秦·漢時代의 庶人 硏究 綜述
林 炳 德 (忠北大)
Ⅰ. 머리말
Ⅱ. “免(廢․贖)爲庶人”과 “免爲 良人”
Ⅲ. 士伍와 庶人
Ⅳ. 女性과 庶人
Ⅴ. 맺음말
Ⅰ. 머리말
국민국가 혹은 시민혁명 이후에 흔히 피지배층을 가리키는 용어로 는 ‘국민’ 혹은 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듯이 전통시대에는 일반민을 의 미하는 용어로 ‘庶民’, ‘庶人’, ‘良人’, ‘良民’, ‘黔首’, ‘士伍’, ‘百姓’ 등등이 흔히 사용되었다. 우리가 흔히 피지배층 가운데 ‘平民’을 가리키는 用 語에는 각 時代마다의 특별한 개념이 존재하였는데, 이 가운데 특히 庶人은 진한시대에는 일반평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특별한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요즘도 흔히 사용되고 있는 ‘親庶民政治’의 ‘庶民’과 거의 구분 없이 사용된 용어가 ‘庶人’이었는데, 秦漢時代에 들어와 周代 혹 은 唐代와 다른 개념의 庶人이 등장하였다는 사실을 처음 지적한 사람 은 淸代의 錢大昕이었다. 淸代의 錢大昕은 “무릇 율에서 庶人이라 하 는 것은 노비 및 죄인에 대칭하여 하는 말이다”라 하여 春秋戰國時代 의 傳統的인 庶人 槪念과는 다른 庶人의 槪念이 秦漢代에 存在하였다 는 것을 정확히 지적하고 있다.1) 이에 대하여는 睡虎地秦墓竹簡整理小 1) “凡律言庶人者, 對奴婢及有罪者而言” (錢大昕, 二十二史考異권10, 上海古籍
組는 雲夢秦簡 司空 의 “百姓有母及同牲(生)爲隸妾, 非適(謫)罪殹 (也)而欲爲冗邊五歲, 毋賞(償)興日, 以免一人爲庶人, 許之.”에서2) 錢大 昕의 지적을 정확히 인용하고 있다.
한편, 二年律令에는3) 雲夢秦簡에서 볼 수 없었던 庶人에 관한 새로운 자료가 대거 포함되어 있었다. 雲夢秦簡에 기초한 연구에서 도 庶人에 대한 연구가 소홀히 되었던 것은 아니지만, 二年律令에 의해 좀 더 구체적인 그 실태의 파악이 가능해졌다.4) 특히 庶人과 私
出版社, 2004, p.186).
2) 睡虎地秦墓竹簡整理小組,
睡虎地秦墓竹簡
(文物出版社, 1978), p.91.3) 張家山二四七號漢墓竹簡整理小組,
張家山漢墓竹簡〔二四七號墓〕(釋文修 訂本)
(北京: 文物出版社, 2006)와 彭浩․陳偉․工藤元男 主編,
二年律令 與奏讞書 -張家山二四七號漢墓出土法律文獻釋讀
(上海古籍出版社, 2007).4) 庶人에 관한 주요 연구는 다음과 같다. 鎌田重雄, 漢代の禁錮 (
歷史學研 究
108․109, 1943;
秦漢政治制度の研究
, 日本學術振興會, 1963年에 再 錄); 西嶋定生,
中国古代帝国の形成と構造
(東京大学出版会, 1961); 尾形 勇, 良賤制の形成とその展開 (
岩波講座 世界歷史
5, 1970); 好並隆司, 漢代下層庶人の存在形態(二) (
史學雜誌
82-2, 1973); 冨谷至, 秦漢にお ける庶人と士伍·覺書 (谷川道雄 外編,
中國士大夫階級と地域社會との關係 についての總合的硏究
, 昭和57年度科学研究費補助金總合研究(A)研究成果 報告書, 1983); 堀敏一, 中國における良·賤身分制の成立過程 (
中國古代の 身分制
, 汲古書院, 1987); 川本芳昭, 北魏時代における所謂良奴制の成立 - 良の問題を中心として- (
史學雜誌
97-7, 1987); 林炳德, 中國古代의 奴 婢와 刑徒 (
忠北史學
3, 1990); 林炳德, 魏晉南北朝의 良賤制 (
歷史學 報
142輯, 1994); 椎名一雄, 張家山漢簡二年律令に見える爵制 -庶人の理 解を中心として (
