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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관광과 냉전 경관의 사회적 구성

가. 안보관광의 계기: 땅굴의 발견

접경지역에 존재하는 전략촌은 군사안보적 맥락과 식량증산이라는 경제적 맥락에서 다루어지지만, 사회문화적 맥락에서 다루어질 수 있 다. 전략촌이 가진 독특한 자원, 즉 오랫동안 민간인 통제구역에 소재 하고 있었기 때문에 생겨난 생태적 독특성과 우월성, 그리고 군사적 경관은 관광의 중요한 소재가 될 수 있다. 중요한 전략촌들이 주로 철원과 김화지역에서 발전하였기 때문에 이 지역의 독특한 자연환경, 즉 화산폭발로 인한 현무암과 한탄강 계곡은 관광산업이 발전할 수 있는 잠재적 자원이었고, 너른 철원평야의 벼농사는 철새를 유인할 수 있는 생태적 자원을 제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접경지역이라는 조 건은 이런 가능성을 상당기간 억제하였다.

이 지역의 군사화 된 환경이 볼거리로서의 경관으로 전환되는 과정 은 정근식의 연구157)에서 확인된다. 이에 따르면, 접경지역의 군사시 설은 그것이 처음 만들어질 때는 대부분 기밀에 속하거나 군사용이어 서 존재여부를 드러내지 않는 속성이 있다. 존재하지만 존재여부를 잘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이들이 물리적 접근금지 대상이거나 은폐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이런 군사시설은 안보의 맥락에서 시민들에게

‘볼거리’로서 부분적으로 또는 제한적으로 보여질 때 비로소 사회적 경관이 되는데, 그것의 최초의 맥락은 안보관광이라고 할 수 있다.

1974년 파주에서, 1975년 철원에서 발견된 ‘땅굴’은 한국의 냉전분 단체제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동시에 냉전‘경관’이 형성되는 중요한

157) Keunsik Jung, “On the Ruins: Forgetting and Awakening Korean War Memories at Cheorwon,” Development and Society, vol. 46, no. 3 (2017).

계기였다.158) 땅굴은 1971년 김일성의 ‘9‧25교시’에 의해 시작된 것 으로 알려져 있는데, 땅굴의 존재는 1974년 9월 5일 북한에서 귀순한 김부성의 첩보에 의해 처음 알려졌고, 1974년 11월 15일 파주의 고랑 포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육군 수색조가 임무 수행 중에, 땅 밑에서 수증기가 올라오는 것을 발견한 것이 단서가 되었다. 철원에서 1975 년 3월 24일 또 하나의 땅굴이 발견되었다. 이들은 차례로 제1땅굴, 제2땅굴로 명명되었다. 제2땅굴이 발견될 때 이를 수색하던 한국군 7명이 북한군에 의해 희생되었다. 1978년 10월에는 판문점 부근에서 또 하나의 땅굴이 발견되었다. 1990년 3월에는 양구에서도 발견되었다.

땅굴은 북한의 침략의도를 증거 할 수 있는, 그리고 ‘적화통일’의 의도가 ‘현재 진행형’임을 보여줄 수 있는 최적의 장소로 간주되었고, 정부는 이를 국민들에게 보여주어 안보에 대한 경각심을 심어주려고 했다. 이런 맥락에서 ‘안보관광’이 추진되었다. 정전회담이 열리는 예 외적이고도 독특한 장소로서의 판문점 관광을 제외한다면, 안보관광 의 움직임은 철원에서 먼저 형성되었다. 1975년 철원에서 제2땅굴이 발견된 후 철원군은 1976년 ‘멸공 환상(環狀)관광지’ 개발계획을 구상 하기 시작하였다. 1977년에 교통부가 철원에 있는 고석정을 국민관광 지로 지정하면서, 다른 ‘볼거리’들을 묶어서 관광을 진흥하기 위한 구 상이 제안되었다. 안보관광은 한편으로는 반공의식의 고양을 위한 자 원으로서의 땅굴과 전통적 관광자원으로서의 경승이 결합되어 탄생 한 셈이다.

