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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건촌의 운영과 일상

<그림 Ⅳ-6> 양지리 재건촌 영농 장면

출처: 󰡔경향신문󰡕, 1974.10.17.

가를 받아야” 했다.84) 육군규정은 “통제관행인 내규 및 예규가 자체 적으로 통합 발전되었기 때문에 실제 통제에 있어서는 군사시설보호 법에 따른 통제선보다는 육군규정에 의해 각급 부대별 통제의 필요정 도에 따른 통제선이 우선”하였다.85)

박종화‧권태준‧노융희에 의하면86) 민북지역에서는 ‘출입 통제’,

‘입주 및 출입영농에 대한 통제’, ‘소유권에 대한 통제’라는 세 가지 차원의 통제가 일상적으로 이루어졌다. 이와 같은 통제는 재건촌 주 민의 삶과 일상을 제약하고 규율하는 바탕이었다. 민간인 출입통제선 북방지역을 출입하고자 하는 사람은 관할부대장의 허가를 받아야 했 다(군사시설보호법 법률 제2388호, 1972년 12월 26일 제5조87)). 이 에 재건촌 주민들이 자신의 마을과 농토를 출입하기 위해서는 출입을 위한 허가증을 발급받아야 했다. 출입에 대한 통제 및 승인 권한은 사단장에게 있으며, 2개의 사단이 관련된 지역은 군단장이 승인을 하 였다.88)

그런데 출입증 발급절차가 무척 까다로워 주민들의 곤란을 초래하 였다. “출입을 위한 허가증 발급절차는 주민이 보안대 또는 읍면, 군 청, 사단으로 직접 찾아다녀야 하며, 출입유효기간이 짧아 자주 갱신 해야 하며, 갱신할 때마다 구비서류가 복잡하며, 그나마 구비서류가 관할부대에 따라서 상이한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출입상의 곤란은 민북지역 주민의 민원사항의 주종을 이루고 있었다.”89) 출입증 발급

84) 박종화권태준‧노융희, “민통선 북방지역 개발전략연구,” 󰡔환경논총󰡕, 제26권, 1990, p. 4.

85) 위의 글, pp. 4~6.

86) 위의 글, pp. 7~10.

87) 위의 글, p. 8에서 재인용 88) 위의 글, p. 7.

89) 위의 글.

절차 및 조건에 대한 통제가 비교적 완화된 것은 탈냉전‧민주화 시기 를 거치면서였다. “1988년 5월 1일부터 출입증 유효기간을 2년에서 10년으로 연장하고, 출입증 갱신기간을 매년 1월중에서 매년 1월부터 11월까지로 연장하며, 출입 시 신청서류를 종래 6종에서 3종으로 대 폭 간소화시켰다.”90)

또한 민북지역은 입주 및 출입영농에 대한 통제가 이루어졌는데, 이때 통제의 정도는 마을의 형성근거와 전략적인 중요도에 따라 달랐 다.91) 민북지역에서 영농을 하는 출입영농자는 복색과 출입시간이 지 정되어 있었는데, 이는 재건촌 주민에게도 예외 사항이 아니었다. 또 한 민북지역 내의 입주, 출입 및 체류, 개간, 개발, 가옥의 중개축 등 의 제반 활동에 대해서 관할 사단장의 통제를 받았다.92)

민북지역 중에서 통일촌과 재건촌 등의 전략촌이 설치된 곳의 토지 와 주택은 해당 주민들의 소유권이 인정되지 않고 거주권만이 인정되 었다.93) 정부는 초기에 재건촌을 건설하면서 “무연고지를 개간하여 농경지와 주택을 건설케 하고 주택의 사용권과 농경지의 경작권을 허 용하였다.”94) 하지만 해당 지역 토지의 원소유주들이 나타나 “정부의 지원에 의해 정착하여 개간한 토지”에 대해 소유권 반환소송 등을 제 기하면서 소유권을 주장하고 나서는 등 토지분쟁이 발생하였다.95) 이처럼, 전략촌 주민들은 출입과 생활에 있어 통제를 받았다. 마을 경계의 감시 초소를 지나 농사를 짓기 위해서 항상 출입증을 휴대해 야 했으며, 옷의 색깔과 불을 끄는 시간, 심지어는 술을 마시는 행위

90) 위의 글, p. 7.

