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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통선의 북상과 전략촌의 변화

출처: 위의 자료.

철원군청의 1981년 민통선 북방지역 마을현황카드에 따르면, 민북 마을은 입주당시 956가구, 4,721명이었는데, 1981년 당시에는 1,153 가구, 6.162명으로 증가하였다. 입주당시 원주민은 427가구, 외래인 은 529가구였는데, 1981년에는 각각 472가구, 681가구였다. 그리고 1992년 철원통계연감에 따르면, 민통선북방마을은 14개 마을로, 1227 가구, 5,151명이 거주하였는데, 이는 철원군 전체인구의 9.3%였다. 이 들의 농가 호당 경지면적은 2.2ha로, 철원군 평균 1.7ha보다 넓었다.

민북지역 출입 농가는 철원군 전체 농가의 절반정도를 차지하였다.

및 ‘평화’를 강조하는 모습으로 나아갔다. 이것은 접경지역이 군사적 대치뿐만 아니라 통일과 교류의 장소성을 획득하고, 관광 형태도 평 화와 생태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바뀌게 된 것과 관련이 있다. 이에 따라 분단 이전의 남북간 역사적 연결성이 강조되었고, 전략촌을 포 함한 민북마을은 남북교류의 거점으로서 역할을 부여받게 되었다.

가장 상징적인 제도적 변화는 민간인통제선(CCL)의 북상이었다.

1989년 민통선 북상을 시작으로 여러 차례에 걸쳐 민통선이 북상함에 따라 민북지역이 감소하는 한편 많은 자립안정촌과 재건촌 등 민북마 을들이 ‘민북’지역에서 해제됨에 따라 마을 정체성에도 변화가 일어났 다. 김창환과 이태희의 연구140)에 따르면, 2000년대까지 총 23개의 자립안정촌과 7개의 재건촌이 민통선 이남이 되면서 민북마을에서 해 제되었다. 2012년 현재 남은 자립안정촌은 45개, 전략촌은 7개이다.

<그림 Ⅵ-2> 민북마을의 역사분포

출처: 김창환이태희, “GIS를 활용한 민북마을의 분포변화에 대한 연구,” 󰡔한국사진지리학회지󰡕, 제23권 1호 (2013), p. 130.

140) 김창환이태희, “GIS를 활용한 민북마을의 분포변화에 대한 연구,” 󰡔한국사진지리학 회지󰡕, 제23권 1호 (2013).

<표 Ⅵ-3> 전략촌 현황(2016년 현재)

지 역 마을명 유형 입주 시기 해제여부

강원도

양구군 해안면 오유2리 재건촌 1971(상세미상) 미해제

만대리 재건촌 1971(상세미상) 미해제

철원군

철원읍 대마1리 재건촌 1968.08.30 2000 해제 대마2리 재건촌 1981.07.08(대마리 분구) 2000 해제 갈말읍 정연리 재건촌 1971.12.10 미해제 근남면 마현2리 재건촌 1968.08.30 미해제 동송읍 이길리 재건촌 1974.10.23(정연리 분구) 미해제 양지리 재건촌 1973.08.01 2012 해제 김화읍 생창리 재건촌 1970.10.31 2007 해제 근북면 유곡리 통일촌 1973.07.20 미해제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백연리 통일촌 1973.07.20 미해제 연천군 왕징면 동중리 재건촌 1969(상세미상) 2000 해제

북삼리 재건촌 1973(상세미상) 2000 해제 백학면 석장리 재건촌 1973(상세미상) 1989 해제 출처: 위의 자료를 재구성.

민통선의 북상 이전에도 전략촌의 의미에는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 하였다. 먼저 1970년대 후반에 이르면 남한과 북한의 경제적 격차가 가시화되며, 1980년대 초반에 이르면 적어도 경제적 지표에서 북한 과의 체제경쟁에서 완전히 승리하는 모습을 보인다. 더 우수하고 근 대화된 도시와 농촌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남북한 간 경관 경쟁이 심 화되고 있었던 당시, 전략촌은 근대적이고 이상적인 남한의 모습을 대내외적으로 보여준다는 심리전 상의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경제개발의 성공은 전략촌이 가진 심리학적 가치의 퇴색으로 이어졌 고, 1980년대에 들어 북한을 관망할 수 있는 일부 전방지역을 국민들 에게 개방하더라도 문제가 없게 되었다. 또한 1970년까지 이중철책 이 전 구간에 설치되었으며 1980년대에는 전진철책이 추가 설치되고, 각종 보안기술이 발전하게 되었다. 따라서 전략촌이 기획되었던

1960년대 후반에 극심했던 휴전선 인근의 군사적(비정규전) 충돌은 더 이상 보기 힘들어졌으며, 접경지역은 이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안 정된 지역이 되었다. 이와 같은 변화들은 전략촌을 국가의 핵심적 전 략요소가 아니라 오히려 토지문제와 각종 탄원들로 ‘골치가 아픈’ 관 심지역으로 재위치시켰다.

