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idak ada hasil yang ditemukan

가. 재건촌에 대한 건설 계획

정부가 전략촌을 계획하고 이를 현실화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하게 목표하였던 것은 ‘식량증산’과 ‘군사안보’였다. 무엇보다 식량부족과 인구증가 등의 사회경제적‧인구학적 요인은 전략촌 건설을 고려하게 된 기본 배경이었다. 정부는 한국전쟁 이후 전국에 ‘버려진’ 유휴지들 을 개발하여 식량 생산을 늘리는 동시에 심각한 사회문제로 비화되기 직전에 놓인 도시의 실업자들을 구제하고자 했다. 민북지역에 대한 개간 압박으로 1960년대에 해당 지역의 영농인구가 증가되었고,78) 민통선 가까이 이루어지던 화전민에 대한 대책 마련 또한 시급한 상 황이었다.79) 이와 같은 조건에서 ‘영농중심형’ 전략촌의 설치가 고려 되었다.80)

한편, 1960년대 후반의 ‘안보위기’를 계기로 정부는 집단안보체제 를 본격적으로 가동하였다. 이를 위해 박정희 정부가 가장 첫 번째로 시도한 것은 ‘향토방위’를 위해 사문화되어있던 향토방위법을 개정하 여 이를 실제 작동시킨 것이었다. 향토방위군 편성은 사회의 구성원 들이 병역의무를 마치고 군대를 제대한 이후에도 군인의 역할을 지속 해야 함을 의미하였다. 비단 접경지대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전방’

과 ‘후방’의 구분 없이 군사적 충돌과 긴장에 대비한 지속적인 대비상 태, 즉 ‘집단안보체제’ 하에 놓이게 되면서, 전체 국민에 대한 통제와

77) 재건촌 형성 과정에 대한 심화된 내용은 강인화, “1960-70년대 접경지역 전략촌의 형 성과 냉전경관: 강원도 철원지역 ‘재건촌’을 중심으로,” 󰡔사회와 역사󰡕, 제125권 (2020) 을 참조할 것.

78) 고광도, “귀농선 북방 영농에 관한 연구,” pp. 199~200.

79) 국가기록원 관리번호 DA0889432.

80) 김인경, “귀농선북방의 영농문제고찰.”

군사화 또한 증대되어 갔다.

정부는 1960년대 후반의 ‘안보위기’ 상황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 발전과 개발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구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영농중심형 전략촌’에 대한 구상은 점차 ‘군사안보중심형 전략 촌’에 대한 구상으로 ‘발전’해갔다.

1967년도에 정부는 민간인통제선 이북지역이 위치한 ‘수복지구’를 포괄하는 ‘낙후지역(도서, 낙도 및 접적 수복지구) 종합개발 관계관회 의’81)를 개최하였다. 그리고 1967년 3월 11일 차관회의에서 ‘접적 및 수복지구개발관계관회의 및 제3차 접적 및 수복지구 종합개발대책위 원회 개최보고(안건 285호 내무부)’를 진행했다.82) 1967년 3월 18일 내무부는 ‘접적지역개발을 위한 제3차 관계관 회의’를 열었다. 이 회 의에서 내무부는 “67년도 1차분 접적지역개발비 1억1백70여만원을 주로 시설사업비(하천 도로 교량)에 배정완료하고 ‘민간인통제선북방 지역개발에 관한 임시조치법’을 제정키로 했다”83)

81) 국가기록원 관리번호 BA0084498.

82) 국가기록원 관리번호 BA0085337.

83) 󰡔경향신문󰡕, 1967.3.18. 국방부와 내무부가 전략촌 설치의 법적 근거를 마련하겠다고 언급하였던 전략촌(재건촌) 설치와 관련된 ‘민간인통제선 북방지역개발에 관한 임시조 치법’ 등은 재건촌 설치 이전 또는 설치 과정에서 사실상 제정되지 않았다.

<그림 Ⅳ-1> 접적 및 수복지구 종합개발 관련 회의

출처: 대통령비서실 (보고번호 67제163호).

1960년대의 안보위기 상황에서 정부는 ‘반공’을 대비하는 수동적인 자세에서 더 나아가 ‘승공’을 고려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1967년 도 4월부터 내무부와 강원도는 ‘접적지구종합개발5개년계획’의 하나 로 현지 군 당국의 지원을 받아 재건촌을 건설하기로 계획하였다(동 아일보, 1968.8.30.). 이에 근거하여 1968년 8월 30일 대마리와 마현 리(현 마현2리)에 재건촌이 건립되었다. 이후 내무부는 ‘재건촌설립5 개년계획’을 수립하여 약 40여개에 이르는 재건촌을 추가 건설하기로 계획하였다(경향신문, 1968.8.30).

