인할 수 없다. 1849년(헌종15) 헌종이 승하하고 철종 이 즉위하면서 총위영이 혁파된다.35) 친위군영의 혁파는 진찬의례의 비용 마련에도 영향을 끼 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진찬소에서는 호조와 병조를 통해 진찬의례에 들어가는 비용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철 종은 진찬소에 10,000냥을 내려주는 한편, 부족한 조목은 호조와 병조에서 마련하도록 명하였 다.36) 앞서 살펴보았듯이 헌종은 필요한 물력을 호조와 병조에서 2,000냥에 한하여 정하고, 부족분은 총위영에서 지급하도록 명하였었다. 이와 달리 철종은 부족분을 군문이 아닌 호조와 병조에서 마련하라고 명하고 있다. 총위영이 혁파되고 그 명칭이 다시 총융청으로 변경되면서 총위영으로 이속되었던 인적·물 적 자원이 기존에 속해 있던 관청으로 각기 분산되었다. 철종대에는 진찬의례의 설행에 필요 한 대부분의 비용을 지급할만한 군문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호조와 병조 가 주축이 되어 진찬의례의 비용을 마련하였다고 할 수 있다. 한편 고종대에는 19세기에만 5차례의 진찬의례가 설행되었다. 첫 번째로 1868년(고종5) 12 월에 진찬의례가 설행되었는데, 이 해는 대왕대비인 신정왕후가 환갑을 맞는 해였다. 高宗 (1852~1919)은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진찬의례를 설행하였다. 이 진찬의례에서도 철종대와 마 찬가지로 군문의 재정이 활용되지 않았다. 『[무진]진찬의궤』 「재용」의 이래전을 보면, 운현궁 15,000냥, 호조 4,352냥 7전 2푼, 영건도감 쌀 19석 3두로서 총 19,352냥 7전 2푼, 쌀 19석 3두로 나타난다.37) 운현궁의 돈이 이래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는 당시에 총위영처 33) 34) 35) 36). 『總衛營事例』 卷4, 「各屯來歷」. <부표 2> 참조. 『哲宗實錄』 권8, 철종 7년 11월 24일 무인. 『哲宗實錄』 권1, 철종 즉위년 6월 28일 갑오. 『承政院日記』 2587책, 철종 8년 1월 20일 계유. 進饌所啓曰, 本所所用物力, 當爲措劃矣. 依已例令 戶曹兵曹輸來入用, 何如. 傳曰, 錢一萬兩內下矣. 其餘不足條, 輸用於戶兵曹. 37) 『[戊辰]進饌儀軌』 卷3, 「財用」. 移來錢[雲峴宮錢一萬五千兩, 本府錢四千三百五十二兩七錢二分, 營建都監米 十九石三斗]一萬九千三百五十二兩七錢二分白米十九石三斗內.. - 6 -.