하지만 일부 정치인들에게 있어 전략촌 구상은 완전히 폐지된 것이 아니었다. 1980년 전략촌의 추가 건설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왔는 데, 당시 신민당 안보문제특위는 휴전선일대 5개 사단, 동서 해안에 각각 3개 사단, 지리산 2개, 한라산과 태백산에 각 1개 사단 등 15개 사단으로 구성된 전략촌을 5개년계획으로 설치할 것을 정부에 촉구 하였다. 여기서 주장된 전략촌은 이전의 전략촌 보다 더 군사적 의미 를 가지는 것으로, 평상시 생업에 종사하다 즉각적인 전투임무를 수 행할 수 있는 마을로 현역 대대장을 가지는 대대단위 전략촌을 의미 했다. 그러나 이러한 구상은 정책으로 이어지지 않았으며, 이후에는 제기되지 않았다.

<그림 Ⅵ-3> 전략촌 추가설치 촉구

출처: “신민, 수복지구해안선 등 취약지구 전략촌 설치 촉구,” 󰡔동아일보󰡕, 1980.3.25.

1980년대 전방의 개방은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 되었고, 이는 마을 정체성에도 영향을 주게 된다. 이미 1970년대 중반부터 정부에 있어 민통선 북방지역은 단순히 안보와 식량생산이라는 측면 이상의 의미 를 가지게 된다. 정부는 1974년과 1975년에 연이어 발견된 땅굴을 국 내외에 공개하면서 이들 장소를 시찰하러 온 주요 초청 인사나 단체 들의 편의를 위해 길을 포장하고 각종 편의시설과 교육관을 신축하는 등 개발을 실시하였다.141) 시찰자들은 땅굴뿐만 아니라 군 전망대나 다른 주요 시설들을 방문하기를 원했고, 정부 또한 이에 맞추어 일종 의 관광 코스를 개발하게 되었다. 1976년 판문점 도끼 살인사건은 국 내외 관심이 판문점과 공동경비구역(JSA)에 쏠리게 하였고, 판문점, 땅굴, 전망대는 한국을 방문하는 고위급 인사나 안보견학을 위한 주 요한 장소로서 개발, 관리되기 시작한다. 마찬가지로 잘 가꾸어진 전 방의 통일촌은 안보 견학 시 유용한 관광자원이 되었다.

<표 Ⅵ-4> 1982년도 전략촌의 세대수 및 인구변화

141) 전원근, “1970년대 국가 프로젝트로서 ‘땅굴’과 전방의 냉전경관화,” 󰡔문화와 사회󰡕, 제27권 2호 (2019).

유 형 소재지 세대수 인구 (명)

경작지(ha) 설치 연도

통일촌

철원군 근북면

유곡리 63 342 129 66 63 1973

파주시 군내면

백연리 84 484 200 40 160 1973

재건촌

철원군 철원읍

대마리 188 994 310 24 286 1968 철원군 근남면

마현2리 68 439 108 54 54 1968

연천군 왕징면

동중리 95 454 125 31 94 1969

출처: 내무부 지적과, “1982년도 민통선북방정책입주촌 토지분쟁(2)”철(1982) / 국가기록원 관리 번호 BA08433076.142)

1980년대 들어 전방의 관광화는 더 힘을 얻게 되었고, 고성 통일전 망대의 개방 이후 서울올림픽을 전후로 철원과 파주도 자체적인 안보 관광 루트를 개발하였다. 전방은 이전의 성역이 아니라 국민이라면 한 번쯤 가볼 관광지로 재탄생하였고, 이에 따라 파주와 철원 통일촌 은 다른 변화를 겪게 되었다. 파주 통일촌의 경우 일단 서울과 가까울 뿐만 아니라, 판문점을 지나는 통로에 위치하고 제3땅굴 및 도라전망 대 등 다른 관광지와 가까워서 관광루트의 필수적인 경유지가 된 반

142) 이장형, “수복지구 토지소유권 분쟁에 관한 연구”에서 재인용하였으며, 본래 마을 구 분을 통일촌과 전략촌으로 나눈 부분을 통일촌과 재건촌으로 고쳐 실었음.

