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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적 전달 사태에서 다양한 교수매체들이 끊임없이 도입되고 있음 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언어는 교과를 전달하는 데에 필요불가결한 도구 가 되어왔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교과를 가르치고 배우는 일이 교육의 핵심적 과제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언어가 교육적 전달 사태에서 응 당 차지하고 있어야 할 위치를 타당하게 규명하는 일은 교육이론 또는 교육과정이론에서 핵심적 관심사가 될 수밖에 없다. 본 논문에서 밝히고 자 한 내러티브이론은 언어이론이기에 앞서 교육이론의 하나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내러티브이론은 교육적 전달 사태에서 강구되는 언어―교과의 언어―의 타당한 성격을 규명해 준다는 데에 그 이론적 의의가 있다.

내러티브이론이 교육학적 맥락에 본격적으로 적용되어 나타난 것은 브루너의 교육과정이론에 힘입은 바 크다. 브루너는 이른바 ‘전기 이론 에서 후기 이론으로의 전환의 과정’에서 내러티브이론을 도입하고 있다.

그 전환은 브루너가 그의 학문적 생애상 전기에서 강조된 지식의 구조 를 후기에 이르러 문화로 대체한 것을 가리킨다. 브루너는 교과의 성격 에 미흡한 것을 가리켜 ‘중간언어’로 일컬으며 그 대안으로 지식의 구조 를 제안한 바 있다. 적어도 브루너의 관점에 충실하자면, 지식의 구조는 교과의 성격을 그릇되게 파악하는 중간언어를 대신하는 또 하나의 ‘교육 내용’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듀이 이래로 관심의 대상이 되어 온 교 과의 논리와 심리 문제에 비추어 보았을 때, 브루너가 그릇된 것으로 비판하고 있는 중간언어는 새롭게 재조명될 수 있다. 중간언어는 명백히 정보의 형태로 제시되는 것이지만 그것 이외에, 그것과 별도로 교육내용 이 있는 것은 아니다. 브루너는 종래의 교육이 교과의 성격을 중간언어

―문제해결에 필요한 정보의 덩어리―로 파악함으로써 교과의 성격을 그 릇된 방향으로 이끌고 간다는 점을 비판하느라, 정작 그 중간언어가 가 지고 있는 가능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이 사실을

정당히 존중한다면 중간언어는 애당초 지식의 구조를 획득하는 것에 아 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지식의 구조를 획득 하기 위해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렇게 볼 때 지 식의 구조는 개념―중간언어―등을 매체로 삼아 획득되는 교과의 내면화 를 뜻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후기에 이르러 브루너는, 지식의 구조는 개인이 당면하는 사회 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에 개인이 당면하는 사회적 문제의 해결은 지식의 구조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것과 는 성격을 달리하는 문화에 의해서 모색될 수 있다고 본다. 브루너의 이 관점은 그의 「교육의 문화」에 집약적으로 나타나 있는 것으로서,

「교육의 과정」에 나타나 있는 전기 이론의 지식의 구조 이론과 대조를 이루는 것으로 파악된다. 그러나 브루너의 이 전환이 곧장 이전의 지식 의 구조 이론을 대체하는 것으로 귀결되지는 않는다. 문화는 개념을 매 개로 하여 지식의 구조를 획득하는 그 일을 뒷받침해 주는 또 하나의 경로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의 이유에서 브루너가 그의 후기 이론에서 문화이론과 함께 내러티브이론을 제시하고 있는 것 또한 전기 이론에서 규명하고자 한 지식의 구조의 변형의 문제를 밝히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다. 브루너의 내러티브이론을 잉태하고 있는 한 가지 주요한 구분―즉, 사고의 범형적 표현 양상과 내러티브적 표현 양상―에 관한 브루너의 설명에는 지식의 구조와 그 변형의 문제에 관한 그의 견해가 잘 나타나 있다. 사고의 범 형적 표현 양상과 내러티브적 표현 양상은 동일한 하나의 사고가 표현 된 것으로서, 사고의 범형적 양상은 사고가 범형의 양상으로 표현된 것 을 가리키며, 사고의 내러티브적 양상은 사고가 내러티브의 양상으로 표 현된 것을 가리킨다. 이 두 가지 표현 양상들 중에서 브루너가 더 관심 을 기울이고 있는 것은 내러티브적 표현 양상이다. 브루너는 바로 그 내러티브적 표현 양상이 사고를 학습자 자신의 것으로 하는 데에 보다 더 적합한 것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있다. 브루너가 보기에는, 범형적

표현 양상은 지식을 그 성격에 왜곡됨이 없이 표현되어야 한다는 점을 곧이곧대로 강조한 나머지, 그 지식이 학습자의 인지적 노력과 이해의 수준에 맞게 표현되어야 한다는 점을 충분히 살리지 못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내러티브적 양상은 지식을 그 전달사태의 성격에 맞게 재구성하 여 표현하는 것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사실상 내러티브적 표현 양상은 브루너가 지식의 구조의 의미의 한 부분으로 종종 강조하고 있는 직관적 사고를 획득하는 방안의 하나로 이해될 수 있다. 내러티브적 표현 양상은 분석적 사고―범형적 표현 양 상―보다는 더 직접적으로 직관적 사고를 획득가능하게 하는 한 가지 방안으로 파악되는 것이다. 브루너에게 직관적 사고는 특정 분야의 학자 들에게나 가능한 사고라는 점, 지식의 구조는 직관적 사고에 중요한 기 초를 이룬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브루너에게 내러티브는 지식의 구조 를 내면화하는 데에 용이한 언어적 표현 방식일 뿐, 지식의 구조를 대 체하는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리고 브루너가 그릇된 교육내용으로 간 주한 중간언어를, 지식의 구조를 내면화하는 매체인 개념으로 재해석할 경우, 내러티브는 그 개념을 표현하는 특별한 언어를 뜻한다고 볼 수 있다. 다만 내러티브가 지식의 구조를 내면화하는 데에 용이한 언어라고 하여 그 내러티브가 범형으로서의 개념을 전달하는 언어와 별도로 성립 하는 또 다른 언어라고는 보기 어렵다.