(7) 럼 재정이 풍부한 군문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과 일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총위영이 비록 혁파되었지만, 고종 초 흥선대원군은 군사력 강화를 시도하고 있었다. 1866 년(고종3) 12월 호조로부터 40,000냥을 빌려와 어영청에 지급하고,38) 1867년(고종4) 1월 훈련 도감에 20,000냥, 금위영·어영청과 武庫에 각각 10,000냥을 할당하여 무기를 보수하도록 하였 다.39) 2월에는 총융청에도 10,000냥을 지급하고,40) 9월에도 훈련도감에 추가로 20,000냥을 배정하였다.41) 이외에도 鎭撫營의 지위를 정2품 아문으로 승격시키고, 병력의 수와 재정을 크 게 확대하였다.42) 이처럼 군문의 재정이 확대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868년의 진찬의례에서는 군문의 돈 이 활용되지 않고 운현궁의 돈이 이래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흥선대원군이 군비를 강화하는 정책을 시행하고 있었지만, 총위영의 경우와 같이 진찬의례의 비용을 마련할 만한 재정적 여유는 없었던 것이다. 총 비용 역시 약 27,000냥이었던 1848년에 비해 9,000냥 정도 가 줄어들었다. 1877년(고종14)에 이르면 다시 헌종대처럼 진찬의례에서 군문의 재정이 활용되기 시작한다. 1874년(고종11) 고종은 친정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친위군영인 武衛所를 창설하고,43) 훈련도 감·금위영·어영청의 標下軍과 卜馬軍을 무위소에 이속시켰다.44) 인적인 부분 외에 물적으로도 50,000냥이 넘는 돈을 호조로부터 빌려갔다.45) 그러한 가운데 1877년 12월에 진찬의례가 설행되었다. 이 해는 대왕대비 신정왕후가 칠순 이 되고 대비 哲仁王后(1837~1878)가 望五가 되는 해였다. 고종은 이를 기념하기 위해 진찬 의례를 설행하였다. 진찬의례에 들어간 비용의 경우, 『[정축]진찬의궤』의 「재용」을 보면 이래전이 51,352냥 1 푼, 무명 5동이었으며, 그중 50,952냥 1푼이 무위소에 속한 돈이었다. 무위소 외에 호조와 병 조에서도 이래한 재원이 있었으나, 각각 돈 400냥과 무명 5동에 불과하였다.46) 1857년이나 1868년과는 달리 이 해에는 군문인 무위소의 재정이 크게 활용되었고, 그 규모는 진찬의례의 전체 비용에서 거의 대부분을 차지할 정도였다. 무위소의 경우에도 총위영과 마찬가지로 창설 직후 훈련도감·금위영·어영청으로부터 병력을 차출하여 이속시켰다. 무위소의 예산도 군복의 제작을 위한 淸錢 200,000냥,47) 기타 소요경비 로 40,000냥을 배정하였으며, 1875년부터는 진무영에 배정되어 있는 蔘稅 중에서 40,000냥을 무위소에 배정하기로 결정하였다.48) 무위소의 운영을 위해 국가예산이 집중적으로 지원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49) 이와 같이 고종의 뜻에 따라 무위소의 재정이 크게 증가하였고, 그 결과 1877년 진찬의례에서도 총위영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무위소에서 총 비용의 거의 전부에 해당하는 금액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38) 39) 40) 41) 42) 43) 44) 45) 46). 『承政院日記』 2709책, 고종 3년 12월 18일 계묘. 『承政院日記』 2710책, 고종 4년 1월 24일 기묘. 『承政院日記』 2711책, 고종 4년 2월 17일 신축. 『承政院日記』 2718책, 고종 4년 9월 19일 기사. 배항섭, 『19세기 조선의 군사제도 연구』, 국학자료원, 2002, 47~68쪽. 『高宗實錄』 권11, 고종 11년 6월 20일 신묘; 배항섭, 앞의 책, 2002, 119~120쪽. 『高宗實錄』 권11, 고종 11년 7월 11일 신해. 『高宗實錄』 권11, 고종 11년 11월 1일 경자. 『[丁丑]進饌儀軌』 卷3, 「財用」. 移來錢[武衛所錢五萬九百五十二兩一分, 戶曹米一百石, 折錢四百兩]五萬一 千三百五十二兩一分, 木五同[兵曹]內. 47) 『日省錄』, 고종 11년 6월 13일. 48) 『日省錄』, 고종 11년 8월 20일. 49) 최병옥, 「조선말기의 무위소연구」, 『군사』 21, 1990, 138~139쪽.. - 7 -.

