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idak ada hasil yang ditemukan

미얀마 코캉사태에 대한 중국의 대응

Dalam dokumen 제20권 1호 2011 (Halaman 117-124)

Fulfilling the Inter-Korean Basic Agreement and International Environment

Ⅲ. 미얀마 코캉사태에 대한 중국의 대응

성(彭家聲) 형제를 소환하였으나 응하지 않았다. 이에 8월 23일 100여명의 미얀 마 정부군이 펑자성 거소를 습격하고, 다음날인 24일 미얀마 군과 경찰은 특구 무 장세력에게 반정부 동맹군에서 탈퇴하여 미얀마 정부군 변경방어부대로 편입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소수민족 무장세력이 정부군의 요구를 거절하자 8월 25일

1,000여명에 이르는 대규모 군 병력을 투입하여 코캉특구를 점령하고 소수민족

무장세력 지도자 펑자성과 그의 지지자를 체포하려 했다. 월등한 무기와 장비를 갖춘 미얀마 정부군에 의해 코캉특구지역 소수민족 무장세력은 이렇다할만한 저 항을 하지 못하고 힘없이 제압당했다.

무력충돌이 발생하여 생명의 위협과 재산상의 피해를 느끼게 된 수만 명의 특 구지역 주민이 중국 윈난성 난산진 통행로를 통해 피난길에 올랐다. 피난길에 나 선 대부분의 난민들은 중국계 주민들과 변경지역에서 중국과 변경무역에 종사하 는 상인들이었다. 무력충돌이 발생하기 이전 코캉특구지역은 중국계 화인에 의해 통치되었고 중국계가 경제력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얀마 정부군에 의해 점 령된 뒤 위기감을 느낀 변경지역의 수많은 주민들이 피난민 대열에 동참하게 된 것이다. 약 37,000명의 난민이 중국 윈난성으로 진입하였으며, 이 외에 코캉 무장 병력 700명이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탈출했다.

행정특구’라고 불릴 만큼 중국화가 많이 진행되어 있고 중국의 영향을 크게 받는 곳이었다.10

따라서 친중국계가 장악하고 있었던 코캉지역을 미얀마 군사정부가 대내 정치 적 목적으로 자치권을 박탈하고 직접 지배하에 병합시키려는 과정에서 미얀마를 탈출한 많은 수의 주민들이 자국 내로 유입되자, 중국은 심각한 위기사태로 인식 하고 지방정부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중앙정부 차원에서도 대응책을 강구하여 대 응해야만 했다.

<미얀마 사태 시 중국의 주요 대응조치>

- 미얀마 군사정부-소수민족간 대화 설득, 평화적 해결 요청 - 무장경찰부대 변경지역 순찰·방범활동 강화, 통행로 통제조치 강화 - 중앙지도부 지시하달

- 중앙 지휘본부, 일선지휘부 설치

- 윈난성정부, 섭외돌발사건 협조·응급처치 연석회의 구성·가동

- 중국외교부, 미얀마에 국경지역 안정유지, 미얀마 내 중국인 생명·재산권 보호 요구 - 중국인 사상자 발생에 항의, 사과요구

- 중국유입 미얀마 주민 수용시설에 수용, 구호 - 국경지역에 무장경찰부대 증강, 인민해방군 배치

- 멍젠주 공안부장 현지 파견, 변경지역 안정유지, 피난민·무장군인 수용방안 지시 - 무기 휴대 무장세력 무기 압수, 수용

- 천빙더 총참모장 미얀마 파견, 미얀마 군사령관에 중국입장 전달 - 유언비어 차단

- 사태 진정 후 피난민 미얀마 복귀 설득

코캉사태가 발생하자 중국은

2005년 8월 대외비 형태로 공포·발효된 국무원

‘국가섭외돌발사건응급대비방안’(國家涉外突發事件應急預案)에 의거하여 1급 급

변사태

(特別重大涉外突發事件)로 규정하고 대응하였다. 4단계의 급변사태 중 가

장 위급하고 광범위한 대응을 요구하는 급변사태로 간주되었기 때문에,11 중국은 매뉴얼에 따라 국무원 내에 중앙 지휘본부를 설치하고 사건 발생 현장에도 일선 지휘부를 설치하여 24시간 가동하였다

.

