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너의 「교육의 문화」는 그의 「교육의 과정」과 함께, 그것과 대조하 여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다. 그 밖의 저작들 과 함께 특히 이 두 저작에는 교육에 관한 브루너의 견해가 집약되어 나타나 있다. 그리고 그 두 저작이 발간된 시간의 경과―36년―를 감안 해 볼 때 「교육의 문화」(1996)에는 「교육의 과정」(1960)에 제시되어 있 는 한두 가지 설명에 대한 브루너 자신의 반성적 고찰이 들어있을 것이 라는 점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 중에서 특별히 관심을 끄는 것은
「교육의 과정」에 제시되어 있는 이른바 ‘대담한 가설’을 반성적으로 고 찰하고 있는 대목이다. 그 대담한 가설은 ‘어떤 교과든지 지적으로 올바 른 형식으로 표현하면 어떤 발달단계에 있는 어떤 아동에게도 효과적으 로 가르칠 수 있다’는 것이다(Bruner, 1960/2006b: 316). 이 대담한 가설에 대하여 브루너는 「교육의 문화」에서 다음의 반성적 회고를 피력 하고 있다. 즉, ‘어떤 교과든지 지적으로 올바른 형식으로 표현하면 어 떤 발달단계에 있는 어떤 아동에게도 효과적으로 가르칠 수 있다’는 것 에 표현되어 있는 ‘“올바르다”는 말은 그 의미가 분명히 밝혀지지 않은 채 이후 계속하여 나의 뇌리를 떠나지 않는 것이었다’(Bruner, 1996:
ⅻ)는 것이다.
브루너가 「교육의 과정」에서 강조하고 있듯이 그 대담한 가설은 ‘교과 의 성격을 생각하는 데에 필요불가결한 가설’의 하나로 제시된 것이다 (Bruner, 1960/2006b: 317). 앞 절에서 설명한 지식의 구조는 그 가설 에 대한 한 가지 대답을 시사하고 있다. 즉, 교과가 교과답게 되기 위해 서는 그것이 지식의 구조를 충실히 반영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브루너에게 교과는 바로 이 지식의 구조를 구현하고 있는 것을 가리킨 다. 브루너가 지식의 구조와 대비되는 것으로 중간언어를 언급하고 있는
것은 교과가 지식의 구조의 반영이라는 점을 도외시한 채 오로지 언어 의 성찬이 되거나 생활의 문제 해결의 수단이 되는 경우가 있을 수 있 기 때문이다. 교과를 이러한 의미에서의 중간언어로 파악하는 것은 교과 의 성격을 살리지 못한 채 교과 아닌 것을 교과로 삼는 것이다. 브루너 의 그 대담한 가설이 ‘교과의 성격을 생각하는 데에 필요불가결한 가설’
인 것은 지식의 구조야말로 교과를 참으로 교과답게 성립시켜주는 것이 기 때문이다. 물론, 중간언어가 지식의 구조와 맺는 관련은 브루너의 견 해와는 상이한 관점에서 해석될 수도 있다. 중간언어는 지식의 구조와 분리불가능한 채 결합되어 있는 것으로서, 학습자가 지식의 구조를 자신 의 것으로 하는 데에 강구되는 매체의 하나―개념 등―로 재해석될 수도 있는 것이다. 4장 1절 참조.
