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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宋代 貢瓷에 대한 인식과 定窯와 汝窯의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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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宋代 貢瓷에 대한 인식과 定窯와 汝窯의 성격

金 允 貞 (龍仁大)

Ⅰ. 머리말

Ⅱ. 北宋 황실의 貢瓷 사용과 처 리 방법

Ⅲ. 銘文 내용으로 본 定窯 瓷器 의 성격

Ⅳ. 北宋 말기 定窯와 汝窯의 성격

Ⅴ. 맺음말

Ⅰ. 머리말

송대 황실용 자기의 제작 체계에 대한 상황을 알려주는 문헌기록은 葉寘의

坦齋筆衡과 顧文薦의 負暄雜錄이다.

1) 더욱이 북송대 도자 연구의 쟁점은 이들 기록에 언급된 여요와 관요를 어떻게 해석하고 인 식할 것인가의 문제일 것이다. 즉, 섭치

탄재필형의 내용을 보면, 송

황실에서 정요 백자를 사용하다가 ‘芒’ 때문에 사용하지 못하고, 당시 가장 좋은 품질의 청자를 만들던 여요에서 황실용 청자를 만들게 했다 가 이후에 京師에 자체적으로 관요를 설치하였다는 내용이다.2) 이 기

1) 葉寘의 坦齋筆衡과 顧文薦의 負暄雜錄의 내용은 대동소이하기 때문에 섭 치의 기록만을 가지고 화두를 던지고자 한다.

2) (元) 陶宗儀 撰, 南村輟耕錄 卷29 (上海書店印行, 1985), “宋葉寘坦齋筆衡 云, … 本朝以定州白磁器有芒不堪用, 遂命汝州造靑窯器, 故河北唐鄧耀州悉有之, 汝窯爲魁, 江南則處州龍泉縣窯, 質頗麄厚, 政和間, 京師自置窯燒造, 名曰官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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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에서 북송 황실에서 사용한 자기를 생산한 가마는 정요→여요→관요 로 이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내용에 등장하는 여러 가마를 정 의하고 해석하는 관점은 학자들마다 여러 견해가 다양하지만 본고에서 는 그 부분에 대한 재론은 하지 않고 관점을 달리하여 定窯와 汝窯의 성격을 규명해 보고자 한다.

북송 황실과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汝窯와 官窯의 성격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연구와 관점을 달리하여, 섭치의

탄재필형에 언

급된 ‘여주에 청요기 제작을 명하였다’라는 시점에서 그 이전에 북송 황실에서 사용되던 자기들이 어떻게 수급되고 처리되었는지를 인지하 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여주 청요기 이전에 북송 황실에서 사 용되던 정주 백자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를 고민해야 여주 청요기 의 성격을 규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정요와 여요 자기의 제 작 체계에 대한 이해는 북송대 貢瓷와 官窯, 또는 貢窯에서 官窯로 가 는 과도기적인 상황들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먼저, 문헌기록을 통해서 11세기 북송 황실의 자기 수급 방법과 처리 방법을 살펴보고, 문헌에 언급된 貢瓷 중에서도 정요 자기의 성 격을 명문 자료를 중심으로 파악해 보고자 한다. 정요 자기는 徐兢이

高麗圖經에서 언급했던 “定器制度”와 관련하여 동시기에 고려청자를

이해하는데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 특히, ‘有芒不堪用’에서 ‘芒’의 의미 를 재고해 본 후에, 명문 자료의 성격을 통하여 북송 말기 정요와 여 요의 성격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Ⅱ. 北宋 황실의 貢瓷 사용과 처리 방법

(본조에서는 정주 백자기가 有芒하여 사용하지 못하고, 마침내 여주에 청요기 를 만들도록 명하였다. 하북 당주ㆍ등주ㆍ요주에 청자가 있는데 여요가 으뜸 이고, 강남 처주 용천요는 질이 거칠고 두껍다. 정화연간(1111~1117)에 자체 적으로 경사[개봉]에 가마를 설치하여 (자기를) 만들었는데, 이를 관요라고 한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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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會要輯稿

食貨에서 ‘자기고’에 대한 기록을 중심으로 북송대 공 납 자기의 종류, 사용, 처리방법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3) 이 기록들을 살펴봄으로써 여요에서 제작된 청자가 휘종연간(1101-1125)에 황실 에서 사용되기 이전에 황실에서 사용된 자기의 종류와 납입 과정과 방 법 등을 파악할 수 있다. 즉, 여요 청자가 황실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이유가 섭치의 기록대로 정요 자기의 ‘有芒’ 때문이었는지, ‘유망’의 의 미가 무엇인지를 좀 더 구체적으로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 宋會要輯稿第 一百四十六冊 食貨五二之三七

甆器庫在建隆坊, 掌受明越饒州定州靑州白甆器及漆器以給用以京朝官三 班內侍二人監庫.

자기고는 건륭방에 있는데, 明, 越, 饒州, 定州, 靑州의 白甆器와 漆器 를 받아서 給用을 담당하고 경조관과 삼반내시가 창고를 감독하였다 북송대 명주[절강성 영파], 월주[절강성], 요주[강소성 경덕진], 정 주[하북성 곡양], 청주[산동성]4) 등에서 백자기와 칠기를 자기고에 공 납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요주와 정주를 제외하고 월주는 청자를 생산하던 가마였으며, 명주와 청주에서 정확하게 어떤 품목을 공납했 는지는 불분명하다.5)

송대 운영되던 많은 가마에서 자기가 공납되거나 세금이 징수된 사 실은 여러 문헌기록과 명문자료 등을 통해서 확인된다. 경덕진은 원래

3) (淸) 徐松 纂輯, 宋會要輯稿第一百四十六冊, 食貨五二之三七 (臺北: 新文豊 出版公司編輯部, 民國65[1976]).

4) 청주는 북송 京東東路 治所였으며, 경제 문화의 중심이었다. 현재 산동성 益 都이다. 絲織業이 발달해서 비단이 유명하였으며, 조정에서도 이곳에 場院을 설치하여 고급 비단을 직조하였다. 산동반도의 모든 화물이 모이는 집산지였 다 (虞雲國 主編, 宋代文化史大辭典 下, 北京: 漢語大辭典出版社, 2006, p.

727 참조).

