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1. 도시 공간 경험의 변화
“
여름날 오후의 고요함 속에서 지평선 위에 걸쳐진 산과, 그림자를 만드는 나뭇가지 하나를 보는 것, 이들과 보는 이들이 하나로 연결되는 순간, 그보다 그 순간 바라보고 있 다는 것은 바로 그 산의 그리고 나뭇가지의 아우라를 숨 쉬게 되는 것이다.” - 벤야민 (Walter Benjamin)
7. Frederick Law Olmsted는 1822년 코네티컷에서 태어나 14세 때 시력이 심하게 나빠진 이후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 그의 나이 18살에 뉴욕으로 옮겨가며 과학 영농에 관련된 직업을 가졌으나 제대로 자 리를 잡지 못한 후 그의 형과 함께 무역 상인으로 일하며 유럽을 여행하였고, 신문 특파원으로서 남미를 여행 하며 몇 권의 책을 내기도 하였다. 뉴욕의 컬럼니스트와의 몇 번의 교섭을 통해 1857년에 뉴욕 센트럴파크의 개발 계획의 총 감독자로 임명되었다. Olmsted는 환경을 개량하기 위해 공공 공원에 미술을 적용한 미국 최 초의 계획에서 책임건축가 직책을 맡았다. 이 공사는 광범위한 관심을 끌었고, 그 결과 그는 이후 미국에서 추 진된 거의 비슷한 성격의 주요공사 대부분에 참여하게 되었다.
1861년에 센트럴파크 설계를 마치고 미국 보건위원회(現 적십자)의 행정비서로서 시민전쟁 중의 미국 연합군 을 원조하는 일을 하였다. 1863에는 채금업의 책임자로서 샌프란시스코에서 일하게 되었고 후에 뉴욕으로 돌 아와 프로스펙트파크(1865-1876), 시카고의 리버사이드단지, 버팔로파크(1868-1876)와 나이아가라 폭포 공원 계획(1887)에 참여하였고 1903년 8월 28일 죽었다. 그가 세운 회사는 1980년까지 존속하며 550건에 달하는 프로젝트를 이행하였다. - wikipedia
김응숙의 해석에 따르면 벤야민의 이러한 경험은 대상물과 자아의 합일에 해당 하는 경험, 즉 어떤 전체를 경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험은 현재적 시간, 즉 시간과 공간이 어느 차원에서 하나가 되는 순간에 사물의 아우라적인 이미지가 개 인의 기억이라는 창고에 저장되는 것을 의미한다.8 이는 사물의 인지 혹은 공간의 인지를 통해 대상을 파악하고 그에 따른 행동을 의미하는 체험과 구분되는 감성적 그리고 기억과 스키마가 아우러진 종합적인 기억의 과정을 의미한다. 지금의 정 보화 시대에 점차 경험이 강조되는 것은 물리적 환경에서의 인지적 한계를 벗어난 수많은 정보적 관점, 그리고 그 정보의 소통에서 오는 타인과의 관계성 속에서의 간접 경험 등에 의해 전체를 아우르는 아우라적 이미지의 변화에 기인한 것이다.
즉, 지금의 시대에 있어 하나의 공간과 대상에 대한 경험은 즉각적인 인지와 반응 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차원에서의 정보적 반응과 함께 이루어진다. 새로운 환 경에 적응하는 과정에 있어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져 왔던 지각과 감각 그 리고 인지와 기억의 과정의 재해석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지금까지의 기본적인 경험의 과정은 감각을 통해 일차원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말단의 기능인 수용의 과정의 거쳐 뇌에서의 정보적 처리를 통해 이것이 어떠한 자극인지 그리고 그에 따른 기존의 학습 혹은 본능에서 오는 여러 사전적 정보를 통해 어떤 자극인지를 판단하게 되는 것을 지각(知覺)으로 이해되어진다. 지각은 결국 사람이 환경 혹은 어떤 특정 대상과 사건에 대한 감각의 통합적 과정을 통해 판단의 과정을 거친 것을 의미한다. 그에 비해 감각은 외부로부터의 자극 혹은 신 체적 반응에 의한 것을 포함한다. 즉, 학습이나 과거의 기억 혹은 스키마와 같은 인지적 과정을 거치지 않은 전체적 내부, 외부의 자극에 대한 반응을 의미한다.
따라서 여기에는 외기에 대한 인상(印象)을 포함하나 벤야민의 견해에 따르면 경
ㄷ. 김응숙, “문화연구와 일상경험의 세계 - 발터 벤야민의 매체개념과 수용에 관한 논의”, 한국언론학보, 제 42-3호, 한국언론학회, 1998, p. 70.
험은 여기에 감정적이고 감성적인 자기 소화의 과정을 거쳐 기억의 기제로 활용 되는 어떤 것을 의미한다.
심리학적 견해에 있어서도 감각과 경험은 분명한 차이를 가진다. 일반적으로 의식 과정 속에서 복잡한 이해의 과정 혹은 시간적, 공간적 관계를 포함한 전체적 인 형태를 갖춘 것을 경험이라 일컫고 그러한 공간적 시간적 관계 혹은 과정을 가 지지 않은 자극에 대한 지각을 감각으로 이해한다.
공간에서의 경험을 이야기 할 때 이러한 감각과 경험 그리고 지각과 인지의 차 이는 많은 시사점을 던져 준다. 우선 일반적으로 우리가 어느 공간에서 느끼게 되 는 가장 일차원적인 자극은 사용자에게 감각적으로 수용된다. 그리고 그 감각을 기반으로 우리는 기존의 경험과 기억 그리고 여러 가지 과정을 거쳐 그것을 해석 하고 그 과정에서 자기와 일체화되는 경험으로 소비한다. 따라서 디자이너가 경 험을 이야기 할 때 단순히 미적 관점에서의 형태적 접근은 감각적 작용에 기대는 행위에 불과하다.
