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프랑스의 대표적인 인문주의 학자로 알려져 있는 페트루스 라 무스13)(Peterus Ramus, 1515-1572)는 당대의 명성과 후대에 끼친 교 육적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큰 관심을 받지 못하는 인물 중의 하 나이다. 라무스는 16세기의 위대한 사상가요 교육개혁가로서, 스스로 소 크라테스의 삶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만큼 그와 유사한 학문적 삶을 살았다. 다만, 라무스 또한 그 당시의 인문주의 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소 크라테스의 삶을 모방하되 그 온전한 모습을 그대로 따르지 않는 면모 를 보였다. 그 당시 라무스는 중세의 고도로 형식화된 학문적 유산들, 특히 학문적 주축으로서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그것의 무비판적인 형식적 모방에 대항하여 ‘자유로운 사고의 권리’를 주장하였다. 소크라 테스가 자신의 철학적⋅학문적 신념에 의해 죽음을 선택했던 것처럼 라 무스 또한 중세의 고전적 권위와 타협하느니 차라리 목숨을 버릴 정도 로 교육 개혁의 선도적 역할을 자임하였다. 다만, 라무스의 삶은 중세의 형식적 학문체계를 탈피하여 형식에 덜 구애받으면서도 기술적 체계를 갖춘 실용적 학문체계를 정립하는 데에 일생을 헌신한 삶이었다고 볼 수 있다.
특기할 만한 라무스의 학문적 시도는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1) 중세 이래 유지되어온 수사학과 논리학의 내용상의 엄격한 분류, 2) 분류된 개별 학문들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일반적 탐구방법론 정립, 3)
13) 그의 원래 이름은 피에르 드 라 라메(Pierre de La Ramée)이나 라틴어 필명 인 라무스로 더 잘 알려져 있으며 영미권에서는 Peter Ramus로 부른다. 이 하 이 글에서는 라무스로 통일한다.
교육적 전달사태를 염두에 둔 교육방법의 체계화가 그것이다. 먼저, 라 무스는 개별 학문 간의 연구 대상은 엄격히 구분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다. 라무스의 이 주장은 근대 학문체계의 분화에 이론적 근거를 마련한 바 있다. 물론, 서구 역사에서 학문의 분류는 플라톤을 출발점으로 하여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체계화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우리가 사용 하는 교과목이나 전문 영역의 명칭 가운데 많은 부분이 아리스토텔레스 에 의해 체계화된 것이지만, 그것은 인간이 추구하는 모든 종류의 지식 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라무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백 과사전식 지식의 분류에서 탈피하여 전달을 염두에 둔 ‘교과의 범형’을 만들고자 하였다(Ong, 1982: 131).
라무스에 의하면, 마치 개별 공간을 가지고 있는 집들이 다른 집들과 분리되어 있듯이 특정학문은 여타의 다른 모든 학문과 별도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어야 한다. 라무스는 모든 건물들 사이의 간격과 건물 벽의 길이를 명확히 규정하여 건물의 경계를 분명히 하는 아테네의 법―‘솔론 의 법’―을 근거로 하여 각 학문을 분류하였다(Ong, 1983: 280). 그 중 에서도 라무스는 중세 이래로 유지되어 온 3학과―문법⋅수사학⋅논리 학―의 수사학과 논리학의 영역을 유형에 따라 명확히 분류하였다. 라무 스에 의하면, 수사학이 정확한 언변의 기술이라면, 논리학은 정확한 입 론의 기술이다(Boyd, 1952/2008: 282). 이러한 라무스의 견해에 따라 수사학과 논리학의 연구 대상은 엄격히 분류된다.