나. 재건촌의 형성

(1) 1968년 최초의 재건촌 설립: 대마리와 마현리(현 마현2리) 정부는 1967년도에 철원의 마현리와 우미동에 재건촌을 우선적으 로 건설할 것을 계획하였다(경향신문 1967년 4월 17일). 1967년 11월 2일 내무부는 “민간인들의 출입이 금지된 민통선북방지역에 2천3백 만 원의 국고를 보조, 오는 7일 재건촌 건립을 착공”하겠다고 밝혔다 (경향신문 1967년 11월 2일). 이때 철원군 우미동에 1백50가구, 마현 리에는 50가구 등 모두 2백 가구를 건설하기로 계획하였고, 해당 지 역에서 약8천석의 곡식 수확이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다(매일경제 1967년 11월 2일).

이와 같은 정부계획에 따라 1968년 8월에 철원의 대마리와 마현리 (현 마현2리)에 최초의 전략촌이 형성되었다. 동아일보는 “대마리에 1백50동, 마현리에 50동 등 모두 2백동의 주택을 마련, 최재선씨(36, 예비역대위) 등 철원군과 연천군의 농토 없는 재향군인가족 2백 가구 (1천6명)가 입주했다”고 보도했다(동아일보, 1968.8.30.). 경향신문 보도에 따르면, 대마리는 한국전쟁 당시 “격전지였던 철의 삼각지에 우리나라서 처음으로” 세워진 “이스라엘식 재건촌”으로, 1968년 8월 30일 오후에 열린 준공식에는 “내무장관과 서종철 1군사령관을 비롯 해, 수많은 인근 주민들이 참석”하였다(경향신문 1968년 8월 30일).

“‘피의삼각지대’로 불리어지는 이곳은 북괴 측에서 빤히 보이는 휴전선

남방 1킬로미터 지점으로 유사시의 자체방위를 위해 예비군특수중대를 설립, 여자들도 부락방위에 나서도록”하였다(동아일보, 1968.8.30.).”

“이날 입주식을 가진 향군가족들은 그동안 대마리 지구에 2백정보 마 현리 지구에 1백정보의 황무지를 옥답으로 개간했는데 연간2만4천석 과 농작물을 수확할 수 있게 됐다고 보았다(경향신문 1968.8.30.).”

또한 같은 날 내무부는 ‘재건촌설립5개년계획’을 수립하여, “민간인 통제선북방의 황무지 1만5천정보에 40여개의 재건촌을 세우기로 했 다(경향신문, 1968.8.30.).”

<그림 Ⅳ-2> 생창리 재건촌 (1972~1973년)

<그림 Ⅳ-3> 생창리 재건촌 입주 초기의 연립주택(2가구 1동)

출처: 철원군청 문서고 관련문서(좌), 연구팀 촬영(2019.5.11. 우).

<그림 Ⅳ-4> 대마리의 초기 전경

출처: 󰡔경향신문󰡕, 1968.8.30.

(2) 재건촌의 마을별 입주 경위와 인구 구성

앞서 언급하였던 것처럼 전략촌에 대한 구상은 최초의 영농중심형 전략촌에서 1960년대 후반기의 안보위기를 거치면서 군사안보중심

형 전략촌으로 변모되어갔다.

1968년 8월 30일에 입주식을 마친 대마리는 대표적인 군사안보중 심형 전략촌으로 입주대상자들이 모두 병역의무를 마친 ‘제대군인’이 었다. 제대군인이 입주를 위한 기본적인 자격 조건으로 기능하면서, 이들이 재건촌 입주민들의 ‘세대’와 ‘가구’를 대표하는 것으로 간주되 었다. 이렇게 군사안보를 목적으로 정부의 계획(‘재건촌설립계획’) 하 에서 형성된 ‘군사안보중심형’ 재건촌에는 (입주일을 기준으로) 1968 년 8월 30일에 설치된 대마리(현 대마1리, 대마2리)와 마현리(현 마 현2리) 이외에 1970년 10월 30일에 설치된 생창리가 있다.

이와 달리 해당 지역에서 출입영농을 하던 이들과 그 연고자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영농중심형 재건촌’이 있다. 1971년 12월 10일에 입 주한 정연리(현 정연리, 이길리)와 1973년 3월 1일 입주한 양지리가 대표적인 영농중심형 재건촌에 해당한다.

<그림 Ⅳ-5> 생창리 재건촌 입주식 관련 기사

출처: 󰡔동아일보󰡕, 1970.10.31.

<그림 Ⅳ-6> 양지리 재건촌 영농 장면

출처: 󰡔경향신문󰡕, 1974.1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