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철학자 유형의 고통 해석
4.1. 철학자의 특이체질
철학자 유형은 금욕적 이상을 취향의 문제로 접근하며 선택한다. 이를 니체는“금 욕적 이상 전체에 관한 철학자 특유의 선입견이나 애호가 존재한다”(GM, 3-7, S.
368)고 말하며, 이로 인해 그들은 금욕적 이상의 가치에 대해서는 청렴한 증인이나 재판관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GM, 3-8, S. 369). 이런 애호를 니체는 철학자들의 특이체질Idiosynkrasie이라고 부른다.
철학자들한테서 나타나는 특이체질[은] […] 그들의 역사적 감각의 결여, 생성이라는 생각 자체에 대한 그들의 증오, 그들의 이집트주의가 그 예이 다. 어떤 것을 영원이라는 관점에서 탈역사화하면서 그들은 그것을 영예롭 게 만들고 있다고 믿는다. ― 그것을 미라로 만들면서 말이다. 철학자들이 지금까지 수천 년 동안 이용했던 모든 것은 죄다 개념의 미라들이었다. 실 제의 것은 어느 것도 그들의 손아귀에서 살아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개념을 우상처럼 숭배하는 철학자 제씨들(GD, “Vernunft” §1, S. 68).
위 구절에 의하면, 철학자 유형은 대상을 개념화하여 고정하려는 의지를 갖는다.
즉 생성은 변화하며 변화하는 것은 끝을 맞이하기 마련임에도 불구하고, 철학자 유 형은 생성의 특질을 탈각하여 개념화함으로써 고정되고 영원불변한 것으로 만든다.
이와 같은 특이체질을 드러내는 철학자 유형은, 생리적 선호에 따라 금욕적 이상을 기꺼이 채택한 자들로 그려진다.
『계보학』에 따르면, 철학자 유형은 전략적인 필요에 따라 금욕적 이상을 수단화 했다(GM, 3-7, S. 368-369). 이 점에서 이 유형이 금욕적 이상을 선택하는 이유는 무리 인간이 사제에게 ‘길들어서’ 고통에 취약해진 결과 금욕적 이상을 추종하는 것과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또 철학자가 금욕적 이상을 취하는 동기는 사제의 동 기와도 다르다. 사제 유형은 금욕적 이상을 자기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최상의 도 구, 또는 권력을 지향하는 ‘최상’의 면허”(GM, 3-1, S. 357)로 바라보았기에 금욕적 이상을 수단으로 전사 계급을 약화시키고 무리 인간을 지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철학자 유형은 자신들의 학적 과제에 몰두하기 위해서 높은 정신성을 유지할 필요
가 있고, 이에 유리한 환경을 금욕적 이상이 제공해준다는 사실 때문에 금욕적 이 상을 선택한다(GM, 3-9, S. 374).76) 이들이 고유한 개인적 관심사에 몰두하기 위한 수단으로 금욕적 이상을 채택한다(GM, 3-7, S. 321)는 니체의 묘사는, 이들이 사제 보다는 그들의 공통 원형인 관조적 인간들에 가까워 보이게 한다. 앞서 이 글은 관 조적 인간들이 금욕을 더는 고통스럽기만 한 것으로 인식하지 않고 힘 느낌을 획득 하고 쾌에 도달할 수 있는 수단으로 전환하는 데 성공하였다고 지적했다. 이로부터 금욕에 대한 선호가 발생하는데, 이러한 선호는 철학자 유형에게도 동일하게 존재 하지만, 철학자 유형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생과 힘 의지를 장애물로 여긴 나머지 고통스러운 생을 제거하려는 의지를 품는다. 그래서 “철학자들에게 특유한 세계 부 정적인, 삶을 적대하는, 감각을 불신하는, 탈감각하려는 태도”(GM, 3-10, S. 378)는
“삶에 맞서는 의지”(GM, Vorrede §5, S. 264)의 성격을 지녔다. 고통을 쾌로 전환하 기보다는 오히려 고통을 발생시키는 생 전체를 부정하는 방향으로 철학자는 사고 하며, 이 때문에 철학자 유형은 고통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 관조적 인간들보다 쇠 약하고 데카당한 태도를 지닌다.
이들이 사제의 모습을 벗어던지고 철학자로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최근이라고 니체는 말한다. 그 구체적인 시기와 사건은 17세기 이후 유럽에서 가속화된 기독교 의 약화 및 세속화와 관계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철학과 과학이 전통 형이상학 과 신학에서 독립하여 독자적인 학문 영역으로 인정받게 되면서, 사제의 금욕적 이 상이 철학자들의 금욕적 이상으로 바뀌었다고 『계보학』과 『즐거운 학문』 등은 설 명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두 금욕적 이상은 서로 다른 것이라기보다는, 본래 사제 와 다를 바 없던 철학자들이 금욕적 이상을 좇아 기독교의 내부 논리를 끝까지 전 개하도록 추동한 결과, 기독교 도덕의 내부 논리가 그 동력을 상실하는 데 이르렀 다고 볼 수 있다. 니체의 설명에 의하면, 인간들은 도덕적인 기준을 신이 주신 것으 로 설명하는 기독교 도덕에 만족하지 못하게 되었고, 신을 근거로 하는 설명 대신
76) 이들이 학적 과제에 매몰되는 경향을 보인다는 점에서, GM의 철학자 유형은 M 41절에서 언급된 관조적 인간들의 네 가지 분류 중 마지막 유형에 해당하는 ‘사상가와 학문의 노동자’의 특징 또한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M에서는 이들을 철학자 유형과 구분하지만, GM에서는 근대 학자와 과학자까지도 철학가의 금욕적 이상의 예로 거론된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는 철학자와 학자를 구분하지 않고 철학자 유형으로 통칭할 것이다.
