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충만한 고통 해석으로의 가능성
2.2. 새로운 고통해석: 삶의 양식 창조하기
니체가 『계보학』을 통해 제기하려는 문제가 당대 도덕적 위기의 미학적인 해결 방안을 모색한다고 볼 수 있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힘에의 의지가 세계를 해석하 는 힘 충동이고, 도덕은 사태에 대한 해석129)이라고 보는 한, 니체는 생에 대한 도 덕적 해석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를 고려하고 있지 않다. 해석하고자 하는 충동이 인간에게 내재한 본능적인 충동이라면, 인간은 생에서 고통스러운 문제가 발생할 때 이를 해명해줄 도덕적인 답을 늘 추구할 수밖에 없다. 니체가 금욕적인 진리에 의 의지를 ‘오류’라고 비판한다고 해서, 오류를 제거하거나 혹은 공백을 남겨두는 것이 그의 목표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니체에게 있어서 진리는, 인간이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는 오류이자 실존을 버티기 위한 토대이다. 그래서 그는 결코 진리가 무가치하다거나, 인간은 진리를 추구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에 그는 “삶에 대한 오류는 삶을 위해 불가피하다”(MA Ⅰ, §33, S. 48)고 말한다.
그가 바라는 것은 다만 금욕적 이상을 넘어서는 새로운 도덕, 실존의 고통을 긍정 할 수 있는 새로운 기준과 해석이다. 만약 오류가 불가피하다면, 금욕적 이상보다 는 나은 오류를 니체는 원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니체의 우려는 특히 풍습의 윤리에 구속되지 않고 자기초월적인 수준
128) 라틴어로 ‘삶의 양식’ 혹은 ‘생활양식’이라 번역할 수 있는 Modus Vivendi는 주로 분쟁이 일어난 국가 사이에서 이를 빠르게 해결코자 비준 없이 간략히 채결하는 ‘잠정협정’을 가리키는 외교용어이다. 이 단어가 비록 니체의 용어는 아니지만, 이 글은 다음 세 가지 측면에서 이 용어를 니체의 고통 해석의 성격을 반영하는 용어로 사용하고자 한다. 첫째, 니체의 해결책은 최종적이고 영구불변하는 규약의 형태로 제시될 수 없는 성질을 지녔다. 따라서 삶의 불안정할 정도로 변화무쌍한 가능성을 반영하는 이 용어는 적절하다. 둘째, 이 용어는 갈등관계에 대한 긴장 완화를 시도하려는 니체의 고통에 대한 제안들을 상기하게 한다. 셋째, 자기구제 혹은 자기완성에 도달하기 위하여 쾌락을 조절하는 스토아학파의 처방을 가리키는 용어로 흔히 사용 되는 ‘삶의 기술Ars Vivendi’이 금욕적 자기 절제의 기술을 가리키는 반면, Modus Vivendi에 는 그러한 금욕적 의미가 없다. 따라서 니체적 의미로서의 삶의 양식이나 태도를 지시하기에 적합한 단어로 제안하고자 한다.
129) 다음을 참조하라. “나의 주요 명제: 도덕적 현상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이 현상들에 대한 도덕적 해석이 있을 뿐이다. 이 해석조차 도덕 외적인 기원을 갖고 있다(KGW Ⅷ-1, N1885, 2[165]).”
의 행위를 개인이 할 수 있도록 이끌 문화적 방도가 없다는 사실에 초점 맞춰져 있 다. 영구한 가치를 보증하던 종교와 학문의 내적 논리가 해체된 지금, 무리인간으 로 오래도록 길러지고 실존에 대한 ‘현기증’으로 지치고 피로하기까지 한 인간은 새로운 해석을 창조할 힘이 소진되어 있다.
이제 건설하는 능력이 마비되고, 먼 곳을 내다보고 건설하는 용기가 꺾이게 되며, 조직의 천재가 부족하게 된다. 도대체 이제 누가 수천 년에 걸쳐 완성 될 일에 과감하게 착수할 수 있겠는가? 이로 인해 인간이 계산하고, 약속하 고, 미래를 계획 속에 선취하고, 자신의 계획을 위해 희생을 바치는 데 토대 가 되는 근본적인 믿음이, 다시 말해 인간은 거대한 건축을 위한 하나의 초 석일 경우에만 가치와 의미를 지닌다는 근본적인 믿음이 사라지게 되는 것 이다. 그러한 가치와 의미를 위해서는 인간은 무엇보다도 우선 확고해야 하 며, “초석”이 되어야 한다(FW, §356, S. 278-279).
