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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대통령 리더십의 부침

Dalam dokumen 비영리-변경금지 2.0 - S-Space (Halaman 60-89)

(1) 드골주의와 인격화된 리더십(1958-1986)

1) 대통령 카리스마와 제5공화국 헌법

2000년대 이후 프랑스에서 인격화된 리더십이 재등장한 맥락을 이해하기 위하 여 먼저 제5공화국 헌법의 특징과 드골주의의 전통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프랑스 의 제5공화국 헌법은 이원정부제를 채택해왔다. 프랑스의 이원정부제에서 대통령 은 직접선거를 통해 선출되며 정해진 임기를 갖는다. 반면, 수상은 의회 다수당에 서 배출되어 의회에 책임을 진다. 즉, 이원정부제 하에서 행정부가 선출된 국가원 수와 비선출직인 수상으로 구성되는 것이다. 명문화된 헌법을 그대로 따를 때 수 상이 행정부의 수반이 되지만, 관례를 따를 때는 대통령이 최고 권력을 갖는다.

보다 실질적인 집권 기준은 누가 의회에서 상대적인 ‘다수의 지위’를 구성하는가 의 여부이다(Sartori 1997, 123). 헌법상으로 대통령과 수상은 국가 정책 수립을 포함한 행정 권력을 공유하고 있으며, 양자의 권한이 분명하게 규정되지는 않는 다. 예를 들어, 헌법 제15조는 군통수권이 대통령에게 있다고 명시하는 반면, 제 21조는 수상이 또한 국방의 책임을 진다고 규정하고 있다(Skach 2005).29)

제도의 모호성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이원정부제는 현실적으로 강력한 대통령 의 리더십을 보장해왔다. 이는 제5공화국 수립의 역사적인 맥락에서 드러난다. 과 거 제3공화국(1875-1940)과 제4공화국(1946-1958)에서 보나파르티즘에 대한 거

29) 따라서 프랑스의 이원정부제의 원칙은 행정 권력의 분립이라는 측면과 대통령 권력 강화의 성격을 모순적으로 포함한다. 이와 관련하여 가프니(J. Gaffney)는 제5공화국의 전 시기에

‘긴장 이론’(tension theory)이 관통하고 있다고 보았다. 이원정부제 내에는 한편에는 정당 과 의회에 의존하는 민주주의를 향한 추동력이 존재하는 반면, 다른 한편에는 대통령직을 중심으로 민주주의에서 벗어나는 추동력이 존재한다는 것이다(Gaffney 1989, 6).

부가 존속하였고 정부 수반은 연합을 가능하게 하는 합의 지향형 인물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Blondel and Thiébault 2010, 141). 반면, 제5공화국 헌법은 ‘정당 들의 레짐’(régime des partis)이라 불렸던 제4공화국의 수구주의(immobilisme) 에 대한 반발로 기획되었다. 초대 수상인 드브레는 행정부가 의회보다 우월한 지 위를 가져야 하며, 영국 방식의 수상-내각이 프랑스의 모델이 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1958년 헌법과 1962년의 직선제 개헌으로 대통령 이었던 드골이 국정운영의 주도권을 확보하였고, 대중들과 대통령의 직접적인 연 계는 권력의 정당성을 더욱 강화시켰다. 드골에 의해 형성된 강한 대통령의 전통 은 1986년 동거정부가 처음 등장하기 전까지 30여 년 동안 중단 없이 지속되었 다(Hayward 1993; Suleiman 1980)

드골은 정당 기반에 의존하는 정치를 선호하지 않았다. 그의 입장은 제3공화국 에서의 정치경험과 세계대전 참전경험에서 나온 것이었다. 드골은 제3공화국과 제 4공화국이 정당 간 경쟁과 다툼을 통해 약해졌으며, “분열과 다툼을 향한 프랑스 의 오랜 갈리아적 성향”이 프랑스 국익에 장애가 되어 왔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특정 계급과 집단과의 연관을 부정하였으며. 첫 당명에서 반영되듯이 하나의 정당 이라기보다는 연합(rassemblement)의 형태로 대중들을 모으는 것을 선호하였다.

