Ⅶ5. 전망과 고려사항
2. 대남정책의 측면
의 수립, 공안 관련 인물과 기관의 득세, 중앙당과 내각의 역할 강화, 국방위원회와 군부의 약화 등을 지적할 수 있다. 정치 관련해서 핵심 질문은 김정은이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버금가는 1인독재체제를 재수 립했느냐이다. 만약 이미 성공했다면 일반적으로 1인절대독재자가 그 러했듯이 안정적으로 종신집권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경제적 측면에서는 중국의 1980년대 중반의 개혁 단계에 해당하는 경제조치의 실시, 사회주의적 모자를 쓴 민간기업의 번성을 주요 측면 으로 지적할 수 있다. 경제 조치는 중국의 1980년대 후반과 유사하지만, 국제적 고립 등의 여건 때문에 중국식 장기 경제성장은 발생할 개연성 이 낮다. 북한에서는 내부적 필요와 동학 때문에 시장확대가 지속될 것이며, 아마도 5~10년 내에 사유재산과 사적 기업가를 인정하게 될 것이다.
다음으로 대남정책의 측면을 보자. 북한은 김정은 권력 세습이 시작 된 2009년부터 비핵화 거부를 공식 선언했다. 다른 이유도 있지만, 가 장 주요하게 북한의 비핵화 거부로 인해 남북관계는 갈등과 대결의 국 면에 진입했다. 2012년 미북 사이의 2·29 합의 파기, 2013년 2월 3차 핵실험으로 사태는 더욱 악화됐다. 북한이 핵무기를 보유하게 되었다 는 것은 북한의 대남정책이 앞으로 계속적으로 공격적임을 예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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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번갈아 취하는 가운데 상호 관계가 점차 더욱 위험스럽게 악화된다 는 것이다. 2015년은 이러한 대결국면이 시작된 이후 7년째이며, 그 끝 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는 두 가지 주제를 다룬다. 첫째, 북한이 비핵화를 거부함으 로써, 그간의 남북 간 ‘화해와 협력의 관계’가 2009년부터 ‘갈등과 대결 의 관계’로 전환했음을 밝힌다. 둘째, 2009년 이후 북한의 대남정책이 공격적으로 변화하고 있는데, 그 배경으로서 세 가지 요인을 지적한다.
그것은 권력 승계 과정의 진행, 북한의 핵 보유, 신생 절대 독재자의 성격적 특징이다.
가. 북한의 비핵화 거부와 그 파장48
북한의 모든 주변국은 북한이 핵무기를 보유하는 것을 원하지 않 는다. 따라서 북한이 핵무기를 보유하고자 강행하는 경우, 북한과 주변 국 사이에 갈등과 대결이 발생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갈등과 대결은 북한과 주변국에 공히 매우 많은 부담과 높은 수준의 위험을 발생시 킨다. 그러나 갈등과 대결이 반드시 불가피한 것은 아니었다. 북한이 비핵화를 공언하는 경우, 핵무기 개발 문제와 관련하여 북한과 주변국 간에 잠정타협(modus vivendi)을 설립시키는 것이 가능했다. 이 경우 북한의 핵개발 문제로 인한 갈등은 외교적/평화적으로 관리될 수 있 었다. 그런데 북한이 비핵화를 거부하는 경우, 북한과 주변국 간의 잠 정타협은 붕괴하고, 양자관계는 갈등과 대결의 국면으로 복귀한다.
실제로 북한은 2009년 이전까지는 비핵화 의지를 천명했었다. 적어
48_이 부분은 통일연구원 온라인 시리즈로 미리 발표되었다. 박형중, “북한의 비핵화 거부와 한반도 정세 변화,” (통일연구원 Online Series CO 15-17, 2015.7.3.).
도 공개적으로는 그러했다. 북한의 이러한 공언에 기초하여 북한과 주 변국 사이에 특히 미국과 북한 사이에 북한 핵개발을 놓고 전략적인 잠정타협이 몇 차례 이루어졌다. 그 전략적 잠정타협의 핵심 내용은
<북한 측은 단계적 비핵화를 수용하는 대신 주변국 측은 북한에게 안전보장과 경제지원을 단계적으로 확대하며, 남북평화공존을 추구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와 같은 전략적 타협하에서도 북한과 미 국 간에 전통적 갈등과 대결이 진행되었고 주기적 위기도 발생했다.
