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3. ‘문화의 다이아몬드’ 상에서 예술의 생산
문화의 다이아몬드 모형에서 왼편은 예술의 생산에 관련된다. 여기서 는 예술가가 어떻게 작품을 창작하며 사회와 어떤 관계를 형성하는지에 관심을 둔다. 단토(Danto)는 예술의 본질을 예술 내부에서 찾는 것을 거 부하며 대신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것, 예술이론의 분위기와 예술의 역사에 대한 지식”, 즉 예술계를 통해 예술의 본질이 규정된다고 했다.78) 더 나아가 베커(Howard S. Becker)는 예술은 개인에 의해 갑자기 완성 된 산물이 아니라 예술계(Art Worlds)에서 이루어지는 집단적인 노력의 과정이라고 강조하며 창작에 참여한 사람들과 그들을 둘러싼 관계, 자원 과 제도, 이들이 공유하는 관행으로 확장해 이해하려고 한다.79)
판소리는 일반적으로 소리꾼 한 명의 예술로만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판소리 역시 다양한 인력과의 관계에서 예술 활동이 이루어진다. 본 장 에서는 예술집단 내 소리꾼의 사회적 위상 변화에 초점을 맞추고 특히 전통판소리 위주로 형성된 예술계에서 창작판소리꾼이 등장하게 된 동인
78) 한준 외 3인,「한국 근대적 음악계의 형성과 분화」,『문화와사회』10, 한국문화 사회학회, 2011, 258면.에서 재인용
79) 예술계는 예술 작품을 생산하기 위해 협력적으로 활동하는 조직된 사람들의 네 트워크로 예술은 혼자서 작업하는 창조적인 천재 예술가에 의해 만들어지기 보 다는 여러 사람들의 노력이 모여 탄생된다(Howards S. Becker, Art Worlds.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82.).
과 창작 작업의 특징을 살펴보겠다. 또한 창작판소리 생산에 중대한 영 향을 미치는 외부 요인으로서 국가의 지원 역할을 집중적으로 살피겠다.
상업적 성향이 적은 순수 공연예술 분야에서 정부의 정책적 지원은 창작 작업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무형문화재 제도를 포함하여 판 소리에 대한 국가의 지원 구조의 변화를 분석했다. 동시에 정부의 정책 적 주도 하에서 명창 혹은 유망한 소리꾼이 선별되는 과정을 게이트키핑 의 관점에서 비교하여 살피겠다.
1.1. 소리꾼의 신분 변동과 창작방식의 변화 1.1.1. 상이한 계보의 예술가 등장
예술사회학자들은 직업인으로서 예술가를 주목한다. 주로 예술가들의 유형을 분류하고 이들의 공통된 특징을 발굴해 내려 한다. 하지만 다른 직업들에 비해 예술가들의 경력은 개인차가 크기 때문에 일반적인 통계 를 내기는 어렵다.80)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학자들은 예술가들에 대한 의견이 일치하는 부분이 있는데 예술가로 성공하기는 굉장히 어렵고 또 한 금전적으로 충분한 보상을 받지 못한다는 점이다.
예술가들은 소수의 슈퍼스타와 그 이외의 평범한 예술가들(rank and file)로 양분되는 ‘승자독식’의 형태를 띠고 있다.81) 대부분의 예술 장르는 일부 스타 예술가가 특정한 양식과 유행을 이끌어 가고, 나머지 예술가 들은 대중들에게 인정받지 못한 채 스스로의 성취감을 만족하며 활동할 뿐이다. 게다가 고된 연습과 훈련 과정을 거치고도 응당한 보상을 받지 못하는 예술가들이 무수히 많은데 관객들 혹은 비평가 앞에서 실력이 발 휘되지 못하면 고행의 과정이 무의미해져 버리기도 한다. 이러한 관점에 서 멩거(P-M. Menger)는 예술가들의 경력이 위험하다고 지적한다.82)
80) Andrew Abbott & Alexandra Hrycak, Measuring Resemblance in Sequence Data: An Optimal Matching Analysis of Musicians’ Career, American Journal of Sociology, 96(2), 1990, p. 144~85.
81) Sherwin Rosen, The Economics of Superstars, American Economic Review, 75, 1981, p. 845~858.
판소리 역시 ‘명창’으로 불리는 탁월한 기량을 지닌 소수의 소리꾼들 이 전통판소리의 흐름을 주도해왔다. 판소리는 고수 이외에 어떠한 예술 가도 등장하지 않아 마치 판소리 예술사가 곧 명창의 역사인 것처럼 유 명 소리꾼들에게 조명이 집중되었다. 그러나 창작판소리를 주도해 온 예 술가들은 ‘명창’ 일변도로 전개되지 않았다. 오히려 성공한 주류 명창들 대부분은 창작 활동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렇다면 현대 창작판소리들 은 누가 이끌며 지속하고 있는가. 판소리의 흐름을 주도한 예술가의 변 화 양상을 전통판소리와 창작판소리로 대비하여 조망하고 특히 창작판소 리가 상이한 계보의 예술가에 의해 주도되는 과정을 주목해서 살펴보고 자 한다.
