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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쉑의 이행성 실패 논증

Dalam dokumen 저작자표시 - S-Space - 서울대학교 (Halaman 49-53)

수 없다.) 그렇다면 두 철수 각각에 대하여 인식주체는 대칭축 이쪽 편 에 있다는 기술적 믿음과 대칭축 저쪽 편에 있다는 서로 다른 기술적 믿 음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22) 결론적으로 파인의 대칭우주 사례가 정말 로 상상가능한 정합적인 사례라면, 그것은 서로 다른 이름으로 지시되는 두 철수 사이에 아무런 기술적 차이도 없는 사례가 못되는 것인 만큼, 프레게적 뜻의 어떤 가능한 후보에도 적용되는 반례인 것이 결코 아니 다.

패를 지적하였다.25) 나는 우선 여기서 타쉑의 논증을 파인의 같은 것으 로 표상 개념을 사용한 관계주의 논증으로 이해될 수 있도록 적절하게 옮겨본다.26)

타쉑이 제시한 사례를 소개하기에 앞서 용어 사용에 있어 '대법 공지 칭' 대신 '같은 것으로 표상' 혹은 '조정'으로 잠시 돌아와야 한다. 타쉑 의 사례는 사고에 대한 프레게주의의 반례로서, 언어표현에 있어서가 아 니라 믿음의 구성요소에 있어 같은 것으로 표상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 다. 여러 사람이 어떤 대상에 대한 믿음을 공유하는 경우, 즉 그 대상에 대해 동의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또 여러 사람이 한 대상에 대해 충 돌하는 믿음을 가지는 경우, 즉 그 대상에 대해 반대(disagree)하는 경우 가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스파이더맨 설화가 참인 세계를 생각해보자.

그 세계에서 피터 파커는 한편으로 가난하고 소박한 삶을 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정체를 숨기고 시민을 구하는 영웅 스파이더맨으로서 살아간 다. 이때 어느 두 사람이 스파이더맨은 용감하다는 데 동의할 수 있다.

또 두 사람이 한 사람은 스파이더맨은 용감하다고 생각하면서 다른 사람 은 스파이더맨이 용감하지 않다고 생각함으로써 서로 반대할 수 있다.

이 경우에는 동의나 반대가 발생하고 있다. 하지만 피터파커가 정체를 숨기고 있는 스파이더맨이라는 것을 모르는 두 사람이, 한 사람은 스파 이더맨은 용감하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은 피터파커가 용감하다고 생각 한다고 해서 두 사람이 진정으로 어떤 문제에 대해 동의하고 있다고 할

25) 원래의 사례는 Kripke(1979) 에서 제시되었다. 크립키는 영어 이름 'London'과 프랑스어 이름 'Londres'가 공지칭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에 대한 믿음 보고들, 그리고 정치인 파데레프스키와 피아니스트 파데레프스키가 동일인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에 대한 믿음 보고들에서 이름에 대한 밀주의를 가정하지 않고도 독 립적인 그럴듯한 가정들만으로도 철학적 퍼즐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임 으로써 믿음 보고의 의미론 문제가 프레게주의가 밀주의보다 우월함을 보여주는 것이 아님을 주장하였다. 타쉑과 파인은 크립키가 제시한 두 경우 중 파데레프스 키 사례에 주목한다.

26) Taschek (1998), pp.347-51 참조. 파인 역시 파데레프스키 사례를 가지고 유사 하지만 별개의 이행성 실패 논증을 제시한 바 있으나, 동의와 반대를 통해 같은 말하기(same-saying)를 포착한 타쉑의 사례 제시가 보다 직관적이기 때문에 본 고에서는 이를 다룬다. 다만 내가 여기서 재구성한 논증은 타쉑이 제시한 사례를 파인의 이론과 종합한 것으로 타쉑 본인의 주장과 다소 거리가 있다. 이 사례가 촉발하는 철학적 퍼즐에 대한 타쉑 본인의 해결책은 Taschek (1998) 을 보라.

수 없으며, 한사람은 스파이더맨이 용감하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은 피 터 파커가 용감하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해서 두 사람이 어떤 문제에 대 해 서로 반대하고 있다고 할 수 없다. 비록 두 사람이 바로 동일한 대상 에 대해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대법 공지칭하 는 언어표현들이 대상을 같은 것으로 표상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두 사 람이 하나의 대상에 대해서 동의하거나 반대하고 있을 때 두 사람의 믿 음들은 그 대상을 같은 것으로 표상한다고 할 수 있다.

