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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진 형태/방식

한반도의 평화 및 통일을 위한 외교활동은 그 추진형태 혹은 방식

72_ The White House, A National Security Strategy of Engagement and Enlargement (Washington D.C.: July 1994).

에 있어서도 변화를 보였다. 시기적으로는 기본노선의 변화처럼 역 시 냉전종식을 전후한 때라고 할 수 있다. 냉전기에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외교활동은 주로 양자적 관계가 중심이었다면, 탈냉전 기에 들어와서는 양자뿐만 아니라 다자적 외교활동도 추가로 병행하 여 추진되었다고 하겠다.

단지 예외는 1970년대까지 지속된 유엔총회에서의 정례적인 한반도 문제 논의였다. 이는 6.25전쟁 참전으로 인해 정전체제의 법적 당사 자들 중 하나가 유엔이었고, 그로 인해 한반도 통일문제에 대한 지속 적인 보고와 논의가 총회결의로 자동적으로 정례화되어 있었기 때문 이다. 그런데 아래에서 보다 자세히 서술하겠지만, 표면상 상당히 열 띤 논쟁과 남북 별도의 결의안 제출 및 지지확보 경쟁의 반복에도 불구하고, 유엔 역시 진영중심 이념대결의 장으로 퇴색하면서 실질 적인 해결에는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래서 결국 1970년대 중반 이후 유엔총회의 재결의에 의해 한반도 문제의 정례적 상정 중지를 결의함으로써 불필요한 외교력 낭비를 중단할 수 있었다.

사실 2차 대전 이후 안보 및 지역문제 논의와 관리 면에 있어서 아시아지역이 유럽과 대별되는 가장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양자 대 다자적 질서이다. 이는 이슈의 특징도 영향이 있지만 역내 국가들의 외교적 선호도와 역사적 관계가 더 큰 영향을 미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한반도 문제도 결코 예외가 아니어서 대부분의 기간 동안 양자 관계에 의해 주로 논의되고 관리되어 온 경향이 크다. 다만 탈냉전기 에 접어들면서 진영 결속에 대한 부담이 줄어들었고, 그로 인해 다자 적 기제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고 할 수 있다. 각 시기별로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가. 냉전기

앞에서 논의한 것처럼 냉전 기간 동안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역대 한국정부의 외교활동은 대체로 남북한 대결을 전제로 한 상황 에서 북한도발에 대한 방어 및 억제와 통일문제에 대한 한국 입장지 지 확보가 주된 내용이었다. 특히 6.25전쟁이 종전이 아니라 정전상 태로 지속되었고, 지리적으로도 아시아지역 냉전체제의 최전방에 위 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으로서는 전쟁재발 방지와 군사적 안전확 보가 최대의 현안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냉전기 평화‧통일 외교는 일차적으로 소극적 평화의 유지를 위한 안보외교의 성격이 강했고, 그를 바탕으로 통일방안 지지확보와 경제건설을 위한 외교활동이 추 가로 보태졌다고 할 수 있다.

냉전기의 안보외교라고 한다면 냉전체제의 구조적 특성상 당연히 대북 봉쇄 및 견제를 위해 미국과의 군사동맹 결성 및 강화가 최우선 시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미국과 소련이 대립적 양극체제를 이루 고 서로가 세력권확장 경쟁을 하는 상황이긴 했지만 한‧미동맹 체결 이 결코 저절로 이루어진 손쉬운 외교성과는 아니었다. 이는 당시 미 국이 아태지역에서 한국의 전략적 가치를 그리 높게 평가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미국은 일본을 아태지역에서 대소련 봉쇄 및 억제의 전초기지로 간주하고, 전후 원래 계획했던 일본의 농업국화 를 변경하여 산업화를 지원하고 일본과의 군사동맹도 강화해 왔던 것이다.

미국의 대한반도 전략이 그렇게 불리했고, 국력 면에서도 대북 열 세였던 당시 정황을 감안한다면 이승만 정부에게 미국과의 동맹결성 은 정말 절실하고 중차대한 외교안보 목표였다. 그런 연유에서 이승 만대통령이 한편으론 “북진통일”을 주장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강경수를 통해 한‧미동맹 결성을 촉구하는 대 미 외교적 압력을 행사한 것이다. 즉, 미‧중‧북한간 정전협상에서 이 미 합의된 포로 전원송환 약속을 한국정부가 임의적으로 깨고 원하 는 많은 포로들을 석방함으로써 한국의 묵시적 동의 없이는 미국이 원하는 정전협정의 체결이 어려워질 수도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그 리고 한국의 묵시적 동의는 한‧미 상호방위조약의 체결이 있을 때 가능하다는 의사표시였다. 반공포로 석방 외에도 미국의 확고한 안 보공약 담보를 위해 전쟁 초기 이승만대통령은 한국군에 대한 작전 지휘권을 맥아더 유엔군 및 미군사령관에게 이양하기도 했다. 그런 노력의 결실로 1954년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되었고, 그를 근간 으로 미군의 한국 내 주둔과 미국의 군사원조도 합의되었다.