91) 위의 글.

92) 위의 글, pp. 8~9.

93) 위의 글, p. 9.

94) 위의 글.

95) 위의 글.

등에 대해서도 관할 군부대의 통제를 받아야 했다. 또한 주민들은 위기 상황에서 군인으로 활약할 수 있도록 군사훈련을 받았으며, 대남방송 과 대북방송으로 인한 소음 피해에 시달렸다. 무엇보다 농지 개간 과정 에서 종종 지뢰피해를 입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에 대한 피해 보상이 제대로 이루어진 적은 없다. 주민들은 전략촌에 입주하면서 관련된 피 해 배상 또는 보상을 요청하지 않는다는 각서를 썼다고 기억한다.96)

<그림 Ⅳ-7>는 1980년대 민북지역의 영농출입을 위해 입주민들이 출 입증을 갱신하는 과정에서 “민북에서 일어나는 인적 물적 피해는 본인 이 책임지며 손해 배상을 청구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각서이다. 이에 더하여 주민들이 개간한 토지에 대해서도 정당한 권한 보장이 이루어지 지 않아 원래 토지소유자와의 사이에서 분쟁이 지속되었다.

<그림 Ⅳ-7> 민간인통제선 이북지역 출입허가증을 발급받기 위한 각서

출처: 철원군청 소장자료.

96) 이종훈정춘근임철순송은정‧박은김다혜, 󰡔민북마을 역사 기록물 발간사업: 대마 리 역사 이야기󰡕.

나. 토지소유 및 경작권을 둘러싼 갈등

(1) 민간인통제구역 토지소유권의 특성

전략촌이 형성된 민간인통제선 이북지역은 대부분 (특히 본 연구가 주요한 대상으로 삼고 있는 철원지역의 경우) ‘수복지역’으로서의 성격 을 갖는다. ‘수복지구(收復地區)’는 ‘본래 대한민국의 영토인데 일시 잃 었다가 되찾은 지역’이라는 의미로 지칭되었는데, 이에 따르면 북한지 역은 남한이 ‘언젠가 되찾을 지역’이라는 의미를 갖는다.97) 수복지구는 일본으로부터의 해방 이후부터 한국전쟁 발발 직후까지 약 5년에 걸쳐 서 사회주의 체제 하의 북한 통치를 받은 지역으로, 북한의 법령에 따 라 토지소유권 몰수와 분배가 이루어졌다가 다시 남한의 법질서에 의해 토지소유권이 환원 및 복구되는 커다란 변화를 겪은 지역이다.98)

<그림 Ⅳ-8> 수복지구 현황(2018년 현재 행정구역 기준)

출처: 이장형, “수복지구 토지소유권 분쟁에 관한 연구: 강원도 철원군의 사례를 중심으로,” 󰡔북한 대학원대학교 석사논문󰡕, 2018, p. 1.

97) 한모니까, 󰡔한국전쟁과 수복지구󰡕, p. 482.

98) 이장형, “수복지구 토지소유권 분쟁에 관한 연구: 강원도 철원군의 사례를 중심으로,”

󰡔북한대학원대학교 석사논문󰡕, 2018, p. 2.