윈난성 지방정부 차원의 돌발사태 대응 매 뉴얼에 의거하여 윈난성 정부에서도 자체 대응방안을 마련하여 대응하였다. 8월

10黃康顯, “對果敢局勢可有所作爲,” 󰡔大公報󰡕, 2009.9.8.

11500명 이상의 외국의 주민과 피난민이 중국 영내로 진입하는 섭외사건을 중국은 1급 급변사태

로 규정하고 있다.

초에는 섭외돌발사건 협조·응급처치 연석회의(聯席會議)를 구성·가동하였으며,

8월 27일 미얀마주민이 대거 중국으로 유입되는 등 코캉사태가 악화되자 윈난성

정부는 심야 긴급대책회의를 개최하고 무장경찰부대를 증파하여 경비를 강화함으 로써 영내에 미칠 수 있는 파급영향을 최소화 하고자 했다.

중국 당 중앙과 중앙정부는 윈난성 당 위원회와 성정부 그리고 인민해방군 변 경관리부대에 지시를 하달하여 변경지역 관리·통제 조치를 강화하고 변경 통행로 를 엄격하게 통제함으로써 돌발사태가 더욱 악화·확대되지 않도록 하였다. 변경지 역에 일차적으로 700명의 인민해방군 병력을 긴급 증원하여 변경 통행로 차단·통 제조치를 강화하였다.12 특히 마약과 무기 등 중국의 사회질서를 저해할 수 있는 금지물품 반입을 엄격하게 차단하고자 하였으며

,

변경지역 사태가 쿤밍 등 내륙지 역으로까지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유언비어가 유포되지 않도록 하는 데에도 유의하였다.13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캉사태가 악화되어 수많은 코캉 주민들이 중국 영내로 유 입되자, 중국 중앙정부는 멍젠주 공안부장을 윈난성 현지에 파견하여 변경지역의 안정유지 업무와 중국에 유입된 미얀마 주민과 무장세력 수용방안을 지휘·관리하 였다. 중국-미얀마 국경에서 중국 안쪽으로 3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지역에 7개의 피난민 수용소를 설치하여 피난민들을 임시 수용하였다.14 여름이었기 때문에 천 막을 설치하여 미얀마 주민들에게 거처를 임시로 마련해 주고, 윈난성 정부는 인 민폐 1,000만원의 구호비용을 마련하여 식품, 음료, 담요, 약품 등 생활용품을 제 공해 주고, 위생 및 방역조치를 취하였다. 피난민 1인당 하루 인민폐 8원의 현금과 쌀 2근을 제공하여 최소한도의 생활이 가능하도록 했다. 수용시설 지역의 안전 및 통제조치는 무장경찰이 담당하도록 했으며, 피난민과 관리요원 이외의 외부인의 출입을 엄격하게 금지하였다. 관리통제소에서 입주증을 발급받은 피난민만이 지

12중국은 2003년 8월까지 북한과 미얀마와의 국경지역 방어 임무를 무장경찰부대에 맡겨오다가 같은 해 9월 초부터 인민해방군에게 임무를 교체하였다. 현재 북한과 미얀마와의 변경지역 방어 임무는 인민해방군이, 변경 치안유지는 무장경찰이 맡고 있다. “2003年9月16日外交部发言人 在记者招待会上答记者问,” <http://www.fmprc.gov.cn/chn/gxh/tyb/fyrbt/jzhsl/t25769.htm (검색일: 2003.9.19).

13“中方通報緬甸果敢戰事致邊民涌入中國境內情況,” <http://www.chinanews.com.cn/gn/news/

2009/08-30/1840946.shtml> (검색일: 2009.8.30). 2010년 8월 6일 윈난성 쿤밍대학교 방문 시 필자가 쿤밍대학교 학생 5명에게 코캉사태의 전말에 대해 질문하였으나, 이들 모두 코캉사태를 잘 알지 못하였고 중국정부가 효과적으로 대응하였다는 반응만을 보였다.