그러나 1979년과 1980년의 정치적 격변은 안보관광의 구상을 구체 적인 계획으로 전화시키지 못하게 하는 요인이었다. 안보관광 계획은 강원도가 1981년 국민관광지 조성계획을 확정하고, 1982년 ‘88 올림

158) 땅굴이라는 용어는 속어 또는 북한에서 사용되는 것으로, 이를 지하 터널로 부르지 않고 땅굴로 부르는 것 자체가 1970년대 남북 간 심리전의 산물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픽’에 대비하는 관광지로 철원이 선정되면서 안보관광 계획이 구체화 되기 시작했다. 1986년부터 軍과 철원군이 합동으로 안보 및 전적지 발굴 보존사업을 추진하여, 철원 안보관광의 기본계획을 1987년 2월 에 완성하였다. 이 계획은 땅굴, 노동당사 잔해나 사라진 월정리역의 복원 등 15개의 전적지, 도피안사 등 2개의 문화재, 고석정과 직탕폭 포 등 2개의 경승지를 구성요소로 하여 작성되었다.

그 후 안보관광 프로그램의 명칭을 둘러싸고 군청 간부들이 투표를 하여 ‘철의 삼각 전적지’로 결정하였고,159) 이어 1988년 국내 최대의 안보교육장을 건립하였는데, 그 명칭으로 충렬관, 승공관을 검토하다 가 ‘철의 삼각 전적관’으로 결정하였다. 이어 1988년 7월, 비무장지대 와 북한을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를 세웠는데, 민관군이 서로 선호하 는 명칭이 달랐지만, 최종적으로 ‘철의 삼각 전망대’라는 명칭으로 합 의가 이루어졌다.160)

1990년대에 이르러 땅굴견학은 철원 외에 땅굴이 있는 파주나 양구 지역에서도 안보관광의 핵심이 되었다. 여기에서도 철원의 예를 따라 비무장지대의 경관을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들이 세워지고, 독자적인 관광 프로그램이 발전하였다. 파주지역의 안보관광은 도라산 전망대 와 통일촌의 장단콩 축제와 어우러져 활성화되었다. 양구지역의 안보 관광은 펀치볼의 경관과 연계되었으나 수도권에서 멀다는 이유 때문 에 충분히 발전하지 못했다.

159) 후보 명칭은 철원 철의 삼각 전적지 외에 철원 통일안보전적지, 철원 안보전적지, 제2 땅굴 안보전적지, 철원지역 전사적지 등이었다. 철원군 소장문서.

160) 철원군청 소장 자료에 따르면, 군은 부대 명칭을 차용한 청성전망대나 필승전망대, 또는 호국전망대를, 주민들은 지역의 역사성을 강조한 태봉전망대나 월정전망대를, 철원군청은 철원통일전망대나 월정전망대를 선호했는데, 안보관광의 명칭인 ‘철의 삼 각 전망대’로 결정하였다.

나. 냉전경관의 사회적 구성

철원의 사례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한국정부는 1982년부터 서울 올림픽 준비를 위해, 다른 한편으로는 안보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안 보관광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접경지역의 군 사적 환경과 전쟁의 유산은 ‘볼거리’로서의 의미를 갖기 시작하였다.

사회적 경관으로서의 냉전경관, 또는 분단경관은 안보관광과 동시에 탄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안보관광의 대상으로서의 냉전경관은 어떤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 는가? 관광객들에게 매력이 있는 ‘볼거리’를 발굴하기 위해서는 시간 적으로 사라진 것과 생성된 것을 포함하고, 공간적으로는 경계의 안 과 밖에 있는 자연이나 군사시설 중에서 공개할 수 있는 것들을 아울 러야 한다. 접경지역에서 관찰할 수 있는 것으로 한정하여 생각해본 다면, 군사분계선 표지판을 비롯하여 철책, 초소, 검문소, 벙커와 군 사기지, 전차장애물을 비롯한 방어시설, 월경금지판, 심리전 방송용 시설, 기지촌, 전략촌 등이 냉전경관을 구성한다. 과거의 전장으로서의 철원지역에 남아있는 잔해 폐허도 안보관광의 중요한 구성요소이다.