라무스가 활동하던 그 당시 수사학의 연구대상―아리스토텔레스의 「수 사학」을 기원으로 하여 정립된 수사학의 연구대상―은 ‘착상’(inventio),
‘배열’(dispositio), ‘표현’(elocutio), ‘기억’(memoria), ‘발 성’(pronuntiatio) 등의 다섯 가지로 간주되었다. ‘착상’은 논거들의 직 관적 포착을 가능하게 하는 기술로서 논거들을 찾아내는 기술이며, ‘배 열’은 연역과 귀납을 통해 찾아낸 논거들을 조직하는 기술이다. 한편,
‘표현’은 발견한 논증이나 논거들의 골격에 살을 붙이고 보다 명료하고 생생하게 언어로 구체화하는 기술이며, ‘기억’은 말 그대로 이를 효과적
인 방법으로 저장해 두는 기술이다. 마지막으로 ‘발성’은 변론가가 자신 의 기억 속의 담론을 청중들에게 전달할 때 마치 배우와도 같은 역할을 수행하는 데에 필요한 기술이다. 수사학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 에 의하면, 이상의 다섯 가지 기술은 별도로 발휘되는 것이 아니라 한 꺼번에 발휘된다.
라무스는 그의 저서 「변증법」에서 아리스토텔레스로 대표되는 전통적 수사학의 연구 대상이던 ‘착상’과 ‘배열’을 논리학의 연구대상에 포함시 키고 ‘표현’와 ‘발성’만을 수사학의 연구대상으로 남겨놓는다. 라무스가 보기에, 그 당시 전통적 수사학은 순수한 사고의 영역―착상과 배열―과 언어의 영역―표현과 발성―의 차이를 충분히 인정하지 않은 채, 두 가 지 영역 모두를 수사학의 연구 대상에 포함시켰다. 라무스는 경험적 사 실을 근거로 하여 순수한 사고의 영역과 언어의 영역을 구분하고, 그 중 언어의 영역에 해당하는 것만을 수사학의 연구 대상으로 보았다 (Ramus, 1549/1986). 라무스에 의하면, 착상과 배열은 순수한 사고의 영역에 해당하며, 표현과 발성은 언어의 영역에 해당한다. 라무스가 보 기에, 착상과 배열은 말하기나 글쓰기의 도움 없이도 내면적으로 실천될 수 있는 순수한 사고의 영역에 포함되는 것이다. 다만, 아리스토텔레스 의 수사학의 탐구 대상 중 ‘기억’은 이론적 영역에 속하는 기술이기보다 는 학문의 실천에 활용될 수 있는 기술에 해당된다는 점에서 문법⋅수 사학⋅논리학의 3학과에 공통적으로 요구되는 것으로 간주된다.
다음으로, 라무스는 분리된 개별 학문들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일반 적 탐구방법론을 정립하였다. 이러한 라무스의 시도는 근대적 의미의 탐 구방법론 연구에 기여한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라무스는 그 일반적 탐구방법론으로 논리학을 제안하였으며, 이 논리학이 곧 그의 변증법이 다. 다만, 앞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의에서 이미 언급된 바 있 는 변증법은 희랍시대에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의미로 사 용되어 왔음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라무스의 변증법은 실재를 그 내용 으로 하는 플라톤의 변증법과도, 논증체계를 그 내용으로 하는 아리스토
텔레스의 변증법과도 다른 것이다. 라무스의 변증법은 모든 지식에 적용 가능한 것으로서, 논증을 발견하는 방법―지식을 탐구하는 방법―과 그 발견된 논증을 배열하는 방법―지식을 체계적으로 조직하는 방법―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라무스의 변증법은 차라리 방법론 으로 간주될 법한 것이다.