(8) 1887년(고종24) 1월의 진찬의례에서도 군문의 재정이 활용된다. 1887년은 대왕대비 신정왕 후가 팔순이 되는 해였고, 이를 기념하기 위한 진찬의례가 설행되었다. 진찬의례에 들어가는 비용으로는 고종의 內下錢에서 271,825냥, 친군영에서 59,668냥 7전 8푼, 호조에서 400냥, 병조에서 500냥, 평안감영에서 3,000냥, 평안병영에서 2,000냥, 按撫營에서 3,000냥이 진찬소 로 이래되어 340,393냥 7전 8푼이 마련되었다.50) 『[정해]진찬의궤』 「재용」의 이래전 항목을 보면 새로운 군문으로 친군영과 안무영이 등장하고 있으며, 진찬의례의 비용으로 두 군문에서 약 62,000냥이 이래되었다. 그런데 1887년의 진찬의례에서는 이전에 비해 진찬의례를 설행하기 위한 전체 비용에서 군 문의 이래전이 차지하는 비중이 축소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1848년과 1877년의 경우, 총 이래전 가운데 군문의 재정이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반면 1887년에 이르러서 는 고종의 내하전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큰 것으로 확인된다. 내하전의 비중이 커지는 것은 당시 중앙의 재정 상황과 관련이 있다. 京各司와 군영에서 매 년 1월에 보고한 회계부에 따르면 고종 즉위 후 1880년까지는 일정 규모의 재정이 유지되고 있었다. 은의 경우에는 50,000냥 이상 유지되고 있었고, 쌀의 경우에는 약 44,000석에 지나지 않았던 1878년을 제외하면 마찬가지로 50,000석 이상이 유지되고 있었다.51) 그런데 1886년(고종23)의 회계부를 보면 은이 7,266냥, 쌀이 16,921석으로 급격하게 줄어 들고 있다.52) 1886년의 회계부를 보고한 날이 1887년 1월 15일이며, 진찬의례가 설행된 날이 1월 27일이었다. 따라서 중앙 관청의 재정이 급격하게 줄어든 상황에서 고종은 내하전을 활용 하여 진찬의례에 필요한 비용을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 1892년(고종29) 진찬의례의 이래전 규모에서도 군문의 재정이 아닌 고종의 내하전이 대부분 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1892년은 고종이 望五가 되는 해이자, 즉위한 지 30년이 되는 해였다. 그 해 6월 세자와 대신들은 경사를 기념하기 위해 고종에게 진찬의례를 설행할 것을 청하였고, 고종이 추수가 끝난 뒤에 행할 것을 명함에 따라 9월에 진찬의례가 설행되었 다.53) 이 진찬의례의 특징은 1829년 효명세자가 순조의 나이 40세와 즉위 30주년을 기념하기 위 해 진찬을 올린 이래 처음으로 內宴과 外宴을 함께 설행하여 찬품의 수를 비롯한 진찬의 전 체적인 규모가 현격하게 컸다는 것이다.54) 규모가 큰 만큼 진찬에 들어가는 비용도 증가할 수 밖에 없었다. 『[임진]진찬의궤』의 「재용」에서 이래전의 규모를 보면, 고종의 내하전이 800,000 냥, 호조가 400냥, 병조가 500냥, 친군영이 180,958냥으로 총 981,858냥인 것으로 나타난 다.55) 이를 보면 1860~1890년대에 이래전이 약 19,000냥 → 51,000냥 → 343,000냥 → 981,000 냥으로 급증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개항 이후 외국 자본의 유입 등으로 인한 물가의 변 동으로 보인다. 또한 고종 즉위 이래로 진찬의례에 드는 전체 비용은 시기가 갈수록 증가하고 있는 반면, 군문의 재정이 차지하는 비중은 점차 축소되는 것이 확인된다. 진찬소도 군문이 50) 『[丁亥]進饌儀軌』 卷3, 「財用」. 移來錢[內下錢二十七萬一千八百二十五兩, 親軍營錢五萬九千六百六十八兩七 錢八分, 戶曹米一百石, 折錢四百兩, 兵曹木五同, 折錢五百兩, 平安監營錢三千兩, 平安兵營錢一千兩, 按撫營錢三 千兩]三十四萬三百九十三兩七錢八分內.. 51) 52) 53) 54) 55). <부표 3> 참조. 『高宗實錄』 권24, 고종 24년 1월 15일 계묘. 『[壬辰]進饌儀軌』 卷1, 「傳敎」. 김종수, 앞의 글, 2003. 『[壬辰]進饌儀軌』 卷3, 「財用」. 移來錢[內下八十萬兩, 戶曹米一百石, 折錢四百兩, 兵曹木五同, 折錢五百兩, 親軍營錢十八萬九百五十八兩]九十八萬一千八百五十八兩內.. - 8 -.

