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김일성시대 정치 (1) 권력투쟁
북한의 정치사는 한마디로 김일성 1인 지배체제 확립과 김일성·김 정일 세습체제의 구축과정으로 요약될 수 있다. 북한의 지도층은 해 방 직후에 공산주의 운동 또는 항일투쟁 경력, 지역적 출신 등을 달리 하는 파벌들간의 연합형태로 구성되었다. 당시 북한지도층을 형성하고 있던 파벌로는 김일성계를 제외하고 국내에서 지하공산당 운동을 했 던 국내파, 중국에서 공산주의 운동을 하다 귀국한 연안파, 소련에서 공산주의 교육을 받고 북한에 보내진 소련파가 있었다.
김일성(본명 김성주)은 사실상 국내에서는 전혀 정치적 기반을 갖지 못하였음에도 북한 주둔 소련군의 절대적인 후원을 받아 새로운 지도 자로 부상하였다.133) 그는 당시에 소련군이 북한을 소비에트화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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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성,「3대혁명 소조운 동과 그 생활력」(평양: 사 회과학출판사, 1984), p.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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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3대혁명소조운동 발기 20돌 기념중앙연구 토론회(1993.2.4)에서 소조 활동기간을 마친 22만 여 명의 소조원 출신들이 당 및 정권기관과 경제부문 에서 일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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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 제 1차 확대회의(1945.10.13)에 서는 김용범이 책임비서로 선출되었으며, 같은해 12월 17일에 개최된 분국 제3차 확대집행위 회의에서 비 로소 김일성이 책임비서 로 되었다.
대리인으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김일성은 자신의 권력기반 강화를 위하여 단계적으로 반대파 또는 잠재적인 적대세력에 대한 숙청작업을 벌여 왔다. 그 첫 희생자는 국 내파 인물들로서 김일성은 이들을 처음부터 좌경적 오류, 종파주의자, 영웅주의자로 비판하였다.134)
권력투쟁은 6.25 발발 직후에 벌어진 남로당계에 대한 숙청에서 본 격화되어, 1950년대 후반에 연안파·소련파에 대한 숙청과 1960년대 후반의 갑산파와 군부에 대한 숙청으로 이어졌다. 1970년대 초반에는 김일성 부자세습체제에 장애가 되는 세력들을 제거하기도 하였다.
김일성은 남침의 실패로 인해 조성된 자신의 정치적 위기를 모면하 는 과정에서 남로당 계열을 숙청대상으로 삼았다. 김일성은 1952년 12월 당 중앙위원회 제5차 전원회의를 시발로 1955년 12월까지 남로 당계의 지도급 인물들인 박헌영, 이승엽, 배철, 김남천, 임화 등을 미 국의 고용간첩이라는 죄목을 붙여 숙청을 단행하였다.135) 이후 김일성 은 남로당계 잔당에 대한 숙청을 계속하며 또다시 연안파 및 소련파 에 대한 숙청을 단행하였다. 1956년 2월에 개최된 소련 공산당 제20 차 대회 이후, 공산권 내에서 개인숭배 반대와 스탈린 격하운동이 진 행되자 북한에서도 반김일성 운동이 고조되는 한편, 군수공업을 위주 로 한 중공업 우선의 경제정책에 대한 반발이 일어남에 따라 김일성은 최대의 정치적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연안파와 소련파에 의해 절정에 달했던 반김일성 운동은 1956년 8 월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를 계기로 김일성에 의해 좌절되었다. 이때 에 김일성은 김두봉, 최창익, 박창옥 등 연안파와 소련파 지도자들에 대한 숙청을 단행하였는데 이 사건은‘8월 종파사건’으로 불린다.
김일성은 1958년 3월, 제1차 당대표자회를 소집하여 반대파 인물들 에 대한 숙청작업을 일단락 짓는 한편, 전국적으로 중앙당 집중지도사 업을 대대적으로 전개함으로써 반대파의 기반을 일소하는 등 1인 지배 체제를 확립하게 되었다.
김일성은 1960년대 후반에 들어와서는 자파 내의 인물들에 대한 숙 청에도 착수하였다. 1967년 5월 당 중앙위원회 제4기 제15차 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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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당의 공고화를 위하여」(평양: 조선노동당 출판사, 1951), pp.105∼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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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제국주의의 고용간 첩 박헌영, 리승엽 도당 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 화국 정권전복 음모와 간첩사건 공판문헌」(평 양: 조선민주주의인민공 화국 최고재판소, 1956), pp.150∼160.