1988년에 철원군청에서 작성한 안보관광 지도에 따르면, 백마고지 위령비와 제2땅굴, 도피안사와 함께 8개의 잔해폐허가 포함되어 있 었다. 이 경우 안보관광의 계획자들은 이 폐허를 특정한 방식으로 읽 도록 유도하기 위하여 반공주의적 메시지를 담은 표어를 빈번하게 사 용하였다. 대표적인 잔해 폐허인 노동당사나 수도국지는 북한 지배 하에서 또는 한국전쟁 기간에 자행된 ‘붉은 폭력’의 현장으로 독해되 어야 했다. 그러나 폐허는 종종 이런 기획자의 의도를 넘어서는 비의 도적 효과를 생산한다. 폐허는 적대감보다는 전쟁이나 폭력의 무가치 성을 느끼게 하는 매개물로 기능하기 쉽다. 이를 폐허의 평화효과라 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림 Ⅶ-1> 안보관광 기본코스 예시

자료: 철원군청, 1988.

냉전경관은 지상 뿐 아니라 지하에도 존재한다. 지하에 구축된 진 지나 동굴은 당연히 여기에 포함된다. 지하에 매설된 지뢰도 경관의 범주에 포함되는가? 경관이 보이는 것을 의미한다면, 지뢰는 보이는 것이 아니므로 여기에서 제외되어야 하지만, 지뢰가 묻혀 있는 지역 을 표시한 표시물, 그리고 여러 가지 지뢰의 모습을 전시하여 이를 발견하면 신고하라는 지뢰 경고판들은 여기에 포함되어야 한다.

비무장지대와 같은 육지 이외에 강안이나 바다 지역에도 냉전경관 이 나타난다. 가장 뚜렷한 것은 해안상륙방지시설인 용치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군에 의해 광범하게 사용된 용치161)는 여러 가지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 톱날형과 기둥형으로 구분된다. 때때로

161) 대만의 금문도에서는 용치를 궤조채(軌條砦)라고 부르고 있다.

대만 금문도에서 볼 수 있는, 공중에서의 낙하를 막기 위한 시설도 여기에 포함할 수 있는데, 한국에서는 공군력의 우세를 가정하여 거 의 만들어지지 않았다.

냉전 경관은 전쟁 과정에서 사라진 사람과 건물, 그리고 마을 등의 잔해를 포함한 폐허, 그리고 전쟁을 기억하려는 전적비나 희생자들을 기억하는 추모비, 사라진 마을 또는 잃어버린 마을에 대한 기억을 담 은 이주자들의 망향비, 조상들을 추모하는 망향단을 포함한다. 과거 의 분경이었던 38선 기념비, 수복을 기념하는 수복기념비, 전략촌에 서 주민들이 자신들의 입주초기에 겪은 고난을 기억하기 위하여 세운 개척비도 포함한다.

안보관광은 접경지역의 경관과 남북대치의 현실을 잘 관찰할 수 있 는 전망대를 만들어냈다. 이를 잘 바라볼 수 있는 장소가 선택되고, 육안으로 관찰하는 한계를 뛰어 넘기 위하여 망원경이 도입되었다.

군사용 초소에서 적을 ‘감시’하는 시선은 전망대에서 비무장지대의 철책과 대안을 ‘주시’하는 시선으로 바뀌었다. 여기에서 물리적인 대 안(對岸)은 철책을 넘어 보이는 북한의 풍경이다. 공간적으로 대안을 바라본다는 것은 시간적으로 현재를 뛰어 넘어 미래를, 분단 현실의 대안(代案)을 상상하는 것으로 이어질 수 있는데, 이것이 안보관광의 한계이자 역설이다.

안보관광과 전망대의 역사에서 의미가 있는 사건은 1984년 고성에 만들어진 통일전망대였다. 이것은 “분단의 아픔과 통일을 염원하는 마음을 되새기고자” 세워진 것으로 실향민과 관광객이 찾아와 “이산 의 상처를 달래고 통일을 기원”하는 장소로 간주되었다. 접경지역 전 망대의 역사에서 고성 통일전망대는 독특한 지위를 차지한다. 안보관 광에서 분단과 반대 개념인 ‘통일’을 처음으로 도입하였고, 금강산의 경치를 바라볼 수 있는 장소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비무장지대를 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