위의 인용문은 니체가 요구하는 창조가 결코 사적이고 개인적인 차원을 만족시키 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니체가 현대사회의 문제로 걱정하는 것은 ‘초석’이 될 만 한 인간을 키워낼 거대한 힘이 더는 조직되지 못하는 시대라는 데 방점이 찍혀 있 다. 그가 요구하는 미래 인간은 자신이 ‘수천 년에 걸쳐 완성될 거대한 건축’의 초 석이어야 가치와 의미가 있다고 믿는 자이다. 그러나 니체적 의미에서 비극적 인식 의 고통을 느끼는 자는 모든 가치 폭로의 결과 지극히 삶을 비관하게 된 인간이기 에 더더욱 세계의 미래에 대해 냉소할 수밖에 없다. 내면의 심정과 원칙에 따라 스 스로 정의로운 행동을 하도록 만드는 문제에 관해서라면, 근대의 많은 도덕 원리들 은 힘을 잃고 만다. 행위는 법률적 강제에 의해 조정될 수 있어도 행위 이전의 심정 윤리적 측면은 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글은 앞서 니체의 고통 유형을 논의하면 서, 니체가 이미 이를 전제로 삼고 있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즉 법적 처벌과 같이 외적 잔인성에 기초한 풍습의 윤리는 양심을 창조하지 못한다. 내면의 심정 윤리는 전통적으로 종교적 영역이었지만, 근대 이후 기독교의 지배력이 해체되면서 공백 이 발생하게 된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다시 칸트와 마주치게 된다. 법률의 관할 외적 지대이자 신
앙의 지배가 철회된 이 공백지를 이성으로 통치할 수 있는 묘책을 제시한 인물이 칸트이기 때문이다.130) 칸트는 인간의 의지가 자율적으로 선택한 정언명령에 따라 행위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대답한다. 즉 “정언명령은 어떤 외부적 존재나 절대자가 형성하여 인간들에게 이에 따라야만 한다고 명령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가 스스로 형성하고 자기 자신에게 명령한 법칙”131)이기에 외부를 참 조하지 않고도 윤리적 질서를 제시할 수 있다. 니체 저작 여러 곳에서 나타나는 많 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실존의 위기에 대한 니체의 철학적 관심은 칸트의 논의에서 촉발되었다는 것을 이 글은 논의했는데, 둘은 도덕에 대해서도 유사성을 공유한다.
가령 둘은 모두 타율적이거나 경향성이 이끄는 판단에 의해서는 생에 대한 도덕적 해명을 요구하는 본능이 충족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동기에서 비롯되는 명령을 통 해 자신을 넘어설 것을 주문한다. 그러나 니체는 칸트의 정언명령을 새롭고 적합한 해석으로 승인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두 가지로 제시될 수 있다. 첫째, 정언명령은 형이상학적인 신에 대한 복종을 전제한다고 니체는 비판한다. 칸트의 도덕률은 ‘절대적 필연성’에 기초하지 만, 칸트가 ‘결코 거짓말을 하지 말 것’을 언급할 때 이러한 도덕률이 절대적 필연 성에 근거한다는 것을 신적인 권위가 아니면 어디서 얻어낼 수 있느냐고 쇼펜하우 어는 비판한 바 있다.132) 이는 콩스탕B. Constant과의 논쟁에서, 살인자에게 쫓기는 친구를 집에 숨겨준 경우조차 살인자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아야 한다고 칸트가 대 답했던 일화를 떠오르게 한다. 니체도 쇼펜하우어와 마찬가지로 칸트의 정식에 동 의하지 못한다. 정언명령에 대한 무조건적인 수행은 이를 신성에 필적하는 초월적 인 것으로 가정하지 않고서는 성립하지 않기에, 반자율적인 복종심을 보여준다. 즉 그러한 태도는 “내게 존경할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복종할 수 있다는 점이 다. ― 그리고 그대들도 내 경우와 달라서는 안 될 것이다!”(JGB, §187, S. 109)라는
130) 니체는 칸트의 도덕 형이상학 및 그 기획에 근거한 비판철학 전체를 이와 같은 관점에서 바라보고 평가한다. 즉 그는 “문화적 위기가 칸트를 움직인다”(KGW Ⅲ-4, N1872, 19[34])고 말한다.