에 진리 자체의 원리를 찾는 방향으로 학문의 추구가 바뀐 것이 곧 기독교 약화로 이어졌다. 그래서 이 과정은 기독교 내적 논리에 의한 기독교의 자기 몰락 과정으 로 설명된다. 즉 “도대체 기독교적인 신을 이겨낸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 한 대답은 그들 스스로 “신에 대한 신앙의 허위를 스스로 금지”한 결과라는 것이다 (GM, 3-27, S. 427).
이 과정을 자세히 보여주는 『즐거운 학문』의 357번 아포리즘은,77) 신학적 교리 를 해명하려던 철학자들의 노력이 오히려 지속적인 기독교 해체로 귀결되는 과정 을 네 단계로 정리한다. 첫째로 라이프니츠는 데카르트와 그 이전의 철학자들과는 반대로, “의식은 단지 표상의 우발적 사건일 뿐이며 그 필연적이고 본질적인 속성 이 아니라는 것”(FW, §357, S. 280)을 밝혀내었다. 그로 인하여 ‘의식’이라고 부르 는 것은 사실 인간 내면의 구성체일 뿐이고, 신으로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 이 밝혀졌다. 둘째로 칸트는 제한된 영역에서만 인과율이 의미를 갖도록 그 경계를 설정하였다. 셋째로 헤겔은 종개념이 상호적으로 발전한다고 가르침으로써 학문 내에 발전과 역사적 감각을 들여온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쇼펜하 우어는 신을 거론하지 않고 현존재의 가치문제를 따져보는 염세주의적 관점을 제 시하여 마침내 신앙을 몰락시켰다.
이런 붕괴를 가져온 철학자의 “학문의 정신”(FW, §344, S. 257)은 그들의 특이체 질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다시 말해 학문의 정신은 모순과 오류, 거짓이 아닌 것만 인식의 왕국에 입장할 자격을 지녔다고 생각하기에 불신과 의심이라는 경찰로 모 든 것을 검토하고, 진리가 아닌 것은 추방하고 싶어 한다(FW, §344, S. 256-257). 이 정신은 두 가지 믿음 외의 나머지 모든 것은 불신한다. 첫째는 ‘진리가 존재한 다’는 믿음이며, 두 번째는 “진리보다 더 필요한 것은 없다. 진리와 비교하면 그밖 에 다른 모든 것은 이차적인 가치밖에 지니지 못한다”(FW, §344, S. 257)는 또 다른 믿음이다. 철학자 유형이 무조건 진리만을 추구하는 성향을 니체는 『계보학』에서
“진리에의 의지”(GM, 3-24, S. 419)라고 부르는데, 이런 진리에의 의지는 철학자들 을 추동하는 변형된 힘 의지이자, 철학자들이 기독교 도덕을 대신하여 추구하는 금 욕적 이상이다. 달리 말하자면 이것은 금욕적 이상 자체에 대한 신앙이다.78)
77) GM, 3-27, S. 427에서 니체는 FW, §357을 참조할 것을 직접 지시하고 있다.
진리에의 의지가 신앙의 형식을 띠고 있으며, 기독교 신앙을 대체하는 현대적인 신앙이라는 점을 드러내기 위하여 니체는 철학자들의 사고방식을 분석한다. 이에 따르면 진리에의 의지는 진리가 무조건 필요하다는 앞선 전제에서 출발하여, “나는 기만하지 않기를 원한다”는 보편명제 하에 “나는 나 자신도 기만하지 않기를 원한 다”는 개별 경우가 포함된 의지로 구성되어 있다(FW, §344, S. 257). 그런데 도덕적 토대를 이루는 이 개별적 명제는 기독교의 금욕적 이상이 내면화의 고통을 심화시 킨 것과 마찬가지로 작용한다. 가령 ‘나는 기만하지 않기를 바란다’는 명제는 부채 나 죄책의 정서를 지닌, 약속을 지키고자 하는 인간의 의지로 설명할 수 있다. 그런 데 이에 더해 ‘나는 나 자신을 기만하지 않기를 원한다’라는 두 번째 명제는, 양심 의 가책이나 죄의식을 자극하지 않도록 나 자신에게조차 거짓말을 하지 않고자 하 는 의식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생성의 특질은 진리에의 의지가 추구하는 개념화 와는 다른 모습으로 드러나기에 학문의 정신은 계속 생성으로부터 고통당할 수밖 에 없다.
이처럼 근대의 철학자 유형을 살펴보면, 이들은 비록 고통에 대한 직접적인 해석 을 내놓지 않더라도 그들이 처한 상황은 여러 유형의 고통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1650년부터 1800년까지의 학문은 지혜와 신의 관용을 입증하고자 했다. 그러나 결과는 그 반대였다”(KGW Ⅴ-2, N1881, 11[82])는 유고의 한 메모에 서 알 수 있듯이, 니체는 신학자와 철학자들이 기독교의 내적 논리에 충실하려는 의욕으로 신적 진리를 찾아 학문의 토대를 파헤쳤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 결과 폭 로된 것은 학적 양심으로는 교리에 대한 정당화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이었다. 그러 므로 기독교가 내적 논리에 의해 해체되었음을 감지하는 근대의 세계 인식은 불안 과 두려움의 정조를 지니게 되며, 니체 당대에 데카당한 풍조로 드러난다고 설명할 수 있다.
78) “진리를 향한 무조건적 의지란 금욕적 이상 자체에 대한 신앙이다. 비록 이 신앙의 무의식적 인 명법으로 존재한다고 해도 그러하다(GM, 3-24, S. 4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