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전제와 대법 공지칭
(11)에서는 ‘샛별’과 ‘개밥바라기’가 공지칭한다는 것이 전제된다. (11)에 서 ‘그런데 우리가 그들이 사실은 동일하다는 걸 알게 되고 나서,’ 라는 표현을 사용했으므로 ‘샛별’과 ‘개밥바라기’가 동일한 대상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게 된 사건이 이전 시점에 일어났다는 것이 전제되고, 그것이 지 식인만큼 ‘샛별’과 ‘개밥바라기’는 정말로 동일한 대상을 지칭한다는 것이 전제된다. (12)에서도 ‘영수씨’와 ‘이 교수님’은 동일한 대상을 지칭한다는 것이 전제된다. 왜냐하면 이름 관습상, 풀 네임 ‘이영수 교수님’이 적법하 게 사용되기 위해서는 ‘영수씨’와 ‘이 교수님’이 동일한 대상을 지칭한다 는 것이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13)에서도 ‘샛별/개밥바라기’는 ‘샛 별’이 가리키는 대상이자 ‘개밥바라기’가 가리키는 대상을 가리킬 목적으 로 ‘/’를 사용한 특수한 표현이다. 그 표현이 적법하게 사용되기 위해서 는 그 표현을 구성하는 이름들이 정말로 동일한 대상을 가리켜야 하므 로, (13)에서도 ‘샛별’과 ‘개밥바라기’가 가리키는 대상이 동일하다는 것이 전제된다.
피닐로스 사례들은 표현들의 대법 공지칭이 그 표현들의 내재적 의미 론적 특징 (즉 프레게적 뜻)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점 에서 중요한 사례들이었다. 그렇다면 그 사례들 모두에서 문제의 표현들 이 공지칭한다는 것이 전제된다는 것이 무언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 지 아닐까? 내가 보기에 이것은 대법 공지칭이 공지칭의 전제를 통해 설
락에서 발화될 때, 화자는 (Pre)와 같은 것을 전제해야만 하고, 청자는 발화를 적 절하게 이해하기 위해 이 전제를 받아들일 것으로 기대된다.
(Pre): 어떤 것이 있어서 샛별과 개밥바라기 모두와 동일하다.
‘it’의 선행사는 (Pre)의 바로 그 어떤 것이다.
윤철민은 자신의 제안을 근거로 1-표현과 1,2-표현이 (그리고 2-표현과 1,2-표 현이) 대법 공지칭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것이 주장의 유일한 근거는 아니지만 말이다.) 1-표현과 1,2-표현은 대법 공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두 표현이 공지칭할 것으로 전제되는 것뿐이다. 하지만 이후 발화를 적절하게 이해 하기 위해 두 표현이 지칭하는 대상이 동일하다는 전제를 인식하고 받아들일 것 이 기대된다면, 그것은 곧 두 표현이 대법 공지칭한다는 뜻 아닌가? 나는 윤철민 의 주장과 달리, 피닐로스 사례들에서 문제의 표현들이 공지칭한다는 전제가 있 다는 것은 그 표현들이 대법 공지칭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표현들이 어떻게 해서 대법 공지칭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명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아이디어는 이렇다. 무언가가 전제된다는 (presupposed) 것은 그 언어적 정보가 담화에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 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두 표현이 공지칭한다는 것이 전제되면, 두 표 현이 공지칭한다는 것은 그 담화에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것 이 바로 유능한 언어사용자들이 두 표현의 이해에 있어 부족함을 드러내 지 않고는 두 표현이 정말 공지칭하는지 합리적으로 의문을 제기할 수 없는 이유이다. 즉 두 표현이 공지칭한다는 것이 전제될 때, 대법 공지칭 에 대한 파인의 시험기준이 만족된다.40)
이 아이디어에서 출발해서 전제를 통해 피닐로스 사례를 설명해보자.
우선 (12)에서, 화자가 영수 씨가 이 교수님이라고 하는 첫번째 문장을 발화한 시점까지만 해도 ‘영수 씨’와 ‘이 교수님’이 가리키는 대상이 동일 하다는 것이 전제되지 않았다. 화자는 단지 그렇다는 것을 주장했을 뿐 이다. 그런데 두번째 문장에서 화자는 청자가 ‘이영수 교수님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발화하는데, 이름 관습에 비추어볼 때 ‘영수 씨’와 ‘이 교수 님’이 동일한 대상을 가리킬 때만 ‘이영수 교수님’이 적법하게 사용될 수 있으며, 그러므로 화자는 ‘이영수 교수님’을 사용하면서 ‘영수 씨’와 ‘이 교수님’이 동일한 대상을 가리킨다는 것을 전제한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영수 씨’가 ‘김영수’라고 불리는 다른 사람을 가리킨다면 ‘이영수 교수님’
의 사용은 지시대상을 가지는 적법한 사용일 수 없다.) 그리고 청자가
‘이영수 교수님’의 사용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받아들임으로써 청자 역 시 그러한 전제를 받아들인다. 결국 ‘이영수 교수님’은 ‘영수 씨’와 ‘이 교 수님’이 동일하게 가리키는 대상을 가리키도록 사용되어, 저 두 표현 각 각과 대법 공지칭하는 것이다.
(13)에 대해서도 비슷한 설명을 제공할 수 있다. 첫번째 문장에서 화자 가 샛별이 개밥바라기라고 주장할 때 화자가 ‘샛별’과 ‘개밥바라기’가 동 일한 대상을 가리킨다고 전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첫번째 문장의
40) “한 담화에서 대상이 같은 것으로 표상되는 것은 오직 담화를 이해하는 그 누구 도 그것이 같은 것인가 하는 질문을 합리적으로 제기할 수 없을 경우에만 그렇 다.”