그렇지만, 이러한 전략적 타협은 북한과 미국 사이의 갈등과 위기를 위 험스럽지 않은 수준에서 관리 가능하게 만들었다. 또한 이러한 전략적 타협은 북한과 미국을 비롯한 주변국의 관계가 화해와 협력의 방향 으로 발전할 수도 있으며 그리하여 궁극적으로는 갈등과 대결이 청산 될 수도 있다는 현실과 희망을 한동안 보여주기도 했다. 이러한 전 략적 타협은 1994년의 미북 간 제네바 합의, 2006년 6자회담의 9·19 성명, 2007년 2·13 합의와 10·3 합의로 구현되었다. 북한 핵개발과 관 련한 국제적/전략적 타협은 남북 간의 전략적 타협의 기초가 되었다.
남북 간의 전략적 타협은 2000년 1차 정상회담과 6·15 선언, 그리고
2007년 2차 정상회담과 10·4 선언으로 구체화되었다. 이와 같은 전
략적 타협에 의해 2000년부터 2007년까지 ‘화해협력’ 국면이 전개되 었다.
2009년부터 상황이 변화했다. 북한은 2차 핵실험을 거행했고, 비핵
화 거부를 공개적으로 천명했다. 오바마 정부는 북한의 2차 핵실험과 비핵화 거부 이후 ‘전략적 인내’ 정책을 표방했다. 이는 북한이 비핵화 를 결정할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는 애초에 북한과의 적극적 대화를 표방했던 오바마 정부가 정책을 바꾼 것을 의미했다.
미국은 국제사회와 협력하여 대북제재를 강화하는 한편, 북한 인권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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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를 보다 적극적으로 다루기 시작했다.49 이는 미북관계에 새로운 국 면이 시작됨을 의미했다. 북한의 비핵화 거부가 미국의 정책 전환을 촉발했고, 그리하여 북한과 미국 간의 관계가 과거의 타협과 협력의 국 면에서 대결과 갈등의 국면으로 전환됐다. 앞서 서술했듯이 과거에는
<북한의 단계적 비핵화 대 안전보장과 경제지원의 단계적 확대 제공, 그리고 남북 평화공존 수용>이라는 전략적 타협을 기초로 북한과 미 국을 포함한 주변국 간에 타협과 협력의 국면이 전개했었다. 이 시기 에도 갈등과 대결은 있었지만, 궁극적으로 타협과 협력이 가능했던 것은 북한의 핵무력 증강 조치가 유발하는 위기가 억제되었기 때문이 었다. 그러나 북한이 비핵화를 거부하게 되면, 북한의 핵무력 증강 조 치를 시발로 하여 미국을 비롯한 주변국의 응징, 그리고 북한의 맞대 응, 이에 대한 주변국의 응징이라는 상승하는 나선형의 대결과 갈등 국 면이 고착화될 수밖에 없었다.
북한이 2009년 비핵화 복구 불가를 선언했지만, 비핵화 과정 재개의 희망이 완전히 소멸한 것은 아니었다. 2009년 이후에도 한국과 미국, 그리고 중국은 북한을 비핵화를 위한 6자회담에 복귀시키는 것이 아직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희망을 유지했고, 그렇게 노력했다. 따라서
2009년 북한의 2차 핵실험, 비핵화 거부 선언, 2010년 천안함 폭침, 연
평도 포격과 같은 한국에 대한 새로운 차원의 적대 행동에도 불구하고,
6자회담 재개 노력이 지속되었다. 한편 남북 간에는 남북 정상회담 개
최 시도 등 남북관계 개선 시도가 존재했다. 북한도 2009년 9월부터
‘비핵화’라는 단어를 재사용했고,50 10월 중국 총리 원자바오와 만나
재확인했다.
49_김정욱, “클린턴, 북한 인권 좌시 안해,” 중앙일보, 2009.7.25.
50_“유엔주재 상임대표, 유엔 안보리 의장에게 편지 발송,” 조선중앙통신, 2009.9.4.
