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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체제주의자로서의 작가의식과 시각적 표상들의 매개성

최인호가 소설가에서 영화의 각본가 혹은 각색자로 활동 영역을 옮겨가게 된 것은 소설 『별들의 고향』과 영화 <별들의 고향>의 선풍적인 인기 때문이 었다. 최인호에게 소설 『별들의 고향』(예문관, 1973)과 영화 <별들의 고향>의 인기와 청년문화논쟁은 당대 문학 담론장에서 문단의 신진에 가까운 그를 상 당히 불리한 입지에 놓이게 했다. 반대로 폭발하는 대중들의 문화론적인 욕구 와 국책/산업 사이의 돌파구가 필요하던 영화계에서 최인호는 환대받게 된다.

영화 <별들의 고향>은 당시 문단에 최인호에 대한 편견을 심어준 작품이자 한편으로 최인호에게 영화인으로서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준 작품이다.

27세 때 쓴 「별들의 고향」은 온 사회를 뒤흔든 신드롬을 일으켰다.

나는 그때부터 이러한 현상이 사람들에게 곧 반대의 표적이 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왜냐하면 튀어나온 못은 정을 맞기 때문이다. 나 는 사람들에게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반체제 측으로부터는 상업주의라는 비난을 받았고, 체제 측으로부터는 퇴폐주의라는 양면의 협공을 받았다.

나는 선천적으로 비체제주의자다. 나는 문단을 떠나 영화로 갔다. 내가 10년 동안 영화에 몰두했던 것은 원래 영화를 좋아했지만 비가 올 때는 우산을 쓸 것이 아니라 비가 그칠 때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86)

내가 문단에 등단해서 제일 환멸을 느낀 것은 솔직히 이 무의미한 논쟁 을 벌이고 있는 작가들과 비평가 혹은 그 무의미한 논쟁이 보이지 않는 86) 「암투병중에 신작 낸 최인호 작가」, 『매일경제』, 2011.7.8.

생존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87)

그는 ‘선천적으로 비(非) 체제주의자’라고 술회하면서 당시 자신을 향한 반 체제 즉, 순문학 위주였던 문단 권력의 주류 양자로부터 받은 공격에 염증을 느꼈음을 고백한다. 또한 무의미한 논쟁들 속에서 생계까지 위협을 받고 있었 음을 밝히고 있다.88) 그러므로 영화 쪽으로 경사된 이유를 ‘비가 그칠 때를 기다리기 위해서’라고 말하는 것은 문단에서 자신에게 가해지는 협공을 피해

‘잠시’ 그 자리를 떠나 있겠다는 의도를 보여주는 대목으로, 현실적인 문제들 로 주 활동 영역을 넓히되 완전히 이탈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던 것이 확인된 다. 즉, 본인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소설작가로서의 의식을 그대로 견지한 채 영화 작업으로의 매체 이동을 하겠다는 의도를 드러낸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최인호에게는 문단의 이합집산보다는 구속되지 않는 의식과 작가의 자유 그 자체가 중요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당시의 기사를 보면 최인호에 대한 영화계의 요청은 보다 시급한 것 으로, 여기에는 ‘불황’89)과 ‘외화 수입 쿼터’90)라는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대

87) 최인호, 『나는 나를 기억한다-1부』, 여백, 2015, 211면.

88) 최인호는 작가들 중에서 드물게 다른 직업 없이 작품 활동 말기까지 전업 작가 로 살았는데, 작품 활동의 초기이자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인 1970년에 이미 결혼 을 했기 때문에 잡지를 가려가며 창작을 해서는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웠을 것으 로 추측된다. 신혼 초기의 궁핍상과 경제적 압박에 대해서는 「가족-신혼일기」

라는 자전적 소설에 목욕탕 2층집에 신혼집을 차렸다가 고생한 일화 등을 쓰고 있다. 이후로도 신문 연재소설과 대하소설 등 왕성한 작업량을 과시하고 특히 잡 지 『샘터』에 「가족」(1975년 9월호~2010년 2월호)이라는 이름으로 장기간 연 재를 이어간 데에는 매월 고정된 수입이 필요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러한 당시 문인들의 사정에 대해 이문열은 자신의 삼국지 번역 이유도 생계 때문이었음을 밝히면서 최인호를 언급한다. “우린 궁핍한 시대를 겪었다. 전업 작가로 살 수 없 었다. 최인호 선배 정도나 겨우 살 수 있었을까. 다들 신문연재로 연명했다. 글쓰 기 외의 부업을 가져야 할 운명이었다.” -이춘호, 「“이문열이 우리시대 과평가된 작가?…평단은 나를 과평가해 준 적이 없다”」, 『영남일보-위클리포유』, 2015.12.25.,

https://www.yeongnam.com/web/view.php?key=20151225.010340758360001 (2023.2.4.)

