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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욕적 이상의 예술가: 말년의 바그너

5. 예술가 유형의 고통 해석

5.1. 금욕적 이상의 예술가: 말년의 바그너

니체 철학에서 예술은 고통에 반응하는 두 유형의 인간을 판별하는 기준으로 제 시된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이들은 고통을 충만하게 겪는가 혹은 궁핍하게 겪는가 로 나눠질 수 있다. 마찬가지로『계보학』에서 니체는, 예술가는 금욕적 이상과 두 가지 방식으로 관계 맺는다고 말한다. 즉 예술가에게 금욕적 이상은 “아무것도 의 미하지 않을 수도 있거나, 또는 너무 많은 것을 의미할 수 있다(GM, 3-1, S. 357).”

이 중 후자는 금욕적 이상과 관계 맺기에 니체가 우려하는 방식인 고통을 궁핍하게 겪는 이들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예술은 도덕이나 철학과 다르다. 도덕이 제시하는 최고의 도덕적·종교적 가치들은 니체에게는 모두 고통에 대한 궁핍한 태 도로 평가된다. 예를 들어 니체는 ‘덕’이나 ‘신성’처럼 “현재 인류가 그들의 최고의 소망 사항을 통합해놓은 가치들은 모두 데카당스 가치다.”(AC, §6, S. 170)라고 잘 라 말하는 반면, 예술은 예외적 가능성이 출현할 수 있는 영역으로 남겨둔다.81)

80) 제3논문 전체 28절 중에서 예술가는 총 8곳(3-1~6, 3-25~26)에서 언급된다. 그러나 유의미 한 분량과 내용으로 비판이 진행되는 구절들은 3-3~6에 걸친 세 절 정도인데, 여기서도 니체는 철학자의 금욕적 이상을 본격적으로 비판하기 위한 토대로 예술가의 금욕적 이상을 언급할 뿐이다. GM에서 니체가 취하는 예술에 대한 이러한 냉담한 거리 두기는, 예술을 사유의 중심에 놓는 다른 저작과는 상반되는 태도라 할 수 있다. 그러나 GM에서 예술 언급은 분량상으로는 적지만 니체의 전체 기획을 파악할 때 핵심이 되는 단서들을 알려준다. 아론 리들리A. Ridley는

“GM에서 이상하고 다소 피상적인 방식의 발언을 통해 보여주듯이 [예술은] 여전히 그의 생각 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Aaron Ridley, Nietzsche’s Conscience: six character studies from the Genealogy, New York: Cornell University, 1998, p. 78.

그러나 이러한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당대의 예술가들은 광범위하게 금욕적 이상 에 노출되어 있다. 니체는 당대 문화의 “전체적인 상황은 전반적으로 열악하고, 퇴 락이 일반적이다.”(WA, Zweite Nachschrift, S. 40)라고 평가하며, 특히 낭만주의 예 술이 19세기 대중에게 널리 지지받는 것을 부패한 징조로 본다. 이러한 낭만주의 비판은 후기 저작에서 바그너 비판으로 집약된다. 즉 니체가 후기 저작에서 바그너 를 “현대성의 칼리오스트로”(WA, Epilog, S. 47)로 비판하는 것은 데카당한 당대 문 화의 한계와 위험성에 대한 고발을 겸한다.82) 그리고 이러한 문화 비판의 실마리는

『계보학』 제3논문에서 찾을 수 있다. 여기서 바그너는 유형학적 측면에서 금욕적 예술가의 범례 혹은 전형으로 제시된다. 따라서 이 글은 근대 예술운동과 문화적 현상 안에서 어떻게 금욕적 이상이 위험한 영향력을 미치는지를 바그너라는 경우 를 통해서 이해하고자 한다.