이장형에 의하면, 1954년 11월 유엔군으로부터 수복지구에 대한 행 정권을 이양 받은 한국정부가 해당 지역의 토지행정을 재건하고자 하 였지만 토지 소유자 확인을 위한 기초 자료인 토지대장‧임야대장‧지 적도 등의 지적공부(地籍公簿) 및 부동산등기부가 모두 폐기되거나 소실되어 남아있는 자료가 없는 상황이었다. 한국전쟁 이전의 폐기 또는 한국전쟁 당시의 전재(戰災)로 인하여 수복지구의 지적공부와 부동산등기부가 소실된 상황에서 많은 경우 인우보증(隣友保證)에 근 거하여 소유권을 확립하게 되었다.99)

1958년 4월 11일 농림부는 ‘수복지구 농지개혁사무 처리요강’(농지 제1169호)을 제정하였다. 이장형의 연구에 따르면, 위 요강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명시하였다. 농지의 매수분배는 1957년 12월 1일 현재의 소유자 및 경작자를 상대로 실시하고, 당시의 관계자가 없을 때에는 1958년 4월 10일 현재의 관계자를 상대로 한다(통칙 제1항). 귀농선 이북 또는 군징발농지 등의 정상적 경작이 불가능한 지역에 대하여는 분배치 아니 한다(통칙 제2항). 보상과 상환은 1958년도부터 실시한 다(통칙 제3항). 이처럼 농림부의 요강은 귀농선 또는 민간인통제선 이북지역을 ‘정상적 경작이 불가능한 지역’으로 규정하여 농지 매수 와 분배가 이루어지지 않는 곳으로 보았다.

남한의 다른 지역에서는 이미 1950년에 농지개혁이 실시되었지만 수 복지구에서는 1958년에 와서야 농지개혁이 시행되었고, 그것도 민간인 통제선 이북지역을 제외한 이남지역만이 대상 지역으로 포괄되었다.

이때 농지개혁에서 제외된 토지에 대해서는 1983년 7월 1일 「수복지역 내 소유자미복구토지의 복구등록과 보존등기 등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시행될 때까지 지적공부상 소유자란이 미복구된 상태로 남아 있었

99) 위의 글, p. 69. 북한 통치하에서 부동산등기부는 자본주의의 잔재라는 이유로 폐기되 었으며,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수복지구의 토지대상 및 임야대장과 같은 지적공부도 더 이상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다.100) 이와 같은 상황은 이후 전략촌이 형성된 마을의 입주민과 해당 지역의 토지소유자 사이에서 소유권과 경작권을 둘러싼 분쟁이 발생하 고, 그 해결 또한 어려움을 겪게 되는 기본적인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2) 1970년대 전략촌 토지분쟁의 발생 경과

정부가 전략촌을 형성할 당시인 1960년대 후반의 접경지역, 즉 민 간인통제선 이북지역은 지적공부 및 부동산등기부가 폐기 또는 소실 되어 토지의 원소유자를 확인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었다.101) 이 와 동시에 민간인통제선 이북지역은 군사시설보호법 및 육군규정에 의해 민간인에 대한 통제가 이루어지는 지역으로, 민간인에 대한 출 입과 입주 및 출입영농에 대한 통제 이외에도 토지와 주택 소유권에 대한 통제가 이루어지고 있었다.102) 이처럼 전략촌이 형성된 지역은 토지소유자의 재산권 행사가 제약되는 곳으로, 정부 차원에서 당장의 토지 원소유자에 대한 확인 필요성과 당사자에 의한 재산권 확인 요 구가 현안으로 대두되지 않았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정부는 향후 발생하게 될지도 모를 분쟁을 예 방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기보다 분쟁의 씨앗을 그대로 남겨둔 채 전 략촌에 입주할 주민들에게 개척의 결과물을 공약하고 입주민들에게 경작권을 임의적으로 배분하였다. 즉, 전략촌을 형성하기 이전에 해 당지역 토지의 원소유자를 확인하고 이들에게 동의 절차를 거치거나, 개척을 진행하게 될 입주민들의 토지소유권 및 경작권을 보호할 수 있도록 하는 입법 및 행정상의 사전 조치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전략촌에서 토지소유권 분쟁이 격화된 것은 1980년대 후반이다.

100) 위의 글, pp. 69~70.

101) 위의 글.

102) 박종화권태준노융희, “민통선 북방지역 개발전략연구,” pp. 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