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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세기: 신예술정책과 위원회 전환

4. 역사적 배경

4.1. 한국문화예술위원회

4.1.3. 문화의 세기: 신예술정책과 위원회 전환

2000년을 맞이해 국민의 정부는 ‘문화의 세기’라는 캐치프레이즈를 통해 문화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고자 하였다. 가장 눈에 띄는 성과는 예산의 증가로, 2000년 문화 부문 전체 세출 예산이 정부전체 세출 예산의 1.0%를 넘어선 뒤 2001년에는 절대금액 기준 1조 원을 넘어서게 되었다. 문화경쟁력의 힘과 영향력을 인식하게 되면서 다양한 문화예술 활동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지원과 활동이 확대되었으며, 국민 여가생활이나 생활 속에서도 문화를 향유하고 즐기는 풍토가 확산되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등장한 참여정부는 자율, 참여, 분권을 3개 국정원칙으로 내세워 문화예술 현장에서도 이 가치를 정착시키고자 하였다. 향유자 중심의 예술활동 강화, 예술의 창조성 증진, 예술의 자생력 신장, 열린 예술행정체계 구축의 4대 기본방향을 정하고 <새예술정책>을 발표하였다. 새예술정책은 “예술 이 지니는 근본적이고 고유한 가치를 재인식”하고, “자율, 분권, 참여 원칙에 따른

선진 예술행정 체계를 정립”하며, “활력이 넘치는 예술환경 조성을 위한 전략적 지원정책 강화”를 목표로 하였다. 순수예술을 문화적 삶의 토대이자 시민사회와 민주주의 발전의 핵심 요소로 간주하고 순수예술 분야를 주요 정책 대상으로 삼아, 이 정책을 두고 일각에서는 순수예술의 부활, 순수예술의 가치 재조명이라는 식으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새예술정책과 함께 자율, 분권, 참여의 원칙에 따라 기존 진흥원 제도를 위원회로 전환하여 민간자율적인 정책의제를 설정하고 민주적 참여를 통해 문화현장과 직결된 고도의 전문성을 가진 예술지원기구인 한국문화예술위원회를 2005년 설립 하게 된다. 위원회 전환을 둘러싸고 문화예술계가 진보, 보수, 장르별 협의체 등 다양한 갈래로 나누어 갈등을 빚기도 하였지만 범문화예술계 공동의 기구를 구축하여 조속한 위원회 전환을 요구하였다. 이런 노력의 결과 문화예술진흥법에 서 위원회 전환을 골자로 하는 개정안이 처리되고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설립되어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예술 지원 활동에 대한 기대가 한층 고조되었다. 위원회 전환 초기는 혼란과 격동의 시기로 위원장 및 위원 선발, 소위원회 구성, 조직 개편, 기금 지원 대상 선발 등 각 이슈마다 논란이 많았다. 이 중에서도 문화예술계 전반에서 가장 관심을 가진 것은 위원 선발과 관련한 문제였다. 2년 임기의 비상임직 10인으로 구성된 위원은 문예진흥기금 지원 대상을 최종 평가하고 심사하는 최고 의사결정 집단이다. 위원회 전환 과정에서 자율적인 기금심사와 위원회의 독립성 을 특히 강조했기 때문에 위원이 보수/진보, 다양한 예술 장르 중 어떤 분야 사람이 선발되는지 여부가 향후 기금 지원 결과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모두 판단하였 다. 참여정부 때 선발된 위원회 1기 멤버들은 특히 문화예술계 진보 인사의 대거 등용으로 명백한 코드 인사라는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2000년대 문화정책에서 주목할 또 하나의 이슈는 문예진흥기금 모금 중단이다.

1973년 문예진흥법 제정과 함께 모금을 시작해 수십 년간 한국 문화예술 진흥을 이끌어 왔던 문예진흥기금이 2004년 모금을 중단하게 되어 문화예술 진흥에 적신호 가 켜졌다. 문예진흥기금 고갈에 대비책으로 복권기금, 경륜경정수익금 등 다른 기금을 조달해 문예진흥 사업을 유지해왔지만, 이 기금들은 복권기금의 역진성 조항 때문에 소외계층 대상 사업에만 사용할 수 있는 한계점이 존재한다. 매년 국정감사 때마다 고갈 문제가 지적되지만 아직도 뚜렷한 해결책이 없이 별다른 진전이 없는 상황이다.