유 형 소재지 세대수 인구 (명)

경작지(ha) 설치 연도

철원군 김화읍

생창리 109 631 119 54 65 1970 철원군 갈말읍

정연리 120 - - - - 1971

양구군 해안면

만대리 76 400 157 90 67 1971

양구군 해안면

오유2리 135 644 246 144 102 1971 철원군 동송읍

양지리 104 517 3,432 1,311 2,121 1973 연천군 왕징면

북삼리 137 733 110 56 54 1973 연천군 백학면

석장리 43 233 112 53 59 1973

철원군 동송읍 이길리

68

(입주당시) - - - - 1974

연천군 중면

삼곶리 20 100 31 13 18 1978

면, 철원 통일촌은 방문이 어려운 위치에 있어 철원의 안보관광 루트 에서 자주 제외되었다. 이는 통일촌 주민들의 삶에도 영향을 미쳐 파 주와 철원 통일촌은 경제와 산업, 주민의 구성과 인식, 마을의 현재 경관 등에서 큰 차이를 보이게 된다. 철원 통일촌 주민들은 자신들의 지역보다 활기찬 파주 통일촌을 방문했던 당시의 충격을 잊지 못하고 있다.

<표 Ⅵ-5> 1992년 철원지역 민북마을 현황

구 분 가구수 인구수 경지면적

농가 비농가

총 계 1,277 1,078 199 5,151 2,688 2,463 2,397.5 940.5 1,457

자립 안정촌

월하리 72 62 10 284 142 142 103 32 71

관전리 32 32 132 70 62 80 31 49

도창리 181 148 33 691 357 334 215.4 84.4 131 동막리 44 36 8 215 103 112 151 109 42 사곡2리 57 51 6 263 145 118 257 165 92 마현1리 218 115 103 758 365 393 206 81 125

재건촌

대마1리 104 98 6 424 222 202 209 47 162 대마2리 97 89 8 435 223 212 168 36 132 생창리 98 94 4 410 250 160 138 43 95 정연리 76 70 6 330 178 152 187 106 81 이길2리 68 67 1 327 172 155 176 53 123 양지1리 97 97 - 401 200 201 229 36 193 마현2리 74 63 11 276 152 124 175 85 90 통일촌 유곡리 59 56 3 205 109 96 103.1 32.1 71 출처: 철원군, 󰡔철원군지󰡕, 철원군청, 1992.

마지막으로 DMZ 지역의 자연생태계에 대한 관심의 급증은 마을 정체성의 변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민통선 북방지역과 비무장지대의 생태계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게 되면서 이 지역의 통제양상은 점차

군사안보적 통제에서 생태계 보전상의 통제로 이동하게 되었다. 철원 오대쌀 등 이 지역의 농산물들도 ‘맑고 깨끗한 자연’의 이미지를 획득 하며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하우스 파프리카와 같은 새로운 작물 을 통해 소득원을 다양화했다. 1990년대 중반에는 민통선 일부를 자 연생태계 보호지역으로 지정하는 움직임이 수십 년간 통제를 경험했 던 주민들의 반대에 부딪히기도 하였지만, 지금은 주민들이 나서 철 새를 보호하고 모이를 주는 등의 적극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2000년 대 들어서도 각종 생태계 조사와 정책 개발을 통해 DMZ 일대의 생태 계 보호가 중요한 이슈가 되었으며, 이에 따라 많은 지역이 보전된 자연환경 속에서 두루미, 독수리, 산양과 같은 자연생태계를 둘러보 는 생태관광지로 급부상하였다. 이러한 지역에 위치한 전략촌들은 생 태와 평화라는 새로운 흐름에 따라 정체화를 하게 되었다. 이길리는

‘두루미가 잠자는 마을’로, 대마리는 ‘두루미평화마을’로 브랜드화되 었고, 생창리는 ‘DMZ 생태평화공원’이 위치한 마을로 유명해졌다.

양구군 해안면의 만대리, 오유1, 2리 등 여섯 마을은 특색 있는 지형 과 보전된 자연환경을 관광자원화하면서 ‘펀치볼 마을’로 브랜드화되 었다. 또한 파주 통일촌의 ‘파주장단콩축제’는 경기도 대표축제로 매 년 치러지고 있다. 반면 철원 통일촌은 50가구 이하로 가구 수와 주민 수가 줄었으며, 대부분 입주 1세대 고령자로 이루어져 있다. 유곡리 가 속한 철원군 근북면은 2015년 조사결과143) 노령화 지수가 전국 1 위를 하였다. 이처럼 남북관계의 변화, 민통선의 북상과 전방의 개방 에 따른 변화들은 전략촌들의 성격과 정체성의 변화로 이어졌고, 마 을 간의 사회경제적 격차를 만들게 되었다.

143) “철원 유곡리 ‘109명 중 넷 빼고 노인, 동네 사라질까 걱정’,” 󰡔중앙일보󰡕, 2017.8.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