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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결 / 파행기 (1993∼2000.5)

Dalam dokumen 제20권 1호 2011 (Halaman 98-103)

North Korea’s Stance on the Inter-Korean Basic Agreement

2. 동결 / 파행기 (1993∼2000.5)

관계 정상화였다

.

남한의 구소련 및 동유럽과의 수교와 동유럽의 체제 전환과정은 한반도에서 교차 승인의 필요성을 한층 높였다. 1991년 1월 30일부터 북한은 일본 과의 수교 회담을 시작하였고 대미 직접 대화도 추구하였다. 만약 남북관계가 악 화될 경우 북일 수교회담과 미북관계에 부정적 영향을 끼칠 것을 우려하여 남북 관계 개선에 나섰다. 특히 당시 미국으로부터의 북핵 압력이 거세어질 것에 대비 하여 남북대화로 화해 분위기를 조성하려 하였다. 그러나 북한의 바램과 달리 미 북대화는 성사되지 않고 미국의 핵압력은 강화되었으며, 북일 수교회담의 진전도 이루어지지 않자 남북관계는 경색되었다. 이와 같이 탈냉전이라는 대외환경에서 이에 대한 적응으로 남북한은 남북기본합의서를 만들어냈으나, 미북관계 개선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남북대화는 지속되지 못하였다.

1993년 베이징에서 북미간의 참사급회담이 시작되었을 때 북한은 NPT

복귀 거 부 의사를 밝혔으나 미국과의 직접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1993년 5월 초 북한 유엔 대표부 허종 차석 대사가 미 국무부 북한 담당 자인 케네스 키노네스(C. Kenneth Quinones)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대화 재개 의사가 있다면 회담 개최를 서두르는 것이 좋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도 이러한 맥락이다.9

1993년 6월 2일부터 뉴욕의 유엔대표부에서 미국과 북한의 제1차 고위급 회담

이 개최되었다. 당시 갈루치-강석주 회담에서 북한과 미국은 북한이 NPT 탈퇴를 보류한다는 데에 합의하였다. 6월 11일 1차 미북회담은 “북한의 NPT 잔류와 미 국이 안전보장 약속을 교환하는 것”으로 종결되었다. 북한은 1차 회담에 대해 “역 사적 의미가 있는 회담,” “자주적 입장을 관철하면서도 승리를 획득한 회담”이라 고 자평하였다.10 그 이후 북한은 대미 비난을 자제하고 미군의 유해 일부를 반환 하는 등 차기회담의 성과를 위한 긍정적 분위기를 조성해나갔다.

제2라운드 회담은 7월 14일부터 19일까지 제네바에서 열렸다. 이 회담에서 미 국은 북한 대표단에게 북핵시설에 대한 위성촬영 내용 및 분석결과를 설명하였다.

그리고 북한이 IAEA의 특별사찰과 남북 상호 핵사찰에 대한 의무사항을 준수해 야만 대북 핵위협 부재에 대한 새로운 성명서를 채택할 수 있으며 미북관계 진전 을 위한 대화를 진행할 수 있다고 언급하였다. 즉 미국은 북한을 핵공격하지 않고, 북한의 사회주의를 존중한다고 약속하였다.

미북관계의 진전과 별도로 남북한은 1993년 10월 5일부터 1994년 3월 19일까 지 핵문제를 최우선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특사교환을 위한 실무대표접촉을 판문 점에서 8차례 가졌다. 이 접촉에서 북한측이 핵전쟁 연습 중지 및 대북 국제공조 체제 포기 등을 요구하여 회담이 진전되지 못하였다. 그리고 1994년 3월 19일 판 문점에서 개최된 제8차 실무대표접촉에서 ‘서울 불바다’ 발언으로 전쟁 위기를 조 성하고 퇴장하여 실무대표 접촉이 중단되었다.11

남북관계의 악화 이후에도 미북대화는 지속되어 1994년 8월 5일부터 11일까지 개최된 회담에서 북미제네바기본합의서(Geneva Agreed Framework)가 조인되 었다. 이것은 한국전쟁의 정전협정 이후 최초로 체결된 북미간의 합의서였다. 이 합의로 미국은 북한에 대한 경수로 지원과 핵무기 불사용을 확인하였고, 북한은

9돈 오버도퍼, 󰡔두 개의 한국󰡕 (고양: 길산, 2002), p. 420.