그 후 박정희 정부에 들어와서는 한반도 평화 및 통일을 위한 안보 외교는 한‧미동맹을 근간으로 하되, 보완적으로 일본과의 관계까지 정상화하여 안보를 보다 튼튼히 하는 한편 경제개발을 위한 협력도 강화하는 쪽으로 전개되었다. 또한 같은 진영의 국가들인 호주, 뉴질 랜드, 필리핀 등과도 우호적인 양자관계를 맺어 안보외교를 더욱 확 고히 하였다.

요컨대, 흔히 냉전기 동북아 지역질서는 소위 “북방삼각” 대 “남방 삼각”의 형상으로 묘사되곤 했다. 즉, 남북한이 각각 꼭짓점이 되어 북쪽에는 소련, 중국, 북한이 삼각형의 협력관계를 형성하고 남쪽에 는 미국, 일본, 한국이 삼각형의 협력관계를 형성하여 서로 대치하는 형국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는 개념상 혹은 전략적 구도상 그런 삼각 관계를 상정한 것일 뿐, 법적으로나 제도적으로는 3자적 협력관계는 아니었다. 북방삼각에 속한 소련, 중국, 북한간에도 북한과 중국 그리 고 북한과 소련간 각기 별도의 양자동맹이 체결되었지 북‧중‧소 3국

이 함께 동맹을 체결한 것은 아니었다. 남방 삼각의 경우도 물론 마찬 가지이다. 한‧미‧일간에는 3자동맹이 성립되지 않았으며 한‧미와 미

‧일이 각기 양자동맹을 맺고 전략적으로 소련을 비롯한 공산진영에 맞서는 형국을 이루었을 뿐이다.

사실 동북아를 벗어나 아태지역 전체의 전략적 구도를 생각해보면 양자적 관계의 질서가 더욱 명확해진다. 냉전기 아태지역의 안보협 력질서를 묘사할 때는 주로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전거바퀴 모델이 많이 사용된다. 국가들간 연결관계를 소위 “중심축(Hub)-바퀴살

(Spokes)” 형태의 자전거바퀴에 빗대어 묘사한 것이다. 즉, 중심축에

미국이 위치하고 한국, 일본, 호주, 필리핀, 대만 등의 국가들이 바퀴 살 끝에 각각 미국과 실질적 혹은 공식적 양자동맹 관계를 맺고 위치 하면서 대소견제 협력체제를 형성하는 형상이다. 여기서 물론 주변 국들간에도 동일 진영국가들로서 친선우호관계는 성립되긴 하지만, 하나의 단일동맹체로 결성되어 있는 것은 아니며 잘 해야 때때로 사 안별(ad hoc) 군사협력이 가능한 정도인 것이다. 그래서 결국 이 자전 거 바퀴 모델의 핵심은 아태지역에서 미국의 동맹체제는 다자가 아 니라 양자관계로 구성된다는 사실이다. 종합하면, 삼각형 모델이건 자전거바퀴 모델이건, 냉전기간 동북아지역의 안보질서는 다자가 아 닌 양자적 관계를 근간으로 하는 진영내 협력과 진영간 대립이 특징 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지역질서의 구도 속에서 중소국인 한국이 다른 형태의 형성을 모색할 역량이 있는 상황도 아니었기 때문에 당 연히 한국정부의 평화‧통일 외교도 당연히 양자적 관계를 통해 주로 추진되었던 것이다.73 또한 의지 면에서도 한국의 입장에서는 대북

73_ 물론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예외는 있었다. 대표적인 예로 대유엔 외교와 비동맹 외교를 들 수 있다. 두 경우 모두 지나치게 미국과의 양자동맹 관계에만 치중한

방어와 억제가 가장 일차적인 국가목표였고, 그를 바탕으로 경제건 설을 서둘러 북한과의 체제경쟁에서 승리하려는 전략을 취했기 때문 에 굳이 다른 형태의 안보질서를 달리 추구하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 탈냉전기

탈냉전기에 접어들어서도 동북아의 기본질서는 여전히 양자적 관 계가 지배적이었고, 한국의 외교노력도 근간은 여전히 한‧미동맹을 중심으로 한 양자관계였다. 이는 일차적으로는 세계적인 탈냉전의 분위기 속에서도 여전히 휴전선을 중심으로 남북한간 냉전적 대치상 태가 지속되고 있는 데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즉, 안보에 대한 우려 가 현실로 상존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으로서는 쉽게 한‧미동맹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인 것이다. 한국정부와 많은 한국 국민들이 보다 확실한 영구적인 평화체제가 한반도에 구축될 때까지는 주한미군과 한‧미 군사협조체제는 안전망으로서 한국안보에 꼭 필요하고, 다자 적 안보협력은 한‧미동맹의 보완재일 수는 있어도 대체재일 수는 없 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굳이 냉전기 형성된 양자 중심 질서의 관성이 아니더라도, 대외문제 해결에 있어서 동북아의 역내 국가들 대부분이 다자보다는 양자적 접근을 더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는데 또 다른 원인이 있다.74 그런 선호는 협상의 번거로움, 복잡함, 산만함 등 다자적 접근의 절차 에서 연유되는 문제도 있지만, 역내 국가들의 경우 제3자의 개입보다

당시 외교의 부정적 영향과 다자적 외교의 병행 필요성을 보여준 사례들이라고 할 수 있다.

74_ 동아시아 다자안보협력에 대한 논의에 관해서는 황병무 외, 동아시아 안보공동체 (서울: 나남, 2005)를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