그러나 북한이 실질적 진전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비핵화 입장을 표명한 것은 2011년 3월이었다.51 2011년 3월 북한이 비핵화에 유연한 입장을 취하게 되면서 남북 간 비핵화 회담과 미북 간 비핵화 회담이 진행되었다. 이러한 양측 접촉의 결실로 탄생했던 것이 2012년 미북 간의 2·29 합의였다. 이 합의의 핵심은 북한이 핵무기 능력 증강 행동 을 동결하는 것을 다시 한 번 더 약속한다는 것이었다. 이 합의는 북한 의 핵개발 문제로 유발된 북한과 주변국 간 높은 수준의 정세 불안정 이 드디어 새로운 안정을 향해 출발할 수 있는 시발점이 될 것이라는 높은 기대를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북한이 2012년 4월 13일 장거리 로 켓 실험을 거행하는 행동을 취함으로써 이 합의는 파기되었다.
그렇다면 북한은 왜 2·29 합의를 성사시켰다가 파기했을까? 그것은 아마도 김정은 권력 승계를 원만하게 추진하기 위할 목적으로 대외 관 계에서 긴장완화를 추구하면서 시간을 벌어야 했던 필요와 관련이 있 을 것으로 추정된다. 북한은 2010년 3월 천안함 폭침, 11월의 연평도 포격으로 인해 점증하는 외교적 고립과 군사적 압박에 처해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북한은 2011년 3월 비핵화 복귀를 의미하는 제안을 했 고, 이에 바탕하여 이어서 남북 간 및 미북 간에 비핵화 회담이 진행되 었다. 이는 한국과 미국의 대북압박을 현저히 감소시키는 데 기여했다.
그런데 2011년 12월 김정일이 사망하고, 김정은의 공식 통치가 시작되 지 않은 상태에서 2·29 합의가 체결되었다. 이제 김정은이 직접 권력 을 장악하게 되면서, 권력 승계 과정 보호를 위한 대외 관계에서의 긴 장완화 필요성이 감소했을 수 있다. 반면 새로운 수령으로서 과감성과 공적을 내세워야 하는 김정은의 입장에서 북한의 핵능력 증강을 제약
51_“외무성 대변인, 러시아 외무성 부상 일행 방북 관련 중통기자 질의 대답,” 조선중앙
통신, 201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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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2·29 합의가 더 이상 필요 없는 것으로 인식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북한은 2012년 4월의 장거리 로켓 실험은 실패했지만 12월 장거리 로 켓 실험은 성공했고, 이어 2013년 2월 3차 핵실험을 단행하였다. 이어 서 북한은 2013년 3~4월 중 한미 합동훈련에 대해 이례적으로 강경 하게 맞대응하면서 긴장을 높이는 조치를 취했다.52 북한의 긴장고조 조치에는 미국 본토에 대한 핵공격 위협도 포함되어 있었다.
2012/2013년에 상황은 다시 한 번 변화했다. 2012년 2·29 합의의 파
기 및 2013년 2월 3차 핵실험과 함께, 북한에 핵무력 증강 문제에 대해 미국과 국제사회가 한층 강경한 태도를 취하는 새로운 국면이 시작되 었다. 대표적으로 리비어(Evans J.R. Revere)는 2013년 말, 미국은
“현실을 직시하고 새로운 대북정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53 여
기서 ‘현실’이란 북한이 핵무기를 보유하고 그것을 (미국에 대해서도) 사용하겠다고 위협하는 엄중한 사태이다. 이러한 새로운 현실에 대응 하자면, 미국은 대북정책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대북 정책이 실패했기 때문이다. 미국 대통령마다 정책의 강조점이 다르기 는 했지만, 그 모든 대북정책에 공통적이었던 것은 북한 정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한 상태에서 긍정적·부정적 인센티브 패키지를 조합하면 북한에게 핵포기를 설득할 수 있다는 발상이었다.54 이러한 정책이 실 패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북한이 처음부터 핵과 미사일 개발을 종결할
52_이에 대해 박영자, “김정은 정권의 대남 긴장 조성: 2013년과 향후 전망,” (서울: 통일 연구원, 2014); Ken E. Gause, North Korean Calculus in the Maritime Environment: Covert Versus Overt Provocations (CNA Analysis &
Solutions, 2013).
53_Evans J. R. Revere, “Facing the Facts: Towards a New U.S. North Korea Policy,” Working paper of the Brookings Institution, Center for Northeast Asian Policy Studies (October 2013), pp. 1~2.
54_Ibid., p.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