鴨台史學
6, 2006); 椎名一雄, 庶人の語義と漢代の身分 秩序 (
大正大學東洋史硏究
創刊號, 2008); 椎名一雄, 邊境漢簡にみられ る爵位事例への一考察 (
大正大學大學院硏究論集
34, 2010); 曹旅寧, 秦 漢法律簡牘中的“庶人”身分及法律地位問題 (
咸陽師範學院學報
22-3, 2007); 鷹取祐司, 秦漢時代の刑罰と爵制的身分制 (
立命館文學
608, 2008); 任仲爀, 秦漢律의 耐刑 -士伍로의 수렴 시스템과 관련하여- (
中 國古中世史硏究
19, 2008); 林炳德, 秦·漢時代의 士伍와 庶人 (
中國古中 世史硏究
20, 2008); 任仲爀, 秦漢律의 庶人 (
中國古中世史硏究
22, 2009); 朴健柱, 秦漢 法制上의 刑盡者 ․免隸臣妾 과 公卒、
士伍、
庶人 (
中國學報
58, 2009); 任仲爀, 中國 古代 庶人개념의 변화 -賜民爵과 관 련하여- (
東洋史學硏究
113, 2010); 宮宅潔, 恩赦と勞役刑 -特に 復作について- (
中國古代刑制史の硏究
, 京都大學學術振興會, 2011).屬에 대해서는5) 二年律令에 의해 그 실태에 대한 이해가 보다 정확 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淸代의 錢大昕을 제외하고 1940년대 초 반 鎌田重雄이 秦漢의 庶人을 ‘農民’으로 이해한 것을 기준으로 하면 秦漢의 庶人硏究도 어느덧 70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西嶋定生이 漢代의 ‘農民’이 1급의 公士에서 8급의 公乘까지의 爵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밝힌 1961년도 출판의 中国古代帝国の形成と構造를 기준으로 하면 50년이 지났다. 1940년대부터 시작된 ‘庶人硏究’는 이제 二年律 令 이후 淸代의 錢大昕의 지적의 타당성이 재확인되면서 다시 활발하 게 되었다. 秦漢律에서는 無爵의 신분이 公卒, 士伍, 庶人으로 나타나 고 있다. 이렇게 無爵의 신분을 公卒/士伍/庶人으로 구분한 사례는 周 代나 唐代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더욱 公卒과 士伍는 대체로 有爵者 혹은 無爵者 등으로부터 來源하고 있는데 비하여 庶人은 罪囚 와 奴婢에서만 來源하고 있다. 이렇게 같은 無爵의 신분이라 하더라도 來源上에 따라 용어의 차이를 주고 용어의 차이에 따라 稟米, 受杖. 睆 老 등에 특권의 차이를 주고 있는 것은 오직 秦漢律에서만 존재한다.
즉 무작자를 3개 등급으로 나누고 그 등급에 따라 특권의 차이를 부여 한 사례는 오직 秦漢律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周代나 唐 代의 庶人과 秦漢律의 公卒, 士伍, 庶人과는 비교가 어렵지만, 굳이 비 교한다면 周代나 唐代의 庶人은 차라리 秦漢律에서의 庶人 보다는 士 伍에 가까운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秦漢律의 庶人은 公士/公卒/
士伍/庶人/司寇/隱官 등의 爵位를 지표로 하는 身分序列의 연장선상에 위치하는 爵制的 身分의 개념으로 존재한다. 즉 商鞅의 작제 혹은 二 年律令의 爵制에서 전혀 새로운 개념이 부여되어 탄생된 용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특수한 성격을 가지는 秦漢時期의 庶人과 관련해서는 이제까지 적지 않은 연구가 진행되었다.
