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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인문학에서의 절대와 상대

II. 절대와 상대의 사유와 타이포그래피

3) 서양 인문학에서의 절대와 상대

서양은 철학(Philosphia)의 어원이 고대 그리스로부터 온 것을 보더라도 인문 학적 사유에서 서양 철학을 빠뜨릴 수 없다. 물론 철학이라는 말이 서양에서부 터 시작되었다 하여 모든 철학적 사유가 서양에서 시작되었고 또한 앞서갔다 말 할 수는 없지만 서양은 철학을 비롯하여 종교학 역사학 언어학 고고학 문학

예술 등의 분야에서 동양과 마찬가지로 눈부시게 발전해 왔음을 묵과할 순 없 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문헌과 선행연구를 통하여, 서양철학 중 그리스 철학 의 소크라테스와, 실존주의의 마틴부버, 그리고 그리스도교 종교학자인 폴 틸리 히의 사상에 나타난 절대와 상대에 대해 고찰해보고자 한다.

(1) 소크라테스의 無知의 知

소크라테스의 사상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그리스 철학 뿐만 아니라 서 양철학 전반의 토대가 되었다. 나아가 소크라테스는 흔히 예수 석가 공자와 함 께 세계 4대 성인으로 불리 울 만큼 그의 영향력은 높게 평가되고 있다. 본 연 구에서는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사상 중 가장 유명한 ‘무지의 지(無知의 知)’에 대해 문헌과 선행연구를 통해 고찰해보고 그의 사상에서 절대와 상대는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칼 야스퍼스(1981)96)는 소크라테스의 세 가지 본질(本質)을 ①진리는 끊임없이 질문하는 사람에게 그 자신을 나타내며, 우리가 알지 못함을 인정하면 절망적인 무(無)가 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본질적인 지식을 얻을 수 있음, ②희랍의 신과 폴리스의 신에 대한 믿음, ③자신의 신령(神靈, Daimonion)에 대한 믿음이라 하 였다. 이처럼 소크라테스에 있어서 참 지식에 대한 갈망과 진리탐구는 그의 본 질 중 제일 처음 언급될 정도로 중요한 부분이다. 소크라테스는 진리를 탐구함 에 있어서 ‘질문’을 중요시 하였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서 교육이란 질문과 답 변을 통한 ‘대화’였다. 이는 누가 누구에게 일방적인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아 96) 칼 야스퍼스. 소크라테스, 불타, 공자, 예수. 황필호 역. 서울: 종로서적, 1981. p.10.

닌, 서로간의 대화를 통해 질문하며 그 안에서 진리를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소 크라테스의 대화는 상대가 스스로 진리를 깨달을 수 있도록 돕는 매체이다. 따 라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산파라 비유하여 “신은 내게 산파의 역할을 맡겼을 뿐, 내 자신의 출산을 허락하지 않았다”97) 하였다. 즉 자신은 대화를 통해 진리 로 가는 길을 인도할 뿐, 진리를 대신 찾아 줄 수는 없다고 하였다. 이는 소크 라테스의 대화는 불교 간화선(看話禪)의 화두(話頭)와 같은 역할임을 말해주고 있다. 즉 그의 대화는 진리의 직접적 전달이 아니며, 진리에 대한 깨달음을 얻 을 수 있도록 하는 진리에 대한 우회적 표현이다. 따라서 소크라테스에 있어서 의 대화는 중요한 수단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진리를 전달할 수는 없으므로 진리 를 깨달음이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에 있어서 대화의 기능은 마치 불교의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98)’과 같다.

[그림 12] 진리의 깨달음과 소크라테스의 대화

너무도 유명한 “너 자신을 알라(γνῶθι σεαυτόν)”라는 말은 소크라테스가 처 음 한 말은 아니라, 델포이의 아폴로 신전에 새겨져 있던 신탁(神託)이었다. 이 문구는 소크라테스에 의해 유명해진 말이기는 하나, 이와 비슷한 문구는 다른 곳에서도 발견된다. 기독교 신약성서 외경 중 하나인 도마복음과 논어에도 다음 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97) Ibid., p.11.

98) 因指見月, 見月忘指. 손가락에 의지하여 달을 보더라도 달을 볼때는 손가락을 잊어야 한다. 교

봉종밀(圭峰宗密)의 원각경약소(圓覺經略疏) 권하(卷下)

“너 자신을 알라, 그러면 남도 너희를 알 것이고, 너희도 너희가 살아 계신 아버지의 자녀라는 것을 알게 되리라.(도마 복음 제3절)99)

“예수께서 이르시되, ‘모든 것을 다 아는 자도 제 스스로 를 모르면 아무것도 모르는 자라.’(도마복음 제67절)100)

“내가 아는 것이 있는가? 나는 아는 것이 없다.(論語, 子罕-7)”101)

쿠사누스102)는 반대의 일치103)를 신에게서 인식하는 방법은 직관(直觀), 즉

‘무지(無知)의 지(知)(docta ignorantia)’에 따른다고 하였다. 조해정(2013)104)은 정 치가, 시인, 장인들은 소크라테스와 달리 스스로를 지혜롭다 믿고 있지만, 소크 라테스가 보기에는 자신을 포함한 모두가 무지자라는 점에서 차이가 없고, 무지 를 자각하고 있느냐는 점만이 차이가 있다 하였으며, 따라서 소크라테스의 지혜 는 무지에 대한 자각에 있다 하였다. 김형수(2011)105)는 신은 절대적 진리로 존 재하지만 인간은 그 인식이 불가능하며, 이에 대한 해결책은 인간의 지성을 넘 어 파악하는 것 즉 ‘파악될 수 없는 방식으로의 인식’이라 하였다. 실제로 읽고 들어서 알고 있는 지식은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 이는 다른 사람이 안다고 생각 하는 내용을 언어적으로 기억하는 것이다. 그렇게 얻어진 이해는 근본적인 이해 가 될 수 없기 때문에, 그 알고 있음의 진위여부가 불분명하다. 지두 크리슈나 무르티(2000)106)는 “우리는 나무를 보면서 ‘이것은 OO나무’라는 나무의 명명(命 名), 즉 식물학적 지식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마음을 제약한 나머지 그 나무를

99) 오강남. 또 다른 예수. 예담, 2009. p.46.