한편 이명박정부는 <문화비전 2008~2012>에서 “방방곡곡 모세혈관처럼 펼쳐지

는 품격 있는 문화국가, 대한민국”으로 문화정책의 비전을 설정하고 수요자 중심의 정책 추진, 선택과 집중의 지원체계, 실용과 효율의 문화행정, 상생하는 문화와 산업, 소통과 개방의 전략, 문화를 통한 녹색성장 등의 전략을 제시하였다. 이명박 정권의 문화정책은 문화와 산업의 만남을 지향하여 全정권이 표방했던 순수예술, 예술의 수월성 중심의 ‘새예술정책’과 반대되는 지점이 많았다. 문화예술 진흥을 통한 가시적이고 명확한 성과를 기대하고 문화예술 작품 상업화, 산업화를 장려하 는 등 문화가 산업의 패러다임 안으로 편입되는 경향을 보였다.

2013년 출범한 박근혜정부는 ‘문화융성’을 캐치프레이즈로 하여 『문화기본법』

을 제정하였으며 문화재정 2% 달성을 국정과제의 하나로 제시하였다. 매달 마지막 수요일을 ‘문화의 날’로 지정하여 국가유적지, 공연, 전시, 영화 등을 무료 또는 대폭 할인하여 제공하는 정책을 도입하여 일반 국민의 문화향수 수준을 증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또한 대통령 소속 자문위원회인 문화융성위원회를 출범시켜 정부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국가 발전에 있어서 문화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4.2. 미국국립예술기금위원회(The National Endowment for the Arts)

4.2.1. 1965-80년: 설립기

1960년대 이전에는 미국 문화정책의 기반이 아직 제대로 조성되지 않았다.

정부 문예지원 규모가 미미했을 뿐 아니라 정부는 정치, 경제, 사회 영역을 우선 관장해야 한다는 인식 때문에 대부분의 문화예술 지원은 사적 영역에 의존하고 있었다. 1935년 대공황을 겪고 있던 미국인들에게 경제적 도움을 제공하기 위해 추진한 루즈벨트 대통령의 뉴딜 정책에 따라 창설된 공공산업진흥국(Works Progress Administration, WPA)에서 주도한 문화예술 정책이 미국 연방예술기금 (이하 NEA) 설립 이전에 주목할 만한 유일한 문화정책 사례였다. WPA는 예술가들 의 ‘고용’에 초점을 맞추고 다양한 장르에서 대규모의 예술가 인력을 정부 프로젝트 에 고용하여 5,000명이 넘는 예술가들이 경제적 어려움에서 구제될 수 있었다.

한편 WPA 문화정책의 두 번째 목표는 미국 예술가들이 창작한 예술작품을 통해 미국의 국가 이미지와 이데올로기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1950년대는 2차대전

직후 미국과 소련이 대치한 냉전시기인데, 소련의 문화적 유산을 가치절하하고 폄하하는 차원에서 소련의 문화예술과 차별되는 그리고 독창적인 미국만의 문화적 아이콘이 필요했다. 따라서 대부분의 예술 창작을 실험적이고 자유롭게 하기 어려운 상황이었고, 정부 문화정책의 토대가 마련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정부 검열과 통제가 상당수 존재하였던 시기였다.

본격적인 국가 차원의 문화정책은 케네디 정권 때부터 모양새를 잡아갔다.

유명한 문화예술 애호가이기도 한 케네디 대통령은 미국문명 수준을 고양시키기 위한 핵심 도구로 문화예술을 선택하고 대통령 취임식에 당대 유명 예술가들을 다수 초청하는 등 적극적으로 문화예술을 국가 정책 내로 포섭하였다. 예술을 개인 일상에 주입시키게 되면 개인의 미적 수준이 올라가고 지적 상상력이 발휘되 어 무미건조한 물질주의적 삶에 변화가 올 수 있다고 생각했다. 개인의 내적 가치에 주목하고 개인적 성장을 이루는데 예술이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고 기대하였다. 이와 더불어 뉴딜 정책의 성공으로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뤄 경제보다 개개인의 삶의 질에 더 주목하는 문화가 형성된 이 시기 사회문화적 변화도 이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켰다.