17세기 판소리 발생 당시 소리꾼은 가면을 쓰고 춤과 줄타기 등 각종 기예를 펼친 연행자들과 함께 ‘광대(廣大)’로 불렸다. 소리꾼은 다른 기예 종목에서 뛰어난 자질을 보인 광대들보다는 비교적 좋은 대접을 받았지 만 세습무 혹은 재인 집단 출신의 천민 신분에 속했기 때문에 그들을 바 라보는 사회적 시선은 존경이라기보다는 냉대에 가까웠다.83) 그러나 19 세기 초 판소리 창자의 사회적 위상이 크게 반등하면서 이른바 ‘명창의 시기’로 접어든다. 천민과 중인층 중심으로 애호되던 판소리의 인기가 평 민과 양반들, 심지어 왕실까지 확산되었고 일부 판소리 창자의 신분이 명창으로 상승했다.84) 19세기는 염계달, 모흥갑 등 전기 8명창 시대와 박유전, 이날치 등 후기 8명창 시대로 양분되고, 이들은 뛰어난 예술적 기교와 표현의 탁월성을 인정받아 판소리의 황금시대를 이어나갔다. 20 세기 초반에는 이화중선, 김초향, 박록주, 김여란, 김소희 등 여류 창자들 이 주도하는 5명창 시대가 펼쳐졌는데 근대 사회에 접어들어 직업 선택 이 자유로워짐에 따라 남성보다는 여성이 판소리에 전념하는 경우가 늘
82) Pierre-Michel Menger, Artistic Labor Market and Careers, Annual Review of Sociology, 25, 1999, p. 541~574.
83) 최동현(1994), 앞의 책, 55∼69면.
84) 사회적으로 공인된 명창은 1864년 대원군이 판소리 경창대회를 열어 장원한 이 에게 명창을 부여하고 이를 전주통인청대사습(全州通引廳大私習)으로 승격시킨 것에서 유래한다(김기형,「비가비 광대의 존재 양상과 판소리사적 의의」,『한국 민속학』33, 한국민속학회, 2001, 46면.).
었던 탓이다.85) 이처럼 조선시대의 명창이라는 호칭은 직업이라기보다는 탁월한 성음 실력을 보증하는 의미로 인식되어 뛰어난 판소리 예술가들 을 구분하는 절대적인 기준으로 작용하게 된다.86)
19세기부터 20세기 초반까지 명창 위주의 전통판소리계가 고착되는 와중에 그 틈 사이로 1940〜50년대 창작판소리가 서서히 파생되기 시작 한다. 창작판소리는 태동된 이래 각 시기별로 다른 신분의 예술가들에 의해 역동적으로 변해왔고 이들은 ‘명창’과 ‘비가비’라는 서로 다른 계보 를 형성하며 창작판소리의 단계적 흐름을 이끌었다. 시대별로 창작판소 리를 주도한 예술가들의 계보를 분류하면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그림 4. 창작판소리 예술가의 계보와 변천 과정87)
85) 김종철은 여류 명창의 등장을 사회적 상황의 변화로 설명하며 여류 예술가의 우 세 현상이 20세기 후반까지 지속된다고 설명한다(김종철,「판소리의 공연 방식 과 사회·문화적 위상」,『한국의 판소리문화』, 박이정, 2003, 100〜101면.).
86)「판소리 명창」,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87) 창작판소리의 발전과정에서 각 시기 구분은 김연(2007)의 앞 논문을 참조한다.
해방을 전후해 등장한 창작판소리는 전통판소리의 소리꾼 계보를 계 승하는 ‘명창 계보’로부터 시작된다. 일부 명창이 창작의 선도자 역할을 자처했는데 이들은 탁월한 성음과 기교 등의 전문 역량을 바탕으로 창작 판소리의 포문을 열었다. 전통판소리 영역에서 명성을 구축한 노장 예술 가들이 판소리의 대중화라는 예술적 과업과 사명감을 실현하기 위해 새 로운 판소리의 영역을 모색한 것이다.
창작판소리에 본격적으로 첫발을 내딛은 예술가는 명창 박동실이다.
평소 짧은 단가를 주로 작곡해왔던 그는 1930년대 후반 명창들이 일선에 서 물러난 다음 해방의 시기에 맞춰 <이준열사가>, <안중근열사가>,
<윤봉길열사가>, <류관순 열사가> 등의 열사가를 창작해 직접 불렀다.
열사가는 일본의 지배 하에서 억압을 이겨낸 열사들의 활약상을 그리며 미래의 새로운 꿈과 희망을 노래하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그러나 박동 실은 한국전쟁 직후 월북으로 활동을 이어가지 못한 채 분단 의 상황마 저 겹쳐 예술계에서 많은 조명을 받지는 못했다.88)
1950년대부터 1960년대 전반까지는 정치적 풍랑으로 인해 한 편의 창 작판소리도 발표되지 않았다. 이때는 4·19혁명과 5·16 쿠데타 등의 사회 혼란 속에서 예술계 전체가 침체에 빠졌던 시기였다. 뿐만 아니라 대중 들로부터 높은 인기를 얻었던 창극과 국극으로 인해 유명 판소리 예술가 들이 이탈해 나간 시기다. 판소리계는 예술가와 관객을 모두 잃어버리면 서 쇠락의 시기에 빠지게 되었다.
약 20여 년간 주춤했던 창작판소리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은 소리 꾼은 명창 박동진이었다. 그는 1968년부터 1972년까지 전통 레퍼토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부르는 ‘완창’을 도입해 그간 도막소리로 부르던 판소리 관행을 뒤집고 새로운 연행양식을 선보였다. 전통판소리 영역에서 실력 을 다져온 그는 창작판소리에도 열의를 보여 1969년 당시로서는 낯선 소 재를 판소리로 창작한 <예수가>를, 1973년에는 성웅의 일대기를 그린
<충무공 이순신>을 발표했다.
한편 이 시기 조상현, 안향년, 성창순, 안숙선 등 일부 전통판소리 명
88) 김기형(2002), 앞의 논문, 7〜2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