니체가 특히 『계보학』에서 문제 삼는 것은, 말년의 바그너가 성애와 순결을 대립 관계로 보는 지점이다. 말년의 바그너가 성애와 순결을 구분하는 것은 금욕적 이상 을 좇는 예술가라는 점을 스스로 드러낸 증거라는 것이다. 니체가 보기에 성애와 순결은 대립적인 관계가 아니고 관능을 죄악시할 필요도 없다. 본래 고대 그리스에 서 성애의 관능은 곧 사랑의 표현이기도 했는데, 기독교 이후로 관능은 사랑과 분 리되어 부도덕하다거나 불순하다는 오욕을 뒤집어쓰게 되었을 뿐이다.83) 그러므로 바그너가 순결과 관능을 구분한 것은 기독교 도덕에 오염된 데카당스의 징후로 평 가된다.

81) 제3논문 앞부분은 금욕적 이상에 아무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예술가가 존재한다고 밝히며, 금욕적 예술가의 반대 사례로 괴테와 하페즈(GM, 3-2, S. 359), 스탕달(GM, 3-6, S. 365) 등을 언급한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금욕적 이상과 관계되지 않은 예술가가 이미 존재하며, 또한 앞으로도 존재하리라는 점을 알 수 있다.

82) 이 점에서 니체가 바그너의 경우를 통해 궁극적으로 몰두하는 것은 유럽의 데카당스라는 문제 이며, 니체의 바그너 비판은 “총체적 문화비판의 양상을 띤다”라고 전예완은 지적한다. 전예완,

「‘바그너의 경우’를 통해서 본 니체 대 헤겔」, 『헤겔연구』, Vol. 33, 2013, 1-2쪽.

83) “기독교는 에로스에 독을 타 먹였다: — 그로 인해 에로스는 죽지는 않았지만, 타락하여 부도 덕해졌다(JGB, §168, S. 102).”

순결과 관능 사이에는 어떤 필연인 대립이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좋은 결 혼, 모든 심정으로부터 우러나는 사랑은 이런 대립을 넘어선다. […] 순결과 관능이 대립하는 경우가 있다고 할지라도, 다행히 그것은 비극적인 대립으 로까지 갈 필요는 없다. 이것은 최소한 ‘동물과 천사’ 사이에 존재하는 불안 정한 균형을 즉각 실존의 반대 근거로 생각하지 않는, 심신이 건전하고 쾌 활한 모든 사람에게 해당될 것이다. ― 괴테나 하페즈 같은 가장 섬세하고 도 명랑한 사람들은 거기에서 오히려 더 많은 생의 자극을 보았다. 그러한

‘모순’이야말로 우리를 실존으로 유혹한다(GM, 3-2, S. 358-359).

괴테와 하페즈처럼 육체적 관능을 폄하하지 않으며 오히려 이를 실존으로 유혹하 는 모순이자 자극으로 승인할 수 있는 예술가들은 금욕적 이상으로부터 자유롭다.

이들뿐 아니라 한때 바그너도 포이어바흐의 ‘건강한 관능’이라는 기치를 좇던 시기 가 있었다고 니체는 지적한다(GM, 3-3, S. 360). 이에 반해 관능과 순결을 양립할 수 없는 가치로 보는 말년의 바그너는, 관능이 주는 자극을 불쾌하게 여기고 이와 대립하는 순결을 갈구한다는 점에서 “전향, 개종, 부정, 기독교, 중세를 설교하 는”(GM, 3-3, S. 361) 의지를 드러낸다.

이와 같은 금욕적 강박이 드러나는 작품으로 『계보학』에서 거론되는 것은 바그 너의 마지막 작품인 《파르지팔》이다. 이 작품 속에서 파르지팔은 성배 기사단장 암 포르타스의 상처를 치유하고 모두를 구원할 ‘순수한 바보’로 예정된 인물이다. 그 는 마법사 클링조르의 명령을 받는 마녀 쿤드리에게 유혹받는다. 그러나 쿤드리의 입맞춤을 받는 순간, 파르지팔은 암포르타스의 고통이 어디서 온 것인지를 이해하 고 쿤드리를 거부함으로써 육욕의 굴레를 끊는 데 성공한다. 더 나아가 성창(聖槍) 을 탈환하고 클링조르를 물리치기까지 한 파르지팔은 이후 쿤드리를 저주로부터 풀어주어 죽음의 안식을 얻게 한다. 바그너는 이것을 쿤드리가 얻은 구원으로 표현 하는데, 이러한 결말은 니체가 보기에는 “감성과 정신에 대한 저주”(GM, 3-3, S.

