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보학』의 주된 내용은 기독교 도덕 비판인 것으로 흔히 알려져 있으나, 서론에 서 니체가 밝히는 『계보학』의 집필 의도는 무엇이 생에 대한 건강한 징후인지를 판 별하는 진단학과 관련된다. 니체는 선악의 가치판단은 인간이 처한 특정한 조건하 에서 형성된다고 말하면서, 이러한 조건을 다름 아닌 생에서 찾고 있다. 그에 따르 면 삶이 어떤 상태에 처해 있는가에 따라 도덕적 가치판단은 두 가지 다른 양상으 로 나타날 수 있다.
인간은 어떤 조건 아래 선과 악이라는 가치판단을 생각해냈던 것일까? 그 리고 그 가치판단들 자체는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이제 까지 인간의 성장을 저지했던 것일까 아니면 촉진했던 것일까? 그것은 생 의 위기와 퇴화의 기호인가? 아니면 반대로 거기에는 생의 충만함, 힘, 의지 가, 그 용기와 확신이, 미래가 나타나 있는가?(GM, Vorrede §3, S.
261-262).
여기서 니체는 생의 궁핍함과 충만함이라는 대립 쌍을 자신의 탐구 주제로 제시하 고 있다. Ⅰ장에서 살펴본 바대로, 니체에게 ‘생의 충만함Überfüll’과 ‘생의 궁핍함
Verarmung’을 판단하는 기준은 힘에의 의지가 저항에 맞서는 방향으로 작용하는가
혹은 이를 이겨내지 못하고 저항을 받는 상태에 놓이는가와 관계된다. 그리고 이와 같은 기준이 『계보학』에서는 도덕 형성 조건을 판별하는 기준으로 제시된 것이다.
다시 말해 도덕은 어떤 힘 의지의 상태에 있는가를 드러내는 징후로써, 힘 의지가 퇴화한 인간의 가치판단은 충만한 인간의 가치판단과 다르다는 점이 『계보학』의 논의에 전제되어 있다.
이는 중기 저작 『즐거운 학문』(1882)과 똑같은 문제의식이 『계보학』의 작업에서 도 이어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운명애amor fati’, ‘신의 죽음’, ‘영원회귀’ 등의 주요 사상이 구체적으로 등장하는 『즐거운 학문』에서 니체는 삶의 충만함과 궁핍함을 기준으로 서로 다른 예술과 철학이 발생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때 삶의 충만함 과 궁핍함을 판단하는 기준은 다름 아닌 고통을 겪는 태도다.55) 생의 지나친 충만 함으로 인해 고통받는 자는 삶에 대한 비극적인 견해와 통찰을 용인하고 또 원하는 반면, 생의 궁핍으로 인해 고통받는 자는 구원과 안식을 바란다. 니체의 말을 고통 의 유형에 대입하여 이해하자면, 생을 충만하게 겪는 자는 비극적 인식의 고통을 긍정할 것이며 또 그들은 이러한 고통을 은폐하지 않는 예술과 철학을 전개하리라 고 짐작할 수 있다. 반면 생을 궁핍하게 겪는 자는 휴식, 고요, 구원을 추구하는 기 호에서 드러나듯이 이미 힘이 소진되어 데카당스의 징후를 드러내며, 그 때문에 데 카당스적 고통을 잊기 위해 “도취, 경련, 마취, 광기”(FW, §370, S. 302)를 줄 수 있는 예술과 철학을 원할 것이다.
이와 동일한 전제가 『계보학』에서도 반복된다. 여기서도 니체는 도덕이 그 도덕 을 산출한 문화의 건강한 상태나 피로한 상태를 반영한다고 주장한다. 『계보학』이 도덕의 기원을 조사하는 이유 역시, 서로 다른 ‘가치 평가의 기준’을 발생시킨 문화 의 생리적 조건을 검토하려는 데 있다. 이는 한 도덕이 고통을 어떻게 대하고, 평가 하고, 해석하는가를 따져봄으로써 달성된다. 니체는 삶에서 고통이 발생했을 때 이 를 어떤 태도로 겪어내느냐에 따라서 그 도덕을 내면화한 개인의 위계를 판단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고통을 대하는 상이한 태도는 서로 다른 예술·철학·도 덕이 발생하는 이유가 된다. 그런데 개별적인 경우들이라 할 예술·철학·도덕 영역 에 니체적 의미의 넘침과 궁핍을 기준으로 적용하여 위계를 구분하는 것은 간단하 지 않다. 일반적인 견해대로라면 무언가를 유지하고 보존하고 융성하게 하는 힘이
55) “예술과 철학은 항상 고통과 고통받는 자를 전제로 한다. 하지만 고통받는 자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FW, §370, S. 302).”
야말로 충만한 힘으로 해석될 것이고, 반면 파괴를 앞당기고 현재 상태를 변하게 만들거나 불안정하게 뒤바꾸는 힘을 궁핍함과 연결할지 모른다.
그러나 니체는 그러한 구분이 그저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피상적으로 분류한 것 일 뿐이라고 거부하면서, 현상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zweideutig” 것이기에 오직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기준으로 삼아야만 올바르게 “해석 가능”하다고 말한 다(FW, §370, S. 303). 이에 따르면 현상이 영속적으로 유지되기를 바라는 의지는 현재 자신의 상태를 긍정하는 풍요로움의 표현일 수도 있지만, 현상 유지만을 바라 는 쇠퇴한 힘의 표현일 수도 있다. 또한 파괴를 열망하는 의지는 새로운 힘이 출현 하기를 바라는 충만한 생성에의 표현일 수도 있지만, 현재에 좌절하여 분노한 끝에 현상을 파괴해버리려는 빈곤한 충동에서 기인한 것일 수도 있다(FW, §370, S.