5) 북송대 공납제도는 지방 官府가 각 지역에서 산출되는 공물을 收買한 후에 중앙에 上貢하는 체제였다. 그러나 중앙정부에서 규정한 토공의 종류와 양이 지방 실정과 맞지 않거나 산출된다고 하여도 양이 부족하여 다른 지역에서 구 매하여 上貢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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饒州였다가 景德元年(1004)에 鎭이 설치되었고, 元豐5년(1082)에 瓷 窯博易務가 설치되었다. 경덕진 호전요지에서는 “迪功郞浮梁縣丞臣張 昻措置監造”의 명문이 있는 청자병의 저부편이 출토되기도 하였다.6)

元豐九域志에는 이미 전성기가 지난 越窯와 邢窯에서도 熙寧元年 (1086)과 元豐年間(1078-1085)에 자기를 공납한 기록이 있으며, 耀 州窯도 원풍연간(1078-1085)과 崇寧年間(1102-1106)에 자기를 공납 한 기록을

元豐九域志와 송사

지리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정요 자기도 휘종 대관 3년(1109)에 貢瓷로 사용된 기록으로 상식국에서 사용하는 자기였음을 알 수 있다.7) 원풍연간(1078-1085) 즈음인 11 세기 후반 경에 중국 전역에서 가마가 발전하는 배경에 神宗(1068- 1085)이 國庫를 확대하면서 재원을 충분하게 확보하려는 적극적인 富 國政策에 기인했다는 견해도 있다.8)

창고 감독은 경조관과 삼반내시 두 사람인데, 경조관은 일반 관리를 의미하며, 삼반내시는 삼반원에 속한 내시를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되 는데 원풍5년(1082) 신관제에서 삼반원이 다른 관사에 병합된다.9)

宋會要輯稿의 다음 기록에서는 자기고에 공납된 자기들을 어떻게

선별했는지에 대한 기준이 기재되어 있다.

6) 肖發標, 「再論 “張昻監造”貢瓷的燒造年代 -兼與李放先生商榷」 (故宮博物院院 刊6, 北京: 故宫博物院, 2006), pp.36-38. 이 글에서는 적유랑 부량현승 장 앙이 자기 제작을 감독했던 시기가 소흥8년(1138)에서 소흥25(1155) 경의 남 송 초기로 보는 기존의 견해와는 달리 문헌 고증을 통하여 북송 말기인 1116 년에서 1119년경으로 보고 있다.

7) 宋會要輯稿崇儒 七之四九, “徽宗大觀三年 十月二十二日詔 諸路州軍見貢六 尙局供奉物多不急之用, 兼聞㧰造科配勞民費財, 可令殿中省幷提擧六尙局同共相 度具的確合用名色外余停貢…熙寧(1068~1077)詔書 首罷四方歲貢, 明訓具在, 祇若先猷蔽自朕躬理宜損益, 應殿中省六尙局諸路貢物可止依今來裁定施行…尙食 局…中山府瓷中樣矮足裏撥盤, 龍湯盞十一雙.”

8) 蔡玟芬, 「論‘定州白瓷器,有芒不堪用’句的眞確性及十二世紀官方瓷器之諸問題」

(故宮學術季刊15, 臺灣: 國立古宮博物院, 1988), pp.69-70 참조.

9) 三班은 북송초에 供奉官, 左ㆍ右班殿直인데, 宣徽院에 속한 點檢三班公事를 설치하였다가 987년에 삼반원이 되었다. 기록에 三班使臣이 송초에 300명에 서 신종 원풍3년(1080)에 11,600명까지 늘어나는데, 원풍5년(1082)에 시행된 신관제에서 吏部侍郞右选에 병합된다 (虞雲國 主編, 앞의 책, 上, p.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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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宋太宗淳化元年七月 詔甆器庫納諸州甆器, 揀出缺璺数目, 等第, 科罪 不及, 一釐特與除破, 二釐免決 勒陪却給破者, 三釐笞四十, 四釐笞五十, 五 釐杖六十, 六釐杖七十, 七釐已上不計多少杖八十.

순화원년(990) 조서에 자기고에 貢納된 모든 州의 자기는 흠과 금이 간 개수를 가려내어 등급을 매기고, (등급에) 미치지 못하면 죄를 주었다.

(흠이) 한 개는 특별히 취소해주고, 두 개는 勒陪, 却給(공급을 중지함), 破者(깨뜨리는 것)로 결정되는 것을 면해주고, 세 개는 笞刑이 40, 네 개 는 태형 50, 다섯 개는 장형 60, 여섯 개는 장형 70, 일곱 개 이상은 수 를 따지지 않고 장형 80이다.

위의 기록을 보면, 북송 초기인 990년에 황실 자기고에 납입되는 자기의 선별[揀出] 기준이 缺과 璺의 수에 따라서 정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자기고에 납입되는 자기를 선별하는 기준이 모 양이나 규격, 색에 있는 것이 아니라 흠[缺]과 금[璺]이 간 개수를 중 요하게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백자와 칠기를 공납하는 諸州의 담당자는 흠과 금이 간 개수에 의해서 笞刑과 杖刑을 받는 것을 알 수 있지만 각 주마다 납입되는 전체 자기나 칠기의 수량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다음 기록에는 선별 기준에 미치지 못한 자기들을 처리하는 방법이 기재되어 있다.

㈐ 眞宗景德四年九月 詔甆器庫除揀封樁供進外 餘者令本庫將樣赴三司行 人估價出賣 其漆器架閤收管品配供應準備供進及榷場博易之用.

경덕4년(1007) 조서에, 자기고에서 봉장ㆍ공진으로 가려진 것을 제한 외에 나머지 것은 본고가 형태(樣)를 三司에 알려서 행인이 가격을 매겨 판매하게 하고, 그 칠기는 架閤(庫)가 거두어 보관된 물품들을 供進 및 榷場 博易(물물교환)에 이용하도록 준비하여 공급한다.

공납된 이후에 일단 선별된[揀] 자기는 封樁과 供進에 사용되고 있 다. 봉장은 궁정에 공납되는 물품들 중 일부를 쓰지 않고 비축하였다 가 긴급히 필요할 때 사용하기 위해서 준비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는 “태조가 건륭3년(962)에 봉장고를 설치하는데, 황제가 형호(현재 湖北 武昌에서 湖南 長沙 일대)ㆍ서촉에서 금백을 거두어서, 별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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內庫에 저축하는 것을 봉장이라고 하며, 연말에 사용한 나머지를 모두 봉장고에 넣어서 군대 기근을 준비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10) 공진의 범위와 개념은 좀 더 확인이 필요한 부분이지만, 자기고의 특 성상 供御와 유사한 의미로 추정된다. 諸州에서 土貢된 각종 물품은 황실에서 소비되는 외에 天地ㆍ宗廟ㆍ陵寢에 薦獻하는 등의 의례용, 戶部 判部事가 담당하여 元會때 하는 “陳于庭”나 ‘齎擎陳列’에 사용되 었다. 元會陳列은 궁정 안에 토공을 진열하여 황제에게 공물의 品質과 制度[형태와 규격]의 可否를 허락받는 행위인데, 황제의 국가 통치권 을 의미하는 것이다.11) 본고에서 供進의 개념은 이러한 황실의 제반 활동에 사용되는 자기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규정해 보고자 한다. 이러 한 용어 문제는 앞으로 송대 자기 연구에서 황실용과 궁정용 자기를 구분하여 구체적인 개념 정의가 요구되는 부분이다.

문제는 선별되지 못한 자기들이 어떻게 처리되는가이다. 揀擇되지 못한 자기는 국가의 재정을 담당하던 三司에 알려서 行人이 가격을 매 긴 후에 出賣되거나 칠기의 경우에는 榷場에서 물물교환의 용도로도 사용되고 있다. 여기서 행인은 상인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며12), 공 납되었다가 선별기준에서 탈락한 자기들은 기본적으로 三司와 연결된 상인들에 의해 가격이 매겨져서 판매되거나 각장에서 물물교환에 사용 되었음을 알 수 있다.13) 三司는 土貢을 관리하는 송대 주요 기구였으 며, 元豐改制 이후에는 삼사가 아니라 戶部가 관리하는 체제로 변화하 였다. 뒤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결국 북송 궁정에서 사용되는 자기는

10) 宋史紀事本末 太祖, “建隆以来諸政 三年八月,置封樁庫. 帝平荆湖ㆍ西蜀, 收其金帛, 别爲內庫儲之, 號封樁. 凡歲終用度之餘皆入之, 以为軍旅饑饉之备.”

