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rth Korea’s Stance on the Inter-Korean Basic Agreement
Ⅲ. 시기별 남북기본합의서 이행의 국제환경 평가
비핵화 우선론은 한국의 대북 포용정책이 국제사회의 북한 비핵화 노력을 무력 화시키고
,
국제안보를 훼손시키며, 북한이 핵개발 시간과 자금을 확보하는데 기여 했다는 비판적인 입장이다. 이런 차원에서 남북우선론과 정반대의 입장이다. 또한 비핵화 우선론은 클린턴 행정부와 부시 2기 행정부의 북핵협상 방식이 비핵화 원 칙을 철저히 견지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오히려 북한이 핵개발할 수 있는 시간을 벌었다고 지적한다.이러한 4가지 시각을 바탕으로 지난 20년간의 남북관계를 기본합의서의 이행과 불이행이라는 측면에서 미북관계와의 상호연관성을 검토해보기로 한다.
체코, 불가리아, 루마니아 등과 수교하였다. 이와 동시에 1990년 10월
3일 독일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북한의 남한에 대한 흡수통일 우려를 갖게 했고, 북한은 이 러한 위기 의식 속에 남북회담 자리로 나오게 되었다.특히 북한의 대남정책 변화에 영향을 준 것은 사회주의권에서 중국과 구소련의 변화였다. 1991년 5월 중국의 리펑 총리가 한국의 UN 동시 가입을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고 중국은 남한과의 협력 확대를 불가피한 것으로 설명하였 다. 그리고 중국은 1991년 10월 초 김일성의 중국 방문시 경제 개혁·개방의 필요 성을 설명하고 외국 자본과 기술의 도입을 위해 남북관계 개선을 권유하였다.4또 한 구소련에서는 1991년 8월 공산주의 세력들이 일으킨 쿠데타가 실패로 돌아간 후 8월 24일 소련공산당이 해체되었고 12월 8일 소비에트 사회주의공화국연방이 해체되어 독립국가공동체(CIS)가 창설되었다.
중국과 구소련의 변화는 한반도에 가장 큰 영향력을 주었고 남북한이 공동으로 한반도 안보에 대해 합의하는 합의서를 탄생시켰다. 이 합의서를 통해 남북 양측 이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라는 점을 인정하고, 정전상태를 남북 사이의 공고한 평화 상태로 전환시키기 위하여 노력하며 평화 통일을 지향할 것을 다짐하였다.5남북합의서는 탈냉전 이후 한반도 문제 해결에 대한 최초의 남북 합의라는 점에서 의의를 가진다. 이와 동시에 발효된 ‘한반도의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은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남북한간의 공식 논의의 출발점 이 되었다.
1992년 1월 20일 남한 정원식 국무총리와 북한 연형묵 정무원 총리의 서명으로
이루어진 남북기본합의서는 단순한 선언이 아니라 실행을 위한 구체적 일정표도 계획되었고 이에 대한 노력도 이루어졌다. 1992년 5월 5일부터 8일까지 서울에서 개최된 제7차 고위급회담에서 기본합의서 이행을 위한 실천기구의 구성에 관한 합의가 있었다. 그리고 9월 15일부터 18일까지 평양에서 개최된 제8차 회담에서 는 각 분과위원회가 마련한 ‘남북기본합의서’의 실천을 위한 부속합의서가 채택되 었다.
남북한은 고위급 회담을 통하여 정치·군사·교류협력의 3개 분과위원회와 화 해·불가침·경제협력·사회 문화의 4개 공동위원회, 남북연락사무소의 구성과 운영 등의 합의를 이끌어냈다.6남북기본합의서가 발효되어 시행됨에 따라 남북한은 상호 체제를 인정·존중하
4강인덕·송종환, 남북회담: 7.4에서 6.15까지 (서울: 극동문제연구소, 2004), p. 310.
5통일부, 남북합의서 (통일부, 2004), pp. 44-49.
6북한연구소, 북한총람 (1993-2002) (서울: 북한연구소, 2003), pp. 998-999.
고 내부문제에 간섭하지 않으며, 상호 비방·중상을 하지 않고, 파괴·전복행위를 하 지 않을 의무를 가지게 되었다. 또한 남북한은 휴전협정의 정전협정으로의 변화 노력
,
상호 불가침 의무와 불가침 경계선 존중 의무, 군사적 신뢰구축을 위한 협의 의무, 남북한의 인적 및 물적 교류·협력의 실시할 의무를 이행해야 되었다.71989년 2월 남북고위급회담을 준비하는 예비회담부터 시작하여 남북한 양측의
총리들이 참석한 수차례의 고위급회담을 거친 이후 1992년 2월 평양에서 ‘남북기본합의서
’와 ‘한반도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을 채택하였다.
남북고위급회담의 가장직접적 원인은 1980년대 말부터 시작된 냉전체제의 와해이며, 이로 인한 한국 의 구소련, 동유럽 국가들과의 수교와 북한의 외교적 고립 및 안보 위기의식 확대 가 중요한 원인이다.
한편 1991년 12월 미국은 베이징에 북한 정치 고문 채널을 통해 핵사찰 의무 를 이행하겠다고 하면 고위급 회담을 개최할 용의가 있음을 북한측에 통보하였 다. 당시 미국은 한반도 화해 분위기를 이어가자는 의도를 가지고 협상을 구상하 였으며 1992년 1월 뉴욕 주유엔 미국 대표부에서 김용순 국제부장과 아놀드 캔 터(Arnold Kanter) 국무부 정무차관의 회담이 있었다. 당시 북한은 미국과의 대 화에 많은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으나 협상은 일회성으로 그쳤고 회담의 진전은 없었다.
이후 1992년 8월 31일부터 9월 12일까지 IAEA(International Atomic Energy
Agency)가 북한 핵에 대한 제3차 임시사찰을 실시한 결과 북한이 미신고한 2개
의 핵 관련 의속시설이 적발되는 일이 발생하였다. 또한 북한은 남북핵통제공동위 원회의 상호사찰 규정을 협의하는 과정에서 협력하지 않았고, 12월 이선실 간첩사 건이 확인되면서 남북관계는 경색되었다.이에 대해 한미 양국은 1992년 10월 8일 제24차 연례 안보협의회에서 남북한 상호 핵사찰에서 의미 있는 진전이 없을 경우 1993년 팀스피리트 훈련을 실시하 기 위한 준비조치를 지속할 것을 발표하였다. 이에 북한은 11월 3일 화해·군사·경 제·사회문화 공동위원회 북측 위원장 공동 명의의 연합성명을 발표하여 분야별 공동위원회 제1차 회의의 불참을 선언하였고, 12월 21일 제9차 남북고위급회담도 무산시켰다.
탈냉전의 분위기 속에서 북한의 남북대화 참여의 중요 목적은 미국과 일본과의
7정세현, “남북기본합의서의 법적 성격과 정치적 의의,” 통일문제연구, 제4권 1호 (평화문제연 구소, 1992) p. 15.
관계 정상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