5) 私屬에 관한 주요 연구로는, 王彦輝, 從張家山漢簡看西漢時期私奴婢的社會 地位 (
東北師大學報
2003-2); 王愛淸․王光偉, 試論張家山漢簡中的“私 屬” (
烏魯木齊職業大學學報
13-2, 2004); 王愛淸, “私屬” 新探 (
史學月 刊
2007-2)가 있다.Ⅱ. “免(廢․贖)爲庶人”과 “免爲良人”
雲夢秦簡에 나오는 奴婢의 解放은 “免爲庶人”의 형식을 취하고 있 다. 漢代에도 奴婢 혹은 罪人이 사면을 받으면 “免爲庶人”이 된다. 尾 形勇은 신분으로서의 良民의 用語는 삼국시기에 출현하여 南北朝 시 기, 특히 北魏 均田制의 성립기에 정식으로 등장한다고 하였다. 尾形勇 의 이러한 지적은 庶人의 성격과 그 변화를 이해하는데 중요하다. 그 는 특히 漢代에는 예외 없이 노비가 免되면 庶人ㆍ庶民으로 되고 良民 으로 되는 사례는 없지만, 三國 이후에는 良民이 많이 사용되고 있다 고 주장하였다.6) 반면에 堀敏一은 ‘良奴制가 北魏 均田制의 성립기에 등장했다’는 尾形勇의 주장에 대해서, 良賤의 身分制度는 後漢末ㆍ三國 時代부터 나타났다고 주장한다.7) 그런데, 堀敏一과 尾形勇의 所說은 良賤의 成立 시기의 差異만이 아니라 良賤制의 成立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成立하였는가하는 觀點의 차이도 존재한다.8)
그런데, 三國-魏晋南北朝에 이르러 罪人의 사면의 경우에는 여전히
“免爲庶人”의 형식으로 나타나지만, 奴婢의 해방의 경우에는 “免爲庶 人”이 아닌 “免爲良人”의 형식으로 변하고 있는데, 筆者는 그 이면에는 노비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있었다는 문제제기를 한 바가 있었다.9) 즉 秦漢 시기에 노비가 免되어 庶人이 되는 형식(免奴婢爲庶人)이 三國 이후 六朝 시기에 들어와 良人으로 되는 형식(免奴婢爲良人)으로 변화 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秦漢시기에 예외 없이 庶人으로 되었다는 사
6) 尾形勇, 良賤制の形成とその展開 (岩波講座 世界歷史5, 1970), pp.354-355.
7) 堀敏一, 中國における良․賤身分制の成立過程 (中國古代の身分制, 汲古書 院, 1987).
8) 한편, 川本芳昭는 균전제 성립 이후의 ‘良’身分은 그 以前의 ‘良’신분과 현전히 질적․양적인 면에서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고 균전제 성립 이후의 良奴制는 隋唐良賤制의 직접적인 원류라고 본다 (川本芳昭, 北魏時代における所謂良奴 制の成立 -良の問題を中心として- , 史學雜誌 97-7, 1987, p.55).
9) 林炳德, 中國古代의 奴婢와 刑徒 (忠北史學3, 1990), pp.99-101, 102-105.
실에 비춰보면 형식상 커다란 변화였다는 점과 관련하여 筆者는 이를 良賤制의 역사적 의미와 관련해서 해석한 적이 있었다.10) 필자의 관점 은 주로 堀敏一의 연구방법론과 시각처럼 鄕村社會의 階層分化에 주목 한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최근 任仲爀은 良賤制의 성립의 시기를 均 田制성립시기로 보았다.11) 良賤制 성립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으로 그는 太和 九年(485년) 均田制를 들고 있다. 太和 九年(485년) 均田制 는 良人과 賤人 모두에게 授田하는 규정을 둠으로써 良奴 신분제의 확 립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魏書 食貨志 에는 均田制에 노비 와 관련된 내용이 있음을 볼 수 있는데, 그 중에서 ‘諸男夫十五以上, 受露田四十畝, 婦人二十畝, 奴婢依良.’은 노비에 대한 토지 지급이 良人 의 신분에 입각한다고 한 것으로, 이는 호적에 양인과 노비의 신분이 구별되어 있어야 가능했다는 것이다.12)
任仲爀의 이러한 연구는 魏晉南北朝 시대에 행해진 활발한 賜爵에 서 二十等爵制의 잔존 형태를 규명하고, 이를 통하여 秦漢의 신분제 내에서 중요한 일익을 담당했던 庶人의 의미를 규명하고자 한 것으로 종전의 연구와는 다른 관점에서 庶奴制에서 良奴制로의 변화의 의미를 파악하고자한 것이었다. 三國 이후에 노비가 방면된 신분은 庶人으로 표현하기도 하고 良人으로 표현하기도 했는데, 庶人과 良人의 용어가 동시에 혼란스럽게 사용된 이유는 魏晉南北朝까지 免爲庶人의 근거가 되어왔던 二十等爵制 가운데 하급작이 폐지됨이 없이 계속 집행되어온 것도 이유였다는 것이다. 즉, 秦漢律의 遺制가 魏晋南北朝까지 남아 있 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任仲爀의 이러한 지적은, 결론은 尾形勇과 川本 芳昭의 견해와 유사하다고 생각되지만, 양천제를 二十等爵制의 잔존 형태와 관련하여 이를 파악하고자 한 점에 있어서 독특하다. 任仲爀은 庶人과 良人의 개념상에 혼란이 나타나는 사례로 晉書 元帝紀 의
10) 林炳德, 魏晉南北朝의 良賤制 (歷史學報142, 1994), p.197.
