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신뢰프로세스 및 동북아 평화협력구상의 초기 성과, 문제점, 그리고 이후 통일준비를 위한 단계적 과제 등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이제 지금까지 제기된 문제점들을 극복하면 서 ‘신뢰정책’이 박근혜정부 임기 동안은 물론 향후에도 지속성을 가지는 대북 및 통일정책으로서의 완결성을 가지기 위해 추후 어 떠한 이론적, 개념적 검토가 필요한지 설명하고자 한다. 이는 비단 신뢰정책의 이론적 토대를 강화할 뿐만 아니라, 통일준비 과정의 효율적인 추진이라는 관점에서도 의미가 큰 이론적 개선작업으로 판단된다.
현실적으로 신뢰정책을 구성하고 있는 각 정책들이 모두 저마다 의 논리적 완결성과 충분한 정책내용들을 갖추고 있는 것은 아니 다. 현실적으로 신뢰프로세스와 함께 신뢰정책의 핵심 구성 인자 의 하나인 ‘동북아 평화협력구상’ 및 ‘중견국외교’의 경우 이론적 논의를 위한 분석대상으로 설정하는 데에 한계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기존 이론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한반도 신 뢰프로세스와 동북아 평화협력구상을 중심으로 이론적 보완점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가. 신뢰프로세스: 이론적 구성과 보완
(1) 남북관계와 국제정치이론
통상적으로 남북관계는 국가-국가 관계가 아닌 ‘특수 관계’로 설 정하지만, 대북정책의 이론적 논의라는 관점에서는 일반적으로 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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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간 관계(inter-state relations)를 전제로 한 국제정치이론의 영 역에서 다루는 경향이 강하다. 신뢰프로세스를 구성하고 있는 이 론의 핵심은 ‘기능주의적 한계의 극복’, ‘신뢰구축이론의 한반도적 적용’, ‘제도주의적 지향’, 그리고 ‘구성주의 및 인간안보적 고려’의 네 가지 요소를 들 수 있다.
첫째, 탈냉전 이후 지난 20년간 진행된 모든 대북정책은 기본적 으로 기능주의적 접근(Functionalist approach)의 한계를 보여 왔 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91 기능주의는 필요성과 구체적인 이익에 기반을 둔 외교관계가 협상에 임하는 당사자국들의 핵심 국가이익 을 자연스럽게 해결해 준다는 가정을 전제로 하고 있다. 기능주의적 접근이 반드시 소위 하위 정치(low politics)에서 상위 정치(high
politics)로의 전환을 전제로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핵심 국가이익은 정치·군사·안보적 영역에 해당하는 경우가 많으 므로 이보다는 손쉬운 합의가 가능한, 또한 구체적인 이익으로 설 정되는 경제·사회·문화적 타협과 이익을 통해 소위 사활적인 국가 이익을 확보한다는 논리이다.92
한반도의 경우 기능주의적 정책의 적용에 많은 문제점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탈냉전기 이후 우리 정부의 모든 대북정책은 기능주의적 속성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여
91_국제정치에서 기능주의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에 대해서는, Emanuel Alder and Michael Barnett, Security Communitie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8), Ch. 4; Ernst B. Haas, Beyond the Nation State: Functionalism and International Organization (Colcester, UK: European Consortium for Political Research Press, 2009).
92_Pual Tylor, “Functionalism: The Approach of David Mitrany,” in A. J. R.
Gromm and P. Taylor (eds.), Framework of International Co-Operation (London: Pinter, 1990), pp. 125~138.