10서훈, 󰡔북한의 선군외교󰡕 (서울: 명인문화사, 2008), p. 137.

11강인덕·송종환, 󰡔남북회담: 7.4에서 6.15까지󰡕, p. 316.

핵시설의 동결과 NPT 잔류를 합의하였다. 또한 평양과 워싱턴에 각각의 연락사 무소를 상호 설치하여 상호 관계 정상화를 위해 노력할 것을 명시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북한과의 양자회담보다 한반도 문제 해결을 미국과 중국 및 남 북한의 4자회담 틀 속에서 하려는 의도를 보였다. 4자회담 개최에 대해 약 1년간 대답을 하지 않았던 북한은 1년 만에 예비회담에 참여하면서 참가를 결정하였다.

1997년 12월 제 1차 본회담이 개최되었으나,

이 회담에서 이후 1998년 3월 제네바

에서 제2차 본회담을 개최할 것과, 이에 앞서 1998년 2월 베이징에서 실무회담을 가질 것에 대한 합의를 도출하는 데 만족해야 했다.

따라서 이 시기는 북한의 핵문제로 인하여 미북대화가 시작되고 미북간의 최초 합의가 이루어졌던 시기였으나 남북관계는 단절되고 전쟁 위기까지 나타난 시기 였다

.

미북관계에는 일정한 진전이 있었으나 미북관계 진전에 기대를 가지고 있던 북한의 희망처럼 연락사무소 설치가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남북관계 악화를 우려 하는 미국은 북한의 ‘통미봉남’ 정책에 대한 남한의 불안을 의식하여

4자회담을

통해 미북관계와 남북관계의 선순환을 이루어보려 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 다

.

결국 이전 남북간의 합의는 미북간의 합의로 중심이 이동하여 남북기본합의서 는 동결되고 파행되었다.

3.

대체기

(2000.6∼2007)

2000년 6월 남북 정상회담은 탈냉전 이후 반목을 거듭하던 남북관계에 패러다

임의 전환을 가져온 사건이었다. 정상회담이 개최되기 몇 개월 전까지도 김대중 정부의 대북정책을 비판하던 북한은 2000년 3월부터 정상회담 개최 예비접촉에 적극적으로 임하였다. 북한이 남북정상회담에서 응한 가장 큰 목적은 북한의 심각 한 경제난 해결과 대미관계 개선이었다.12

2000년 3월 남북한은 싱가포르에서 대북지원문제를 협의하였고, 3월 17일부터 4월 8일까지 중국 상하이와 베이징에서 상위 직급의 특사 간 비공개 접촉을 통해

남북정상회담 개최를 전격 합의하였다. 정상회담 합의 직전인 3월 9일 김대중 대 통령이 대북 경제지원을 핵심으로 하는 ‘베를린선언’을 발표하여 심각한 경제난을 겪고 있는 북한에 화해의 제스처를 보냈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이 선언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북한의 도로, 항만, 철도, 전력, 통신 등 사회간접자본의 확충, 남

12서대숙, “북한체제의 전망,” 서대숙 외, 󰡔정상회담 이후의 북한: 남북관계의 변화와 전망󰡕 (서울:

경남대학교 출판부, 2002), p. 10.

북한 간의 안정된 투자환경 조성 및 북한의 식량난 해결에 필요한 농업구조 개혁 등의 지원을 위한 남북한 당국자간의 협력을 제의하였다.

또 다른 하나의 중요한 목적은 미국과의 관계 개선이다. 남북정상회담 이후 곧 바로 북한은 조명록 전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의 워싱턴 방문과 올브라이트

(Madeline K. Albright)

전 국무장관의 평양 방문을 실행하고 클린턴 전 대통령

의 북한 방문을 준비하였던 정황은 이를 뒷받침한다. 그리고 2000년 8월과 10월 북일수교 회담을 개최하였던 점은 남북화해를 통하여 대일관계 개선의 걸림돌을 없애려 한 것이다.

그러나 2002년 제2차 북핵위기가 발생하면서 미국은 북한이 핵무기 개발 프로 그램을 완전히 폐기하기 전에는 어떠한 협상도 갖지 않겠다는 입장을 보였다.