11) 任仲爀, 中國 古代 庶人개념의 변화 -賜民爵과 관련하여- (東洋史學硏究
113, 2010), pp.40-45.
12) 위와 같음.
다음과 같은 기록을 거론하고 있다.
5月에 가뭄이 들었다. 庚申日에 조서에서 말하기를, 옛날 漢의 二祖 (高祖, 光武帝) 및 魏武帝는 모두 (노비를) 免하여 良人으로 삼았다. 武帝 時 涼州가 覆敗하였을 때 奴婢가 된 모든 자들 역시 復籍하였다. 이것은 累代 동안 이루어진 원칙이다. 中州의 良人 가운데 난을 만나서 揚州 諸 郡에 僮客이 된 자를 면하여 征役에 대비하게 하라. 13)
元帝紀 의 “옛날 漢의 二祖(高祖, 光武帝) 및 魏武帝는 모두 (노비를) 免하여 良人으로 삼았다”는 것은 漢書와 後漢書의 원래 기록이 庶 人으로 되어있다. 그런데, 晉書 元帝紀 의 조서에서 良人으로 표현 한 것은 이 시기에 庶人과 良人의 개념이 혼동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 라 한다.14) 그러나 그것은 개념의 혼동이 아니라 漢高祖 5년에 飢餓로 自賣한 자들을 해방하여 庶人으로 삼았던 사실과 光武帝의 수차에 걸 친 노비 해방령을 통해 庶人으로 삼은 것이 실은 雲夢秦簡혹은 二 年律令에서 확실히 나타나는 죄인인 노비(雲夢秦簡혹은 二年律令 에서의 모든 관사노비는 죄인에서 비롯되거나 혹은 죄인 그 자체였다) 의 해방이 아니라 그와는 완전히 성격이 다른 노비, 즉 인신매매를 거 쳐 노비로 전락된 良人이었다는 것에 대한 晉書 元帝紀 의 인식이 그대로 반영된 것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免爲庶人에서 免爲良人으 로 이행한 원인과 관련하여 堀敏一은 노예제의 발전이 서인층의 분해 를 촉진하여 전제국가의 소농민 지배 체제를 동요시켰던 것이 원인이 라고 지적한다.15) 그러나 堀敏一 등의 연구는 庶人의 개념에 대해서 크게 주목하지 않았으므로 良人과 庶人을 비교하는 논리가 명확하지 않았는데, 任仲爀은 이 부분을 二十等爵制의 잔존이라는 관점에서 세 밀히 분석하고 해명하고자 한 것이었다.
13) 晉書卷6 元帝紀 , p.154, “五月, 旱. 庚申, 詔曰: 昔漢二祖及魏武皆免良 人, 武帝時, 涼州覆敗, 諸為奴婢亦皆復籍, 此累代成規也. 其免中州良人遭難為揚 州諸郡僮客者, 以備征役.”
14) 任仲爀, 위의 글, p.39.
15) 堀敏一, 앞의 글, pp.371-372.