131) 서양근대철학회 엮음, 『서양근대윤리학』, 창비, 2010, 280쪽.
132) Arthur Schopenhauer, Arthur B. Bullock (tr), The Basis of Morality, London: G.
Allen & Unwin, 1915, p. 30.
강요를 보여준다고 니체는 비판한다.
두 번째로, 니체는 칸트의 준칙 속에 숨어 있는 비이기성을 자기경멸적이며 인간 성에 대한 몰이해에 기초한 것으로 판단하여 거부한다. 정언명령은 그 자체로 바람 직한 행동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보편적인 상황을 가정할 것을 주문한다. 이때 보편성을 구성하는 것은 ‘다른 모든 사람’이 이성적 법칙에 따라 행위한다면 어떠 하리라는 추정에 근거한다. 칸트는 이를 “나의 준칙이 보편적인 법칙이 되어야만 할 것을 내가 의욕할 수 있도록 오로지 그렇게만 처신하라”133)는 형식으로 제시한 다. 그런데 이러한 보편성의 근거인 ‘다른 모든 사람’이라는 범주는 결국 구체적으 로 존재하는 지금 여기의 나를 제외하면서도 내가 동일성을 느낄 수 있는 추상적 타자로 구성된다는 점에서 선택적이다.134) 이와 같은 이유로 니체는 쇼펜하우어의 연민 도덕으로부터도 결별하는데, 쇼펜하우어가 주장하는 연민 도덕 역시 자기부 정에 근거하며, 그렇기에 결국은 나보다는 무리가 중요하다는 판단으로 귀결된다 고 니체는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무리 도덕의 폐단은 그것을 좇는 사람이 무리와 어울릴 수 있는 평온한 상태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에게 더 이상 무리사회의 덕목에 자신을 일치시킬 수 없는 상황이 돌연하게 닥치기라도 한다면 문제는 가시화된다. 이렇게 서로 다른 윤리가 충돌하는 경우를 인간이 자주 겪는 것은 아니며 우리 중 예외적 인 사람들만 이런 상황에 놓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들이야말로 도덕이 가장 필요한
133) 임마누엘 칸트, 백종현 역, 『윤리형이상학정초』, 아카넷, 2007, 93-94쪽(GMS, B17=Ⅳ402).
134) 니체는 인간이 추상적 사고를 할 때조차 이미 무의식적인 선별을 거친다고 보았다는 점은 이 글의 Ⅲ장 1.2절에서 논의되었다. 이웃을 규정하는 인간 일반의 관념은 이로 인하여 맹점을 지닌다고 니체는 생각한다. 가령 그는 위악적인 유머를 섞어서, 오늘날의 유럽인 의사라면 절망 적으로 심한 내부 염증에 걸린 흑인들이라도 “내부 염증으로 인한 흑인들의 고통은 유럽인이 겪는 정도는 아니다”라고 판단할 것이며, 그 자신도 한 명의 현대적인 유럽인으로서 “과학적 연구의 목적으로 해부된 모든 동물의 고통을 전부 합쳐도, 한 명의 신경질적인 교양 있는 여성 의 하룻밤 통증보다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의심치 않는다”고 말한다(GM, 2-7, S. 319). 여기 서 니체는 흔히 인간들이 먼 시간대의 인간보다는 당대를, 타민족이나 타인종보다는 자기 인종 을 더 쉽게 동일시하며, 고통받는 대상조차도 선별적으로 주목하는 오류를 저지른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러나 니체는 또한, 깊이 있는 사람이라면 항상 동물들이 겪는 무의미한 고통에 대해 동정을 느껴왔다(UB Ⅲ, SE-5, S. 373)고 말했다는 점을 함께 고려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