14중국정부는 중국에 유입된 미얀마 주민들을 난민으로 규정하지 않고 중국에 일시적으로 유입된 미얀마 변경지역 주민, ‘邊民’(변민)으로 간주하였다.

정된 수용시설에서 거주할 수 있도록 했다.15

중국

-미얀마 변경지역에서 발생한 사태 처리과정에서 미얀마 군의 발포로 소수

의 중국인 사상자가 발생하자, 중국정부는 미얀마에 엄중한 항의를 전달하고 공식 사과를 받아냈다.16 코캉지역에서 무력충돌이 발생하기 이전부터 중국정부는 미 얀마 군사정부에게 소수민족과의 갈등을 대화를 통해 해소해 나갈 것을 설득해 왔는데, 중국과 충분한 사전협의 없이 친중국계 소수민족이 장악하고 있던 코캉에 대해 무장력을 행사한 미얀마 군사정부의 행동은 중국의 국익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졌다.17 중국은 미얀마 내 산족, 카친족, 와족 등 접경지역 소수민족과의 직간접적 유대관계를 활용하여 미얀마 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해 온 측면이 있었다 는 점에서, 중국 접경지역에서 무력충돌이 발생하게 되면 미얀마 정부에 대한 전 략적 지렛대의 하나를 상실하게 될 뿐만 아니라 중국 영내로 미얀마 피난민들이 유입되는 등 윈난지역 불안정을 야기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18

그러나 중국 중앙정부는 코캉사태에 대해 대외적으로 신중한 태도를 견지하려 고 하였다. 코캉사태는 중국 서남부 변경지역 안정과 발전에 심각한 위협을 미칠 수 있는 문제였지만, 미얀마 내에서 발생한 사태에 대해 중국이 직접 개입하거나 정면 반대하기 어려웠다. 미얀마 내정문제에 개입하게 될 경우 미얀마 군사정부 와 중국 간의 관계 및 아세안과 중국 사이의 관계에 미칠 부정적 영향을 우려했 기 때문이었다.19 따라서 중국정부가 공식적으로 보인 첫 번째 반응은 “코캉사태 는 미얀마 내정에 속하는 문제다 … 중국정부는 타국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 일관 된 방칙을 채택할 것이다 … 미얀마의 화해를 희망한다,” “사태발전을 예의주시 하며 … 미얀마 정부가 문제를 적절히 처리하기를 기대하며, 변경지역의 안정이 유지되기를 바라고, 미얀마 내 중국인의 안전과 합법적 권익이 보호되기를 바란 다”는 다소 절제된 내용의 외교부 성명문 발표였다.20 중국정부는 미얀마 코캉사

15“中國不會出兵果敢,” <http://hi.baidu.com/qlc518/blog/item/036cbbefd8c86d1ffcfa3ce3.html>

(검색일: 2009.9.4).

16<http://china.huanqiu.com/roll/2009-08/561698.html> (검색일: 2009.8.30).

17International Crisis Group, “China’s Myanmar Dilemma,” Asia Report, No. 177 (September 14, 2009), p. 26.

18Ibid., pp.10-12; Ian Storey, “Emerging Fault Lines in Sino-Burmese Relations: The Kokang Incident,” China Brief, Vol. 9, Issue 18 (September 10, 2009).

19미얀마도 이미 아세안 회원국으로 가입한 나라이기 때문에 중국 정부는 미얀마 내부문제에 군 사적으로 개입할 경우 아세안에서 ‘중국위협론’이 대두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도 우려했을 것 이다.

20“2009年9月1日外交部发言人姜瑜举行例行记者会,” <http://www.fmprc.gov.cn/chn/gxh/tyb/

fyrbt/jzhsl/t581720.htm> (검색일: 2011.4.10).

Dalam dokumen 제20권 1호 2011 (Halaman 117-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