자연스럽게 디자이너는 그 공간에서의 경험을 기획하고 경험을 만드는 것을 목 적으로 한다. “이는 사람들이 그 공간을 기억하게 하고 싶다”와 같은 단순한 목 적과 일치한다. 혹은 사람들이 그 공간을 좋다고 판단하게 만드는 것 또한 경험을 만드는 의도가 된다. 즉, 사람들이 자신이 만든 공간에 와서 어쩠다라고 느끼기 만을 원하는 디자이너는 없을 것이다. 자신의 의도를 이해하는 것 까지를 바라기 는 어렵더라도, 적어도 그것이 전달하는 감성적 판단을 포함하여 좋아하기를 바 라게 된다. 혹은 적어도 단순히 반응하는 것이 아닌 그것을 생각하기라도 바랄 것 이다. 이는 결국 디자이너가 만들어야 하는 것이 단순한 지각에 의한 감각적 반응 이 아닌 공간을 매개로 사용자의 기억과 판단 그리고 해석에 의해 기억하고 즐기 는 경험적 공간으로의 완성을 의미한다.
그 차이가 무엇이던 공간이 의미를 가지고 사람들의 삶을 반영하기 위해서는 그 장소로서의 공간에서 행위와 행태 그리고 감각과 반응에 대한 과정을 통해 경험 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경험에 대한 이해는 또 다른 많은 질 문을 만들게 된다. ‘과연 디자이너가 타인의 기억과 과정, 판단을 이해하고 그것 과 일체화 된 아우라를 형상화 할 수 있는 것일까?’, ‘사람들이 모두 다른데 어떻 게 일반적인 견해가 존재하게 될까?’, ‘타고난 지역이 다르고 다른 문화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같은 판단적 경험을 줄 수는 없는 것일까?’
이 많은 질문이 결국 지금까지의 디자인 담론과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연결 고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찾기는 어렵지 않다. 좁은 의미에서의 본격적인 디 자인의 시작을 바우하우스라고 볼 때 - 물론 연구자를 포함 많은 이들이 디자 인의 용어적 시작에 불가하다고 인정할지라도 - 인간의 이성적 판단에 의한 합 리적인 질서와 조화가 결국 보편타당한 답을 사람들에게 제공할 수 있고, 그 답 을 찾기 위해 지금까지의 예술적 혹은 합리적 학습의 습득과 연구가 필수적이라 고 본 그들의 이상적 접근은 쉽게 인정하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물론 이것 은 분명하게 21세기를 거치면서 많은 디자인에서의 실험과 담론이 그것의 한계 를 극복해 온 이후의 결론이라는 전재에서 보더라도 쉽게 사람들의 생각을 합리 적으로 유도 한다는 것이 가능하지도 가능해서도 안 되는 것임에는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편타당하고 절대적인 감성을 움직이는 이성적이고 합리 적인 답이 있다고 믿어온 모던 디자인을 단순히 과거의 오류로 폄하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 이유는 그러한 믿음에서 만들어진 많은 공간이 물론 모든 이들에게는 아닐지라도 사람들이 순수한 감성의 전체적 결합을 포함한 경험을 그것도 매우 좋 은 경험을 전달하는 많은 선례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 이후의 모던 디자인에 반하는 포스트 모던 혹은 해체로 불린 많은 작업 이 오히려 감성적 반응에 기대는 새로운 형태적 자극 실험에 국한 된 사례가 더 많 다는 것에서도 이 질문이 그렇게 쉽게 일반화 될 수 없다는 반성을 하게 된다. 어 쩌면 그 이유는 분명하게 이해 된다. 우선 모던 디자인 이후의 디자인에서 추구했 던 실험들이 결국 모던 디자인을 극복하고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반응적 대안에 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즉, 그것이 진정한 경험을 만드는 혹은 좋은 공간을 만 드는 것에 그 근간을 두었다고 믿어 주더라도, 1980년대 이후 새로운 개념으로 서의 모던 이후의 디자인이 추구했던 기본적인 이상은 보다 근본적인 사람들의 경 험적 가치가 아닌 디자인에 반하는 디자인 혹은 새로운 형태와 구조를 만드는 디 자인에 더 주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역사상 가장 명쾌한 발전의 과정을 설 명해 낸 해겔의 정반합의 관점에서 이러한 실험이 의미가 없었다고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분명 필요했고 의미를 가지며, 그 의미와 필요는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것 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본질적인 인간과 공간에 대한 경험적 가 치에 대한 질문, 즉 사람들에게 좋은 경험을 주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
디자인 행위의 가장 큰 목적은 결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만드는 것이다. 이 는 매우 단순하지만 어려운 명제이다. 자신이 좋아 하는 것이 아닌 사람들이 좋아 한다는 것에는 이미 사람들을 이해해야 하는 기본적 전제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결국 자신의 감성과 기억 그리고 경험을 온전히 제어할 수 없는 존재라 는 차원에서 이 문제는 매우 심각해진다. 구조주의에서 후기 구조주의로 넘어오 며 대두된 개인의 이성적 판단과 행위에 대한 구조적 한계는 쉽게 사람들이 인지 하고 극복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예를 들어 앞서 언급한 현대 건축과 조경 그리고 공간 디자인 모든 분야에 가장 중요한 사건이자 계기로 받아들여지는 라빌레뜨 공원(Le Parc de la Villette) 에서의 베르나르 추미(Bernard Tschumi) 실험이 성공적이었는지에 대한 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