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idak ada hasil yang ditemukan

비핵화-평화체제 논의의 전개과정

가. 냉전 시기 한반도 평화협정 논의

(1) 1954년 제네바 정치회담과 유엔의 한반도 문제 논의

한국전쟁의 휴전을 가져왔던 정전협정(「한국 군사정전에 관한 협정」, 1953. 7. 27)에 의거해, 남과 북을 포함해 미국, 소련, 중국 등 19개국이 참여한 고위급 정치회담이 스위스 제네바에서 1954년 4월 26일부터 6월 15일까지 열렸다. 회담의 주요의제는 정전협정에서 명시한 대로 외국군 철수와 한반도문제의 평화적 해결방식을 마련하는 것이었다.33)

남북 양측은 제네바 정치회담에서 2개의 의제를 둘러싸고 첨예한 대 립 양상을 보였다. 우선 외국군 철수문제와 관련해서 한국과 연합군측은 침략국인 중국군의 우선 철수를 주장한 반면, 북한과 중국, 소련은 모든 외국군, 즉 유엔군과 중국군의 동시 철군을 주장했다. 한반도문제의 평 화적 해결과 관련해서는 한국과 연합군 측은 중국군의 철수 이후 유엔 감시 하의 인구비례에 의거한 총선거를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북한 측은 모든 외국군이 철수한 조건에서 남북 대표들이 동수로 참여하는 ‘전조선 위원회’를 구성하여 선거법을 마련하고, 이에 따라 사회주의 진영 측과 서방진영 측이 동수로 참여하는 중립국감시단의 감시 하의 총선거로 맞 섰다.34)

결국 남북 양측은 접점을 찾지 못한 채, 각각 자신의 입장을 천명하는 것으로 회담을 마무리했다. 한국과 연합군 측은 자신들이 제안한 방식으

33) 정전협정 제4조 60항은 관련 국가들이 “한 급 높은 정치회담을 소집하여 한반도에서 모든 외국군대의 철수와 한국문제(Korean Question)의 평화적 해결을 논의할 것”을 권고하였다. 이에 따라 한국은 한국전쟁에 연합군으로 참여한 16개국 가운데 남아프 리카공화국을 제외한 15개국과, 북한은 전쟁에 참전한 중국에 소련이 추가되어 이들 과 함께 회담에 임했다. 임수호, “한반도 평화체제 논의의 역사적 경험과 쟁점,” 󰡔한국 정치연구󰡕, 제18집 제2호 (2009), pp. 53~54.

34) 위의 글, p. 54; 정태욱, “한반도 평화협정 관련 논의의 전개과정과 시사점,” 󰡔법학연구󰡕, 제19집 제2호 (2016), pp. 250~251.

48 한반도 평화체제 구상과 대북정책

로 한반도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16개국의 공동성명을 채 택하고 이를 유엔에 회부했다.35) 이에 맞서 북한의 남일 외무상은 당장 선거를 통한 통일방식에 합의할 수 없다면, 우선 평화유지에 관한 합의라 도 봐야 한다면서 “정전의 공고화와 정전상태로부터 공고한 평화에로의 점진적 이행”을 보장하기 위한 외국군대의 철수, 남북 병력 10만 명 이하 감축, 남북 평화협정 체결 등의 6개항을 제안했다.36) 이후 북한은 1974 년 북미평화협정 체결을 주장하기 전까지 주한미군 철수를 전제로 한 남 북평화협정 체결을 주장해 나갔다.

유엔은 1954년 12월 11일 개최된 제9차 총회에서 한국과 연합군 측이 회부한 문제를 정식으로 다루었다. 유엔은 이 총회를 통해 제네바 정치회 담의 실패를 인정하고 연합군 측의 보고를 승인했다. 이후 1959년 제14 차 총회까지 동일한 내용의 결의가 반복되었다.37) 당시 유엔이 미국을 비롯한 서방진영의 통제 하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유엔 내의 사회주의 진영 회원국의 숫자도 늘 어나고, 특히 제3세계 신생 독립국들과 비동맹국들의 유엔 가입이 증가 하면서 유엔 총회에서의 역학관계가 변하기 시작했다. 더욱이 1971년 10월 25일 유엔총회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을 ‘중국’을 대표하는 국가로 인정하였다. 이에 따라 중국이 대만의 안보리 상임이사국 지위를 대체하 였다. 결국 1973년 제28차 유엔총회는 북한과 한국대표를 투표권 없이 무조건 초청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에 따라 1975년 제30차 유엔총회는 남북한이 함께 참여한 가운데 한국과 북한의 입장을 공식적으로 반영한 두 개의 결의안(유엔 결의 제3390호 A, B)을 채택하였다. 이후 유엔은 한반도문제를 더 이상 공식적으로 다루지 않았다.38)

35) 임수호, 위의 글, p. 57.