11) 單鵬, 「宋代土貢制度考略 -以常貢爲中心」 (江蘇科技大學學報3, 江蘇省 镇 江市: 江蘇科技大学, 2007), pp.28, 31 참조.

12) 姜伯勤, 「敦煌文書中的唐五代“行人”」 (中国史研究 2, 北京: 中國社會科学 院, 1979 참조). 당대에 行人의 의미는 세 가지로 사용되었는데, 첫째 군사나 士兵, 둘째 工商人户, 셋째 일반적인 旅人, 路人, 使人이다.

13) 王光堯, 「從官手工業制度看汝窯」 (中國古代官窯制度, 北京: 紫禁城出版社, 2004), p.68. 막대한 경제적인 이윤을 창출하는 出賣는 정부가 가마를 설치해 서 자기를 제작하는 원동력이라고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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土貢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常貢制度와 밀접하게 관련된다.

공납되었다고 하더라도 선별 기준에 미치지 못한 자기가 시장에 팔 리는 상황은 북송대 貢瓷가 거치는 절차 중의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여요 자기의 揀退와 出賣도 이러한 맥락 속에서 이해할 수 있으며14), 여요 자기도 이전에 다른 공납 자기들과 같은 방식으로 처리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정요에서 제작된 <‘官’銘백자>는 이러한 과정에서 민간에 유입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官’銘백자>가 출토된 무덤의 피장자가 대부분 귀족 관료 계층이고 일반 서민은 극히 적어서 <관명 백자>의 주요 소비계층은 중상류층이었음을 알 수 있다.15) <도 1,2>

마지막으로 자기고가 희령3년(1070)에 雜物庫에 병합되었다고 기재 되어 있다.

㈑ 神宗熙寧三年三月 詔倂甆器庫入雜物庫管句 事任雜物庫.

희령3년(1070) 조서에, 자기고가 잡물고에 병합되어, 잡물고에서 사무 를 담당하였다.

14) (宋) 周煇 撰, 淸波雜志校注 卷5 (唐宋史料筆記叢刊本, 中華書局, 1994),

“又汝窯, 宮中禁燒, 內有瑪瑙末爲油, 唯供御, 揀退方許出賣, 近尤難得.”

15) 謝明良, 「有關‘官’和‘新官’款白瓷官字涵義的幾個問題」 (中國陶瓷史論集, 臺 灣: 允晨文化, 2007), p.96.

<도 1> 백자연판문유개호 북송 至道 元年(995) 河北 定州 淨衆院塔基 출토

<도 2> 도 1의 바닥 ‘官’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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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물고는 내외에서 운반되는 잡물을 담당하는 대부시의 하위 창고 였다.16) 자기고가 잡물고에 병합되는 것은 기본적으로 자기고의 역할 이 축소되거나 무의미해졌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11세기 후반 에 供進 자기의 수급 방법이나 관리 체제에 변화가 있었을 것으로 추 정된다. 이와 관련하여 원풍연간(1078-1085)에 이루어지는 官辦手工 業의 형태가 주목된다. 元豐改制로 土貢을 관리하는 기구가 三司에서 戶部로 바뀌고, 토공품 중에 일부 품목에서 관판수공업이 실시되었다.

예를 들어 방직품은 四川 成都의 蜀錦이 매우 유명해서 매년 上貢하는 물품을 민간에서 수매하다가 원풍연간에 呂大防이 성도에 錦院을 건립 해서 蜀錦의 織造를 책임지고 上供하였다. 방직품 외에 官辦 茶場이 建州 北苑을 비롯하여 매우 많았다고 한다.17)

宋會要輯稿의 기록을 통해서 휘종 연간 이전에 송 황실에서 사용

하던 자기가 貢瓷의 개념으로 여러 지역에서 공납되었으며, 황실 자기 고에 납입되는 과정에서 선별 기준이 자기의 모양과 색 등의 조형적인 부분이 아니라 흠과 금이 간 개수라는 점,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한 자 기들의 처리 방법이 가격을 매겨서 판매하였다는 점은 供御에서 선택 되지 못한 여요 자기의 처리 과정과 동일한 방법이었다. 이는 정요 자 기 이후에 북송 황실에서 사용된 여요 자기도 이전 시기의 貢瓷와 일 부분 비슷하게 인식되고 취급되고 있었음을 추정하게 한다. 그러면 다 음 장에서 명문 자료를 통해서 정요와 여요의 성격을 좀 더 구체적으 로 살펴보고자 한다.

16) 宋史 卷165, 志第118, 職官五, “太府寺… 雜物庫,掌受內外雜輸之物,以 備支用.”

17) 單鵬, 앞의 글, p.29. 이 글에서는 관판수공업의 형태 중에 북송 후기에 출 현하는 官窯를 예시하고 있지만 관요와 관판수공업의 성격은 다른 것으로 생 각하여 본문에서 제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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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銘文 내용으로 본 定窯 瓷器의 성격

앞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미 북송대에는 정요 자기 외에도 饒州 [경덕진], 월요, 요주요, 형요, 용천요 등의 가마에서도 자기를 공납하 고 있었다. 그런데 섭치는 왜 정주 백자기만을 언급했을까. 이는 정요 가 당시 운영된 다른 공납 가마와는 다른 상황이었음을 추정하게 한 다. 또한 여요와 연장선상에 있는 정요의 성격을 분석하는 것은 여요 의 성격을 규명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정요 자기는 동시대에 만들어진 다른 자기와 차별화되는 것은 황실 과 관련되는 명문의 종류와 수량이 상대적으로 많다는 점이다. 정요 자기의 명문 중에 수량이 가장 많은 것은 ‘官’字이다. 정요 자기에 ‘官’

字 명문이 새겨지는 것은 이미 만당ㆍ오대 시기부터 시작된 것으로 추 정된다.18) 이 시기에 ‘官’자가 새겨진 자기는 湖南省 岳州窯, 절강성 월요, 섬서성 요주요, 절강성 용천요, 내몽고 缸瓦窯 등에서도 제작되 었다.19)

북송 시기에도 요주요나 건요의 ‘官’銘盞 등이 알려져 있지만 ‘官’銘 정요 자기의 수량이 가장 많다. 실제 <‘관’명백자>는 북송 초기에 요 대 무덤이나 塔基에서 출토된 예가 대부분이고20), 북송 중기 이후에는 무덤에서 출토되는 정요 백자는 있지만 ‘관’자 명문이 들어간 예는 알

18) 穆靑, 「定窯燒瓷的第一个高峰 -晩唐至五代」 (定瓷藝術, 河北省 石家庄市:

河北敎育出版社, 2002), pp.42-65.

19) 謝明良, 앞의 글, pp.84-85.

