는 느낌을 받았을 정도로 새마을 교육에 깊이 감화되었기 때문에 새마을지 도자를 맡아 오랫동안 봉직할 수 있었다고 술회한다(김수경ㆍ최은봉 2005;
한도현 2010, 278-279; 윤충로 2014, 218-220).
력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이었다. 또한 새마을지도자에게 책정된 보수를 노 리고 새마을지도자로 나선 주민이 정작 마을 일은 등한시하는 경우가 발생 했기 때문에 새마을지도자는 보수를 받지 않는 직책으로 규정되었고, 설령 국가가 새마을지도자에게 하사금을 수여하더라도 그것은 새마을지도자 개인 에 대한 포상금이 아니라 마을의 새마을 사업 자금 명목으로 주어졌다(박진 도ㆍ한도현 1999, 70; 육성으로 듣는 경제기적 편찬위원회 2015, 205).
새마을지도자에 대한 보상은 금전적 지원 대신 주로 새마을 훈ㆍ포장 등 비물질적 형태로 제공되었다(윤충로 2014, 222-227; 육성으로 듣는 경제기 적 편찬위원회 2015). 하지만 새마을지도자 활동으로부터 물질적 보상을 기 대하기보다는 자기 생활을 챙길 겨를도 없이 마을 일에 발 벗고 나섰던 새 마을지도자들에게는 사회로부터의 인정, 그리고 자신의 손으로 자기 마을을 변화시켰다는 성취감이 새마을 사업의 최일선에서 온갖 고생을 참아낼 수 있게끔 하는 가장 큰 원동력이었기 때문에(윤충로 2014; 육성으로 듣는 경 제기적 편찬위원회 2015, 95) 비물질적ㆍ심리적 보상의 효과는 물질적 보상 보다도 강력했다.
무엇보다도 새마을지도자들은 보잘것없는 일개 농민에 불과했던 자신이 새마을운동을 계기로 국가에 의해 유의미한 존재로 호명되었다는 사실에 깊 은 감명을 받았다. 박정희는 수많은 상징과 수사를 통해 새마을지도자를 중 요한 존재로 부각하면서 새마을지도자들에게 높은 위상과 권위를 부여하는 한편 농촌의 새마을 사업 현장을 수시로 찾아 새마을지도자들을 위로하고 매년 전국 새마을 지도자 대회를 열어 새마을지도자들의 노고를 치하했다.
또한 박정희는 월간 경제동향 보고에 새마을운동의 성과가 우수했던 마을의 새마을지도자가 직접 출석해서 새마을운동 성공 사례를 소개하도록 했는데, 새마을지도자들은 대통령을 비롯한 고위 관료들 앞에서 자기 마을의 새마을 운동 성공 사례를 발표하고 대통령으로부터 찬사와 격려를 받은 경험을 생 생히 기억하고 있었다(박진도ㆍ한도현 1999, 64-65; 김영미 2009, 363-367; 윤충로 2014, 222-226; 육성으로 듣는 경제기적 편찬위원회 2015). “훈장, 상장으로 새마을운동을 했다”는 한 새마을지도자의 회상에서 잘 드러나듯(윤충로 2014, 226) 새마을지도자로서의 위상과 사회로부터의
인정은 새마을지도자들이 육체적ㆍ정신적 고통을 잊고 새마을 사업에 신명 나게 매진할 수 있도록 만드는 “아편”과 같은 것이었다(김보현 2014, 307-309).
이처럼 새마을운동 시기 국가는 농민을 새마을지도자로 개조하기 위해 갖가지 교육 수단과 전방위적 유인 체계를 동원했다. 국가가 새마을지도자 를 관리하는 방식은 특정 영역에 국한되지 않고 새마을지도자의 삶 전체를 포괄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박정희 정권이 새마을운동의 성공과 실패 를 가르는 결정적 요인으로서 새마을지도자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새마을운 동 추진 과정에서 새마을지도자 만들기 작업에 총력을 기울였다는 점을 간 접적으로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