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다. 농촌새마을운동과는 달리 도시새마을운동은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는 데 실패했지만 새마을운동 분위기를 농촌에서 도시로까지 확산하고자 했던 박정희 정권의 시도는 예기치 않게 도시에서 농촌으로 자본이 유입되는 계 기가 되었다. 도시에 거주하는 출향민들이 농촌에서 한창 진행되는 새마을 운동에 자극을 받고 고향 발전을 위해 기꺼이 고향 마을로 후원금을 내려보 냈기 때문이다. 출향 인사들의 후원금이 새마을 사업의 종잣돈이 되었다는 언급은 여러 마을의 새마을운동 사례에서 확인된다(김영미 2009, 198-199;
차철욱 2016, 192). 이처럼 국가로부터의 물질적 지원은 정부의 공식 문서 에 기록된 것 이상의 큰 규모로 광범하게 이뤄진 것이었으며 마을 주민들만 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한 사업도 되게끔 만들었다는 점에서 새마을운동의 성 공 요인 중에서도 큰 비중을 차지한다.
339; 이영훈 2016, 478-479).
박정희는 국가로부터 무상으로 제공된 시멘트로 전국의 농촌 마을에서 일제히 진행된 1차 새마을 가꾸기 운동의 성과를 보고받고 난 뒤 이전 기 (期)의 새마을 사업에서 우수한 성과를 거둔 마을에만 물자와 보조금을 추 가로 제공하고 새마을 사업의 성과가 부진했던 마을에는 지원을 중단할 것 을 지시했다. 1973년부터는 주민들이 마을 내 리더십을 중심으로 추진해 나 간 공동 사업의 성과에 따라 전국의 마을을 기초마을, 자조마을, 자립마을 세 단계로 분류하고 마을 개발 실적이 우수한 마을에 지원을 집중했다(유병 용 외 2001, 69; 소진광 2007, 102-104; 권기돈 2016, 74-75; 이영훈 2016, 479).18)
내무부와 공화당이 지원이 끊긴 마을에서 정권에 대한 앙심을 품음으로 인해 선별적 지원 정책이 행여 선거에서 불리한 결과를 초래하지 않을까 우 려하여 선별적 지원 방침을 철회할 것을 박정희에게 건의했으나 ‘신상필벌 (信賞必罰)’이라는 박정희의 신념은 매우 완고했다. 박정희는 정치적 유불리 를 고려하지 말고 새마을 사업의 성과가 미진한 마을에는 과감히 지원을 끊 고 주민들이 새마을 사업에 열심히 참여하는 가운데 새마을 사업에서 구체 적 성과를 거둔 마을에만 추가적인 지원을 제공할 것을 행정 당국에 강력히 주문했다(박진도ㆍ한도현 1999, 47; 육성으로 듣는 경제기적 편찬위원회 2015, 71-72). 선별적 지원 방침에 대한 박정희의 강경한 태도는 농민에게
“공짜 돈”만 준다고 해서 새마을운동이 저절로 성공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 에 “농민에게 거저 주기만 해선 안 된다”는 철학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육
18) 1973년 당시 34,665개 마을 중 기초마을은 18,415개, 자조마을은 13,943개로 대다수 마을은 기초마을 또는 자조마을로 분류되었고 자립마을은 2,307개에 불과 했다(내무부 1980, 22; 이영훈 2016, 479에서 재인용). 이처럼 극히 적은 수의 마 을만이 자립마을로 분류되었던 것은 마을공동체가 자립마을로 선정되어 대통령으로 부터 하사금을 받기 위해서는 생활환경 개선과 소득증대라는 새마을운동의 양대 목표와 관련된 일정한 기준을 달성해야 했기 때문이다. 자립마을로 선정되기 위해 마을 차원에서는 마을 공동 시설을 짓고 마을 기금을 확충해야 했고, 개별 가구 차 원에서는 지붕 및 담장 개선을 완료하고 호당 소득 또한 일정 금액을 넘겨야 했다 (이영훈 2016, 479-480).
성으로 듣는 경제기적 편찬위원회 2015, 44).
새마을운동 시기 국가는 모든 마을에 충분한 지원을 제공하기 어려웠던 당시 국가 예산상의 제약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특정 마을에 지원을 집중 하는 전략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선별적 지원 정책을 통해 국가 로부터의 지원을 당연히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마을과의 경쟁에서 이 겨 스스로 얻어내야 하는 보상으로 만듦으로써 국가는 농민들이 새마을운동 에 지속적으로 참여하게끔 유도할 수 있었다. 실제로 1971년 새마을 가꾸기 사업의 성과를 기준으로 1972년에는 전국의 33,000여 마을 중 16,600개 마 을에만 시멘트 500부대와 철근 1톤씩을 추가로 지급하고 나머지 마을에는 지원을 중단하자 이전 해의 새마을 사업 실적이 좋지 못해 지원 대상에서 제외된 6,000여 마을이 새마을 사업에 자진해서 참가했다(이영훈 2016, 479). 이처럼 국가가 마을을 몇 개의 범주로 분류하고 선별적 지원 정책을 선언함과 동시에 지원이 중단된 마을 중 상당수가 뒤늦게나마 새마을 사업 에 뛰어든 것은 국가의 선별적 지원 방침이 농민의 자발적 참여와 투자를 이끌어내는 마중물로써 매우 효과적이었음을 보여준다.
