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과거와의 단절(rupture) 전략
2007년 대선의 사르코지 승리는 앞서 살펴 본 그의 언론 전략이 누적되어 온 위기 환경 속에서 효과를 거둔 결과로 분석할 수 있다. 그러나 단지 이미지 정치 의 효과에만 주목할 때 간과하게 되는 부분은, 2007년 대선 자체가 후보자 이미 지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며 사회당(PS) 역시 정책보다는 이미지를 고려한 후보를 내세웠다는 점이다. 따라서 사르코지의 ‘국익 수호자’ 이미지가 르와얄의 혁신적이 면서도 친밀감 있는 이미지보다 더 많은 지지를 얻을 수 있었던 원인에 대한 분 석이 필요해진다. 나아가 사르코지가 어떻게 르펜과 국민전선(FN)의 지지층을 흡 수할 수 있었는가에 대한 추가적인 설명도 필요하다. 이 문제에 접근하기 위하여
‘국익 수호자’ 이미지 이면에 포함되어 있는 사르코지의 ‘위기대응 전략’을 중요하 게 분석할 필요가 있다. 즉, 특정한 이미지가 어떠한 맥락에서 힘을 얻을 수 있었 는가의 문제가 중요해지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먼저 사르코지 대선 캠페인의 핵심 슬로건인 ‘단절’(rupture)의 의미를 살펴볼 수 있다. 사르코지는 ‘단절’의 필요성을 2005년부터 주장해 왔다.
그는 2005년 9월 대중운동연합(UMP) 하계 정치대학에서 공개적으로 처음 사용 하였으며, 2006년 님(Nîmes) 연설에서 그 내용을 보다 구체적으로 밝혔다. 그는 이 연설에서 “지난 30년 간, 프랑스는 크게 변화하였으나 정치는 이를 따라가지 못했다. 이런 이유에서 우리는 ‘단절’을 시도해야 한다. 우리는 프랑스를 이 시대 에 맞게 조화시켜야 하며... 우리 자신을 지키기 위해 우리 스스로와 결연해야 하 는 것이다.”라 주장하였다. 그는 이를 위해 “관료제와 부채의 무게에 짓눌리고, 거 대한 재분배 기구에 질식되고, 봉건제와 코포라티즘에 침식당한” 국가를 혁신해야 한다고 역설한 바 있다(2006년 5월 9일 님(Nîmes) 연설). 나아가 사르코지는 기 존의 드골주의 후보자들이 우파의 이념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였다며, 우파의 정 체성 갱신을 중요한 정치적 목표로 제시한 바 있다. 사르코지는 공화주의의 보편 가치에 집착한 시라크가 결국 신자유주의 개혁에 실패했음을 상기시키면서 다음
과 같이 우파의 재건을 주창하였다.
나는 프랑스 우파의 강박관념를 극복하기 위해 전력을 다해왔다. 교훈을 주는 척하는 것을 좋아했던 좌파 때문에 오랜 시간 동안 우파는 마비된 것처럼 보였 다. 또한 우파는 조용한 공모자로 비난받으며, 정체성의 상당부분을 잃어왔던 것 이 사실이다... 우파는 과거의 형태로 규정되기 보다는 결국 과거의 우파와는 다 른 것으로, 더 이상 우파가 아닌 것으로 규정되어왔다. 우파도, 좌파도, 중도도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복잡한 혼합은 모든 약점들을 모은 것이 되었다.
좌파에게는 너무 우파적이었고, 우파에게는 충분하지 않았다. 전통적 가치를 기 준으로 하면 너무 유연했으며, 현대적 이념의 관점에서는 너무 경직되었다. 이러 한 자살 전략은 국민전선(FN)의 선전이 왜 지속되는가를 부분적으로 설명한다 (Sarkozy 2006, 17; Haegel 2011, 65에서 재인용).
사르코지가 주장하는 단절은 대체로 전후 건설된 복지 국가 모델과 35시간 노 동제와 같은 구 사회당 행정부의 업적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었다. 위기에 봉착한 복지 국가 모델과 현실적 변화를 가로막는 지난 ‘30년의 영광’에 대한 기억으로부 터의 절연을 의미했다. 단절의 핵심은 전후 프랑스의 국가적 협약 혹은 소위 ‘프 랑스 예외주의’의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기간산업의 국영화 정책에서부터 사회보장제도까지 공산주의와 드골주의의 영향 하에서 사회적 협약으로 이루어진 모든 정책을 재조정하는 의도를 가졌다.57) 또한 단절은 극우정당의 결선투표 진 출, 유럽헌법승인 국민투표 부결, 파리 외곽의 폭동, 신자유주의 개혁의 실패 등이 상징하는 프랑스 발전모델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을 의미했다(Brochet 2011, 11-13). 사르코지는 바로 이 슬로건으로 기존의 드골주의 지지자들뿐만 아니라 노동자 및 극우 유권자들에게 호소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2007년 대선에서 “프랑 스 국민들은 자신들의 상황에 만족하지 못해왔으며, 그 상황을 ‘신속하게’ 변화시
57) 프랑스경제인연합(MEDEF) 부회장이었던 드니 케슬레(Denis Kessler)는 사르코지 개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개혁의 리스트는 매우 간단한데, 1944년과 1952년 사이에 도 입된 정책들을 예외 없이 포함하면 되는 것이다. 레지스탕스 국민의회에 의해 도입된 프로 그램을 철폐해서 1945년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바 있다(Challenges, 2007/10/4; Brochet 2011, 11에서 재인용).
키기 위해 투표하였다.”는 것이 드러났다(Riviére 2008, 85).