360)로 보이며, 그 작품의 창작자가 쇼펜하우어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창작을 할 수 도 있었을 것이라고 아쉬워한다(GM, 3-4, S. 362).84)

84) 니체는 바그너의 마지막 작품이 금욕과 구원에 대한 도덕적 정당화 대신에, 종막극으로 사티로 스 희극을 올리던 고대 그리스의 디오니소스 주신제처럼 바그너 자신의 작품 경향 전체를 패러

쇼펜하우어는 미적 관조를 통해서 성적인 관심으로부터 놓여날 수 있을 때, 마치

‘익시온의 수레바퀴’가 멈춘 것처럼 생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설파했다 (GM, 3-6, S. 366). 여기서 니체는 암포르타스의 고통에 연민을 느끼고 순결을 선택 하는 파르지팔을 쇼펜하우어 철학의 방향성과 겹쳐 본 것이다. 더불어 니체는 바그 너가 “기독교적이고 병적인, 반계몽주의적인 이상으로 개종과 전향”(GM, 3-3, S.

360)을 했다는 증거를 이 작품을 통해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니체가 이렇게 《파르 지팔》을 기독교적인 작품으로 보는 이유는 이 작품에서 옹호하는 순결과 구원의 가 치가 기독교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85)

그러나 작품에서 성애를 배격하고 금욕을 신성화한다는 점, 작품 속에서 표방하 는 가치가 기독교적이라는 점만으로 니체가 바그너를 금욕적 이상의 예술가로 비 판하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가 더는 사회의 중심원리도 아니던 당대에 쇼펜하우어 의 무신론적 교리로 무장한 바그너를 ‘예술가의 금욕적 이상의 전형’으로 손꼽는 이유는, 앞서 말하였듯이 니체가 바그너의 작품 속에서 당대 문화 속에 숨은 위험 을 간파하였기 때문이다. 니체가 당대에 통용되는 가치 중에서 특히 우려하였던 것 은 “‘비이기적인 것’의 가치, 즉 동정 본능, 자기부정 본능, 자기희생 본능의 가 치”(GM, Vorrede §5, S. 264)였다. 한 사회에서 이 같은 가치가 고평가될 때, 해당 사회 속의 인간은 개별적인 삶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가치까지도 부정하게 될 수 있다고 니체는 생각한다. 니체는 이러한 자기부정의 계기를 바그너 작품 속에서도 감지하였기에 바그너 예술이 지닌 특성을 퇴폐적이라고 비판하였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디하며 회고하는 것으로 만들 수도 있었으리라고 말한다. 이처럼 니체가 《파르지팔》이 지닌 진지한 성격을 소재에 부적합한 것으로 여기며 패러디나 사티로스극에 더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는 점은 NW, “Keuschheit” §3, S. 428-429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85) 작품의 소재에 힌두교나 불교 등 다른 이교적 소재들도 많이 차용되었고 바그너가 자신을 비기독교인이라고 생각했다는 점 등으로 인해, 니체가 이 작품을 기독교적이라고 비판하는 것 은 잘못된 비난이라고 평가하는 연구자도 있다. 가령 브라이언 매기B. Magee는 “쇼펜하우어 주의자이면서 동시에 기독교도일 수는 없다”고 잘라 말한다(브라이언 매기, 김병화 역, 『트리스 탄 코드』, 심산, 2005, 441쪽). 그러나 니체가 이 작품을 비판하는 이유는 소재가 아니라 주인 공의 성격적 특성 및 그가 선택하는 것이 일관되게 기독교 가치를 구현한다는 점에 근거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구원으로서의 가능성을 정당화한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