이 결과 1960년에서 1963년 사이 국회에서는 정부 주도의 문화재단을 설립하기 위한 안건이 처음 발의되어 국회, 행정부, 문화예술인들 간에 많은 의견이 오가기 시작하였다. 정부 기금이 종자돈(seed money)이 되어 민간의 투자를 확대하고 장려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어야 하고, 최소 5배 이상의 민간 자금을 문화예술계에 끌어와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정부 기금을 지원하게 되면 예술 창작의 내용에 있어서도 정부의 검열을 받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일각의 우려에 대해서 는 정부관계자와 기관의 사무총장이 기금 지원에 일체 관여할 수 없게 하는 “기금 지원 패널 심사” 과정과 “예술위원회의 최종 의사결정” 과정을 신설하여 기금 지원 기관의 자율성을 높이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였다. 이렇게 미국 연방예술기금 설립을 위해 실질적인 논의가 오갔지만, 1963년 케네디 대통령 서거로 인해 모든 논의는 중단되고 이후 존슨 정부로 넘어가게 된다.

존슨 대통령은 위대한 사회(Great Society) 정책 기조를 선포하고 사회문화 정책을 통해 국민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노력하였다. 국가의 부는 국민의 물질적인 웰빙을 넘어 국민 삶의 질 수준을 최대한 높이기 위해 존재해야 한다고 역설한 존슨 대통령은, 냉전 구도에서 국가 아이콘을 만들기 위한 문화예술이 아니라 삶의 질 제고를 위한 문화예술을 제시하였다. 문화예술이 정치적 수단에서 사회

전반의 복지 문제로 포섭되면서 국회에서도 정부 차원의 문화정책을 추진하기 보다 수월해졌고 존슨 대통령이 기존에 국회와 쌓은 신뢰와 친분의 도움으로 마침내 1965년 예술과 인문학을 위한 국가 재단(National Foundation for the Arts and Humanities) 설립안이 국회에서 승인되었다. NEA의 초기 비전은 예술의 수월성을 높이고 예술의 즐거움을 확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비전 모두를 달성하지는 못하였고, NEA의 주된 초점은 고급예술 중에서도 “현실적 추상주의 (modernist abstraction)” 양식의 예술을 장려하는 식으로 진행되었고 주로 시각예 술 프로젝트에서 이루어졌다. 초기 문화정책가들은 국가 문화 기관을 설립하고 수준 높은 고급예술 작품을 창작하면 미국 문화예술의 전반적인 수준이 높아지고 국제 사회에서 미국의 위상이 높아진다고 기대하였다. 이렇게 고급 예술 중심으로 NEA가 운영되는 동안 대중예술과 민속예술은 상대적으로 소외되었고, 이는 1960 년대 후반 대중예술의 급속한 성장세와는 상당히 모순된 결과를 낳았다. 다시 말해 일반 대중의 문화 향유와 소비를 증진하기보다는 고급 예술 창작을 장려하고 대중들이 고급 예술을 소비할 수 있도록 예술교육을 진행하는 식으로 문화정책과 NEA의 운영이 이루어진 것이다.

일반 대중의 문화향수 증진을 목적으로 하는 문화정책은 닉슨 정권에서 추진되었 다. 닉슨 대통령은 이전 대통령들과는 달리 문화적 수준이 높은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전 정권까지 이어진 문화적 유산을 이어가고 베트남전으로 인한 복잡한 대내외 정국에서 미국 그리고 닉슨 정권에 긍정적 이미지를 부여하기 위해 NEA 기금지원을 사상 최대 규모로 증가하여 1971년에는 전년 대비 예산이 두배 증가하 였다(NEA, 2009). 이에, 미국 문화예술계에 미치는 NEA의 영향력이 본격적으로 확대되게 된다. 닉슨 정권 시기 NEA는 고급예술보다는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한 민중예술, 대중예술에 더 초점을 맞추었다. 특히 청소년, 여성, 노인, 장애인 등 사회 소외계층에 주목하여 여러 계층을 모두 정부 문화정책에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전 정권 기조에 따라 추상적인 현대 예술을 계속 지원했지만 동시에 보다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예술, 지방의 민속예술, 대중예술을 장려해 NEA의 정책 기조에 큰 전환이 되었다(Binkiewicz, 2004).

4.2.2. 1980-90년대: 갈등과 조정기

1970년대 카터 정권을 지나면서 NEA는 꾸준히 성장하였다. 1966년 당시 3백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