20) 요대 무덤에서 출토되는 ‘官’이나 ‘新官’銘 백자는 정요뿐만 아니라 赤峰 缸 瓦窯에서 만든 것도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견해의 근거는 첫째 요대 무덤에서 출토되는 명문백자의 형태 중에 거란민족 특유의 기형인 盤口甁ㆍ穿 帶壺ㆍ鷄冠壺 등이 출토되는 점, 둘째 유색도 두 종류로 나눠지는데 상아 백 색에 황색기가 돌며 광택이 강한 것은 정요 자기로, 백색에 푸른기가 도는 것 은 요나라의 가마에서 제작된 것으로 보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적봉 항와요 요대 가마에서 ‘官’과 ‘新官’銘의 갑발과 墊柱 등의 요도구가 출토되었다 (穆 靑, 「定窯瓷器的銘文」, 앞의 책, p.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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려진 예가 없다.21) ‘官’銘 자기는 관리들이 산지에 가서 監燒하여 民 用 자기와 구별하기 위한 방편이었기 때문에 ‘관’명자기가 사라지는 북송 만기에 관요가 출현하였다는 견해도 있다.22) 그러나 ‘관’명 자기 는 10세기 말에서 11세기 초에 사라지기 때문에 북송 말기에 관요 성 립 시점까지의 기간에 대한 설명이 있어야 할 것이다.

정요 자기에 새겨진 명문 중에 북송 황실과의 좀 더 직접적인 관련 성을 보여 주는 것은 최근 정요 요지 발굴에서 북송 말기 층위에서 출 토된 ‘尙食局’, ‘尙藥局’銘 자기이다.23)<도3,4> 상식국과 상약국은 황 실의 음식과 의료를 담당하는 관사이며, 殿中省의 하위 관사이다. 앞 서 살펴본 ‘관’명자기는 요주요나 건요 등에서도 확인되지만 ‘상약국’

이나 ‘상식국’과 같이 황실과 직접적으로 관련되는 관사명은 정요 자 기에서만 확인되며, 여요 청자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정요와 여요의 관계를 생각한다면, 황실과 관련된 명문 정요자기가 언제 만들어졌고, 정요에 이어 황실에서 사용되는 여요 청자에는 왜 이러한 관사명을 표 기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기는 지점이다.24) 황실용 자기로서

21) 謝明良, 앞의 글, pp.97-100, p.103. 중국 전역에서 출토되는 ‘官’銘 자기를 조사하였으며, 대부분 오대에서 북송 초기에 해당하는 시기이다.

22) 孫新民, 「宋陵出土的定窯貢瓷試析」 (文物春秋3, 河北省 石家庄市: 河北省 文物局, 1994), pp.49-50. 북송 말기 궁정에서 정요 자기는 사용하지 않았으 며, 정요 자기가 貢瓷로 사용된 시기는 북송 초부터 哲宗 元祐年間 (1086~1093) 사이로 보았다.

23) 穆靑, 「定窯瓷器的銘文」, 앞의 책, pp.170-171. 尙食局銘 백자편은 25건, 尙 藥局銘 백자편은 10여건 출토되었다. 상식국명백자는 주로 盤이나 碗류의 기 형이고 내면에 龍文이 압인되어 있고, 구연은 芒口이며, 굽바닥에 ‘尙食局’ 세 자가 음각되어 있다. 상약국명백자는 크기는 각각 다르지만 기형이 한 종류이 며, 몸체와 뚜껑이 맞물리는 母子有蓋盒이다. 뚜껑과 몸체의 비례가 비슷하고, 뚜껑 윗면에는 용문을 刻劃하였다. 상약국 세자는 뚜껑과 몸체의 구연 주변에 음각하였다; 秦大樹, 「정요 백자의 역사적 지위와 공예상의 공헌」, 동아시아 의 백자,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국제학술대회, 2015), pp. 11-12. 최근에 진 행된 정요 발굴에서 북송 만기 층위에서 ‘尙食局’, ‘尙藥局’이 음각된 백자편이 확인되었으며, 시기적으로 송 휘종 崇寧3년(1103)에서 靖康元年(1126)까지의 시기로 추정하였다.

24) 劉淼, 「從定瓷銘文看定窯生産與宋金宮廷用瓷」 (文博2, 陕西省 西安市: 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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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요와 여요가 연속선상에 존재한다면, 이러한 의문, 즉 제작 과정에 서 표기되는 황실 관련 명문의 有無는 두 요장의 성격을 규정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 정요와 여요 자기는 궁정 안에서 揀退와 出賣의 과정을 거쳤지만 여요는 정요와는 다른 체제하에서 운영되었던 것이 분명하다. 즉, 여요 청자처럼 황실 관련 사용처를 명시하는 명문 을 표기하지 않아도 황실용 자기로 인식되었다는 것은 일반적인 土貢 제도에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정요 자기에 많이 보이는 명문 내용은 사용처에서 後刻 된 殿閣名이다. 정요 자기의 명문은 제작 과정에서 시유와 번조 전에 음각되는 경우와, 소비지에서 완성된 자기에 後刻되는 경우가 있다.25) 여요 청자는 가마터에서 왕실 관련 명문이 표기된 경우는 없으며, 여

西省文物局, 2006), pp.90-94. 河北省 曲陽縣에 위치한 定窯는 이미 북송 시 기부터 황실 貢納用 자기를 제작하였으며, 御用磁器인 ‘尙食局’, ‘尙藥局’銘 정 요 자기들은 휘종연간(1101~1125)에 제작되었던 것으로 추정하였다; 劉濤, 「

“尙食局”, “尙藥局” 銘定瓷年代再認識」 (宋遼金紀年瓷器, 北京: 文物出版社, 2004), pp. 161-166. 상약국명자기는 북송 말기인 崇寧2年(1103)에서 靖康元 年(1126) 사이에, 상식국명자기는 금대에 관제 개혁이 이루어지는 熙宗연간 (1135~1149)보다 이르지 않은 시기에 제작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하였다.

25) 가마터에서 표기되는 명문은 官, 新官, 易定, 東宮, 尙食局, 尙藥局, 食官局正 七字, 五王府, 喬位 등이 확인되며, 궐내 전각 명칭과 관련되는 것은 東宮과 喬位이다. 궁정으로 반입된 후에 표기되는 명문은 奉華, 鳳華, 慈福, 聚秀, 禁 苑, 德壽 등이 확인된다; 秦大樹, 「定窯的歷史地位及考古工作」 (中國定窯, 北 京藝術博物館, 2012), pp.261-269.