그러나 또 한편, 브루너는 특정한 문화가 반영되어 있는 신화, 역사, 민담, 상투적 이야기 등을 알고 느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신화, 역사, 민담 등을 내러티브로 간주하여 이를 교육내용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는 견해를 내비치고 있다. 학교는 이러한 의미에서의 내러티브―이 야기로 전해지는 것―를 당연한 것으로 간주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개 발하고 권장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상 브루너가 학교에서 개발해 주어야 할 내러티브의 사례로 들고 있는 것은 신화, 역사, 민담, 상투적 이야기 등은 물론이요, 법규, 관례 등의 상징 등도 그것에 포함된다. 브 루너가 언급하고 있는 ‘문화’는 이 내러티브에 의해 전수된다. 그리고

그 문화는 제도들로 구성되어 있다. 브루너에 의하면 신화, 민담, 상투 적 이야기, 법규, 관례 등의 문화―또는 제도―는 논증적⋅논리적⋅정합 적 명제로서가 아니라, 내러티브를 빌어 전수된다. 이 경우의 내러티브 는 보통의 의미에서의 이야기를 뜻하며, 이러한 이야기가 개인에게 문 화적 정체성을 형성해 준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내러티브를 학교교육에서 개발할 필요가 있다는 브루너 의 견해는 이야기로 전해지는 문화와 제도를 학교교육에서 고려하여야 한다는 점을 밝힌 것으로 이해된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브루너의 문화 이론은 지식의 구조 이론을 대체하거나 폐기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그러 나 지식의 구조는 중간언어―개념―을 매체로 하여 획득되는 것이라는 점에서 볼 때 지식의 구조는 문화나 제도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라 고 보아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의 지식의 구조는, 성리학의 용어로 말 하여 표현 이전의 심성으로 이해할 때 문화는 개념과 함께 그 미발의 심성을 함양하는 경로로 해석될 수 있다. 전기 이론의 지식의 구조는 개념을 매개로 하여 마음을 형성하는 것을 설명하였다면 후기 이론의 문화 이론은 제도―또는 그것이 전달되는 이야기―를 매개로 하여 마음 을 형성하는 것을 설명한다는 것이다. ‘교육이론은 마음의 이론과 문화 의 이론의 교차점에 위치해 있다’(Bruner, 1996: 13)는 브루너의 진술 은 그러한 관점에서 파악될 수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브루너의 내러티브 또한 지식의 구조를 대체하는 문화를 전달하는 언어의 하나로 제시된 것이지만, 그 내러티브적 언어는 지식의 구조를 지적 수준에 맞게 변형하여 제시하는 데에 차용될 수 있는 언어 의 하나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내러티브는 문화를 전달하는 데에 적 합한 언어이기 이전에 지식의 구조를 내면화하는 데에 용이한 언어로 파악되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내러티브가 정서를 표현하기에 적 절한 언어라는 사실 때문이다. 내러티브 이면에 들어있는 그 정서는 언 어의 심층적 원천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모든 언어가 갖추고 있어야 할, 언어의 성립조건이라고 볼 수 있다.

언어는 표층의 구조 이면에 들어있는 심층적 원천으로 인하여 성립한 다는 점은 플라톤 이래로 꾸준히 강조된 바 있다. 플라톤에 의하면 진 정한 언어는 에로스를 심층적 원천으로 하여 성립한다. 에로스는 실재를 향한 인간 영혼의 열망 또는 열정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인간이 가장 가치 있는 것에 관해 열정을 품고 그것에 이끌려 그것을 추구하는 삶을 살도록 해준다. 인간은 이 에로스에 힘입어 감각적 현상 이면의 실재에 관심을 기울이고 그것을 이해하려는 끊임없는 시도를 하게 된다. 인간의 영혼은 그 안에 있는 에로스에 힘입어 비로소 실재를 대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플라톤이 「파이드로스」에서 에로스와 수사학의 관련을 확 립하고자 한 것은 에로스를 심층적 원천으로 하는 언어만이 인간의 영 혼을 실재로 상승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아리스토텔레스는 진정한 수사학의 조건으로 로고스, 에토스, 파토스를 들고 있다. 다만, 에토스와 파토스―심리적⋅주관적 논거들에 의한 논증―는 로고스―논리적⋅객관적 논거들에 의한 논증―가 전제될 때 수사학의 조건으로 기능할 수 있다.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에 서 알 수 있는 것은, 수사학의 이상적 조건은 논증의 논리적⋅객관적 논거들인 로고스라는 점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로고스는 실재 에의 대면을 가능하게 하는 언어의 심층적 조건이 아니라, 개인이나 집 단의 의견에 합치되는 것―설득―을 가능하게 하는 언어적 논증 체계이 다. 바로 이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언어의 심층적 조건―에로스―보 다는 언어의 표층적 기반에 관심을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점에 관한 한, 르네상스 때의 라무스의 수사학 이론 또한 마찬가지 이다. 라무스는 언어의 심층적 원천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언어의 표현 기법에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이다. 라무스는 변증법과 함께 수사학을 교 과의 하나로 정립하여 인간의 사고를 언어로 정확히 표현하는 기법을 규명하고자 하였다. 라무스는 쓸모없는 규칙과 기계적 절차를 강조하는 중세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논리적⋅객관적 논거들에 의한 논증 체계―에서 벗어나 인간의 삶과 그 삶에서 획득된 지식을 미려하고 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