북한개요 02 09
의에서 김일성은 박금철과 이효순 등 갑산파 당료들을 반당·종파분자 로 몰아 숙청한데 이어, 1969년 1월 인민군당 제4기 제4차 전원회의 를 개최하여 민족보위상 김창봉, 인민군 총정치국장 허봉학 등을 유일 사상체계 문란 등의 이유로 숙청한 것이다.136)
1970년 11월에 개최된 제5차 당대회 이후부터 북한의 지도층은 완 전히 김일성 일파로 일색화되었다. 그러나 1973년 9월 김정일의 당비 서 취임을 계기로 김일성의 동생인 김영주를 비롯하여 김동규, 이용무, 유장식 등 권력세습을 반대하는 당료와 군부에 대한 숙청을 또다시 전개하였다.
이처럼 1960년대 말까지의 숙청이 김일성의 1인 지배체제 구축과 그 의 우상숭배를 위한 정적을 제거하는 것이었다면 1970년대에 들어와서 는 김정일 후계세습 체제 구축을 위한 정지작업이라는데 그 특징이 있다.
(2) 김일성 개인숭배
북한에서 김일성에 대한 개인숭배 실태는 영웅화 단계를 넘어서 신 격화로까지 진행되었다. 김일성 개인숭배 운동이 본격화된 것은 1958 년 이후부터이다. 김일성 개인숭배 운동은 과장된 찬양과 상징조작, 날조된 과거행적의 선전, 사상교육 등의 형태로 전개되었다.
김일성을 호칭할 때에는 그 이름 앞에 최상의 수식어, 최상의 경어 가 붙는다. 예컨대‘어버이 수령’에서‘김일성 그이는 한울님’에 이 르기까지 그를 호칭하는 수식어는 매우 다양하다. 1960년대 그에 대 한 우상화 초기에는 그의 이름 앞에 붙는 경칭과 찬양의 수사가 무려 180여자에 달하기도 하였다. 그의 이름에 새로운 수식어나 경어를 붙 여가며 인간의 위치에서 신의 경지로까지 끌어올렸다.
우리 민족의 근대사, 항일독립운동사는 김일성 중심의 혁명투쟁사 로 그 일가의 족벌사로 개작되었다. 북한의 신문·잡지와 각급 학교 교 과서, 학술서적 등 모든 출판물들은 반드시 김일성 교시로부터 시작 하여 내용이 서술되며, 출판물의 대부분은 김일성의 행적들을 수록한 개인숭배를 위한 선전책자이다. 북한의 헌법, 노동법, 토지법, 교육 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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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신문」사설(1969.
5.17):‘당의 유일사상체 계를 더욱 철저히 확립 하여 혁명적 사업 기풍 을 세우자’참조.
제 등 모든 법령들은 김일성의 저작품으로 되어 있다. 김일성 개인숭 배는 항일혁명투사, 조선의 해방자로서 김일성의 이미지를 심어주는 노력으로부터 출발하였다.‘세기와 더불어’라는 김일성 회고록은 북한 주민들에게 정치학습 및 사상교육의 기본교재로서 활용되고 있다.137) 김일성은 마르크스-레닌을 능가하는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상가 로 정치·경제·사회·문화·예술의 천재적 이론가로 칭송된다. 모든 주 민들은 먹고 입고 쓰고 일하는 것이 모두‘수령님의 은혜’로 이루어지 는 것으로 생각토록 강요되었다. 각 가정의 안방에는 반드시 그의 사 진을 걸어 놓고 북한 전지역에는 3만 5천 여개가 넘는 동상, 석고상을 세워 놓아 전 주민이 참배토록 하였다.
김일성 개인숭배운동은 그의 가계와 혈통에 대한 우상화로 확대되 어 직계 선조, 외가친척, 전처의 행적을 역사책에 기록하였으며 그들이 활동하였다는 장소는 혁명유적지·사적지로 지정되었다. 북한은 1992 년 4월 13일 김일성에게 유례가 없는 최고의 군사칭호로 대원수 칭호 를 수여함으로써 그에 대한 우상화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은 김일성 우상화 작업은 그가 사망한 후에도 김정일에 의해 지속되고 있다. 김정일은 김일성 시신을 금수산기념궁전138)에 안치하고 주민들로 하여금 참배토록 하고 있는 등 김일성의 권위를 빌어 자신의 통치기반을 확대하는데 활용하고 있다.