1946년 임시정부의 수장으로 대중적인 지지를 얻었을 당시 드골은 정당조직이나 지역 네트워크 등의 정파적 권력자원을 전혀 갖추지 않고 있었다. 1947년 프랑스 인민연합(RPF; Rassemblement du Peuple Français)를 창당할 때에도 드골은 프 랑스 국민들의 회합이 정당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라 강조한 바 있다. 제5공화국 초기 드골의 통치는 안정된 의회다수파에 의해 유지된 것이 아니었으며, 드골의 집권 기간 동안 권력의 탈정당화 양상은 일관성 있게 유지되었다(Knapp 1994, 6; Clift 2005).

드골이 1958년 정계로 복귀할 수 있었던 것은 드골 ‘개인’이 프랑스 국민들에 게 ‘새로운 정치 세계’에 대한 비전을 제시했기 때문이었다. 드골은 카리스마적인 리더십의 소유자였고, 레지스탕스에 참여하였던 국가 영웅이었으며, 경쟁 지도자 들과 달리 프랑스의 국가제도에 대한 충성심의 소유자였다. 또한 드골은 프랑스를 공산주의 위협으로부터 지키면서 외교적으로 과거의 영광을 찾을 수 있을 만한

인물로 평가됐다. 드골 스스로도 본인을 제도와 헌법 위에 있는 인물로 평가하였 으며, ‘정신, 제도, 실천’의 차원에서 헌법을 유연하게 해석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Knapp 1994, 7). 이러한 맥락에서 이후 ‘드골주의’는 크게 두 가지 지향을 포함 하게 되었다. 첫째는 강한 국가가 시장과 사회를 통제해야 한다는 개입주의 노선 이었으며, 둘째는 유럽 내에서 프랑스가 외교적으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신념이었다(Hewlett 1998, 73).

그런데 드골의 인격화된 리더십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카리스마적 지도력과 함 께 그가 의존한 ‘헌법적 토대’를 동시에 살펴야 한다. 드골 치하에서 소위 ‘헌법적 독재’라 불릴만한 정치는 헌법 제16조 긴급권 사용에서 출발하였다. 1961년 4월 21일 알제리에서 발생한 군사반란에 대응하여 드골은 긴급권을 발동하였다. 당시 헌법은 ‘제도에 대한 위협’, ‘장관급의 체포 및 구금’, ‘공권력 기능의 중단’ 등의 상황에서 긴급권 발동을 보장하고 있었다. 알제리 군사 쿠데타가 즉시 진압되었음 에도 불구하고 1961년 9월까지 긴급권이 종료되지 않았던 것은 드골 국정운영의 오점으로 남았다. 또한 드골은 헌법 제12조의 의회해산권을 사용하여 국정을 주 도하였다. 1962년 10월 헌법 제49조 2항에 근거하여 퐁피두 내각의 불신임동의 안이 하원에서 통과되자, 드골은 이에 맞서 헌법 제12조의 의회해산권을 발동하 여 여당에 적대적인 의회를 해산했다. 이어 1968년 5월 운동이 발생하자 드골은 5월 30일 의회를 해산하여 안정된 여론을 조성하려 하였고, 의회가 아닌 정부를 지지할 것을 국민들에게 직접 호소하여 이어진 총선에서 승리를 거두었다(성낙인 1995, 386; Knapp 2002, 108).

드골의 인격화된 리더십은 무엇보다도 헌법 제11조 국민투표 회부권의 남용을 통해 뒷받침되었다. 드골 임기 중 국민투표는 총 4차례 실시되었는데, 1961년 1 월 알제리 자치에 관한 국민투표, 1962년 4월 에비앙 협정의 동의에 관한 국민투 표, 1962년 10월 대통령직선에 관한 국민투표, 1969년 4월 지방자치제 도입과 상원개혁에 관한 국민투표가 그것이다. 특히 드골은 1962년 분점정부의 상황을 우회하고자 국민투표에 부쳐 직선제 헌법 개정을 시도하였으며, 이어진 총선에서 의회의 60% 의석을 확보하여 1962-9년의 기간 동안 단점정부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Levy and Skach 2008). 당시 원칙상으로 국민투표조항을 통한 헌법 개정

표 3-1. 드골 임기 중 국민투표

날짜 투표 사안 찬성률 기권

1958년 9월 28일 제5공화국 신헌법 도입 79.3 15.4

1961년 1월 8일 알제리 자치 75.3 23.5

1962년 4월 8일 알제리 독립 협정 90.7 24.4

1962년 10월 28일 대통령 직선제 도입 61.8 22.8

1969년 4월 27일 지방자치제 및 상원개혁 46.8 19.4 출처: Wright 1989, 368.