관계주의는 대법 공지칭이 본질적으로 관계적이라고 주장할뿐 아니라 믿음들이 같은 것으로 표상하는 것 역시 본질적으로 관계적이라고 주장 한다. 반면 프레게주의는 두 경우 모두 뜻의 동일성으로 환원된다고 주 장한다. 프레게주의와 지칭주의 사이의 대립은 지칭표현의 의미에 대한 대립일 뿐 아니라 표상 내용, 즉 명제에 대한 대립인 것이다. 타쉑의 이 행성 실패 논증은 믿음에 있어 같은 것으로 표상이 본질적으로 관계적이 라는 것을 보여주는 논증이다. 상황은 다음과 같다. 폴란드의 유명인 파 데레프스키는 정치인인 동시에 피아니스트이다. 나는 이 사실을 알고 있 다. 반면 피터는 이 사실을 모르고 있으며, 정치인 파데레프스키와 피아 니스트 파데레프스키가 각각 별개의 사람으로 존재한다고 믿고 있다. 피 터는 파데레프스키는 유명한 피아니스트인 만큼 그가 음악적 재능이 있 을 거라고 믿고 있다. 반대로 피터는 정치인들이란 모두 음악적 재능이 라고는 없는 사람들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정치인 파데레프 스키에 대해서는 음악적 재능이 없을 거라고 믿고 있다. 마지막으로 나 와 피터는 둘 다 합리적인 인식주체이다. 이제 나와 피터 사이의 가능한 두 대화를 생각해보자.

(7) 피터: 파데레프스키는 음악적 재능이 있다.

(8) 나: 나 역시 파데레프스키가 음악적 재능이 있다고 생각해.

(9) 피터: 파데레프스키는 음악적 재능이 없다.

(10) 나: 하지만 나는 파데레프스키가 음악적 재능이 있다고 생각해!

먼저 (7)과 (9)를 함께 보자. 피터는 (7)과 (9)에서 스스로의 믿음에 반대 하고 있는 것일까?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다. 피터는 파데레프스키라는 하나의 대상에 <음악적 재능이 있음>이라는 속성을 서술하는 동시에

<음악적 재능이 없음>이라는 속성을 서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스스로에 게 반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피터는 자기 자신이 하나의 대 상에 모순되는 속성들을 부여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므로, 스스로에 게 '분명하게' 반대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피터가 그러한 방식으로 스스 로에게 분명하게 반대했더라면 이는 피터가 합리적 주체라는 가정에 위 배되었을 것이다. 이 상황을 파인의 조정 개념을 통해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피터가 (7)로 표현한 믿음과 (9)로 표현한 믿음에서 파데레프스키 의 나타남들이 조정되어 있었더라면, 파데레프스키는 음악적 재능이 있 는 동시에 음악적 재능이 없다는 것이 (7)과 (9)로부터의 분명한 귀결 (manifest consequence)이었을 것인데, 그렇다면 피터가 이 분명한 귀결 을 알 수 있는 위치에 있었음에도 (7)과 (9)를 모두 받아들였다는 것이 된다. 그런데 이는 피터가 합리적이라는 가정에 어긋나므로, 가정된 상황 에서 피터가 (7)로 표현한 믿음과 (9)으로 표현한 믿음에서 파데레프스 키의 나타남들은 조정되어 있지 않다고 해야 한다.

이처럼 피터가 자기 자신에 분명하게 반대하고 있는 것은 아닌 반면, (9)와 (10)에서 피터와 나는 서로에게 분명하게 반대하고 있다. 피터와 나는 우리가 함께 하나의 대상에 모순되는 속성들을 부여하고 있다는 것 을 알고 있으며, 우리 중 하나만이 옳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따라 서 파데레프스키는 음악적 재능이 있는 동시에 음악적 재능이 없다는 것 이 (9)와 (10)의 분명한 귀결이며, 이는 (9)로 표현한 피터의 믿음과 (10) 으로 표현한 나의 믿음에서 파데레프스키의 나타남들은 조정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7)과 (8)에서 피터와 나는 서로에게 분명하게 동의하 고 있다. 우리 둘은 우연히 동일한 대상에 같은 속성을 서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 그러므로 (7)과 (8)에서도 우리의 믿음들에서 파데레프스키의 나타남들은 조정되어 있다.

그런데 (8)과 (10)에서 표현한 나의 믿음은 어떤가? (8)과 (10)은 동일 한 믿음을 표현할 것이다. 혹은 설령 (8)과 (10)이 각각 별개의 믿음을 표현한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그 믿음들에서 파데레프스키의 나타남들은 조정되어 있을 것이다. 나는 (8)의 '파데레프스키'와 (10)의 '파데레프스 키'가 동일한 사람을 가리킨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8)로 표현한 믿음의 파데레프스키의 나타남이나 (10)의 표현한 믿 음의 파데레프스키의 나타남이나 같은 것으로 표상된 것, 즉 조정되어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정리하면 (7)믿음과 (8)믿음이 (파데레프스키의 나타남들에 있어) 조정 되어 있고, (8)믿음과 (10)믿음이 조정되어 있고, (10) 믿음과 (9) 믿음이 조정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7)믿음과 (9)믿음은 조정되어 있지 않으므로, 위 사례에서 믿음에 있어 파데레프스키의 나타남들 간의 조정 관계는 비-이행적으로 성립한다. 만일 조정 관계가 동치 관계라면 조정 관계는 이행적이어야 한다. 그리고 조정 관계가 동일한 뜻으로 표상함 관계라면 조정 관계는 동치 관계여야 한다. 그런데 저 사례처럼 조정 관 계가 비-이행적으로 성립하는 사례가 있으므로, 조정 관계는 동일한 뜻 으로 표상함으로 포착될 수 없다. 그러므로 프레게주의는 잘못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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