나. 김일성 사망과 유훈통치
1994년 7월 8일 오전 2시 김일성이 사망하였다. 북한 당국은 사망 34시간 만인 1994년 7월 9일 낮12시‘특별방송’을 통하여 이 사실을 발표하면서 사망원인에 대해“겹쌓이는 헌신적인 과로로 인하여 1994 년 7월 7일 심한 심근경색이 발생되고 심장쇼크가 합병되었다”고 발 표하였다. 북한은 사망 11일 후인 7월 19일 영결식을 갖고 김일성의 시 신을 과거 소련의 레닌, 중국의 마오쩌둥(毛澤東)의 경우와 같이 미이 라 형태로 금수산의사당(주석궁)에 안치하였다.
김일성이 사망한 이후 김정일은 노동당 총비서와 주석 등 김일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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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와 더불어」(조선 노동당출판사)는 1992년 4월 15일 김일성 80회 생일을 기해 발간되기 시작한 김일성 회고록 으로서 김일성의 항일 투쟁 활동내용을 담고 있다.「세기와 더불어」
는 1998년 6월 현재 총 8권까지 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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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수산의사당’이 당중 앙위원회·당중앙군사위 원회·국방위원회·중앙 인민위원회·정무원 공 동명의로‘금수산기념궁 전’으로 개칭(1995. 6.12)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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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고 있던 당과 국가를 대표하는 직책들을 3년이 넘는 기간 동안 승 계 받지 않았으며, 단지 군최고사령관 명의로 김일성 유훈139)만을 내세 우며140) 북한을 실질적으로 통치하였다.141) 이와 같은 김정일의 태도는 그의 등장 배경의 한계 및 가부장제적 정치문화와 함께 경제난을 비롯 하여 북한이 당면하고 있던 여러 가지 현실적 어려움에 기인했던 것으 로 보인다.
김정일체제는 김일성이 보유했던 수령의 지위와 역할을 그대로 승계 받은 후계체제에 기반을 두고 있다. 북한이 사회주의를 표방하면서도 국가를‘사회주의 대가정’으로, 김일성을‘어버이’로 부르는 등 가부장 적 정치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점도 고려의 대상이다. 특히 북한은 그 동안‘충효’라는 덕목의 가치를 강조하여 정치적으로 이용하였다. 김 정일은 이렇게 정치화된‘충효’덕목을 내세워 김일성에 대한 우상화를 더욱 강화하는 한편 각종 언론매체를 통해 자신을 김일성과 동일시하 는 선전을 계속하면서 김일성의 카리스마를 자신에게로 이입시키는 작 업에 주력하였다. 결국 김정일은 김일성의 유훈관철을 특히 강조하고, 김일성에 대한 최상의 애도를 통해 스스로‘충효의 최고 화신’임을 과 시함으로써 수령의 후계자로서 부족한 카리스마를 보완하고 승계 이후 에도 자신에 대한 북한주민들의 충성을 강화해 가는 길을 택했다. 이와 같은 현상은 김정일 정권의 공식 출범 시기에까지 이어져, 1998년 9월 에 개정된 헌법의 서문에“김일성 동지의 사상과 업적을 옹호고수하고 계승 발전시켜 주체혁명위업을 끝까지 완성하여 나갈 것이다”라는 규 정을 명시하고 김일성을‘영원한 주석’으로 받들며, 새 헌법을‘김일성 헌법’으로 명명하기에 이르렀다.
다. 김정일시대 정치
(1) 후계문제의 등장 및 김정일의 부상
김정일의 권력승계는 20여년에 걸쳐 장기적이고 단계적으로 진행되 어 왔다. 북한에서 후계문제가 거론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 11월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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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유훈’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밝 히지 않았다. 이는 유훈을 강조하면서도 통치의 폭 에 제한을 받지는 않으려 는 고려에서 였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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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조선노동당은 위 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당이다”(1995.10. 2), 「김정 일선집」(평양: 조선노동당 출판사, 199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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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부 부부장 최수헌의 제50차 유엔총회 기조연 설(1995.10.11)에서‘우 리 당과 국가의 최고영도 자’로 호칭한 점으로 미 루어 볼 때 김일성 사망이 래 김정일은 최고 지도자 로서의 통치권을 실질적으 로 행사하고 있었던 것으 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