(9) 아닌 예조에 설치되었다.56) 18~19세기 전반까지만 하더라도 각 군문에서는 다른 관청에서 돈을 이급해오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재정을 충당하였다. 그러나 총위영의 사례에서 보았듯이 이급해온 돈으로 재정을 운 영하는 데에는 한계가 나타났다. 호조에서 총위영에 돈을 이급함에 따라 재정 운영에 어려움 을 겪는 등 각종 폐단이 이어졌고, 결국 이러한 문제로 인해 헌종 사후에 총위영이 다시 총융 청으로 복구되어 총위영으로 이급되었던 인적·물적 자원이 모두 원래의 관청으로 분속되었다. 19세기 후반의 무위소도 마찬가지였다. 중앙과 지방의 각 관청에서 재정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음에도 무위소에서는 이들 관청으로부터 돈을 이급하였다. 그리하여 1877년까지만 하더라 도 군문의 돈으로 진찬의례에 사용되는 거의 모든 비용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러나 1887년부터는 고종의 내하전을 중심으로 진찬의례의 비용을 마련하였다. 중앙과 지 방 관청의 재정이 부족한 상황에서 친군영과 안무영 역시 큰돈을 이급해오기 어려웠던 것이 다. 물론 1887년과 1892년의 경우에도 군문이 진찬소로 돈을 이래하고 있으나, 고종의 내하 전이 전체 이래전 중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고, 군문의 이래전은 일부에 불과하게 되었 다. Ⅳ. 맺음말 이 글에서는 19세기 진찬의례의 설행에 필요한 비용으로 군문의 재정이 활용된 사실과 그 러한 군문의 재정 비중이 19세기 후반으로 갈수록 점차 축소되고 있었던 사실도 확인하였다. 이 글에서 다룬 내용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848년(헌종14) 헌종은 대왕대비 순원왕후의 육순과 왕대비 신정왕후의 望五를 기념하기 위해 진찬의례를 설행하였다. 진찬소에서는 진찬의례의 설행을 위해 각 관청으로부터 이래전 을 마련하였는데, 총 이래전 중에서 총위영의 돈이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진찬소 역시 총위영에 설치되었고, 진찬당상에는 총위사를 역임한 서희순이 임명되었다. 이처럼 총위 영이 진찬의례를 진행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앞선 시기인 1829년(순조29) 효명세자의 주도 하에 설행된 진찬의례에서는 군문이 아닌 호 조와 내숙설소에서 대부분의 비용을 마련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는 총위영과 같은 친위군영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헌종대 이후로는 1857년(철종8)에 진찬의례가 설행되었다. 이 해는 순원왕후가 69세가 되 고, 신정왕후가 五旬이 되는 해였다. 그런데 철종대 진찬의례에서는 헌종대와 달리 군문의 역 할을 확인할 수 없었다. 1849년(헌종15) 헌종이 승하하고 철종이 즉위하면서 총위영이 혁파된 다.57) 친위군영의 혁파는 진찬의례의 비용 마련에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한편 1868년(고종5)은 대왕대비인 신정왕후가 환갑을 맞는 해였고, 고종은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진찬의례를 설행하였다. 이 해에는 군문의 재정이 활용되지는 않았지만, 흥선대원군의 사저인 운현궁에서 많은 비용을 충당하였다. 1877년(고종14)에는 다시 이전처럼 군문의 재정 이 활용되었는데, 이 해는 대왕대비 신정왕후가 칠순이 되고 대비 철인왕후가 망오가 되는 해 였다. 고종은 이것을 기념하기 위해 그 해 12월 진찬의례를 설행하였고, 무위소에 진찬소를 설치하였다. 비용 역시 무위소의 돈이 진찬의례의 전체 비용에서 거의 대부분을 차지할 정도 였다. 56) 『[壬辰]進饌儀軌』 卷首, 「座目」. 57) 『哲宗實錄』 권1, 철종 즉위년 6월 28일 갑오.. - 9 -.

(10) 1887년(고종24)의 진찬의례에서도 군문의 재정이 활용된다. 1887년은 대왕대비 신정왕후가 팔순이 되는 해였고, 이를 기념하기 위한 진찬의례가 설행되었다. 진찬소는 친군영에 설치되 었고, 친군영과 안무영에서 돈을 이래해왔다. 그러나 이전에 비해 진찬의례의 전체 비용에서 군문의 이래전이 차지하는 비중은 축소되었다. 반면 총 이래전 가운데 고종의 내하전의 비중 이 매우 큰 것으로 나타난다. 1892년(고종29) 진찬의례의 이래전 규모에서도 고종의 내하전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고종 초 이래로 진찬의례에 드는 전체 비용은 시기가 갈수록 증가하고 있는 반면, 군문의 재 정이 차지하는 비중은 점차 축소되어갔던 것이다. 18~19세기 전반까지만 하더라도 각 군문에서는 다른 관청에서 돈을 이급해오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재정을 충당하였다. 그러나 총위영의 사례에서 보았듯이 호조에서는 총위영에 돈을 이급함에 따라 재정 운영에 어려움을 겪는 등 각종 폐단이 나타났고, 결국 이러한 문제로 인 해 헌종 사후에 총위영이 다시 총융청으로 복구되기에 이르렀다. 19세기 후반의 무위소도 마찬가지였다. 중앙과 지방의 각 관청에서 재정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음에도 무위소에서는 이들 관청으로부터 돈을 이급하였다. 1887년부터는 고종의 내하전을 중심으로 진찬의례의 비용을 마련하였다. 중앙과 지방 관청의 재정이 부족한 상황에서 친군영 과 안무영 역시 큰돈을 이급해오기 어려웠던 것이다. 이후 고종의 내하전이 전체 이래전 중에 서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고, 군문의 이래전은 일부에 불과하게 되었다.. - 10 -.

(11) ※ 참고문헌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일성록』 『비변사등록』 『만기요람』 『육전조례』 『총위영사례』 『덕지둔미전봉하성책』 『[기축]진찬의궤』 『[무신]진찬의궤』 『[무진]진찬의궤』 『[정축]진찬의궤』 『[정해]진찬의궤』 『[임진]진찬의궤』. - 11 -.