36) 남 일, “조선에서 평화조건을 보장할 데 대하여,” 󰡔조선중앙연감󰡕(평양: 조선중앙통신사, 1955), p. 350.

37) 정태욱, “한반도 평화협정 관련 논의의 전개과정과 시사점,” p. 253.

Ⅲ. 비핵화-평화체제에 대한 주요국 입장 49 제네바 정치회담의 결렬 이후 한반도 분단구조가 견고해지면서 통일 문제는 쉽게 해결될 수 없는 사안이 되었다. 이에 북한은 1960년대부터 1970년대 초까지 당장에 통일을 실현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한반도 평화 보장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남북평화협정 체결을 주장해 나갔다.39) 한편, 당시 한국은 유엔 감시 하의 인구비례에 의한 총선거를 통일방안으로 제 시하고 있었지만, 박정희 정권 등장 이후 1970년대 들어서는 통일문제 와 관련해 장기적 관점에서 접근해 나갔다. 이른바 ‘선 건설, 후 통일’론 을 강조하였다. 결국 남북한은 모두 1960년대 후반부터 통일을 장기적 과제로 인식하고, 분단구조의 평화적 관리 문제에 더 집중해 나가기 시작 한 것이다.

(2) 북한의 북미 평화협정 체결 주장

1970년대 들어 미국의 닉슨 독트린 선언과 미중 데탕트 분위기가 형 성되면서 비밀리에 남북대화가 진행되었고, 그 결과 남북한은 1972년 7월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이후 남북한은 남북조절위원회를 통해 논의를 지속해 나갔다. 그러면서 남북한은 1973년 6월 23일 각각 독자적인 평화통일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한국은 소위 ‘6·23 선언’을 통 해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해 남북 간 불간섭·불침략, 긴장완화를 위해 북한과 함께 유엔에 가입할 것 등을 제의하였다.40) 김일성은 몇 시간 후에

‘조국통일 5대 강령’을 발표했다.41) 북한은 한국의 제안, 특히 남북 유엔

38)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임수호, “한반도 평화체제 논의의 역사적 경험과 쟁점,” pp.

58~71; 정태욱, 위의 글, pp. 253~254 참조.

39) 김일성은 1955년 8월 광복절 10주년 경축사에서 남북군축, 불가침선언과 함께 주한미 군 철수를 제안했고, 1962년 10월 최고인민회의 제3기 1차 회의에서 주한미군 철수 후 상호 무력행사를 하지 않을 것을 담보하는 남북 평화협정 체결을 제안했다. 임수호, 위의 글, pp. 65~66; 이종석, “북한 비핵화와 평화협정:논의 배경·역사·전망·대응방향,”

(세종연구소 정책브리핑 2016-10, 2016.03.28.), pp. 6~7, <http://www.sejong.org /boad/bd_news/1/egoread.php?bd=3&itm=&txt=&pg=7&seq=3171> (검색일:

2017.05.01.).

40) 통일원, 󰡔남북한 군축제의 관련 자료집󰡕(서울: 통일원, 1994), p. 19.

50 한반도 평화체제 구상과 대북정책

동시가입 제안에 대해 분단의 영속화를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비난 했다. 한편, 남북조절위원회는 남북이 팽팽한 의견대립으로 진전을 보지 못하는 가운데, 1973년 8월 북한이 김대중 납치사건과 ‘6·23 선언’을 구실로 일방적으로 대화중단을 선언함으로써 종료되고 말았다.