<도 3> ‘尙食局’銘龍紋鉢

河北省 定窯 北宋 末期 層位 出土 <도 4> ‘尙藥局’銘龍紋盒 河北省 定窯 北宋 末期 層位 出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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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청자에 後刻된 전각명은 정요 백자의 후각된 전각명과 동일한 예들 이 확인된다. 정요 자기에 後刻된 전각명은 奉華, 壽成殿, 慈福,26) 德 壽 등이 알려져 있으며, 전각명이 새겨지는 시기는 여러 견해가 있지 만 대체로 남송 시기인 것으로 추정된다.27)

‘봉화’명 자기에서 봉화는 남송 고종대 劉貴妃가 거처하던 奉華堂을 의미하는 것이다.28)<도5,6> 최근 항주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해지는 고려청자편에서도 굽바닥에 ‘奉華’명이 後刻된 예가 확인되었다. ‘수성 전’도 효종(1162-1189)의 황후 하씨가 죽은 이후에 사씨가 귀비에서 황후가 되고 광종(1189-1194)이 등극한 후에 수성황후라고 불렀고, 수성전은 성숙황후 사씨가 머물던 전각으로 추정된다.29)<도7,8> 정요 와 여요 자기에 후각된 전각명은 대부분 남송 시기에 황후들이 머물렀 던 전각이고, 남송 황실에서 정요와 여요 자기를 동시에 사용했다는 점은 그 이전 시기인 북송 말기의 상황과 연결해서 볼 수 있다. 북송 말기에 궁정에서 정요 백자기를 사용하지 않고 여주 청요기만을 사용 한 것이 아니라 두 요장의 자기는 동시에 사용되었으며, 단지 제작 체 계와 궐내 사용처에서 차이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1123년에 고려 사신으로 왔던 서긍이 ‘완ㆍ접ㆍ배ㆍ구ㆍ화병ㆍ탕잔 은 모두 정기제도를 따랐다.’라는 문구에서 ‘定器制度’에 대한 해석은

‘정요 자기의 제도’로 보거나 ‘그릇의 정해진 법식’으로 보는 두 가지

26) 宋史 本傳, 憲聖吳皇后, “高宗憲聖慈烈吳皇后,開封人. 父近,以后貴,進 封吳王. 年十四,高宗爲康王,被選入宫. 王即位, 封和義郡夫人. 后博習書史, 又 善翰墨, 由是寵遇日至, 尋進貴妃 紹興十三年, 詔立爲皇后,高宗内禅, 稱太上皇 后, 名所御殿曰慈福.”

27) 劉淼, 앞의 글, p.93.

28) 李仲謀, 「“奉華”銘瓷器硏究」 (上海博物館集刊 9, 上海: 上海古籍出版社, 2002), pp.247-255. ‘奉華’銘자기는 정요자기 3점, 여요 자기 4점, 균요 자기 1점 등이 알려져 있다. 현재 남아 있는 ‘봉화’명자기 중에 정요자기 2점만이 남송대 새겨진 것이고 여요 자기는 서법과 풍격이 남송시기와 맞지 않는 점을 들어 건륭시기에 새겨졌을 것을 추정하였다.

29) 宋史 列傳, 后妃傳 中, “成恭皇后崩,中宮虛位, 淳熙三年(1176),妃侍帝, 過德壽宮,上皇諭以立後意. 尋遣張去為傳旨, 立貴妃為皇后, 複姓謝氏. 親屬推恩 者, 光宗受禪, 上尊號壽成皇后.”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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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해가 있다.30) 전자의 해석을 따른다면 적어도 서긍은 다양한 기종의

30) 徐兢, 宣和奉使高麗圖經卷第 三十二 器皿 三 陶尊 “陶器色之青者, 麗人謂 之翡色. 近年以來, 制作工巧, 色澤尤佳, 酒尊之狀如瓜, 上有小蓋, 面爲荷花伏鴨 之形. 復能作盌, 楪, 桮, 甌, 花甁, 湯琖. 皆竊放定器制度, 故略而不圖, 以酒尊異

<도 5> ‘奉華’銘 定窯鉢片 北京故宮博物院

<도 6> ‘奉華’銘 汝窯靑瓷접시 높이 2.1cm 구경 12.8cm

타이페이고궁박물원 소장

<도 7> 백자‘壽成殿’銘접시, 定窯 타이페이고궁박물원

<도 8> 청자‘壽成殿’銘잔탁 Victoria&Albert 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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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요 자기를 자주 접했으며, 당시 고려청자가 정요 자기와 매우 유사 했음을 알 수 있다. 실제, 국립중앙박물관 <‘상약국’명청자합>은 절강 성박물관 소장 <상약국명백자합>과 기형, 문양의 형태와 위치, 명문의 내용과 위치 등이 일치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31)<도9,10> 다만 ‘정

기제도’에 대한 해석은 ‘정요의 그릇 만드는 법’보다32) ‘정요 자기의 양식과 규격[style]’으로 보는 것이 더 적합할 것이라고 생각한다.33)

於他器, 特著之.”

31) 馬爭鳴, 「靑翠靚麗話靑瓷」 (收藏家 4, 北京: 北京市文物局, 2002), pp.

10-11. 절강성박물관 소장 <‘상약국’명백자합>이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상약 국’명청자합>과의 차이점과 유사점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하고, 정요 자기의 영향으로 고려 <‘상약국’명합>이 제작되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32) 박지영, 「高麗 陽刻靑磁의 性格」 (講座美術史 29, 한국불교미술연구소, 2007), pp.68-73.

33) 漢語에서 制度의 사전적 의미는 첫째, 구성원이 모두 준수해야 規章 혹은 準 則 [system, ;institution], 둘째, 역사에서 정치, 경제, 문화의 체계 [order], 셋째, 式樣과 規格 [style]의 세 가지의 의미가 있다. 실제 고려도경에서 ‘制 度’의 다른 용례를 찾아보면, 制度文采[형태와 크기, 화려한 색채], 制度侈靡 [양식이 사치스럽다], 制度華侈, 制度小大 등은 모두 제도의 의미가 형태와 규 격, 양식의 의미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도 9> ‘尙藥局’銘靑瓷盒 고려 12세기 1/4분기 높이 9.3cm 입지름 7.0cm

국립중앙박물관

<도 10> ‘尙藥局’銘白瓷盒 北宋 末期 높이 7cm, 입지름 7.2cm

浙江省博物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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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문제는 섭치가 기록한 “本朝以定州白磁器有芒不堪用”의 문장 에서 ‘芒’자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이다. 기존에 정요 자기 연구에서 대부분의 학자들이 芒口, 구연 부분이 시유되지 않고 태가 노출되어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고 보았다. 정요 자기의 芒口는 覆燒에 의한 것 이지만 망구된 부분을 가리면서 장식 효과가 있는 금속 장식은 송대 유행이었다. 자기의 구연 부분에 금속테를 두르는 것은 월주 자기에서 많이 사용하던 방법으로, 그릇을 아름답게 장식하거나 신분이 높은 사 람들이 사용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34) 그래서 정요 자기의 芒口와 金 鑲을 주제로 다룬 논문들은 섭치나 陸游와 같은 남송대 사람들이 남긴 기록에서 정주 백자기가 ‘有芒’하여 禁中이나 本朝에서 사용할 수 없 었다는 기록을 부정하거나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남송대 사람이었 던 섭치나 육유가 북송대의 상황을 잘 모르고 기록했다는 것이다.35) 휘종의 <文會圖>를 보더라도, 북송 황실에서 벌어진 연회에 사용된 자 기 그릇은 약 145개로 추정되는데, 이중에 85개가 구연에 金釦 장식 이 된 정요 백자로 판단된다.36)<도11,11-1>.