‘샛별’과 ‘개밥바라기’는 대법 공지칭하지 않는다. 하지만 ‘샛별/개밥바라 기’를 적법하게 사용하기 위해서 화자는 ‘샛별’과 ‘개밥바라기’가 동일한 대상을 가리킨다고 전제하며, 화자의 사용을 받아들이면서 두번째 문장 을 이해하는 청자는 역시 그러한 공지칭의 전제를 받아들인다. 그렇기 때문에 두번째 문장의 ‘샛별/개밥바라기’는 앞 문장의 ‘샛별’, ‘개밥바라기’
와 각각 대법 공지칭한다.
(11)에서는 대법 공지칭이 성립하는 데 있어 조응표현 ‘거기’가 성공적 으로 지칭하면서 의미를 갖도록 하려는 화자와 청자의 적극적 노력이 크 게 작용한다. 청자는 (11) 조응 표현 ‘거기’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해석하 는데 어려움을 겪지 않을 것인데, 이는 (14)의 사례와 대조된다.
(14) 가. 토끼랑 기니피그는 철우 거야. 토끼는 암컷이야.
나. 토끼랑 기니피그는 철우 거야. *그건 암컷이야.41)
(14-가)와는 달리 (14-나)에서 의미론적 이상(anomaly)이 발생하는 이유 는 조응 표현이 무엇을 가리켜야 할지가 분명치 않기 때문이다. (14-나) 를 들은 청자는 화자에게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냐고 되물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단 ‘토끼’와 ‘기니피그’ 중 하나, 이를테면 ‘토끼’가 맥락적으 로 훨씬 두드러진 요소였다면 이러한 의미론적 이상은 발생하지 않고 화 자는 ‘그건’이 토끼를 가리키는 것으로 문제 없이 해석했을 수도 있다.
(혹은 화자가 손가락으로 토끼를 가리키는 지시 행위를 하면서 (14-나) 를 발화한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11)이 발화된 것으로 가정된 맥락이 ‘샛별’과 ‘개밥바라기’ 중 어느 쪽도 맥락적 으로 두드러지지 않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11)에서는 (14-나)와 같은 의
41) 이것은 캄프(Kamp)의 예시를 수정한 것이다. 원래 예시는 다음과 같다.
가. Walter has a rabbit and a guinea pig. The rabbit is white.
나. Walter has a rabbit and a guinea pig. *It is white.
Kamp et al (2011), 정소우 (2011), p.340. 에서 재인용. (11)과 평행한 사례로 만 들기 위해 ‘a rabbit’ 같은 부정관사 표현 대신 한정 표현으로 수정하였다. 수정한 이후에도 (나)가 이상하다는 직관은 유지된다.
미론적 이상이 발생하지 않는다. (14-나)와 (11)의 비교는 ‘거기’가 ‘샛별’
또는 ‘개밥바라기’ 중 어느 하나와 공지칭하는 것으로 해석됨으로써 이상 이 발생하지 않은 것이 아님을 시사한다. 문제의 두 표현 중 어느 한쪽 만을 조응 표현의 선행사로 택할 근거가 (14-나)와 (11)에서 같은 정도 로 빈약하기 때문이다. 두 사례의 차이는 (11)에서는 ‘샛별’과 ‘개밥바라 기’가 동일한 대상을 가리킨다는 것이 전제된다는 것이다. ‘거기’가 이상 없이 지칭하도록 하기 위해서 화자는 ‘거기’가 바로 그 동일한 대상을 가 리킨다고 전제하며, 청자는 그러한 전제를 수용하여 그 표현을 해석한다.
‘샛별’과 ‘개밥바라기’가 동일하게 가리키는 것으로 전제되는 대상이 ‘거 기’의 선행사라고 할 수 있다.42) 그러므로 (11)의 ‘거기’는 ‘샛별’과 ‘개밥 바라기’ 각각과 대법 공지칭한다.
피닐로스 사례에서 이행성 실패에 대한 재고찰
피닐로스 사례들을 다룬 2장과 3장의 논의에서 다음과 같은 의문이 들 수 있다. 이를테면 (13)과 같은 사례에서, 결국 '샛별'과 '개밥바라기'가 공지칭하는 대상이 있다는 것이 전제되고 난 다음인 '샛별/개밥바라기' 가 발화되는 시점의 맥락에서는 이행성 실패가 없는 것 아닌가?43) 공지 칭이 전제되는 것이 곧 대법 공지칭이라는 나의 이론 하에서 이는 올바 른 지적인 것으로 보인다. 분명 '샛별/개밥바라기'와 '샛별', 그리고 '샛 별/개밥바라기'와 '개밥바라기'가 각각 대법 공지칭하는 것이 '샛별'과 ' 개밥바라기'가 공지칭하는 대상이 있다는 전제 덕분이라면 그러한 전제 가 있을 때 '샛별'과 '개밥바라기' 역시 대법 공지칭한다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다면 세 표현에 있어 대법 공지칭 관계는 이행 적으로 성립할 것이다.
이러한 지적을 받아들이면, 이제 중요한 질문은 '이행성 실패' 논증이
42) 각주 35에서 밝힌 것처럼 ‘거기’의 선행사가 ‘샛별’과 ‘개밥바라기’가 가리키는 동 일한 대상이라는 아이디어는 윤철민에게서 얻은 것이다.
43) 한성일 교수가 이러한 지적을 해주었다. 중요한 지적을 해준 한성일 교수께 감 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