은 불가능했으나, 드골은 이를 이용해서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관철시켰기 때문에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Hayward 1993, 23-5).

이처럼 드골은 국민투표를 의회의 동의를 얻기 힘든 상황에서 일련의 절차를 회피하는 수단으로 사용했다. 국민투표 회부권은 불리한 정치적 상황에서 대통령 이 국민에게 직접 호소하여 신임을 획득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국민투표를 통한 의사 결정은 드골의 안정적인 국정운영으로 이어졌다. 국민의 입장에서 국민투표 사안에 대한 승인은 그 내용보다 드골 대통령직의 계속적인 수행여부에 대한 회 답의 의미를 갖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1962년 다수를 차지한 신공화국연합(UNR;

Union pour la Novelle République)은 드골주의 정당으로 의회 다수파를 형성했 으며, 이후 드골의 ‘국민신임투표제적 독재’를 위한 여당이 되었다는 비판을 받았 다(Duhamel and Grunberg 2001; Clift 2005, 223). 물론 1969년의 국민투표에 서 드골의 패배는 본인의 사임으로 귀결되었기 때문에 국민투표제 자체를 독재적 인 통치수단으로만 평가할 수는 없으나, 드골이 일종의 중간 평가의 기능을 하는 국민투표에 의존하여 도박과 같은 정치 상황을 연출해 왔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성낙인 1995, 379-80).

2) 드골 이후의 인격화된 리더십

드골은 1969년의 국민투표에서 패배한 이후 곧바로 대통령직에서 사임하였고,

드골주의는 점차적으로 영향력을 상실할 수밖에 없었다. 이어지는 대선에서 퐁피 두(Georges Pompidou)가 드골주의의 계승자로 당선되었다. 퐁피두가 우파의 후 보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드골 정부의 수상 출신이기 때문이었으며 당 지도부의 계산에 의한 선택은 아니었다. 퐁피두가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사망한 후, 드골주 의를 표방한 샤방델마스(Jacque Chaban-Delmas) 대신 자유주의자 지스카르 데 스탱(Valery Giscard d'Estaing)이 대선 후보가 되면서 드골주의의 영향력은 상실 하기 시작하였다. 드골주의 정당은 1970-80년대에 약화되었고 자유주의 우파의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강화되었다(Levy and Skach 2008). 그러나 행정수반의 인 격화된 리더십은 뒤이어 데스탱에 의해 지속되었으며, 드골주의 유산이 1986년 동거정부가 처음 등장하기 전까지 프랑스 제5공화국사에 지속되었다고 보는 평가 가 일반적이다. 무엇보다도 제5공화국에서 의회는 행정부 견제의 역할을 좀처럼 하지 못했으며 종속적인 역할만을 담당했다. 의원들은 입법 활동을 주도하지 못했 고 법안수정조차도 행정부에 의해 통제되는 경우가 많았다. 결과적으로 프랑스는 미국과 같이 이익집단이나 로비스트들이 의회를 통해 정책에 영향을 미치는 전통 이 약할 수밖에 없었으며, 행정 권력에 대한 견제가 대중들의 직접적인 시위를 통 해 이루어지는 경우가 더 많았다(Ancelovici 2008, 14).

드골주의에 대해 가장 강한 반기를 들었던 사회당의 미테랑에 의해서도 유사한 통치가 이어졌다. 1981년 지스카르 데스탱을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된 미테랑은 드골 정부에 대해 “책임성 없는 권위주의적 레짐”이라 비난해왔으며, 1964년 영 구적인 쿠데타(Un coup d'état permanent)에서 우파 정치를 헌법적 독재로 묘 사한 바 있다. 그러나 집권 이후 “헌법이 부여하는 권력을 모두 행사할 것”이라며 전임 대통령들과 동일한 방식의 국정운영을 시도했다(Turner 1997, 32; 김응운 2010, 155-6). 미테랑은 1974년 좌파 공동강령에서부터 헌법 제16조의 긴급권 폐지를 강하게 주장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실행하지 않았고, 12년이 지난 1993년 사회당의 총선 패배가 명백한 상황에서야 긴급권 개정안을 제출하였다(성 낙인 1995, 401-2). 또한 미테랑 역시 의회해산권을 활용하여 국정운영을 주도한 바 있다. 미테랑은 집권 직후였던 1981년 5월 22일 우파가 다수를 이루던 의회를 해산했으며, 이후 총선에서 압승을 거둬 완전한 정권교체를 실현할 수 있었다.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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