(12) <부표 1> 19세기 진찬의례의 移來錢 현황. 1 2. 연도 1809년(순조9) 2월 1811년(순조11) 윤3월. 3. 1829년(순조29) 2월. 4. 1848년(헌종14) 3월. 5. 1857년(철종8) 3월. 6. 1868년(고종5) 12월. 7. 1877년(고종14) 12월. 8. 1887년(고종24) 1월. 9. 1892년(고종29) 9월. 10. 1893년(고종30) 10월. 이래전 · · 호조 병조 내숙설소 총위영 호조 병조 내하전 운현궁 호조 영건도감 무위소 호조 병조 내하전 친군영 호조 병조 평안감영 평안병영 안무영 내하전 호조 병조 친군영. 9,320냥 1,700냥 8,352냥 25,723냥 7전 2푼 400냥 1,500냥 10,000냥 15,000냥 4,352냥 7전 2푼 쌀 19석 3두 50,952냥 1푼 400냥 무명 5동 271,825냥 59,668냥 7전 8푼 400냥 500냥 3,000냥 2,000냥 3,000냥 800,000냥 400냥 500냥 180,958냥 ·. · · 19,372냥. 27,623냥 7전 2푼 · 19,352냥 7전 2푼 쌀 19석 3두 51,352냥 1푼 무명 5동. 340,393냥 7전 8푼. 981,858냥 ·.

(13) <부록2> 『총위영사례(總衛營事例)』 「각둔내력(各屯來歷)」 동전환산식 太 = 租 = 小麥 = 小豆 = 大豆 = 稷 = 2.5냥 米 = 4냥 粘租 = 5냥 둔전명 1. 2. 3. 장흥둔(長興屯) 재령수세소 (載寧水稅所) 봉산사인방둔전 (鳳山舍人坊屯田). 소재지 전라도 장흥부(長興府) 13면, 내덕도(來德 島) 황해도 재령군(載寧郡) 여물평(餘勿坪) 등. 소속. 토지 규모 陸畓 131결 93부 8속. 내영(內營). 島田 290결 40부 7속 島沓 99결 81부 6속. 내영(內營). 畓 831결 83부 6속. 수취 액수[定摠] 錢 6,000냥 租 1,500석. 환전(換錢) 9,000냥. 1결당 租 3석. 4,986냥. 1부당 錢 3전 6푼. 12,605냥. 田 16결 35부 8속 황해도 봉산군(鳳山郡). 내영(內營). 畓 148결 62부 3속 蘆田 267결 33부 7속. 정주대명동신구통여 관향각통급어청초등 4. 노전(定州大明洞新舊. 평안도 정주목(定州牧) 대명동(大明洞). 내영(內營). 筒與管餉各筒及於靑. 畓 150결 80부 2속 蘆田 199결 38부 7속. 草等芦田) 田 62부 5속 5. 박천둔(博川屯). 평안도 박천군(博川郡) 박비도(博飛島). 내영(內營). 畓 141결 17부 1속 蘆田 74결 40부 7속. 황해도 안악군(安岳郡) 사곶(寺串) 6. 순풍둔(順豊屯). 황해도 신천군(信川郡) 어로(魚蘆) · 성월. 내영(內營). (聲月) · 월천(月川). 1부당 錢 4전 2푼 (南新洞은 3전 6푼). 9,080냥. 田畓 284결 68부 3속 蘆場 11파 鐵 14,700근 太 54석 8두 2승. 7. 철현둔(鐵峴屯). 황해도 재령군(載寧郡). 내영(內營). 田結未詳. 租 4석 稷 82석 4두 5승 眞荏 3석 水荏 7석 4두. - 1 -. 350냥.

(14) 法油 1석 1두 3승 5합 錢 750냥 租 234석 牛稅租 소 1필당 15두 還租 8. 태탄둔(苔灘屯). 황해도 장연현(長淵縣). 내영(內營). 畓 111석 17두 7승락 (62석 16두 3승락은 면세). 300石零(耗則年各不同) 留庫 租 100석. 2,647냥. 留庫 太 18석 正租 97석(荒租 50석 每年種子) 募軍 50명 錢 25냥 (1명당 錢 5전). 9. 전주익산둔 (全州益山屯). 전라도 전주부(全州府) 조촌(助村) 등 11면 전라도 익산군(益山郡) 춘포면(春浦面) 등. 내영(內營). 全州畓 106결 56부 益山畓 22결 61부 上摠 租 55석 上摠 太 303석 10두 上摠 粟 100석 田 336결 9부 9속. 10. 장단1둔(長湍一屯). 경기 장단부(長湍府) 강북면(江北面). 강창(江倉). 火田 42결 52부 1속 畓 11결 27부 1속. 上摠 稷 30석 元卜定 水荏 2석 元卜定 豆 1석 5두. 972냥. 元卜定 穀草 100동 元卜定 蓋草 6동 元卜定 草芚 2부 元卜定 網席 1립 上摠 租 58석 上摠 太 124석 10두. 11. 장단2둔(長湍二屯). 경기 장단부(長湍府) 경기 연천현(漣川縣). 강창(江倉). 田 239결 32부 2속. 上摠 粟 30석. 火田 13결 9부. 上摠 稷 30석. 畓 19결 74부 2속. 元卜定 水荏 2석 元卜定 換豆 1석 元卜定 穀草 50동. - 2 -. 532냥.