그런데 기존 연구에서 충분히 강조하지 않은 점은 단절 전략이 내포하는 위기 대응의 측면이다. 사르코지는 국익 수호자의 이미지로 위기관리 능력을 부각시켰 고, 효율적인 위기 해결능력을 가시화하여 지지층을 결집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이미지 형성을 위해 먼저 2000년대 사회 현안을 둘러싼 책임 공방에서 주도권을 잡을 필요가 있었다. ‘단절’ 전략은 미래의 혁신보다 과거 위기에 대한 책임회피 의도를 담고 있다. 그는 선거 과정에서 “무능하고 기생적인 정치행태, 약속불이행 과 기만의 정치행태와 단절”하겠다고 주장해 왔는데, 전임 대통령 시라크의 국정 운영 역시 단절의 대상이었다. 또한 이 단절에는 기존 우파 정당과의 ‘거리두기’도 포함된다(Szarka 2009, 409). 2007년 대선은 집권 정당이었던 대중운동연합 (UMP)에게 사회적 혼란에 대한 책임이 돌아가는 시점이었다. 프랑스가 직면한 위 기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던 우파 정부의 책임으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키고, 전임 대통령과 차별화를 시도하는 것은 선거 승리를 위한 필수요건이었다.
‘단절’ 기조를 순수한 정책상의 지향으로 평가할 수 없는 이유는 사르코지가 자 유주의 개혁에 대한 반감을 고려하여 ‘고요한 단절’(rupture tranquille)이라는 표 현을 사용한 바 있기 때문이다. 사르코지는 2006년 “고통받는 프랑스”라는 제목 의 샤를빌-메지에르(Charleville-Mézières) 연설에서 세계화 경쟁, 구조조정, 실업 과 저임금 등으로 고통 받는 노동자들의 노고를 언급하였고, 시라크 행정부에서 사회통합 프로그램을 입안하였던 게노(Henri Guaino)를 정책보좌관으로 임명하기 도 했다. 사르코지 역시 순수한 신자유주의를 지향하면서 집권하는 것이 불가능하 다는 점을 인지하였다는 것이 드러난다(Szarka 2011, 410).
과거 유사한 단절 전략을 취했던 미테랑 사례과 비교할 때, 사르코지의 단절 슬 로건이 소속정당과의 ‘거리두기 전략’으로서 갖는 특징은 분명해진다. 사르코지가 집권 후 신자유주의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은 1981년 전후 처음으로 정권 교체에 성공했던 사회당(PS)이 시도했던 개혁과 상당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두 정권은 집권 초기부터 공약 이행을 신속하게 추진하며 강력한 주도권을 행사했다.58) 또한
58) 미테랑은 공약대로 노동자 친화적인 재분배 정책을 골자로 하는 강력한 개혁을 추진하였 다. 사회당 정부는 집권초기부터 가족 수당과 퇴직연금을 인상시켰고, 최저임금을 인상시켰 으며, 부유세를 도입하였다. 유급휴가일수는 증가했고 노동시간은 임금감축 없이 주 39시간
미테랑 역시 사르코지와 마찬가지로 집권 2년차부터 외부 압력에 의해 개혁의 일 관성을 유지할 수 없는 난관에 부딪쳤다. 사르코지가 2008년 미국 발 경제 위기 의 여파로 개혁 수위를 조정했듯이, 미테랑의 국영화 개혁은 유럽통화제도의 압력 으로 좌절됐다. 그러나 이들이 추진한 ‘단절’이 어떠한 정치적 기반을 전제로 하고 있는가는 중대한 차이를 보인다. 미테랑은 개혁 작업을 위해 정당의 지지 기반에 충실한 리더십을 유지했고, 자신의 정파적 정체성을 지속적으로 유지하였으며 당 의 구성원으로 행동하였다. 반면 사르코지는 처음부터 매우 인격화된 형태의 프로 그램을 제시했다. 사르코지가 2007년의 대선에서 발표한 공약의 대부분은 사르코 지 본인을 지칭하는 ‘나’(Je)를 주어로 하는 저작에서 발표되었던 내용들이었다.
사르코지는 나의 계획: 모든 것이 현실이 되다(Mon Projet: ensemble tout devient possible)에서 ‘권위, 정직, 우애, 프랑스의 영광’ 등이 ‘자신’의 가치라고 언급한 바 있는데, 이를 대중운동연합(UMP)의 공통된 지향으로 설명하지 않고
‘나’의 정책기조로 설정하는 것은 매우 특징적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당위에 ‘군림 하는’ 드골의 리더십과 달리 사르코지는 당과 ‘독립적인’ 리더십을 의도하였다는 분석도 제시된다(Szarka 2009, 410).
(2) 개방인사와 리더십 차별화
사르코지의 ‘단절’이라는 정책기조는 그가 행정부 내부에서 국정을 주도하는 방 식에도 반영이 되었다. 사르코지 대통령은 선거 공약으로 대중운동연합(UMP) 이 외의 정당에게 내각을 개방할 것을 해 약속해왔으며 집권 후에는 이를 현실화하 였다. 이 측면은 사르코지의 국정운영이 대처리즘의 전형과 구분되는 주요한 특징 으로 언급된다. 대처는 보수층 이탈을 우려하여 자유주의와 사회민주주의의 어떠 한 연대도 거부했던 반면, 사르코지는 이와 달리 내각에 야당 인사를 임명하는
‘개방인사’를 시도했다는 것이다(Le Figaro 2007/5/26). 사르코지의 개방인사는 으로 단축되었다. 또한 분권화 개혁은 미테랑 임기 중의 주요 치적으로 간주된다. 여러 개 별 방송국들이 법적으로 인정되었으며 텔레비전 방송에 대한 국가의 통제가 완화되었다. 또 한 중앙정부의 도(departement)에 대한 영향력이 완화됐고, 22개의 주에는 직접 선출된 의 회가 들어섰다(Knapp and Wright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