남북대화 중단 이후 북한은 20년 가까이 주장해 온 남북 평화협정 체결 주장 대신 북미 평화협정체결 주장을 들고 나왔다. 1973년 12월 김일성 은 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에서 미국 등 외세개입으로 한국의 한반도 문제해결 능력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면서 북미 평화협정 체결 방침을 제시했다.42) 이에 따라 허담 외교부장은 1974년 3월 최고인민회의 제5 기 제3차 회의에서 북미 간 직접 평화협정 체결을 제안했으며, 최고인민 회의는 이를 공식화하는 대미 서한을 채택했다. 허담은 제안에서 북미 평화협정이 정전협정을 대체하는 것임을 분명히 밝혔다. 그리고 허담은 기존 남북 평화협정에서 북미 평화협정으로 입장을 변경한 이유로, 평화 협정에 대한 한국당국의 무성의, 한국의 군사통수권은 실질적으로 미군 이 쥐고 있다는 점, 그리고 정전협정의 서명당사자 중 현재 한반도에 군 대를 보유하고 있는 당사자는 북한과 유엔군이며 유엔군의 실체는 미군 이라는 점 등을 들었다.43)

북한은 당시 변화된 국제정세 속에서 주한미군 철수와 한반도 평화협 정 체결 문제를 미국과 직접 협상하기 위한 적극적인 외교정책을 추진해 나갔던 것이다. 북한의 북미 평화협정 체결 제안은 기존 남북 평화협정 주장이 주한미군 철수를 전제로 했던 것에 비하여 ‘선 북미 평화협정 체

41) 김일성, “민족의 분렬을 방지하고 조국을 통일하자: 체스꼬슬로벤스꼬 사회주의공화국 당 및 정부 대표단을 환영하는 평양시 군중대회에서 한 연설(1973.06.23.),” 󰡔김일성 저작집 28󰡕(평양: 조선로동당 출판사, 1984), pp. 382~395.

42) 김일성, “올해사업총화와 다음해 사업방향에 대하여: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위 원회에서 한 연설(1973.12.31.),” 󰡔김일성 저작집 28󰡕(평양: 조선로동당 출판사, 1984), pp. 622~642.

43) 임수호, “한반도 평화체제 논의의 역사적 경험과 쟁점,” pp. 66~67.

Ⅲ. 비핵화-평화체제에 대한 주요국 입장 51 결, 후 주한미군 철수’라는 구도로 전환한 것이었다.44)

이에 대응하여 미국의 키신저 국무장관은 최초로 남북한과 미국, 중국 이 참여하는 4자회담과 남과 북에 대한 미국, 일본, 소련, 중국 등 주변국 의 교차승인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북한은 이를 분단의 영속화라고 주장 하면서 수용하지 않았다.45) 한국은 북한의 북미 평화협정 체결 주장과 관련해 한국이 휴전의 불가결한 당사자이며 평화유지의 주된 당사자라 는 점을 강조하면서‘직접 관련 당사국들’의 협상을 제안하였다. 또한 평 화협정 체결을 위한 직접 관련 당사국들 간의 협상이 열리더라도 그것은 남과 북이 주도해야 한다는 원칙을 밝혔다. 이에 대해 북한은 미국, 한국 과 해결할 문제가 따로 있다면서 평화협정은 북한과 미국이, 평화협정 체결과 주한미군 철수 후 한반도 평화를 공고히 하는 문제는 미국의 간섭 을 배제한 가운데 남북이 논의할 문제라고 주장했다.46)

이에 한미 양국은 1979년 7월 정상회담 이후 공동성명을 통해 남‧북‧

미 3자회담을 제안했다. 한미 정상은 공동성명에서 주한미군의 계속 주 둔을 재확인함과 동시에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정착을 위한 어떤 조치도 남북한의 직접 대화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한반도 평화와 긴장완화 문제를 논의할 남·북·미 고위급 회담을 북한에 제안한 것이다. 이에 대해서도 북한은 분단의 영속화를 위한 것이라면서 거부하고 북미 간의 양자회담을 요구했다.47)

(3) 평화체제 논의의 다자적 접근 모색과 남북대화

1980년대 들어 미국의 레이건 정부 등장 이후 1970년대 데탕트의 분 위기가 사라지고 신냉전적 분위기가 강화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

44) 전재성, “한반도 평화체제: 남북한의 구상과 정책 비교검토,” pp. 42~43.

45) 정태욱, “한반도 평화협정 관련 논의의 전개과정과 시사점,” pp. 257~258.

46) 임수호, “한반도 평화체제 논의의 역사적 경험과 쟁점,” pp. 68~69.

47) 전재성, “한반도 평화체제: 남북한의 구상과 정책 비교검토,” p. 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