(15) 元卜定 蓋草 4동 元卜定 草芚 2부 元卜定 網席 1립 上摠 租 107석 上摠 太 124석 5두 上摠 粟 50석 田 172결 15부 9속 12. 적성둔(積城屯). 경기 적성현(積城縣). 강창(江倉). 火田 8결 89부 畓 21결 39부 5속. 上摠 稷 30석 元卜定 水荏 2석 元卜定 換豆 1석. 655냥. 元卜定 穀草 70동 元卜定 蓋草 5동 元卜定 草芚 2부 元卜定 網席 1립 上摠 租 43석 上摠 太 115석 上摠 粟 20석. 田 79결 28부 1속 13. 마전둔(麻田屯). 경기 마전군(麻田郡). 강창(江倉). 火田 3결 57부 畓 3결 20부 7속. 上摠 稷 15석 元卜定 水荏 2석 元卜定 換豆 1석 5두. 470냥. 元卜定 穀草 40동 元卜定 蓋草 3동 元卜定 草芚 2부 元卜定 網席 1립 上摠 租 23석 上摠 太 66석 5두. 14. 삭녕둔(朔寧屯). 경기 삭녕군(朔寧郡) 동면(東面) · 서면(西 面) · 남면(南面). 田 58결 91부 8속 강창(江倉). 火田 50결 11부 5속 畓 7결 70부 8속. 上摠 粟 20석 上摠 稷 20석 元卜定 水荏 2석 元卜定 換豆 1석 元卜定 穀草 30동 元卜定 蓋草 2동. - 3 -. 275냥.

(16) 元卜定 草芚 2부 元卜定 網席 1립 上摠 租 70석 上摠 太 78석 上摠 稷 30석 賭地 租 2석 田 60결 83부 5속 15. 광주둔(廣州屯). 경기 광주부(廣州府). 강창(江倉). 火田 53부 8속 畓 22결 99부 8속. 賭地 稷 4석 元卜定 粘租 2석 元卜定 小麥 1석 5두. 472냥. 元卜定 穀草 40동 元卜定 蓋草 3동 元卜定 草芚 2부 元卜定 網席 1립 元卜定 瓢子 10개 上摠 租 60석 上摠 太 59석 5두 元卜定 粘租 2석. 16. 양성둔(陽城屯). 경기 양성현(陽城縣). 강창(江倉). 田 33결 24부 4속 畓 34결 40부. 元卜定 小麥 1석 5두 元卜定 生麻 40근. 309냥. 元卜定 熟麻 20근 元卜定 草芚 5부 元卜定 網席 1립 元卜定 瓢子 10개 上摠 租 42석 上摠 太 49석 元卜定 粘租 2석. 17. 수원대곶둔 (水原大串屯). 경기 수원부(水原府) 대곶(大串). 강창(江倉). 田 34결 75부 5속. 元卜定 小麥 1석 5두. 畓 30결 63부 4속. 元卜定 生麻 40근 元卜定 熟麻 20근 元卜定 草芚 5부 元卜定 網席 1립. - 4 -. 239냥.

(17) 元卜定 瓢子 16개 18. 수원숙성둔 (水原宿城屯). 경기 수원부(水原府) 숙성면(宿城面). 강창(江倉). 畓 6결 37부 5속. 定稅附于大串屯 上摠 租 20석 上摠 太 26석 元卜定 粘租 2석. 19. 직산둔(稷山屯). 충청도 직산현(稷山縣). 강창(江倉). 田 38결 41부 1속 畓 56결 63부 1속. 元卜定 小麥 1석 5두 元卜定 生麻 40근. 127냥. 元卜定 熟麻 20근 元卜定 草芚 5부 元卜定 網席 1립 元卜定 瓢子 15개 租 8석. 20. 양지둔(陽智屯). 경기 양지현(陽智縣). 강창(江倉). 21. 부안둔(扶安屯). 전라도 부안현(扶安縣). 강창(江倉). 22. 임피둔(臨陂屯). 전라도 임피현(臨陂縣) 경기 장단부(長湍府). 강창(江倉). 田 41결 32부 2속 畓 24결 34부 8속(火田竝計). 田 3결 91부 1속. 太 3석 10두 稷 6석. 57냥. 元卜定 粘租 2석 元卜定 小麥 1석 5두 租 60석 錢 120냥. 290냥. 畓 33석 11두락. 蘆稅錢 20냥 賭錢 46냥. 46냥. 田 7결 90부 2속. 上摠 租 40석. 畓 12결 52부 8속. 上摠 稷 20석. 畓 54결 94부 6속. 경기 파주목(坡州牧) 23. 서남신둔(西南新屯). 경기 마전군(麻田郡) 경기 부평부(富平府). 강창(江倉). 150냥. 경기 양천현(陽川縣). 24. 25. 진위양성둔 (振威陽城屯) 홍주덕산신창둔 (洪州德山新昌屯). 경기 교하군(交河郡) 경기 진위현(振威縣) 경기 양성현(陽城縣) 충청도 홍주목(洪州牧) 충청도 덕산현(德山縣). 강창(江倉). 강창(江倉). 충청도 신창현(新昌縣) - 5 -. 田 6결 57부 3속 畓 7결 39부 3속 田 15석 9두락 畓 67석 5승락. 上摠 60석. 上摠 租 45석. 112냥.

