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논의한 바와 같이 오스트롬은 제도의 다양성을 강조한다. 제도의 구 체적 내용과 성격은 공동체를 둘러싼 제반 조건, 그리고 공동체 구성원들의 의사소통 역량, 신뢰, 의식 수준, 권력 관계 등에 따라 제도마다 매우 다양 하다. 또한 제도는 공동체 외부로부터 부여된 자율성의 범위나 중앙정부의 정책으로부터도 영향을 받는다(E. Ostrom 2010, 53-54). 물론 공동체 안팎 의 상황 및 환경의 변화에 따라 제도는 계속해서 달라질 수 있다. 결국 오
스트롬이 강조하는 바는 현실에서 작동하는 제도는 시간과 공간에 따라 매 우 다양한 양태를 띠며 무궁무진하게 변화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스트롬이 말하는 제도의 다양성은 단순히 현실 속 제도들이 서 로 다른 양태를 띠는 데에서 비롯되는 것 이상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오 스트롬이 제시하는 제도 개념에 따르면 제도란 한 가지 규칙으로만 구성된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규칙이 서로 결합한 ‘체계’ 또는 ‘총체’로서의 제도 이다. 즉 특정 규칙들이 제각기 다양한 방식으로 조합된 결과물이 제도이 다. 오스트롬(E. Ostrom 2010, 43-44)은 성공적으로 작동하는 제도는 공적 제도와 사적 제도 중 어느 한 가지 제도에만 전적으로 의존하기보다는 공적 제도와 사적 제도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가운데 상호작용하는 양상을 띤다 고 설명한다. 시장은 국가의 보호 아래서만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 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알 수 있듯 현실 속 공적 제도와 사적 제도는 서로 떨어 져 존재하기보다는 상호의존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오스트롬에 게 중요한 것은 다른 제도들보다 절대적 또는 상대적 우월성을 지니는 특정 제도가 무엇인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제도들이 어떻게 조합되어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제도는 한 가지 제도로만 이뤄져 있는 것이라기 보다는 여러 하위 제도가 서로 결합하여 작동하는 총체이며 문제의 성격, 그리고 문제를 둘러싸고 있는 상황에 따라 제도의 조합이 매우 다양하게 이 뤄지기 때문이다. 즉 다양한 규칙들이 한데 결합하여 제도라는 체계를 이루 는 과정에서 규칙들 사이에 다양하게 조합이 이뤄질 가능성이 열려 있기 때 문에 제도는 다양성을 띠게 되는 것이다.
또한 오스트롬은 제도는 한 층위에서만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층위 에 걸쳐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오스트롬(E. Ostrom 2010, 192)에 따르면 오랫동안 유지되어 온 제도는 일반적으로 복수의 층위로 조직되어 있으며, 각각의 층위마다 적용되는 규칙들로 구성된 일련의 규칙 체계로서 작동한 다. 즉 오스트롬은 제도의 핵심적 속성으로 다양성과 더불어 다중심성을 강 조하며, 오스트롬의 제도 연구에서 다양성과 다중심성 두 개념은 서로 밀접 하게 연관되어 있다.
제도의 다중심성이 중요한 이유는 일반적으로 현실에서 제도가 다루는
문제는 여러 층위에 걸쳐 있고 제도를 둘러싼 행위자들의 활동 또한 여러 층위를 넘나들기 때문이다(E. Ostrom 1992, 58-60; 2010, 106). 따라서 제도가 효율적으로 작동하면서 견고하게 유지되기 위해서는 어느 층위에서 도 제도의 허점이 발생해서는 안 되므로 각각의 층위마다 적용되는 규칙들 이 필요하다(E. Ostrom 2010, 192).
오스트롬이 말하는 제도의 다중심성은 오스트롬의 제도 개념을 집대성한 결과물인 ‘제도 분석 및 발전 분석틀(Institutional Analysis and Development framework, 이하 IAD 분석틀)’에서 잘 드러난다. IAD 분석 틀은 주요 행위자의 물리적 조건, 공동체의 속성, 작동 규칙 등 제도 안팎 의 변수들을 망라하면서 행위자가 처한 상황, 행위자의 전략적 선택, 행위 자들 사이의 상호작용 결과가 서로 어떻게 연계되는지를 보여주는 일종의 지도와 같다. IAD 분석틀은 어떠한 제도를 분석함에 있어서도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 개념 체계라는 점에서 제도 분석에서 문법의 역할을 하며, 제 도와 행위자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변화를 거듭해 나가는 양상을 분석 할 수 있게 해주는 도구가 된다(E. Ostrom 2005; 안도경 2013, 105-106).
출처: E. Ostrom(2005), 15.
[그림 2-1] IAD 분석틀
오스트롬(E. Ostrom 1992, 44-48; 2005; 2010, 105-113)은 IAD 분석 틀에서 제도를 실행 규칙(operational rules), 집합 선택 규칙 (collective-choice rules), 헌법 선택 규칙(constitutional-choice rules) 세 층위로 크게 구분한다. 규칙의 층위는 규칙이 적용되는 대상의 범위, 규칙 과 관련된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 요건 등과 관련이 있다. 이러한
중층적 규칙 체계 속에서 심층 수준 규칙은 표층 수준 규칙을 제ㆍ개정할 권한의 소재 및 절차를 규정한다. 또한 어떤 층위에서의 규칙 변화는 심층 수준 규칙은 고정된 상태에서 진행된다고 가정하지만 반대로 심층 수준 규 칙의 변화는 표층 수준 규칙에 영향을 준다는 점에서 심층 수준 규칙은 표 층 수준 규칙의 제약 조건이 된다. 따라서 표층 수준 규칙보다 심층 수준 규칙을 바꾸기가 더욱 어렵고 규칙 변경에 수반되는 시간과 비용의 규모 또 한 심층 수준 규칙일수록 커진다.
요컨대 제도는 여러 층위에서 작동하는 규칙들의 조합으로 구성된 체계 이기 때문에 다중심성을 띠며, 각각의 층위마다 서로 다른 규칙들이 다양하 게 조합될 수 있기 때문에 제도의 다중심성은 곧 다양성으로 이어진다. 이 처럼 오스트롬은 제도의 다양성을 매우 엄밀하면서도 풍부한 개념으로 정의 하고 있고, 제도의 다양성은 제도의 다중심성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오 스트롬에 따르면 제도는 다양성과 다중심성을 띠기 때문에 제도 분석을 위 해서는 제도와 행위자를 둘러싸고 있는 구체적인 상황과 맥락, 그리고 서로 다른 층위에 존재하는 제도 및 행위자 사이의 관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 는 총체적 시각이 요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