만약 국가의 지원이 일회적인 것이었다면 국가로부터 지원받은 물자와 자본이 소진되고 난 뒤 마을공동체는 사회적 딜레마 상황으로 다시 돌아가 게 되었을 것이다. 국가로부터 더 이상의 지원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새마을 사업을 계속해서 진행해 나가기 위해서는 결국 마을공동체 속 개인 들에게 새마을 사업에 필요한 자원을 징발해야 하는데, 앞서 여러 차례 설 명한 바와 같이 새마을 사업이라는 마을 단위의 집합행동 상황에서 합리적 개인이라면 자신은 새마을 사업에 참여하지 않는 가운데 다른 사람들의 노 력으로 달성된 새마을 사업으로부터 이익만을 취하는 무임승차를 선택할 수 있을뿐더러 다른 주민들도 새마을 사업에 참여하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섣불리 새마을 사업에 참여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자칫 자신만 ‘순진한 바보’
가 될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할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이 새마을 사업에서 가시적 성과를 거둔 마을에 한해 추가적인 지원을 제공하는 선별적 지원 방침을 택함에 따라 마을공동체로서 는 이전 기의 새마을 사업 성과에 따라 다음 기에도 국가로부터 지원을 받
을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었고, 국가로부터 계속해서 지원을 받기 위해 서는 새마을 사업에서 우수한 성과를 거두어야 했다. 즉 박정희 정권의 선 별적 지원 정책으로 인해 농민들은 국가로부터 지원을 받아내기 위해 새마 을 사업에 지속적으로 참여해서 성과를 내야 할 이유를 갖게 되었다. 또한 마을공동체가 선별적 지원 대상 마을로 선정되기 위해서는 다른 마을보다 새마을 사업에서 상대적으로 우수한 실적을 거둬야 했기 때문에 농민들은 경쟁적으로 새마을 사업에 매달렸고, 다른 마을과의 경쟁 심리는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새마을 사업에 투자를 늘려 나가는 데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 다.
한편 박정희 정권은 새마을 사업에 농민들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마을 공동체를 기본 단위로 농촌 전역에 물질적 지원을 제공하면서도 국가의 지 원이 마을 공동 사업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헛되게 쓰이는 것을 방지하기 위 해 지원의 구체적 방식에 있어서도 전략적 사고를 가동했다. 우선 물자의 용처를 마을 공동 사업으로 엄격하게 제한함으로써 일부 주민이 개인적 목 적으로 물자를 이용하지 못하게끔 방지했다. 만약 주민들이 새마을 사업에 쓰도록 내려보낸 물자를 마을 공동 사업이 아닌 다른 용처에 사용했을 경우 그 마을에는 추후 지원을 중단했다. 또한 현물에 비해 다른 용도로 쉽게 유 용할 수 있는 현금보다는 시멘트, 철근 등 새마을 사업과 직접적으로 관련 이 있는 현물 위주로 지원을 제공함으로써 국가로부터 지원받은 자원을 마 을 주민들이 제각기 나눠 가져 개인적으로 소진해 버리거나 마을 공동 사업 이외의 목적으로 유용하기 어렵게 만들었다(김영미 2012; 권기돈 2016).
이처럼 새마을운동 시기 국가는 마을공동체의 새마을 사업에 물자와 자 본을 지원함에 있어 지원의 방식 하나하나를 세심히 고려함으로써 한정된 예산에서 나오는 지원의 효과를 극대화하고자 했다. 그 결과 박정희 정권이 선별적 지원 방침을 처음으로 천명한 1973년에는 전국의 30,000여 마을 중 에서 자립마을의 비율이 10%도 채 되지 않았던 반면에 박정희가 사망한 1979년에는 전국 34,871개 마을 중 33,893개 마을이 자립마을로 선정되어 전체 마을 중 자립마을의 비율이 97%까지 증가했다. 이처럼 새마을운동이 사실상 완료되는 시점에 이르러서는 거의 모든 마을이 자립마을의 반열에
올라선 데에서 알 수 있듯(이영훈 2016, 481) 박정희 정권의 선별적ㆍ조건 부적 지원 정책은 새마을운동이 거대한 불길이 되어 농촌 전역으로 빠르게 퍼져 나갈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