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 자치 조직에 의해 유지되어 온 농촌 마을의 공동체적 전통은 박정 희 시대에 이르러 새마을운동의 기반이 되었다. 새마을운동이 시작되기 이 전부터 마을 주민들의 삶을 규율해 온 주민 자치 조직은 새마을운동을 추진 하는 데에도 가동되었고, 따라서 마을공동체 안에서 새마을 사업은 주민 자 치 조직의 주도로 이뤄졌다(하재훈 2014, 251; 차철욱 2016, 191-193). 마 을공동체 속 주민 자치 조직은 새마을운동 시기에도 자치와 협동을 통해 새 마을운동이 추진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중에서도 마을에 따라 대동계, 대동회, 주민총회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던 마을 회의는 마을공동체 안에서 새마을운동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를 이해함에 있어 다른 어떤 조직보다도 중요한 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마 을 회의는 주민 대다수의 참여를 바탕으로 새마을운동의 추진 방향을 결정 하는 최고 의결기구이면서 새마을운동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주민 들 사이의 갈등과 이해관계의 충돌을 조정하는 장이었기 때문이다.
마을 내 새마을 사업의 구체적 내용을 결정할 최종적 권한은 농민들에게 주어져 있었기 때문에 마을공동체에서 새마을운동을 둘러싼 실질적 의사결 정은 마을 회의에서 이뤄졌다. 새마을 사업 계획은 마을 회의에서 수립되었 고, 새마을 사업의 성과는 마을 회의에 보고되어 회의에 참석한 주민들의 평가를 거쳐야 했다(김혜진 2007, 69; 육성으로 듣는 경제기적 편찬위원회 2015, 195).
새마을운동 시기 마을 회의에서는 국가로부터 내려온 지원금으로 어떠한 사업을 추진할 것인지, 사업의 구체적 일정 및 절차는 어떻게 할 것인지, 국가 지원금 이외에 부담해야 하는 비용은 어떠한 원칙에 따라 누가 부담할 것인지 등이 논의되었다. 이장, 새마을지도자 등 마을 지도자는 마을 회의 에 출석해서 새마을 사업 계획 전반과 더불어 사업을 집행되는 과정에서 예 상되는 문제점, 행정 기관의 지시사항 등을 상세하게 보고해야 했다. 새마 을 사업이 실제로 마을에 경제적 효용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판단되었을 때 에는 마을 회의의 안건이 사업의 구체적 추진 방향, 특히 개별 농가가 각각 얼마만큼의 비용을 부담할 것인지를 둘러싼 문제로 순조롭게 이어졌지만 새 마을 사업의 기대 효과에 대해 생각이 서로 다른 마을 구성원 간에 논쟁이 오가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마을 회의의 최종 결정은 대부분 만장일치에 의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마을 회의에서는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토론을 통해 주민들 사이의 이견을 조정해 나가는 과정을 거쳤고, 토론에서는 다른 마을 의 새마을 사업 현황 등 매우 구체적이고 자세한 논거가 수반되었다. 다수 결에 따른 의사결정은 설득과 조정을 통한 해결이 실패한 이후 최종 수단으 로 활용되었지만 마을 회의에서 실제로 다수결 원칙이 동원된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이러한 조정 및 의결 과정은 국가의 간섭 없이 주민들에 의해 자 율적으로 진행되었다(골드스미스 1981, 436; 리드 1981, 279-280; 유병용
외 2001, 51; 오유석 2003, 478; 황병주 2004, 498; 최인이 2014, 85; 육 성으로 듣는 경제기적 편찬위원회 2015, 164-169).
또한 마을 회의에서는 주민들을 대상으로 새마을 사업에 필요한 자본과 노동력을 징발하기 위한 설득 작업이 이뤄졌다. 국가가 새마을 사업에 드는 비용 중 일부를 분담했지만 마을공동체는 국가가 지원한 것보다 훨씬 큰 규 모의 재원을 자체적으로 조달해야 했다. 통계에 따라 다소간 차이가 있지만 1970년대 새마을운동 전체 투자액 중 주민이 부담한 재원의 비율은 70%를 웃돌았고, 특히 새마을운동 초기에는 총 투자액 중에서 주민들의 기여분이 차지하는 비중이 절대적이었다. 특히 노동력의 경우 전적으로 마을공동체가 부담해야 하는 몫이었다. 따라서 마을 안에서 새마을운동이 성공적으로 추 진되기 위해서는 주민들의 협력과 희생이 필수적으로 요구되었다(박진도ㆍ 한도현 1999, 51-52; 김대영 2004, 187-188; 김혜진 2007, 74; 소진광 2007, 105-106).
