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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형적 ‘관조적 인간’과 금욕적 수련

『계보학』에는 금욕적 이상의 역동적 전개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거나 대립하 는 여러 인간 유형이 등장한다. 여기서 니체가 말하는 유형이란, 동질적인 조건을 오래 공유하여 방식과 태도가 어느 정도 동일하고 균등하게 고정된 인간 집단을 가 리킨다. 예를 들어 『계보학』 제1논문의 강자와 약자는 역사 속의 구체적인 집단이 나 실존했던 귀족과 노예 계급을 가리킨다기보다 하나의 인간 유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강자는 강자의 방식으로, 약자는 약자의 방식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자 를 가리킨다.

마찬가지로 니체가 사제나 철학자를 언급할 때도 어떤 특정한 개인이 아니라 유 형으로서의 사제, 유형으로서의 철학자들의 특징을 논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여러 단어와 마찬가지로 니체는 유형이라는 단어의 개념을 정의하지 않은 채 여러 상황 에서 사용하므로, 유형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맥락이 항상 엄밀하고 동일하지는 않다.62) 이 장에서는 니체가 『계보학』에서 언급하는 주된 유형으로 사제, 철학자,

62) 더구나 여러 다른 유형으로 한 개인을 지칭하는 경우나, 한 유형에서 다른 유형으로 변화하는 사례를 언급하는 것으로 미루어, 니체적 의미의 유형은 유동적인 개념으로 보인다. 가장 낯선

예술가를 꼽고, 이들의 고통 해석이 어떻게 금욕적 이상의 개념사를 형성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그런데 이에 앞서 이들의 공통된 뿌리이자 가장 오래된 인간 유형 제시되는 원형 이 있다. 니체는 이 원형적 인간 유형을 ‘관조적 인간들contemplative Menschen’이 라고 부르는데, 관조적 인간은 『계보학』에서 언급되기만 할 뿐, 자세한 설명은 생 략되어 있다.63) 이에 대한 설명을 조금 더 제공하는 『아침놀』에 의하면, 문명화의 고통 및 내면화의 고통이 발전되는 단계에서 관조적 인간들이 결정적인 영향력을 끼친 것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궁핍한 고통과 이에 대한 해석의 관계를 논하기 위 해서는 관조적 인간들에 대해서 먼저 해명할 필요가 있다.64) 이에 의하면 관조적

것은 니체가 심지어 한 개인조차 유형으로 취급한다는 점이다. 소크라테스, 예수, 바울, 칸트 등등 니체가 거론하는 모든 인물을 니체는 단지 그 인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방식으 로 행동하고 사고하는 유형의 대표 격으로 언급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니체는 “나는 결코 개인을 공격하지 않는다. — 다만 개인을 강력한 확대경처럼 사용할 뿐이다.”(EH, “weise” §7, S. 272)라고 말한 바 있다. 즉 니체의 신랄한 비판은 사적 개인을 향한 것이 아니라 특정 유형의 대표 사례에 대한 평가라는 것이 니체의 주장이다.

63) 관조적 인간 집단을 제시하는 GM, 3-10, S. 377에서 니체는 이 집단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을 생략한 채로, 다만 더 자세한 논의가 M, §42에 실려 있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M, §42 및 그와 관련된 구절들에서 보충하면서 논의를 구성한다.

64) 니체는 실천적 삶Vita Activa과 관조적 삶Vita Contemplativa을 구분하던 철학 전통을 전유 하여 이를 인간의 유형처럼 사용하고 있다. M, §41에 따르면, 관조적 인간들은 이후 출현하게 되는 네 가지 다른 유형의 초기 형태이다. 첫째 유형은 관조적 인간들 중에서도 수적으로 가장 우세하고 흔한 유형으로 종교적 본성의 소유자들이다. 두 번째 유형은 종교적 인간보다 적지만 여전히 수적 우세를 보이는 인간군상들로 예술가 유형이다. 셋째 유형은 앞의 두 유형보다 언제나 소수로 출현하는데, 이들은 변증법적 성향으로 사물의 기원을 따지며 이러한 기원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철학자 유형이다. 넷째 유형은 자기 관심사에만 몰두한다는 점에서 셋째 유형보다 타인에게 영향을 주려는 욕구가 적은 인간 군상으로, 니체는 이들을 사상가와 학문의 노동자라고 부른다(M, §41, S. 44-45). 니체가 M에서 제시한 네 부류의 인간이 GM에 등장하 는 금욕적 이상의 사제·철학가·예술가 유형과 완벽히 대응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M과 GM을 관통하는 니체의 전제를 알 수 있다. 우선 니체는 종교적 인간·예술가·철학적 사변가·학 자를 어느 정도 동질적인 성향을 지닌 부류들로 묶어서 생각하며, 이 중에서 수적 우위를 차지 하는 자들은 종교적인 감수성을 지닌 인간이라는 점이다. 종교적인 성향은 이처럼 인간 사회에 서 다수를 차지하기에, 사제 유형이 종교적 성향을 자극할 때 지지를 받기란 쉬웠을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인간들은 종교적이거나 사변적인 성향을 지닌 사람 및 예술적 창조력을 가진 자 모 두의 원형에 해당한다. 이렇게 다양한 유형들을 관조적 인간들이라는 하나의 공통 된 원류로 묶을 수 있는 근거는 힘 의지의 사용법과 관련된다.