그러나 그 가설이 ‘대담한’ 가설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교과를 지식의 구조로 파악할 때 따라 나오는 한 가지 중요한 함의를 제시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즉, 지식의 구조를 구현하고 있는 교과는 그 지식의 구조 를 왜곡함이 없이 모든 발달단계에 있는 아동들에게 가르쳐질 수 있다 는 것이다. 브루너의 표현을 빌면 ‘지식의 최전선에서 새로운 지식을 만 들어내는 학자들이 하는 것이거나 초등학교 3학년 학생이 하는 것이거 나를 막론하고 모든 지적 활동은 근본적으로 동일하다 … 이런 활동들 에서 차이는 하는 일의 “종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적 활동의 “수준”
에 있다’(p. 299). 브루너의 이러한 주장은, ‘지식을 만들어내는 학자의 활동’과 ‘초등학교 3학년 학생의 활동’ 사이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대담한 가설로 지각된다. 그러나 브루너 에 의하면 ‘수학의 자료를 어린이가 알아듣는 말로 재미있게 제시하는 데는 궁극적으로 수학 자체를 알아야 하며, 수학을 더 잘 알면 그 만큼 수학을 더 잘 가르칠 수 있다’(p. 324). 다시 브루너에 의하면 ‘현대에 와서 처음으로 학자의 가장 고귀한 역할은, 심지어 큰 연구기관이나 대 학의 학자에게 있어서도, 지식을 교육의 내용으로 전환시키는 것, 다시 말하여 지식을 아동의 학습에 도움이 되는 형태로 바꾸어 놓는 데에 있
다는 인식이 생겨났다’(Bruner. 1971/2006b: 377). 여기에서 ‘지식을 교육의 내용으로 전환한다’거나 ‘지식을 아동의 학습에 도움이 되는 형 태로 바꾸어 놓는다’는 것은 지식의 구조를 아동의 발달 단계에 따라 상이한 수준으로 번역하여 제시하는 것을 뜻한다. 지식―또는 지식의 구 조―가 학습자의 발달 단계에 따라 상이한 수준으로 번역된 것, 그것이 곧 학습자가 배워야 할 교과인 것이다. ‘지적 활동들에서 차이는 하는 일의 “종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적 활동의 “수준”에 있다’는 브루너 의 말은 그 점을 밝혀주고 있다.23) 이러한 의미에서의 지식의 구조는
‘교육내용의 완성단계에서 나타나는 교육내용의 모습’(이홍우 외, 2003:
271), 또는 ‘학자들이 하는 활동으로서의 학문과 동일한 상태로 가르쳐 지는 교과’(임병덕, 2001a: 216) 바로 그것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교육의 과정」에서 브루너는 위의 대담한 가설이 무슨 뜻인가를 밝히 는 데에는 ‘세 가지 일반적인 문제’를 고찰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언급한 바 있다. 그 세 가지 일반적인 문제는 ‘첫째는 아동의 지적 발달과정에 관한 문제요, 둘째는 학습하는 행위에 관한 문제이며, 셋째는 나선형 교 육과정에 관한 문제’이다(Bruner, 1960/2006b: 317). 이 세 가지 문제 를 자세히 고찰함으로써 그 대담한 가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좀 더 자세히 밝힐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또한 그 세 가지 일반적 문제는 지식의 구조가 학습자의 상이한 지적 수준에 따라 번역될 수 있고 또 번역되어야 한다는 점, 한 마디로 말하여, ‘지식의 구조와 그 변형의 문 제’라는 한 가지 주제로 수렴된다는 점은 강조해둘 필요가 있다(이홍우 외, 2003: 262 n. 1). 브루너의 그 대담한 가설은 지식의 구조와 그 변 형의 문제를 밝히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교육의 문화」에서 브루너가 그 대담한 가설에 대한 반성적 회고를 피력하고 있는 것은 지식의 구조와 그 변형의 문제에 무언가 설명을 보
23) 브루너가 지식의 구조의 이점의 하나로 ‘고등지식과 초등지식 사이의 간극을 좁힐 수 있다’는 것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은 대체로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Bruner, 1960/2006b: 310).
탤 필요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한 반성적 회고 끝에 「교육의 문 화」에서 보완하고 있는 것 또한 지식의 구조와 그 변형의 문제일 것이 라는 점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교육의 문화」에서 브루너가 지식의 구조와 그 변형의 문제를 어떤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는가 하는 것은 사 고의 두 가지 양상들에 관한 그의 견해에 집약적으로 나타나 있다. 브 루너는 「교육의 문화」에 앞서 발표한 한 논문―‘사고의 내러티브적 양상 과 범형적 양상’(Narrative and paradigmatic modes of thought, 1985)―에서 사고의 두 가지 양상들을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 ‘양 상’(mode)이라는 것은 ‘표현되어 나타난 것’(modification)을 의미하며, 이 점에서 ‘사고의 두 가지 양상’은 사고의 두 가지 ‘표현 양상’(mode in expression)으로 강조하여 읽어도 무방한 것이다(Bruner, 1986:
15).