任仲爀은 秦漢律에서 처음 사용된 免爲庶人을 魏晉南北朝 시기 내 내 免爲良人과 구별 없이 혼용해왔다고 보고 있다. 그것을 배후적으로 가능하게 했던 것은 魏晉南北朝까지 免爲庶人의 근거가 되어왔던 二十 等爵制 가운데 하급작이 폐지됨이 없이 계속 집행되어온 것도 이유였 다고 한다. 즉, 秦漢律의 遺制가 魏晉南北朝까지 남아 있었기 때문이라 는 것이다.16) 덧붙여 唐代에 관노비ㆍ사노비가 해방되면 명확하게 良 人이라고 밝힌 것과 달리, 官員ㆍ百姓ㆍ賤人이 죄를 지어 罪囚가 된 자가 사면되거나 복역을 마친 경우에는 명확하지 않으며, 秦漢시기의 죄수 사면처럼 免爲庶人이라고 하지도 않는다는 지적을 하고 있다.17)
三國 이후에 노비가 방면된 신분은 庶人으로 표현하기도 하고 良人 으로 표현하기도 했는데, 任仲爀씨의 상세한 고찰에 의하면, 양자의 비 율은 3:7이었다고 한다. 어쨌든 良人으로의 표현이 많아졌다는 것은 확 실하다. 그렇다면 그것은 秦漢律의 遺制가 魏晉南北朝까지 남아 있었 기 때문으로 볼 수도 있지만, 또한 免爲庶人과 免爲良人의 혼동이라기 보다는 免爲良人으로의 통일과정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 않을까? 비록 필자와 任仲爀씨의 良賤制에 대한 관점은 차이가 있지만, 任仲爀씨가 免爲庶人이 免爲良人으로 바뀌게 되는 데는 良賤制의 발전에 힘입었다 고 보는 관점에는 물론 동의한다. 또한 秦漢律에서 처음 사용된 免爲 庶人을 魏晉南北朝 시기 내내 免爲良人과 구별 없이 혼용해왔다는 사 실, 그리고 그것을 배후적으로 가능하게 했던 것은 魏晉南北朝까지 免 爲庶人의 근거가 되어왔던 二十等爵制 가운데 하급작이 폐지됨이 없이 계속 집행되어온 것이 그 이유라고 본 것은 秦漢律의 ‘庶人’을 이해하 는데, 매우 중요한 관점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노비 혹은 죄인이 면하여 서인이 되는 형식에는 ‘免爲庶人’
의 형식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면 ‘贖爲庶人’의 형식도 있고, 대 상은 다르지만, ‘廢爲庶人’의 형식도 존재한다. 최근 椎名一雄은 ‘免爲 16) 任仲爀, 앞의 글, p.40.
17) 任仲爀, 위의 글, p.49.
庶人’, ‘贖爲庶人’, ‘廢爲庶人’의 형식상의 차이점을 세밀히 분석한 논고 를 발표하였다.18) 일반적으로 문헌사료에 바탕을 둔 종전의 ‘庶人’의 연구는 ‘庶奴制’로 파악이 되었는데,19) 이 ‘庶奴制’는 庶人과 대치되는 개념으로 官人을 의식한 것, 즉 官人-庶人-奴婢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 고 한다.20) 그런데, ‘免爲庶人’의 사례는, 주로 노비․형도․열후․관리 에게 사용되고 있고, ‘廢爲庶人’은 주로 제후왕․황후․천자에게 사용 되고 있고, ‘贖爲庶人’은 노비․관리에게 사용되고 있는데,21) 특히 ‘贖 爲庶人’에서 ‘贖’의 역할은 이미 확정되었던 죄명을 贖하는 것에 의해 서 그 죄명을 해당 본인에게서 빼는 것인데, 椎名一雄은 이 경우 官吏 는 官位가 아닌 爵位를 박탈당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하였다.22) 즉 秦漢時代에는 庶人과 대치되는 개념으로 官人이 의식된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二年律令에는 公卒․士伍․庶人․司寇․隱官이 徹 候에서 公士까지의 爵位의 序列에서 연속해서 나타나는데, 鷹取祐司는 公卒․士伍․庶人․司寇․隱官은 爵位를 지표로 하는 身分序列의 연장 선상에 위치하는 爵制的 身分의 하나라는 지적을 한다.23) 椎名一雄의 견해는 ‘贖爲庶人’의 대상이 된 관리가 박탈당한 것은 官位가 아닌 爵 位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서인을 爵制的 身分 서열상에 위치하는 존재로 파악하고자 한 것이었다. 椎名一雄의 견해는 ‘免爲庶人’, ‘廢爲 庶人’, ‘贖爲庶人’의 사례를 세밀히 검토해서 漢代의 庶人이 노비와 형 도에 대립하는 신분이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는 官人․士人에 대립하는 신분이었다는 堀敏一의 견해를 비판한 것이었다.