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 것으로 판단되지만, 1) 북한이라는 특수한 레짐을 상대로 정치적 타결을 유도하는 일이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고, 2) 5년 단임제인 대통령제 하에서 짧은 시간에 의미 있는 성과를 내는데 주력해야 하는 구조적 한계가 있으며, 3) 한국 이 북한을 상대로 활용할 수 있는 전략적 자산이 경제력이라는 매 우 제한적인 영역에 국한되어 있기 때문인 것으로 판단된다.93 하 지만 주지하는 바와 같이 남북한 관계에는 명백히 서구 이론 적용 의 어려움과 한계가 존재한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기능주의 적용의 어려움과 관련한 또 다른 이유는 공존, 평화, 통 합 등을 전제로 한 유럽 중심의 서구적 갈등해결을 설명했던 기능 주의적 관점이 하나의 민족국가를 만들기 위한 통일이론의 과정을 설명하는 이론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한계가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논리는 독일 통일 사례를 배우고자 하는 우리의 노력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독일 통일의 경우 다양한 결합-해 체를 경험한 유럽 전체의 역사적 맥락에서 이해해야 하는 특수성 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기능주의’ 이론은 ‘우리의 제안(경 제지원)’이 ‘북한의 핵심가치(핵개발=생존)’와 등가성을 가지지 못 할 때 실현되기 어려운 근본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점을 명심해 야 한다.94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는 이처럼 기능주의적 접근 중심으로 추진 된 지난 20여 년 간의 대북정책 문제점을 정확하게 파악하면서 신
93_기능주의 대북정책에 대한 다양한 이론적 분석과 관련해서는 대표적으로 김근 식, “대북포용정책과 기능주의,” 북한연구학회보, Vol. 15, No. 1 (북한연구학 회, 2011), pp. 39~57.
94_박인휘, “한반도 신뢰프로세스: 성과와 과제,” 나라경제, Vol. 15, No. 12 (한국 개발연구원,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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뢰라는 가치 지향적인 측면을 함께 강조하고 있다. 즉, 지금까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일시적인 남북관계 발전을 견인하였던 동인 들이 ‘합의와 약속’, ‘국내적 지지’, ‘국제적 이해’, ‘호혜적인 이익’
등 대부분의 경우 기능주의적 속성과 맞닿아 있다는 점을 발견하 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요소들의 결합만으로는 한반도에 근본적 인 평화를 정착시키는 데에 한계가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고, 신 뢰라는 요소의 강조를 통해 기능주의 대북정책의 한계를 극복하고 자 하는 것이다.
둘째, 신뢰프로세스는 ‘신뢰구축이론’을 적극적으로 계승하고 있 지만, 공존을 목표로 한 ‘신뢰(confidence)’와 궁극적인 통일을 목 표로 한 ‘신뢰(trust)’ 사이의 차별성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다. 앞 서 잠깐 언급했듯이, 과거 냉전기 유럽에서 유행한 신뢰구축이론 (confidence-building theory)은 공존과 상호존중을 전제로 한 평 화의 확보에 있다. 이러한 배경에서 신뢰구축이론의 경우 상호 군 사 운용정책의 투명성, 치명적인 군사력을 확보하지 않는다는 포 기의 신뢰, 군사안보정책 영역에서 상대방의 의혹을 제거해 준다 는 외교적 선언 등을 핵심 내용으로 하고 있다.95 따라서 어느 일 방의 주권적 권리의 포기 혹은 정치적 리더십의 상실 등에 대한 염 려가 원천적으로 배제되어 있다.
하지만 한반도 신뢰프로세스의 경우 ‘Trust-Building Process’라 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과거 유럽에서 강조된 신뢰(confidence) 보다는 보다 결속력이 강하고, 신뢰형성의 다음 단계가 ‘공존’이 아 니라 정치적 결합 혹은 통합과 맞닿아 있다는 의미를 전달받게 된
95_G. Wiseman, Concepts of Non-Provocative Defense: Ideas and Practices in International Security (London: Palgrave Macmillan, 2002).