89) 1970년대의 영화 정책이 영화진흥공사를 중심으로 의욕적으로 추진되었던 것과 는 대조적으로 이 시기 한국영화 산업의 불황은 매우 심각했다. TV가 대중적으 로 보급되고 출판 시장이 양적으로 성장하는 등 대중문화 산업이 다양한 영역으 로 분화, 재편되었다. 이 시기 자료들을 보면 젊은 영화 인력의 유입이 매우 적어 영화 인력의 고갈 문제는 1970년대 후반 영화계의 큰 고민거리였고, 극장 또한

Ⅱ. 소설에서 각색으로의 전위와 각색의 계열화 양상

1. 비체제주의자로서의 작가의식과 시각적 표상들의 매 개성

최인호가 소설가에서 영화의 각본가 혹은 각색자로 활동 영역을 옮겨가게 된 것은 소설 『별들의 고향』과 영화 <별들의 고향>의 선풍적인 인기 때문이 었다. 최인호에게 소설 『별들의 고향』(예문관, 1973)과 영화 <별들의 고향>의 인기와 청년문화논쟁은 당대 문학 담론장에서 문단의 신진에 가까운 그를 상 당히 불리한 입지에 놓이게 했다. 반대로 폭발하는 대중들의 문화론적인 욕구 와 국책/산업 사이의 돌파구가 필요하던 영화계에서 최인호는 환대받게 된다.

영화 <별들의 고향>은 당시 문단에 최인호에 대한 편견을 심어준 작품이자 한편으로 최인호에게 영화인으로서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준 작품이다.

27세 때 쓴 「별들의 고향」은 온 사회를 뒤흔든 신드롬을 일으켰다.

나는 그때부터 이러한 현상이 사람들에게 곧 반대의 표적이 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왜냐하면 튀어나온 못은 정을 맞기 때문이다. 나 는 사람들에게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반체제 측으로부터는 상업주의라는 비난을 받았고, 체제 측으로부터는 퇴폐주의라는 양면의 협공을 받았다.

나는 선천적으로 비체제주의자다. 나는 문단을 떠나 영화로 갔다. 내가 10년 동안 영화에 몰두했던 것은 원래 영화를 좋아했지만 비가 올 때는 우산을 쓸 것이 아니라 비가 그칠 때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86)

내가 문단에 등단해서 제일 환멸을 느낀 것은 솔직히 이 무의미한 논쟁 을 벌이고 있는 작가들과 비평가 혹은 그 무의미한 논쟁이 보이지 않는 86) 「암투병중에 신작 낸 최인호 작가」, 『매일경제』, 2011.7.8.

생존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87)

그는 ‘선천적으로 비(非) 체제주의자’라고 술회하면서 당시 자신을 향한 반 체제 즉, 순문학 위주였던 문단 권력의 주류 양자로부터 받은 공격에 염증을 느꼈음을 고백한다. 또한 무의미한 논쟁들 속에서 생계까지 위협을 받고 있었 음을 밝히고 있다.88) 그러므로 영화 쪽으로 경사된 이유를 ‘비가 그칠 때를 기다리기 위해서’라고 말하는 것은 문단에서 자신에게 가해지는 협공을 피해

‘잠시’ 그 자리를 떠나 있겠다는 의도를 보여주는 대목으로, 현실적인 문제들 로 주 활동 영역을 넓히되 완전히 이탈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던 것이 확인된 다. 즉, 본인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소설작가로서의 의식을 그대로 견지한 채 영화 작업으로의 매체 이동을 하겠다는 의도를 드러낸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최인호에게는 문단의 이합집산보다는 구속되지 않는 의식과 작가의 자유 그 자체가 중요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당시의 기사를 보면 최인호에 대한 영화계의 요청은 보다 시급한 것 으로, 여기에는 ‘불황’89)과 ‘외화 수입 쿼터’90)라는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대

87) 최인호, 『나는 나를 기억한다-1부』, 여백, 2015, 211면.

88) 최인호는 작가들 중에서 드물게 다른 직업 없이 작품 활동 말기까지 전업 작가 로 살았는데, 작품 활동의 초기이자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인 1970년에 이미 결혼 을 했기 때문에 잡지를 가려가며 창작을 해서는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웠을 것으 로 추측된다. 신혼 초기의 궁핍상과 경제적 압박에 대해서는 「가족-신혼일기」

라는 자전적 소설에 목욕탕 2층집에 신혼집을 차렸다가 고생한 일화 등을 쓰고 있다. 이후로도 신문 연재소설과 대하소설 등 왕성한 작업량을 과시하고 특히 잡 지 『샘터』에 「가족」(1975년 9월호~2010년 2월호)이라는 이름으로 장기간 연 재를 이어간 데에는 매월 고정된 수입이 필요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러한 당시 문인들의 사정에 대해 이문열은 자신의 삼국지 번역 이유도 생계 때문이었음을 밝히면서 최인호를 언급한다. “우린 궁핍한 시대를 겪었다. 전업 작가로 살 수 없 었다. 최인호 선배 정도나 겨우 살 수 있었을까. 다들 신문연재로 연명했다. 글쓰 기 외의 부업을 가져야 할 운명이었다.” -이춘호, 「“이문열이 우리시대 과평가된 작가?…평단은 나를 과평가해 준 적이 없다”」, 『영남일보-위클리포유』, 2015.12.25.,

https://www.yeongnam.com/web/view.php?key=20151225.010340758360001 (2023.2.4.)

89) 1970년대의 영화 정책이 영화진흥공사를 중심으로 의욕적으로 추진되었던 것과 는 대조적으로 이 시기 한국영화 산업의 불황은 매우 심각했다. TV가 대중적으 로 보급되고 출판 시장이 양적으로 성장하는 등 대중문화 산업이 다양한 영역으 로 분화, 재편되었다. 이 시기 자료들을 보면 젊은 영화 인력의 유입이 매우 적어 영화 인력의 고갈 문제는 1970년대 후반 영화계의 큰 고민거리였고, 극장 또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