303-304). 이렇게 겉으로는 판별되지 않는 문제를 해명하기 위해서, 니체는 형성되 어 있는 문화적 산물의 역사를 계보학적으로 탐색하고 한 인간의 성격 이면에 숨겨 진 동기와 그러한 동기를 선택한 심리를 유추하는 방법을 택한다.
그렇다면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기준으로 어떻게 비극적 인식의 고통을 겪는 것 이 충만하게 삶을 겪는 것인가? 서론에서 살펴보았던 입장 중에 고통이 위대한 성 취를 위한 도구적 가치를 지닌다고 이해하는 라이터나 레진스터 등은 이를 목적을 성취할 방법에 대한 지식으로 독해할지 모른다. 그러나 자신의 체험을 기준으로 고 통을 겪는 기준을 설정하였던 니체가 일관되게 밝히는 충만하게 고통을 겪는 방식 이란 노력을 통한 자기 향상이나 극복, 수련이라기보다는 병과 같은 피할 수 없는 고통 상황 속에서 비로소 만나게 되는 자기 체험에 가깝다.
충만하게 생의 고통을 겪는 이가 고통 상황 중에 만나게 되는 것은 해묵은 고통 속에서도 계속되는 자신의 힘 의지이다. 깊이 고통받는 자는 그의 아픔을 돌보아야 만 하고, 어떻게든 고통을 견딜 방도를 모색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또한, 병자는 병이 낫기 전까지는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는 사실에 직면하게 될 뿐 아니라 현재 상태로부터 호전되기 위해서는 그전까지 지속하던 습관들을 필연적으 로 교정해야 한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이는 이전의 자신이 익숙하게 사고하고 행 위하며 살아가던 방식으로부터의 결별과 단절을 뜻한다. 이러한 단절은 이미 느끼 는 불편 외에도 결별의 아픔과 고독 등 새로운 고통을 만들지만, 그럼에도 작용하
는 힘 의지를 니체는 생을 향한 긍정으로 평가한다. 이는 힘이 약화된 상태에서도 어떤 변화를 거부하고 오직 자신의 상태를 연명하기 위해 마취제나 도취제를 찾는 데카당스와는 다르다. 오히려 충만하게 고통받는 자는 고통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소망을 냉정히 돌아보고 이를 달성할 수 있는지를 엄밀히 따지는 과정에서, 막연한 낙관론을 버리고 실존의 한계를 직시한다.
예를 들어 니체는 병환으로 인해 교수직에서 물러나고 바이로이트에서 바그너와 결별하는 등 사회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고통을 겪었던 시기를 통해서 “나는 처음 으로 가장 과묵한 사람, 가장 깊이 고통받는 사람만이 통달하는 은둔자 같은 말투 를 배웠다.”(MA Ⅱ, Vorrede §5, S. 8)고 회고한다. 즉 그는 개인적으로 가장 고통스 러웠던 시기를 거치고서야 자신의 스타일을 확립할 수 있었다. 그는 그 시기에 자 기 내부에서 ‘의사와 환자를 동시에 지닌 나’를 만나게 되었으며, 지금까지는 시도 한 적 없는 정반대의 방법, 즉 새로운 식이요법과 훈련을 시도하게 되었다고 말한 다. 그리하여 이렇게 생의 최소한도를 유지하는 동안 그는 모든 조악한 욕망에 그 자신을 얽어매두었던 사슬로부터 해방되었다고 말한다. 이 과정은 그에게 자긍심 을 심어주었다. 왜냐하면 외적으로는 모든 것이 불리한 와중에도 그는 분연히 독립 함으로써, “그러한 불리함 속에서도 살 수 있다는 긍지, 약간의 냉소와 약간의 ‘정 조’, 그러나 그만큼 더 많은 변덕스러운 행운”(MA Ⅱ, Vorrede §5, S. 9)을 얻게 되 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가 알게 된 것은 상황이 잘 풀려나갈 때는 이룰 수 있으리라 여겼던 다른 많은 약속이나 그가 시간을 할애했던 다양한 관계들이, 실은 그의 삶에 본질적이지 않은 것일 수 있다는 고통스러운 자각이다. 그래서 고통받는 이는 “자신의 삶을 지배한 망상에 대해 크게 실망하고 깨닫는” 동시에 “최고의 괴 로움을 맛보는 순간에 자신에 대해 통찰하게 된다(M, §114, S. 103).”
이를 종합하자면 고통을 충만하게 겪는 것은 생에서 발생한 비극적인 사건으로 인하여 파국의 고통을 겪는 와중에도 이를 통해 비극적 인식과 대면함으로써 생의 성질을 포용하는 태도에 가깝다. 이는 자기를 극기하고자 육체적인 고통을 감수하 면서 단련하는 스토아적인 금욕적 태도와는 구분되며, 더군다나 고통이 일어나는 것을 조장하고 방조하는 태도와는 더욱 거리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파국의 고통을 통해서 평온한 와중에도 고통스러운 순간은 언제든 갑자기 들이닥칠 수 있다는 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