18) 椎名一雄, 庶人の語義と漢代の身分秩序 (大正大學東洋史硏究 創刊號, 2008).
19) 尾形勇, 良賤制の形成とその展開 (岩波講座 世界歷史 5, 1970), pp.354 -355.
20) 堀敏一, 中國における良․賤身分制の成立過程 (中國古代の身分制, 汲古書 院, 1987), p.106.
21) 椎名一雄, 庶人の語義と漢代の身分秩序 , p.60.
22) 椎名一雄, 庶人の語義と漢代の身分秩序 , pp.70-75.
23) 鷹取祐司, 秦漢時代の刑罰と爵制的身分制 (立命館文學608, 2008), p.104.
Ⅲ. 士伍와 庶人
周厚强은 “以罪奪爵, 皆稱士伍”의 입장에서 士伍는 본래 有爵者의 奪爵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본래부터 작이 없었던 無爵者와는 구 별이 되고 있었다고 한다. 이런 관점에서 그는 衛宏의 견해에 따라 無 爵 혹은 奪爵 후의 “成丁”으로 정치상 모두 봉건적 압박을 받는 하층 민이었다고 보는 劉海年의 견해를24) 비판하고 있다.25) 漢官舊儀에서 衛宏은 “秦制 二十爵. 男子賜爵一級以上, 有罪以減, 年五十六免. 無爵爲 士伍, 年六十乃免老(漢 衛宏撰 漢官舊儀下)”라 하여 士伍를 “無爵爲 士伍”로 파악하고 있다. 이것은 奪爵을 士伍로 파악한 것과는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無爵에는 奪爵되어 無爵이 되는 경우와 처음부터 爵을 획득하지 못한 경우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실제 二年律令에는 죄인 인 司寇의 子나 庶人의 子, 혹은 ‘私屬’의 子가 士伍가 되는 등, 奪爵과 는 정반대로 士伍로 되는 경우가 존재하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어 떤 경로이건 士伍는 里伍 가운데 거주하면서 官職ㆍ爵位가 없고 호적 에 이름을 올린 成年男子로서, 服役年齡以上에 도달한 官爵이 없는 男 性公民이라는 점에서 衛宏의 지적은 如淳, 李奇, 顔師古가 이해하지 못 했던 것을 정확히 지적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아무래도 衛宏 이 살았던 연대가 如淳, 李奇, 顔師古에 비해 훨씬 앞선 시대였던 것과 도 관계가 있을 것 같다. 이 士伍 無爵說은 二年律令에 의해 구체적 으로 확인되고 있다.
二年律令은 爵級에 따른 구체적인 田宅賜與額의 규정, 18급 大庶 長 이하 爵의 世襲에 대한 규정, 免老에 대한 규정, 爵等과 官秩의 비 교 등은 그동안 전혀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사실을 제공하고 있다. 二年律令에는 高爵에서 세대를 거치면서 減爵되면서 小爵으로 변화하 24) 劉海年, 秦漢“士伍”的身分及階級地位 (文物 1978-2).
25) 周厚强, 秦士伍的身分及其階級屬性辨析 (求索1991-4), p.123.
면서 最終的으로는 士伍가 된다. 士伍가 되면 더 이상의 변화가 없다.
이처럼 高爵에서 세대를 거치면서 감작되어 小爵으로 변하는 것은 당 연히 奪爵되는 것과는 다르다. 특히 二年律令에서 準庶人인 隱官과 司寇가 역으로 세대를 거치면서 士伍로 수렴되는 것은 士伍의 개념과 관련하여 二年律令이전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이다. 任仲爀 씨는 이를 근거로 秦帝國의 신분제의 특징을 “士伍로의 收斂시스템”이 라고 명명하였다.26) 任仲爀의 이 연구는 최근 그가 발표한 정력적인 연구 성과 가운데서도 가장 주목할 만한 내용을 포함한 것이었다.