다. 물론 한반도 신뢰프로세스가 북한을 상대로 압박이나 위협이 아니라 한반도에 살고 있는 주민 모두의 행복과 삶의 질을 향상시 키기 위한 통일의 과정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지만, 그 궁극적인 단계에 있어서는 한반도에 하나의 통일된 정부의 수립이라는 점을 당연히 전제로 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반도 신뢰프로세스’
는 신뢰의 형성과 축적이 남북한 사이의 정치·경제·사회문화적 통 합이라는 보다 거시적인 목표와 정교한 정합성을 이루면서 추진되 어야 한다는 차원에서, ‘신뢰구축이론’과 비교하여 보다 다양한 전 략적 고려사항들을 포함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셋째, 신뢰프로세스는 남북한 관계의 제도화를 목표로 한다는 이론적 내용을 포함한다. 한반도 평화의 부재가 지금까지 남과 북 이 합의한 수많은 약속들을 파기하는 데에 그 주요 원인이 있다면, 향후 이뤄질 합의와 약속은 제도적 구속력을 보다 강하게 확보할 필요가 있다. 이는 앞서 언급한 기능주의 대북정책의 한계를 극복 하는 점과 연결되는 설명인데, 물론 현실적으로 북한의 약속 파기 를 제재할 수단이 충분치 않다는 점에서 남북관계의 제도화는 매 우 어려운 과제가 아닐 수 없다. 특히 제도화의 정립은 상대적으로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점, 신뢰의 형성과 함께 단계적으로 추진되 어야 한다는 점, 제도주의 준수에 따른 혜택과 제재가 확실하게 구 비되어야 한다는 점 등에서 남북관계에 적용하기에는 적잖은 어려 움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96
96_특히 제재이론(sanction theory)이 북한의 경우가 적용되기 어려운 이유에 대해 서는 Ruediger Frank, “The Political Economy of Sanctions Against North Korea,” Asian Perspective, Vol. 30, No. 3 (Winter 2006), pp. 5~36; 한바란,
“A Theory of Economic Sanction,” (대외경제정책연구원 KIEP Working Paper 12-03, 2012.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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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관점에서 지금까지 한반도 문제에 적극 관여하지 않았던 국제행위자들을 새롭게 발굴하여 북한 문제의 제도화를 강화하는 방안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세계은행(World Bank)과 같 은 국제금융기구나 북한 문제를 전담할 동북아지역기구의 창설(한 반도 기금 등), 혹은 북한이 지금까지 상대적으로 활발한 외교활동 을 전개하는 국가들(예: 독일·영국·스웨덴·인도 등)을 적극 활용하 여, 북한의 대외행태가 다양한 제도적 틀 속에 구속될 수 있도록 하는 전략 개발이 긴요히 요구된다.
넷째, 마지막으로 신뢰프로세스는 ‘구성주의(constructivism)’ 및
‘인간안보(human security)’와 관련한 이론적 내용도 핵심 구성요 소로 포함하고 있다. 구성주의 국제정치이론은 인식, 관습, 정체성 등으로 대표되는 비(非) 물질적 가치와 요소들이 행위자의 세계관 및 이익 구성 방식을 지배하게 되어 결과적으로 이익과 이해관계 를 지배하게 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97 현실주의 계보를 따르 는 이론가들이 보이는 선험적인 세계관과 판단력의 문제점을 지적 하면서 결국 인간 의지와 반복적인 노력의 의미를 강조하는 설명 방식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대결 및 경쟁 중심적’
이었던 남북관계의 구조적 특징에서 한 발 물러나 북한을 상대로 신뢰의 구축이 가능할 것이라는 관습과 경험을 축적해 나가야 한 다는 ‘신뢰프로세스’는 다분히 구성주의적 입장 및 정책적 노력과
97_구성주의 이론에 대한 기본적인 설명은 Alexander Wendt, “Anarchy is what States Make of it: The Social Construction of Power Politics,” Internatioanl Organization, Vol. 46, No. 2 (Spring, 1992), pp. 391~425. 이러한 구성주의적 관점을 아시아 안보 현상에 적용하여 안보질서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시도한 대표적인 연구로는 J. J. Suh, P. J. Katzenstein and A. Carlson (eds.), Rethinking Security in East Asia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