(18) 26. 임진진둔(臨津鎭屯). 경기 파주목(坡州牧). 강창(江倉). 田 54日半耕 畓 17석 5두락. 賭租 105석 5두 餉還耗租作來 27석. 330냥. 3두 租 260석 8두 太 50석 豆 30석. 27. 장산진둔(長山鎭屯). 경기 파주목(坡州牧). 강창(江倉). 田 221日耕. 稷 60석. 畓 72석 8승락. 元卜定 正草 54동. 1,168냥. 元卜定 穀草 54동 元卜定 墩臺米耗 中. 28. 금물둔(今勿屯). 경기 남양부(南陽府) · 수원부(水原府) 사이. 강창(江倉). 田畓 37결 21부 1속. 29. 통진둔(通津屯). 경기 통진부(通津府). 강창(江倉). 30. 부평둔(富平屯). 경기 부평부(富平府). 강창(江倉). 畓 10석 6두락 田 79부 8속. 31. 강화둔(江華屯). 경기 강화부(江華府) 전라도 영암군(靈巖郡). 강창(江倉). 畓 5결 13부 8속 畓 2석 10두락. 32. 영해남둔(靈海南屯). 전라도 해남현(海南縣). 외영(外營). 畓 24결 62부 1속. 전라도 나주목(羅州牧) 33. 나주둔(羅州屯). 전라도 나주목(羅州牧). 외영(外營). 34. 김해둔(金海屯). 외영(外營). 35. 덕지둔(德池屯). 경상도 김해부(金海府) 소죽도(小竹島) 평안도 영유현(永柔縣). 36. 봉산둔(鳳山屯). 평안도 숙천부(肅川府) 황해도 봉산군(鳳山郡) 湖掘 浦坪. 외영(外營). 외영(外營). 田 2석 8두락 畓 20석 2두 8승락 畓 12결 5부 8속 田 17결 54부 2속 1파 畓 226결 31부 3속 7파 田 1결 37부 4속 畓 22결 80부 1속. 42석 2두 3승 賭地租 5석(錢 7냥 5전으로 대신함) 賭地租 25석. 12냥 62냥. 賭地租 22석. 55냥. 賭地租 8석. 20냥. 上摠 米 43석 上摠 錢 3냥 6전. 175냥. 賭錢 50냥. 50냥. 上摠 24냥. 24냥. 上摠 錢 2,370냥. 2,370냥. 上摠 錢 1,000냥. 1,000냥. 纛田 36골 무안함평둔. 전라도 무안현(務安縣). 38. (務安咸平屯) 평산둔(平山屯). 전라도 함평현(咸平縣) 황해도 평산부(平山府). 39. 검암둔(黔巖屯). 경기 양주목(楊州牧). 37. 上摠 錢 25냥 8전. 외영(外營). 畓 47석 12두락. 외영(外營). 畓 5석락 田 60日耕(6결 69부 5속). 牛稅錢 5냥 賭地錢 8냥 租 19석 7두 5승. 畓 21석 2두 5승락. 還耗租 7석 2두 7승. 외영(外營). - 6 -. 30냥 8냥 65냥.

(19) 穀草 79자내 柴 870속 40. 신둔(新屯). 경기 고양군(高陽郡). 외영(外營). 田 27日耕 畓 1석 12두락. 租 11석 9두 5승. 27냥. 米 34석 2두 4승 41. 갑사둔(甲士屯). 경기 양주목(楊州牧) 누원(樓院). 외영(外營). 42. 수유둔(水逾屯). 경기 양주목(楊州牧). 외영(外營). 43. 오차둔(吾叉屯). 황해도 장연현(長淵縣). 외영(外營). 田畓 21결. 穀草 90자내. 田 10日耕. 牛稅柴 270속 耗租 35석 3두 2승. 畓 9석 14두 4승. 牛稅柴 180속 薪鐵 2,000근. 136냥. 87냥 48,993냥. - 7 -.