그러면 기존에 관점인 ‘芒口’ 이외에 정요 자기의 조형적 측면에서

‘有芒’을 해석할 수 없을까. 芒에는 기본적으로 ①稻麥等殼外頂端的芒 刺, 草尖, 毛尖 ②尖端 ③光芒 ④昏昧, 模糊不淸 ⑤曠遠 ⑥鋩, 尖刀 정 도의 사전적 의미가 있다.37)

첫째, 최근에 제기된 ‘有芒’에 대한 해석 중에는 광택이 있는 있다는 의미의 ‘光芒’의 의미로 보는 견해도 제시되었다. 이러한 견해는 건륭 제가 방정요자에 남긴 어제시에서도 볼 수 있다. 臺北故宮博物院 소장

34) 續資治通鑑에는 “송 경우3년(1036)에 3품이상 관리나 종실척리의 집안이 아니면 금구자기를 사용할 수 없고, 은구한 것을 사용했는데 도금도 할 수 없 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續資治通鑑卷 109 景祐 3年 8月 己酉 “非三品以 上官及 宗室戚里之家, 毋得金釦瓷器. 用銀釦者毋得塗金”).

35) 蔡玟芬, 앞의 글, pp.67-75.

36) 靳靑万, 「宋徽宗 <文會圖>中所繪瓷器辨析」 (漳州師範學院學報 4, 福建省 漳州市: 閩南師範大學, 2007), pp.103-104.

37) 古代漢語詞典(北京: 商務印書館, 2007), p.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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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仿定窯金銀釦螭文洗>의 굽 바닥에는 건륭의 題詩가 鐫刻되어 있 다.38)<도12>

둘째, “有芒”에 대해서 가능한 의미를 추정해 보았다. 같은 단어를

38) 謝明良, 「金銀釦瓷器及有關問題」 (故宮文物 月刊 38, 臺灣: 故宮博物院, 1986), p.85.

<도 11> 徽宗, <文會圖>

184.4×123.9cm 타이페이고궁박물원

<도 11-1> <文會圖> 세부, 북송 12세기, 휘종의 모습과 宴會床 위에 놓여진 金釦白瓷

㈒ 爾時曾是厭光芒, 不及官窯 用廟堂, 歲久光芒消以盡, 希珍今 亦口金鑲”,

‘그 당시에는 광망을 싫어하여, 廟堂에 사용되는 관요에 미치지 못했으니, 세월이 오래되어 광망 이 다 사라지고 지금은 구금양 [구연에 씌운 금속테]도 희귀한 珍品이다.’

<도 12> 仿定窯 金銀釦螭文洗 타이페이고궁박물원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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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하는 경우에 반복된 글자를 생략해서 표현하는 경우가 많은데, 예 를 들어 ‘芒芒’은 넓고 많은 모양을 의미하는 말이다. ‘有芒’은 芒芒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즉, 정요 자기가 요대 무덤에서도 많이 출토되 는 상황을 볼 때, 당시 민간에서 흔하게 사용되었기 때문에 황실용 자 기로서 부적합하다고 판단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송회요집고에서도

자기고에 납입되는 자기의 품종에서 백자만을 언급하였기 때문에 정요 백자 이후에 시각적으로 확실하게 차별화될 뿐만 아니라 정요에 비해 사용 범위가 좁았던 여요 청자를 선택은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 다.

셋째, ‘문양이 많다[번잡하다]’는 의미이다. 정요 자기에 대한 문헌 기록이나 현재 남아 있는 전세품, 무덤이나 요지 출토 유물 등을 살펴 보면, 오대시기에 제작되는 정요 자기에 문양이 거의 없지만 북송기에 접어들면서 문양 종류가 다양해진다.39) 여요 청자에 문양이 거의 없다 는 점을 고려한다면 정요 자기의 이러한 조형적인 측면이 여요 자기와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문양이 많다는 점을 지적한 것은 아닐까 한 다. 1387년에 완성된 조소의

격고요론이나 명대 곡응태의 기록에서

언급된 정요 자기는 모두 다양한 기법으로 문양이 장식된 점을 특징으 로 들고 있다.40)

㈓ 曹昭 格古要論卷之下 古窯器論 古定器

古定器土脉細色白而滋潤者貴 質麤色黃者價低 外有淚痕者是眞 劃花者最 佳 素者亦好 繡花者次之 宣和政和間窯最好 但艱得 成羣隊者 有紫定色紫, 有墨定色黑如漆, 土俱白 其價高 如白定 俱出定州.

古定器는 태토의 결이 섬세하고 흰색이며 윤기가 있는 것이 귀하고 질 감이 거칠고 황색인 것은 값이 싸다. 표면에 유약이 맺힌 흔적이 있는 것 이 진품이며 획화기법으로 만든 것이 가장 아름답고 무늬 없는 것도 좋 고, 수화기법으로 만든 것이 그 다음이다. 宣和와 政和 연간에 구운 것이 가장 좋은데 구하기가 어렵다. 계열을 이룬 것 가운데 紫定은 자주색이 39) 河北省文化局文物工作隊, 「河北省曲陽縣澗磁村定窯遺址調査與試掘」 (考古

8, 北京: 中国社会科学院考古研究所, 1965), pp.405-411. 도 9와 도10 참조.

40) 曹昭 著, 周履靖 校, 格古要論(百部叢書集成: 夷門廣牘, 고려대학교 도서 관 장서인 초판 영인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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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墨定은 칠처럼 검은 색이며, 흙이 모두 흰 것은 白定처럼 값이 비싼 데 모두 定州에서 나온다.

㈔ 谷應泰 博物要覽明

定器有劃花ㆍ繡花ㆍ印花三種, 多用牡丹ㆍ萱草ㆍ飛鳳三種, 時造甚有佳 器, 或多工巧.

정기는 획화, 수화, 인화 세 종류가 있고, 대개 모란, 훤초, 비봉 세 종 류의 문양을 이용한 것이 더욱 아름답고 공교하다.

위의 기록에서 조소는 선화(1119~1125)와 정화연간(1111~1117) 의 정요 자기가 가장 좋다고 하면서 음각[획화] 기법의 정요 자기를 가장 아름다운 것을 꼽고 있다.41) 조소가 가장 아름다운 정요 백자가 제작되었다고 한 시기는 정요 백자의 ‘有芒’ 때문에 황실에서 여요 청 자를 사용하다가 京師에 관요를 설치한 시기였다. 서긍이 고려 장인의 기술을 논하면서 기술이 정교한 거란 장인들 때문에 기명이나 복장이 더욱 공교해졌지만 너무 浮僞해져서 이전의 純質함으로 회복할 수 없 다는 기록에서 북송 말기 문인 관료들의 성향을 알 수 있다.42) 화려하 거나 번잡한 것을 선호하지 않는 북송 문인 관료들의 성향이나 당시 정요 자기가 遼에서 많이 사용되고 있었던 점 등이 북송 조정에서 사 용하는 자기가 되기에 부적합한 요인[有芒]으로 작용한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다. 기존에 견해처럼 芒을 芒口로만 해석한다면 문헌기록의 내용을 부정하거나 誤記하였다고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북송 말기의 상황을 좀 더 포괄적으로 포함할 수 있는 해석의 여러 가능성에 대해 서 살펴보았다.