하지만 사업의 성격상 일부 주민의 재산권을 침해하는 것이 불가피할 때 에는 새마을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주민들 사이에서 높은 확률로 불만 과 갈등이 발생했다. 특히 새마을 사업의 사업지가 특정 농민의 사유지와 겹치는 경우에는 해당 농민이 경제적 손실을 감수하지 않고서는 결코 사업 이 추진될 수 없었다. 따라서 마을공동체가 새마을 사업을 통해 집합적 이 익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새마을운동에 소극적인 구성원을 대상으로 기나긴 회유와 설득 과정을 거쳐야 했다(오유석 2003, 480; 황병주 2004, 499; 권 기돈 2016, 79).
마을 회의라는 토의와 설득의 장이 있었기 때문에 새마을운동 시기 농민 들은 국가를 비롯한 외부 권위체의 개입 없이도 마을 내부의 갈등을 비교적 성공적으로 조정하면서 새마을 사업에 드는 자원을 자체적으로 징발할 수 있었다. 새마을 사업의 직접적 이해당사자인 주민들은 마을 회의에서 끊임 없는 설득, 협상, 조정 과정을 거쳐 합의를 이끌어내고자 했다. 예컨대 마을 도로를 확장하면서 희생되는 사유지가 발생할 때 마을 차원에서 지주에게 약간의 금전적 보상을 제공하거나 또는 지주가 토지를 희사하는 대신 다른 주민들이 도로 확장에 필요한 노동력을 제공하는 방안이 제시되었다. 만약
농민들이 중앙정부의 힘을 빌려 토지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면 한정적인 국 가 예산으로는 지주들에게 일일이 토지 보상금을 지급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점에서 마을 회의의 조정 기능은 어쩌면 국가의 공권 력보다도 큰 위력을 지니는 것이었다(박진환 1981, 139-140).
요컨대 마을공동체의 새마을운동은 처음부터 끝까지 마을 회의를 거치지 않고서는 이뤄질 수 없는 것이었다는 점에서 마을공동체 안에서 마을 회의 는 명실상부한 새마을운동의 심장부였다. 마을공동체의 주민들은 마을 회의 를 통해 스스로의 힘으로 새마을운동의 청사진을 그리고 새마을 사업에 필 요한 자원을 동원하며 구성원들 사이의 갈등을 조정해 나갔다. 한편 새마을 운동 시기 마을회관의 건립은 마을 회의의 제도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마 을회관이 건립됨에 따라 날씨와 무관하게 마을 회의가 정례적으로 열릴 수 있는 장소가 안정적으로 확보되었기 때문이다. 마을회관이 건립되기 시작한 것을 기점으로 새마을운동이 급속히 점화되었다는 사실은 마을공동체가 새 마을운동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마을 회의가 갖는 중요성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박진환 1981, 142; 육성으로 듣는 경제기적 편찬위원회 2015, 195).
하지만 모든 마을에서 마을 회의가 주기적으로 열린 것은 아니었다. 새마 을운동 시기 한국 농촌에는 민주적 토론 문화가 존재하지 않는 전근대적인 마을 또한 무수히 존재했고, 이들 마을에서 마을 회의가 마을 내 의결 및 조정 기구로 운영되면서 마을 주민들의 행위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기대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웠다(유병용 외 2001, 51-52; 오유석 2003, 478-479). 또한 개별 농가로서는 마을 회의에 참석하는 데 시간 비 용을 비롯한 각종 손실이 발생했을 뿐만 아니라 마을 회의의 결정이 개인적 이해관계와 상충하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에 마을 회의를 통한 집단적 의사 결정이 개인의 합리성 추구를 완전히 구속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유병 용 외 2001, 64-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