『계보학』에 따르면, 초기 관조적 인간은 문명화의 고통이 횡행하던 척박한 시대 부터 존재했으며, 당시 공동체의 잔인한 행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던 자들 을 가리킨다. 그러나 관조적 인간들의 내면에 자리 잡은 비활동적이고 사변적이며 비전투적인 특징은, 약탈과 살인으로 공동체를 지켜야만 했던 선사시대에는 경멸 을 당하거나 깊은 불신감을 불러일으켰다(GM, 3-10, S. 377). 그래서 공동체 내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유형으로서 이들은 항상 사회 내적인 “평가의 압박”(GM, 3-10, S.

310)을 느껴야 했고, 끊임없이 자신들의 유용성을 증명해야 하는 부담에 시달렸다.

이들이 공동체 내에서 받아들여지게 된 계기는 ‘사냥, 약탈, 습격, 학대, 살인’이라 는 폭력적인 방식을, 외부가 아니라 “공동체에서 용인되는 좀 더 약화된 형태”(M,

§42, S. 45)로 전환하여 자기 생각을 실현하게 된 때였다. 이들을 이해할 수 없었던 반대 유형들에게 이들의 방식은 미신적인 힘으로 보였고, 그래서 예언자나 시인, 주술사, 사제 등으로 공동체에 받아들여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를 힘 의지의 차 원에서 이해하자면, 관조적 인간들은 외부의 사회적 압력과 내부의 힘 충동으로 괴 롭고 불쾌한 상태였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 힘에의 의지는 개체 내부에서 “동화 하고, 지배하기를 원하고, 더 많이 원하고, 더 강해지기를 원하는 의지 작용”(KGW

Ⅷ-3, 14[81])으로 존재한다. 이 힘이 계속 좌절되면 그 내부는 억압된 힘으로 불쾌 하고 고통스러운 상태에 놓이게 된다는 점은 앞서 이미 살펴보았다.

관조적 인간들은 바로 이렇게 억제된 힘을 내부로 돌려 자신의 동물성을 억압하 는 데 사용했다. 이렇게 힘이 방향을 바꾸어 작용하는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니체 는 관조적 인간들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심리를 추적한다. 관조적 인간들은 “자기 자신 안에서 그 자신에 반하는 모든 가치판단을 발견”(GM, 3-10, S. 377)할 때마다 이를 적으로 치부하고서 거리낌 없이 내면의 자신에게 잔인성을 표출한 것으로 설 명된다. 자신 안의 가치판단뿐만 아니라, 자신의 사유를 방해하는 모든 생리적, 육 체적 불편 혹은 정신적인 의혹이나 저항 등도 적이 될 수 있다. 그들은 이러한 내적 불쾌를 뿌리 뽑고자, 금욕을 선택하고 그러한 불쾌의 원인을 억압하였다. 이렇게

관조적 인간들이 자신을 고문하는 이유는, 위에서 언급하였듯 일차적으로는 사회 적 평가를 의식하고 타인을 압도하려는 힘 의지에서 출발한다. 사회적 압력이 없었 더라면 이들이 금욕 같은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자신을 입증하려 애쓸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자기 자신에게 고통을 가함으로써, 다른 활동적 인간들이 외부로 발산하던 잔인성의 축제에 상응할만한 폭력을 내면에 자발적으로, 똑같이 재연한 다. 이 점에서 관조적 인간들도 잔인하고 폭력적인 시대의 인간이라는 점에서는 다 른 유형 못지않다고 니체는 말한다. 즉 관조적 인간들이 겉보기에는 사변적이고 비 전투적이지만, 이는 현대의 유약한 인간들처럼 잔인성 자체를 비윤리적이라고 거 부하는 까닭은 아니다. 그들도 자신의 힘을 잔인하게 과시할 대상을 내부에서 찾자 마자 단호히 폭력을 사용하였던 것이 그 증거다. 이처럼 “자기 자신에 대한 잔인성 과 창조적인 자기 거세라는 무서운 방법을 사용하여 수행”(GM, 3-10, S. 378)하였 기에, 이를 지켜보는 다른 이들을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하였고 결국 공동체의 인정 과 존경을 받게 되었다. 관조적 인간이 잔인함의 축제가 통용되던 시절에 사회로부 터 존경을 획득하는 과정은 바로 이들이 문명화의 고통을 내면으로 돌려서 적용한 최초의 인간 유형이라는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이들은 자기 자신을 약속할 수 있고 보증할 수 있는 인간으로 조형해내기 위해 자신에게 문명화의 고통을 돌려서 내면 화의 고통으로 작용하도록 활용하였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관조적 인간들은 자기 고문이 오히려 쾌를 산출할 수 있다는 역설을 발견한다. 주체가 내면화의 고통을 능동적으로 가할 때 내부에서는 역설적 으로 쾌가 발생하는 원리는 다음과 같다. 인간은 고통받을 때 그 내면이 고통받는 자와 그 광경을 바라보는 자로 분열된다.65) 그런데 관조적인 인간들은 이같이 분열 되는 의식 중 한쪽을 자신이 되고자 하는 모습이나, 혹은 ‘탁월성을 따르고자 하는

65) 이처럼 고통받을 때 의식이 둘로 나누어지는 현상은 현대의 철학자들도 지적한 바 있다.

예를 들어 손봉호는 고통받을 때 인간의 의식은 둘로 분열하여, ‘의식하고 지각하는 나’는 고통 을 느끼는 자신이 아예 없어졌으면 하고 간절히 바라지만, 고통받는 나는 사라지지 않고 계속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점을 또한 자각하고 이것이 또 다른 고통의 원인이 되는 현상을 지적한 다. 그리고 이런 내적인 자기분열의 과정은 그 자체로도 고통당하는 자가 ‘고통받지 않는 타인 과 나는 너무도 다른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인식하게끔 만든다. 손봉호, 『고통받는 인간』, 서울대학교출판부, 1995, 7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