41) (淸) 寂園叟, 匋雅卷下, “劃花用刀, 繡花用針, 印花用版, 堆花用筆” (中國 古代器物大詞典, 河北敎育出版社, 2001, p.484).

42) 徐兢, 宣和奉使高麗圖經卷第十九, 民庶 工技, “高麗 工技至巧, …… 亦聞 契丹降虜數萬人, 其工伎十有一, 擇其精巧者, 留於王府, 比年器服益工, 第浮僞頗 多, 不復前日純質耳.” 고려는 장인의 기술이 지극히 정교하여, 또 듣자니, 거란 의 항복한 포로 수만 명 중에 공장을 - 기술이 정교한 자로 10명 중 한 명을 고른다. 왕부에 머무르게 하여, 요즈음 기명과 복장이 더욱 공교하게 되었으 나, 다만 부화하고 거짓된 것이 많아 전날의 순박하고 질박한 것을 회복할 수 없다.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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Ⅳ. 북송말기 定窯와 汝窯의 성격

지금까지 북송대 일반적인 공납 자기가 궁정 안에서 어떻게 처리되 었으며, 명문 내용을 통해서 정요의 성격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여요 이전부터 황실에서 사용된 정요 자기의 성격을 살펴봄으로서, 관요 성 립 이전에 사용된 황실용 자기를 제작하던 정요나 여요의 성격을 규정 해 보고자 하는 것이었다.

북송 초기부터 말기까지 土貢의 개념으로 여러 지역의 자기가 궁정 에 공납되고 있었지만 문헌기록이나 고고자료를 보면, 정요와 여요 자 기는 다른 貢瓷와 달리 북송 황실과 좀 더 직접적인 관계 속에서 제작 되었을 것이다. 정요와 여요도 貢窯의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지만 운영 방식과 황실에 수급되는 체제는 차이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반 적인 土貢瓷, 제작 단계에서 황실 관련 관사명을 새기는 定瓷, 제작 단계에서 명문을 새기지 않았지만 황실용 자기로 사용된 汝瓷의 성격 을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인 것이다.

북송대 궁정에 설치된 瓷器庫에 보관된 자기는 황실의 제반 행사나 의례에서 사용하던 자기였으며, 선별 기준에 의해서 揀退된 이후에는 궁정 밖으로 出賣되거나 각장에서 물물교환의 대상이 되었다. 정요 자 기와 여요 자기도 모두 궁정 안에서 揀退와 出賣의 과정을 거쳤다. 이 는 여요 자기의 성격을 비정하는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즉, 여주 청요기가 황실만을 위한 차별화된 자기였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자기였다는 의미이기도 한 것이다.

정요 자기의 제작은 상식국이나 상약국 등의 중앙 관사가 관여하였 을 가능성이 있다. 즉, 정요에서 제작되는 자기 중에서 本司에 공납되 는 일부 자기의 제작에만 관여하는 것이다. 정주 백자기가 ‘有芒’하여 서 사용할 수 없었다면, 이는 정요 자기의 공납 체계에서 ‘유망’의 문 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는 의미로도 볼 수 있다. 정요 자기는 앞서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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펴본 것처럼 북송 초부터 말기까지 황실용 자기로 사용되었지만 황실 에서 정요 자기의 樣[형태, 색, 규격]을 정해서 가져올 수 있는 체제 가 아니었기 때문에 ‘有芒’의 문제도 해결할 수 없었던 것이다. Ⅱ장에 서 살펴보았듯이 자기고에서 공납자기의 선별기준이 樣[형태, 색, 규 격]이 아니라 흠이 있거나 금이 간 개수였다는 점도 이러한 추정을 뒷 받침한다.

揀退된 여요 자기가 출매되었다는 것은 애초에 황제만을 위한 자기 의 제작이 목적이 아니라 황실에서 원하는 양식에 따라서 제작된 자기 를 사용할 수 있는 제작 체제를 구축하는 것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문 헌기록에서도 이러한 체제를 의미하는 ‘製樣須索’의 상황이 확인되는 데, 용천요의 청자가 선화연간(1119-1125)에 禁庭[궁정]에서 제양수

貢 窯 官 窯

窯 場

越窯, 邢窯, 耀州窯, 饒 州[景德鎭], 龍泉窯, 建

定窯 汝窯 卞京 官窯

자기품종 백자, 청자, 흑유자 백자기 청요기 청자

처리방법 揀退→出賣 揀退→出賣 揀退→出賣 揀退→廢棄

선별기준 缺, 璺의 개수 缺, 璺의 개수

有芒 ? ?

사용처 궁정내

(일부 황실)

尙食局, 尙藥局, 東宮, 喬位

→생산과정 供御

→ 명문 없음 ?

奉華堂, 壽成殿, 慈福宮, 德壽宮

→ 소비지

奉華堂, 壽成殿

→ 소비지 後刻 ?

수급체제 중앙→지방관부→요장 중앙→중앙관부

→정요

황실 직속 담당 관사ㆍ관리 → 여주 [有命則貢, 否則 止]

?

제 도 土貢制度 土貢制度[貢窯] 貢窯→官窯

[製樣須索] 官窯制度

<표 1> 북송대 貢瓷의 종류와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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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을 해서 더욱 정교해졌다는 것이다.43) ‘製樣’은 ‘황실이 원하는 견본 양식을 만들다’는 의미이고, 須索은 ‘요구하다, 얻어내다’ 거나 ‘반드시

…할 필요가 있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즉, 가마터에서 제작되는 자기 가 황실이 원하는 견본대로 만들어져야 하는 체제를 의미하는 것으로 관요적인 성격을 보이지만 供御에 선택되지 않은 여요 자기는 폐기되 는 것이 아니라 매매되었기 때문에 완전한 관요 체제는 아니라고 판단 된다. 여요는 정요와 달리 제작 단계에서부터 공납까지 단일 체제하에 서 전담 官吏나 官司가 있어서 황실에서 원하는 형태와 규격을 가진 자기의 제작이 가능한 상황이었음을 추정하게 한다. 황제의 명이 있으 면 자기를 제작하고 명이 없으면 제작하지 않는 체제로 운영되었을 가 능성을 비정해 볼 수 있다.44) 여요 청자의 제작을 담당하는 황실 직속 의 관사나 관리가 있었기 때문에 제작 과정에서 관사 명칭을 표기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며, 이러한 점이 정요의 성격과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는 것이다. 즉, 정요는 중앙 관부와 연관되고 土貢의 의무를 가진 貢窯적인 성격이라면, 여요는 황실 직속의 관리가 직접 여요에 가서 자기의 형태와 색, 문양 등을 정해서 요구할 수 있는 貢窯에서 官窯로 가는 과도기적인 성격을 가진 단계라고 할 수 있다.45)<표1>

43) (宋) 莊綽 撰, 鷄肋編(北京: 中華書局, 1983). “處州龍泉縣 …又出靑瓷器, 謂之秘色, 錢氏所貢, 蓋取於此, 宣和中, 禁庭製樣須索, 益加工巧.”