2002년 10월 3일부터 5일까지 부시 대통령의 특사자격으로 평양을 방문한 켈리

(James Kelly)

미 국무부 차관보는 북한에게 고농축우라늄 핵개발 프로그램의 폐

기를 요구하였으나 북한 외무성 제1부상 강석주는 제네바 합의문을 위반한 것은 미국이라고 지적하고 핵무기 보유 발언을 하였다.13

미북간의 입장이 평행선을 달리면서 중국의 적극적 개입으로 6자회담이 출범하 였으나, 북한 핵문제는 기본적으로 미북간에 논의되어야 한다는 북한의 입장에 따 라 미국과 북한을 중심으로 회담이 진행되었다. 6자회담에서 중국이 중재자 역할 을 함으로써 남한 역시 중재자 이상의 역할을 할 수 없었다. 남한은 여전히 남북 한의 다방면의 교류가 확대된 상황에서 미국과 북한이 핵문제로 대립하고 있었기 때문에 남북관계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노무현 정부의 정경 분리 원칙에 따라 민간 분야의 경제 및 사회 분야의 교류는 지속되었으나 당국자간 회담은 지 속되지 못하였다.

이처럼 남북 정상회담 개최를 통해 이른바 ‘6·15 체제’가 등장하면서 이미 동결 되고 파행되었던 남북기본합의서는 자취를 감추고 ‘6·15 체제’로 대체되었다. 그 러나 남북관계와 미북관계 간 우선성과 균형 문제가 정치·외교적 쟁점으로 등장 하였다. 북한 핵문제에 대한 미북간의 대립이 심화됨에 따라 남북관계만의 발전 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북한 핵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미북관계가 개 선될 수 없으며 결국 남북관계 역시 화해와 협력이 지속되지 못한다는 점을 보여 주었다.

13통일부, 󰡔2002 통일백서󰡕 (서울: 통일부, 2003), pp. 517-519.

4.

복구 시도기

(2008∼

현재

)

2008년 초 우리 정부는 취임식에서부터 남북기본합의서 이행을 주창하였다.

6·15

체제가 북한의 핵개발을 막지 못하였고 남북관계 선순환도 가져오지 못했다

는 논리에서 남북관계를 상호주의적 입장에서 재정립해야 한다는 논리에서였다.

2008년 이후 금강산 관광 중단과 개성공단의 출입 제한 등이 발생하여 남북관

계는 거의 모든 분야의 대화가 단절되었다. 특히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사건으로 인하여 남북관계가 최악의 상황으로 대치하게 되자 강력한 안보를 바탕으로 하는 남북관계 기조가 실현되었다. 북한의 무력도발에 대한 북한의 진정한 사과가 있어 야 남북관계의 개선이 가능하다는 것이 우리 정부의 입장이다. 이에 따라 남북관 계와 미북관계가 밀접히 연계되어 어느 한 관계도 앞서 나가지 않는 양상을 보였 다. 따라서 현 시기에는 남북관계와 미북관계가 선순환을 이루기 위해 강력한 한 미공조를 바탕으로 남북관계와 미북관계가 동시에 발전하는 균형발전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판단된다.

<표 1> 시기별 국제환경과 남북관계

연도 기본합의 한반도 국제환경

91.12

~92

협상타결 및 이행

남: 남북대화와 통일 논의 북: 경제난과 미북관계 개선 희망 남북: 고위급회담

- 소련해체

- 독일통일

93~00.6 동결/

파행

남: 상호주의에 입각한 상호사찰 주장 북: 남북상호사찰 거부,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 이행거부, NPT 탈퇴(1993.3), 김일성 사망(94.8?), 김정일 승계(97~) 남북: 고위급 회담

- 미북 제네바합의(94.10)

00.6~08 6.15체제 대체기

남: 김대중 정부(98~02).

노무현 정부(03~07) 북: 6자회담을 통한 핵문제 해결 남북: 남북정상회담

- 부시정부

- 북 농축의혹, 제네바합의 중단(02.10)

08~ 기본합의서 복구시도기

남: 이명박 정부(08~) 취임, 6.15 및 10.4 정상선언 거부, 기본합의서체제 복구 시도 북: 6.15선언 이행 주장 남북: 남북간 신뢰 하락

- 오바마 정부(2010~?)

Dalam dokumen 제20권 1호 2011 (Halaman 98-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