(20) 『고종실록』의 會計簿 1864(고종1)년의 회계부는 『일성록』을 참고함. 금 1863년(철종14). 100냥. 1864년(고종1). 101냥. 1865년(고종2). 100냥. 1866년(고종3). 98냥. 1867년(고종4). 98냥. 1868년(고종5). 98냥. 1869년(고종6). 59냥. 1870년(고종7). 62냥. 1871년(고종8). 62냥. 1872년(고종9). 62냥. 1873년(고종10). 151냥. 1874년(고종11). 105냥. 은 214,8. 무명 2,063. 98냥 87,98. 동 2,074. 5냥 93,18. 동 1,801. 9냥 80,93. 동 1,981. 6냥 83,55. 동 2,077. 9냥 83,21. 동 1,971. 5냥 53,54. 동 2,262. 3냥 47,75. 동 4,041. 7냥 85,83. 동 4,523. 8냥 108,7. 동 3,780. 93냥 154,9. 동 5,330. 33냥 116,7. 동 2,576. 97냥. 동. 베. 모시. 명주. 196동. 115동. 54동. 278동. 112동. 85동. 660동. 39동. 85동. 421동. 31동. 73동. 470동. 36동. 92동. 488동. 36동. 92동. 597동. 37동. 91동. 725동. 36동. 97동. 63동. 91동. 24동. 84동. 38동. 87동. 38동. 75동. 1,410 동 843동 1,559 동 739동. 쌀 96,33. 콩 9,582. 좁쌀 8,184. 겉잡곡 54,09. 꿀. 8석 116,8. 석 19,67. 석 6,107. 0석 41,88. 02냥 352,8. 02석 106,8. 4석 18,63. 석 3,851. 3석 35,07. 27냥 411,1. 58석 51,55. 5석 11,15. 석 1,107. 7석 30,82. 2석 129,9. 3석 14,75. 석 1,511. 01석 146,9. 4석 18,11. 03석 70,88. 827근. 청전. 기장. 正租. 牟麥. 돈 460,0. 2,307. 33냥 995,1. 5석 31,26. 근 1,047. 68냥 7,804,. 석 2,583. 5석 30,82. 근. 986냥 256,0. 2석 18,56. 석 2,941. 6석 31,92. 6석 77,81. 4석 18,69. 석 1,904. 1석 31,48. 90냥 358,9. 5석 112,3. 8석 22,11. 석 3,097. 6석 31,82. 78냥 750,2. 27석 162,9. 7석 24,22. 석 1,738. 6석 32,21. 65냥 656,9. 05석 205,7. 8석 38,32. 석 1,476. 2석. 12냥 1,635,. 94석 123,6. 0석 27,00. 석. 47석. 6석. 88석. 38석. 46근. 44냥 317,1. 498냥 138,8 63냥.

(21) 1875년(고종12). 151냥. 1876년(고종13). 144냥. 1877년(고종14). 144냥. 1878년(고종15). 144냥. 1879년(고종16). 144냥. 1880년(고종17). 144냥. 122,0. 1,802. 1,165. 223,3. 27,68. 20냥 107,6. 동 1,399. 동. 03석 135,8. 1석 19,95. 71냥 106,0. 동. 07석 63,66. 4석 7,066. 3석 44,13. 석 11,25. 석 4,003. 8석 57,82. 4석 11,46. 석 3,682. 0석 90,74. 3석 11,69. 석 4,170. 7석. 7석. 석. 16,92. 12,67. 1석. 4석. 39냥 98,30 9냥 64,74 5냥 63,40 5냥. 803동. 311동. 266동. 422동. 296동. 280동. 500동. 484동. 386동. 353동. 213동. 546석. 9석. 229석. 1석. 4,656. 13,92. 242,8. 7냥. 60냥 164,7. 644냥. 75냥 140,6. 644냥. 524석. 644냥. 4석. 168석. 486석. 644냥. 37석. 168석. 486석. 644냥. 160석. 34냥 293,5 94냥 144,6 18냥 141,8 29냥. 1881년(고종18) 1882년(고종19) 1883년(고종20) 1884년(고종21) 1885년(고종22) 1886년(고종23) 1887년(고종24) 1888년(고종25) 1889년(고종26) 1890년(고종27) 1891년(고종28) 1892년(고종29) 1893년(고종30). 58냥. 7,266 냥. 235석. 44냥. 151,3 54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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