라무스는 그 당시의 논리학―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을 개선하여 많은 사람들이 쉽게 활용하고 폭 넓게 적용할 수 있는 실용적인 논리학 으로서의 변증법을 기획하였다. 라무스가 제안하고 있는 변증법은 과학 에 적용되는 방법론과 의견제시에 적용되는 방법론을 구분하여 제시하 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에 대한 한 가지 대안적 견해로 제시된 것이 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과학에 적용되는 방법론은 ‘분석적 추론’
또는 ‘명백한 추론’을 그 특징으로 하며, 의견제시에 사용되는 방법론은
‘변증적 추론’ 또는 ‘논리적 추론’을 그 특징으로 한다. 그리고 이 경우 의 분석적 추론은 더 이상 이견이 있을 수 없는 것, 즉 필연적인 것에 서 출발하여 지식과 관련되는 필연적 사실들의 증명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며, 변증적 추론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의견에서 출발하여 증 명이 적용될 필요가 없는 개연적 사실들의 논증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다. 간단히 말하여, 전자―분석적 추론―는 과학을 위한 논리라고 할 수 있으며, 후자―변증적 추론―는 의견을 위한 논리라고 할 수 있다. 아리 스토텔레스의 경우 과학과 의견에 적용되는 논리는 엄연히 구분되는 것 이며, 이 점에서 각각의 영역에서 사물들을 인지하는 방법은 상이할 수 밖에 없다.
한편, 라무스는, 아리스토텔레스와는 달리, 과학의 영역에서든 의견의 영역에서든 사실들을 인지하는 방법은 동일한 것일 수밖에 없으며, 그리 하여 모든 유형의 지식―즉, 과학적 지식과 개연적 지식―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일반적 탐구방법론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과학을 위한 논리와 의견을 위한 논리, 이 두 가지를
구분하여 설정하려고 하였다. 위대한 스승의 명예는 존중해야 되겠지만 이 점에 관해서 만큼은 아리스토텔레스는 옳지 못하다. 사실들에는 한편으로 필연적인 것, 과학적인 것, 다른 한편으로 우연적인 것, 토론의 여지가 있 는 것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 사실을 바라보는 시각은 공통된 불변의 것 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실들을 인지하는 기술, 즉 변증법[또는 논리학]
은 모든 사물들을 파악하는 하나의 동일한 이론에 해당한다(Ramus, 1555/2004: 189 재인용).
이상의 논의에서 알 수 있듯이, 라무스는, 변증법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구분하고 있는 두 가지 추론 방식―분석적 추론과 변증적 추론―을 하나 로 통합하여 모든 지식에 적용 가능한 일반적 탐구방법론에 해당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즉, 엄격하게 분리된 모든 개별 학문에는 변증법이라 는 일반적 탐구방법론이 적용될 수 있으며, 그 탐구방법론에 의해 각 학문이 다루는 지식의 이해는 극대화될 수 있다는 것이 라무스의 견해 이다. 라무스에 의하면, 수사학에서 취급되는 표현과 발성의 기법―간단 히 말하여 글쓰기와 말하기 기법―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변증법적 탐구 방법론에 의거하여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 의견의 영역―개연적 지식―에 적용되던 변증법이 이제 라무스에 이르러 과학적 지식에까지 적용되는 탐구방법론으로 확립되는 셈이다. 이론―과학적 지식―과 의견
―개연적 지식―을 구분하여 그 각각의 탐구방법론으로 분석적 추론과 변증적 추론을 제시하는 아리스토텔레스와는 달리, 라무스는 두 지식 모 두에 변증법이 적용될 수 있다고 봄으로써, 변증법을 모든 종류의 지식 의 탐구에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의 하나로 정립하였다.
마지막으로, 라무스는 교육적 전달사태를 염두에 둔 교육방법을 체계 화하였다. 평생을 교육개혁에 힘쓴 라무스에게 있어서 지식을 효과적으 로 전달하기 위한 교육방법에 관한 고민은 가장 근원적인 것에 해당한 다. 라무스는 자신이 수행하는 ‘연구의 목적은 학생들이 교양과목―3학
―을 이수하는 데에 가시와 걸림돌을 제거함으로써, 교양과목을 좀 더 쉽게 수행하고 취급할 수 있도록 평평하고 곧은 길을 만드는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