한편, 브루너는 이 두 가지 사고의 양상들을 그의 「현재의 마음, 미래 의 세계」에서 ‘범형적 사고’(paradigmatic thought)와 ‘내러티브적 사 고’(narrative thought)로 대비하여 설명하고 있다. 브루너가 보기에는 사고의 범형적 양상은 곧 범형적 사고를 뜻하며 사고의 내러티브적 양 상은 곧 내러티브적 사고를 뜻한다. 그러나 ‘사고의 두 가지 양상들’―
사고의 범형적 양상과 내러티브적 양상―은 사고가 표현되어 나타난 것 을 뜻할 뿐, 사고에 두 가지 종류―범형적 사고와 내러티브적 사고―가 별도로 있다는 뜻은 아니다. 브루너의 「교육의 과정」에 나타나 있는 표 현을 빌면, 범형적 사고와 내러티브적 사고의 ‘차이는 하는 일의 “종류”
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적 활동의 “수준”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와 같이 범형적 사고와 내러티브적 사고는 동일한 하나의 사고가 수준을 달리하며 표현된 것일 뿐, 사고에 두 가지 종류의 것이 있는 것 은 아니다. 사고의 범형적 양상과 내러티브적 양상은 동일한 하나의 사 고가 표현된 것으로서, ‘사고의 범형적 양상’은 사고가 ‘범 형’(paradigm)의 양상으로 표현된 것을 가리키며, ‘사고의 내러티브적 양상’은 사고가 ‘내러티브’(narrative)의 양상으로 표현된 것을 가리킨
다. 마찬가지로 범형적 사고와 내러티브적 사고 또한 사고가 각각 범형 과 내러티브의 양상으로 표현된 것을 뜻할 뿐이다.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을 주제로 하는 기포드 강연에서 윌리암 제임스 는, 종교를 탐구하기 위해서는 가장 종교적인 사태에서 전형적으로 종교적 인 특징을 나타내는 사람을 살펴보아야 한다고 언급하고 있다. 나는 플라 톤에 대한 윌리암 제임스의 견해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내러티브를 탐구하는 일과 관련해서는 그의 충고를 따르려고 한다. 가장 위대한 소설 작품은 내러티브를 예술의 형식으로 변형시킨 것으로서, 내러티브적 표현 양상의 심층구조를 ‘순수하게’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수학과 과학에서 전형 적으로 확인되는 표현 양상이 있을 수 있다. 말하자면 수학과 과학은 범형 적 사고[사고의 범형적 양상]의 심층구조를 가장 순수하고 명백한 형태로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의 반플라톤적인 관점에도 불구하고 윌리암 제임스 가 그의 그 격률을 밝힌 의도는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 다(Bruner, 1986: 15).
브루너가 윌리암 제임스의 격률―‘종교를 탐구하기 위해서는 가장 종 교적인 사태에서 전형적으로 종교적인 특징을 나타내는 사람을 살펴보 아야 한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는 것은, 사고의 범형적 표현 양상과 내러티브적 표현 양상이 어떤 것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그것이 가장 ‘순 수한’ 형태로 드러나 있는 것―사고의 범형적 표현 양상의 경우에는 수 학과 과학, 내러티브적 표현 양상의 경우에는 소설―을 살펴보아야 한다 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이다. 브루너에 의하면 수학과 과학은 범형적 표 현 양상의 ‘심층구조’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이며 소설은 내러티브적 표현 양상의 ‘심층구조’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범형적 표현 양 상과 내러티브적 표현 양상이 어떤 것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수학자와 과학자의 ‘연구결과물’―더 정확히는, 수학자와 과학자의 지적 활동―을 분석해보거나 ‘작가의 문학작품’―더 정확히는, 작가가 작품을 만드는 창조적 활동―을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표현 양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