44) 황실의 명에 의해서만 자기 제작을 貢瓷의 개념은 원대 御土窯에 대한 문헌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元朝 학자 孔齊가 쓴 至正直記 卷2, 饒州御土條에는

“饒州御土, 其色白如粉堊, 每歲差官監造以貢, 謂之御土窯, 燒罷卽封, 土不敢私 也.”라는 내용이 있다. 즉, 매년 중앙에서 관리가 와서 공납할 자기 제작을 감 독하고, 제작이 끝나면 즉시 봉했고 백토[御土]는 개인이 쓸 수 없다고 기록 하였다.

45) 이희관, 「汝窯와 휘종-북송 여요의 성립과 그 의의」 (야외고고학23, 한국 문화재조사연구기관협회, 2015), pp.130-137. 이글에서는 여요뿐만 아니라 정 요와 건요도 제양수색 체제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정요에서 확인되는 황실 관 련 관사 명칭(尙食局, 尙藥局, 東宮, 喬位), 건요에서 확인되는 명문(供御, 進 琖)이 여요에서는 확인되지 않기 때문에 동일한 체제로 운영되었는지에 대해 서는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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Ⅴ. 맺음말

현재 남아 있는 문헌기록과 명문자료들을 종합하여, 북송대 황실에 서 사용하는 자기의 제작지와 제작 체계의 변화 과정을 통해서 정요와 여요의 성격을 살펴보았다. 이 글은 葉寘의

坦齋筆衡에 언급된 정주

백자기의 ‘有芒’ 때문에 황실에서 정요 자기를 쓰지 않고 여요 청자를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기록에서 시작하였다. 북송대 자기 연구의 중심 에 있는 여요의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서, 여요 청자가 사용되기 이전 에 북송의 황실용 자기의 제반 상황을 살펴보고 그 과정을 연결해서 보고자 한 것이었다.

먼저,

宋會要輯稿

食貨에서 ‘자기고’에 대한 기록을 중심으로 북송 대 貢納 자기의 종류, 선별 기준과 과정, 납입되지 못한 자기들의 처 리방법 등을 살펴보았다. 첫 번째 주목되는 점은 여러 지역에서 자기 고에 납입하는 貢瓷의 선별 기준이 모양과 색, 문양 등의 조형적 부분 이 아니라 흠과 금이 간 개수에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선별기준은 결 국 북송 황실이 납입되는 貢瓷의 제작 과정에서 조형적인 부분에 대해 서 관여할 수 없었다는 점을 시사한다. 즉, 섭치의 기록대로 황실에서 정요 백자의 ‘有芒’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체제였음을 알 수 있다. 정 요 자기에서 尙藥局, 尙食局 등의 황실과 관련된 官司名이 다수 확인 되지만 황실이나 중앙 관사가 자기의 樣式을 제어할 수 없는 체제였음 이 확실하다. 즉, 정요는 貢窯이지만 미리 주문된 양식대로 자기를 제 작해서 공납하는 ‘製樣須索’의 단계는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두 번째는 북송대 貢納 자기들이 자기고에 납입될 때, 선별 과정에 서 탈락하는 경우에 가격을 매겨서 出賣되거나 물물교환의 용도로 처 리되는 점에 주목하였다. 송대 周煇의

淸波雜志에서 여요 자기가 供

御에 선택되지 못한 경우에 매매되었음을 기록하고 있어서, 이러한 처 리 방법이 여요 청자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었으며, 완벽한 관요의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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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했던 것은 아니라고 판단하였다. 그러나 여요는 정요와 달리 제작 단계에서부터 공납까지 단일 체제하에서 전담 官吏나 官司가 있어서 황실에서 원하는 형태와 규격을 가진 자기의 제작이 가능한 상황이었 음을 추정하게 한다. 여요는 황실 직속의 관리가 직접 여요에 가서 자 기의 형태와 색, 문양 등을 정해서 요구할 수 있는 貢窯에서 官窯로 가는 과도기적인 성격을 가진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정요와 여요, 이 후에 京師에 설치되는 관요의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못한 문제가 많기 때문에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연구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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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Perceptions of Ceramic Wares as Tributes and Characteristics of Dingyao and Ruyao

during the Northern Song Dynasty

Kim, Yun Jeong

This text takes a unique approach in investigating the connection between the Northern Song imperial court and Ruyao and Guanyao by focusing on a point prior to the time—as written in Ye Zhi’s Tan Zhai Bi Heng—when “the Song Dynasty commissioned the Ruzhou(汝州) area to produce celadons” that requires an understanding of those preexisting concepts of supply and demand as well as the systems previously in place for managing Northern Song royal ceramics. Thus by piecing together surviving records and inscribed ceramics, the characteristics of Dingyao and Ruyao are explored through changes in the location and system of royal ceramic production.

This text begins with records indicating that the royal court began to use Ru celadon instead of Ding ceramics because the account of Tan Zhai Bi Heng establishes that white ceramics of Dingyao had ‘mang(芒)’. In the interest of understanding Ruyao, which is at the core of current research on N. Song Dynasty ceramics, this text intends to examine and connect all of the circumstances surrounding royal ceramic production prior to the use of Ruya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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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rst, the types, classification standards, processes, methods of managing rejected ceramics, etc. of N. Song tributary ceramics are explored primarily through records on ‘ceramics storage’ found in the “Treatise on Food and Money” from Song Huiyao Jigao. The foremost point is that the selection criteria of tributary ceramics accepted in several regions were not based on qualities such as shape, form, color, pattern, etc. but on the number of flaws and cracks. This suggests that ultimately N.

Song Dynasty could not be concerned with the formative aspects of tributary ceramics in the production process. In other words, it can be inferred from Ye Zhi’s documents that the royal court of N. song could not solve the problem of ‘mang(芒)’

in Ding white ceramics. Though it can be confirmed that the wares of Dingyao were inscribed as Sangyangguk(尙藥局) and Sangsikguk(尙食局) and thus obviously purposed for the royal use in food and medicine, it is certain that neither the royal court nor the central government offices had control or influence over ceramic styles. It follows that although Dingyao were tributary ceramics this was not a period of ‘supply and demand’ where only commissioned styles were produced.

The second point focuses on the practice of assigning monetary values to tributary ceramics rejected by the government or putting them up for barter. It is concluded that Ruyao did not fulfill its function as a royal kiln to satisfaction as evidenced by the selling after attaching fiscal worth to rejected Ruyao exactly as recorded in Zhou Hui’s Qing Bo Za Zhi.

However contrary to Dingyao, the process of producing the wares of Ruyao was under the exclusive oversight of a single government official or organization and so it can be presum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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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at it was possible to produce ceramics prescribing to the form and standards preferred by the royal court.

주제어 : 공요, 관요, 정요, 여요, 공자, 북송, 명문자기 關鍵詞 : 貢窯, 官窯, 定窯, 汝窯, 貢瓷, 北宋, 銘文瓷器

Keywords: Kilns producing ceramic wares for tributes, Royal kilns, Dingyao, Ruyao, Ceramic wares as tributes, the Northern Song, Inscription on ceramic wares

(원고접수: 2015년 9월 17일, 심사완료 및 심사결과 통보: 2015년 10월 15일, 수정원고 접수: 10월 21일, 게재 확정: 10월 25일)

Referens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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