100) Ibid., p.301.

101) 吾有知乎哉? 無知也. 論語, 子罕-7.

102) 본 연구 19 페이지 각주 51 참고. 103) 본 연구 19 페이지 각주 47~50 참고.

104) 조해정. “소크라테스의 ‘무지의 역설’과 나가르주나의 중관(中觀).” 哲學論叢, 2013. p.454.

105) 김형수. “쿠사누스의 '아는 무지'(docta ignorantia): 대립의 합치와 통일성에 대한 인식 추 구.” 神學展望, 2011. p.135.

106)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정현종 역, 서울: 물병자리, 2002. p.39.

진정으로 보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에 정필모(2012)107)는 언어는 그 한계성으로 인해 의미를 그 안에 가두며 그 결과 존재의 실상을 표현할 수 없다 하였다. 또한 김귀룡(2015)108)은 사색이 사람의 생각과 언어로부터 시작된다 할 때, 말할(생각할) 수 있는 영역과 이를 벗어난 영역이 존재하게 되어 이들 사이에는 한계가 설정되 며, 모든 철학의 출발점(종착점)은 이 한계에 관한 사색이라 하였다. 따라서 소크 라테스는 참 지식을 전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깨우침으로만 얻을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칼 야스퍼스는 이것을 “허황된 언어로 휩싸인 헛된 사 유가 아니라, 본질로부터 나온 진정한 사유”109)라 하였으며, 한국 선불교의 세계 화에 공헌한 숭산(崇山)110)은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선불교의 문을 통과하려면 생각의 집착을 끊어 하며, 이 것은 생각이 일어나기 전의 마음으로 돌아오는 것이며, 그 상 태를 굳이 말로 표현하자면 ‘오직 모를 뿐’이라 할 수 있다.”111)

이는 힌두사상에서 브라흐만을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na iti na iti)’

라 표현하는 것과 같으며, 장자가 이것을 ’이것과 저것, 있음과 없음, 앎과 모름‘ 등으로 표현한 것과 같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며,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으며, 알면서도 모르는 것, 그것이 소크라테스가 말한 ’너 자신을 알라’의 ’너‘ 로 해석된다. 생각은 이미 상대(相對)의 산물이기 때문에, 이분법적 사고(思考)로 서는 알 수 없는 절대(絶對),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것, 그것이 우리 자신이라는 것이며 그것을 깨달으라는 것을 소크라테스는 “너 자 신을 알라”는 말로 집약하여 표현하였다. 즉 소크라테스가 말한 ’너‘는 도가의 ’도 (道)‘이며, 불교의 ’진아(眞我)‘, 힌두의 ’아트만‘이며 ’브라흐만‘이다.

107) 정필모. “커뮤니케이션 관점에서 본 노장사상(老莊思想)의 인식론과 언어관.” 언론과학연구, 2012. p.142.

108) 김귀룡. “소크라테스와 데리다 -무지를 자각한 삶과 해체된 삶-.” 동서철학연구, 2015. p.294.

109) 칼 야스퍼스. 소크라테스, 불타, 공자, 예수. 황필호 역. 서울: 종로서적, 1981. p.12.

110) 본 연구 23 페이지 각주 62 참고.

111) 숭산. 선의 나침반 2, 현각 역, 허문영 옮김, 서울: 열림원, 2001. p.16~17.

요약해 보면, 소크라테스에 있어서 절대(絶對)란 ‘무지의 지’를 통하여 얻을 수 있는 것이며, 상대(相對)를 만드는 언어적 이분법적 생각은 우리의 혼동을 불러 일으켜 우리 자신이 진정 무엇인지 알지 못하게 한다. 또한 진리(절대)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어서 누군가 대신 깨달아 전달해 줄 수 없다. 오직 스스로 깨우침 에 의하여 도달할 수 있다. 이상 본 장에서 고찰한 소크라테스의 절대와 상대의 의미를 정리하여 보면 [그림 13]과 같다.

[그림 13] 소크라테스의 진리와 지식의 관계

(2) 마틴 부버112)의 나와 너

인문학을 공부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는 저서 나와 너(Ich

und Du)는 20세기 가장 위대한 유대인 사상가로 일컬어지는 마틴 부버에 의

해 집필되었다. 그는 이 책에서 ‘관계’에 대해 말하고 있다. 정선아(2017)113)는 부버는 인간은 결코 독립되어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관계 속에 존재한다 고 하여, 부버의 철학이 관계성 속에서 인간의 실존의 규명에 있음을 말하였다. 이에 부버는 나와 너에서 “사람에게는 두 가지 세계가 존재 한다”하였으며,

112) Martin Buber(1878~1965), 오스티리아 빈에서 출생, 독일의 유대계 사상가. 시오니즘 문화운 동에 종사하며 예루살렘에 있는 헤브라이대학의 철학 교수로 활동하였다. 유대적 신비주의의 유산 을 이어받았으며, 유대적 인간관을 살리려고 하였다. “마르틴 부버.” 두산백과. 2019년 8월 17일. 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746078 113) 정선아. “관계의 상실로 인한 비존재성의 문: 부버의 인격체론과 셰익스피어(Shakespeare)의

『리어왕』(King Lear).”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7. p.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