二年律令 이후 다양한 관점에서 士伍에 관한 연구가 진행되었는 데, 예컨대, 于振波와 楊振紅은 秦漢의 授田制度의 성격과 관련하여 이 를 살펴보고 있다.27) 筆者는 士伍와 관련하여 律令上의 규정이 아닌 그 실태를 파악해야 할 것을 주장하였다. 秦漢時期의 士伍의 실태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이 雲夢秦簡에서 士伍가 노비를 소유하고 있는 기록이 나온다는 점이다.28) 尹在碩은 士伍 중에 불법주조자, 群盜로 전 락하는 등 동일 계층 내에서도 경제적 불평등이 내재하고 있었음을 지 적하였다.29) 이러한 경제적 불평등에 근거하여 士伍는 동일 계급을 형 성하지 못했다는 견해도 제기되었다.30) 최근 종전의 이러한 주장을 뒷 받침하는 결정적인 사료가 최근 里耶秦簡에서 확인되고 있다.31) 古
26) 任仲爀, 秦漢律의 耐刑 -士伍로의 수렴 시스템과 관련하여- (中國古中世 史硏究, 2008).
27) 于振波, 從張家山漢簡看漢名田制與唐均田制之異同 (湖南城市學院學報 26-1, 2005), p.70; 楊振紅, 秦漢“名田宅”說―從張家山漢簡看戰國秦漢的土地制 度 (張家山漢簡《二年律令》硏究文集, 廣西師範大學出版社, 2007), pp.141, 149, 150.
28) “某里士五(伍)甲縛詣男子丙, 告曰: 丙, 甲臣, 驕悍, 不田作, 不聽甲令, 謁賣公, 斬以爲城旦, 受賈錢. 訊丙, 辭曰: 甲臣, 誠悍, 不聽甲. 甲未嘗身免丙. 丙無病也.
無他坐罪. 令令史某診丙, 不病. 令少內某, 佐某以市正價賈丙丞某前,…….”( 睡 虎地秦墓竹簡, p.259.)
29) 尹在碩, 秦代 ‘士伍’에 대하여 (慶北史學 10, 1987), p.175.
30) 劉海年, 앞의 글, p.61.
31) 湖南省文物考古硏究所․湘西土家族苗族自治州文物處․龍山縣文物管理所, 湖南龍山里耶戰國-秦代古城一號井發掘簡報 (文物2003-1); 湖南省文物考古硏
墓에서 출토된 법제 사료가 얼마나 실상을 묘사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는 여전히 의문이 남아 있는데 비해 里耶秦簡은 법률의 실제 집행과 관철을 보여주는 생생한 자료라 할 수 있다. 이 里耶秦簡에는 貲贖 錢에 대한 기록이 J1〔9〕1-J1〔9〕12호간에 걸쳐 나오고 있다. 그 기 록에 의하면 陽陵縣 宜居의 士伍 毋死의 貲餘錢 8064전, 陽陵 仁陽의 士伍는 貲錢 8636전, 陽陵 下里의 士伍인 不識 貲餘錢1728전, 陽陵 孝 里의 士伍 衷의 貲錢 1344전, 陽陵 下里의 士伍인 鹽의 貲錢384전, 陽 陵 禔陽의 上造인 徐의 貲錢 2688전, 陽陵 禔陽의 士伍인 小欬의 貲錢 11,211전, 陽陵 逆都의 士伍 越人의 貲錢 1340전, 陽陵 仁陽의 士伍는 贖錢 7680전, 陽陵 戚作의 士伍인 勝一의 貲錢 1344전, 陽陵 谿里의 士 伍인 采는 貲餘錢 852전, 陽陵의 公卒인 廣의 貲錢 1344전인 것으로 각각 나타나고 있다.32)
究所․湘西土家族苗族自治州文物處, 湘西里耶秦代簡牘選釋 (中國歷史文物 2003-1); 里耶發掘報告 (岳麓書社, 2007). 본고에서는 이를 모두 里耶秦簡 으로 간략히 한다.
32) 里耶秦簡의 陽陵縣의 貲錢 혹은 贖錢에 대해서만 필요한 부분만을 차례대 로 기록하면 다음과 같다. ① J1〔9〕1; …, 陽陵宜居士五(伍)毋死有貲, 餘錢八 千六十四. 毋死戍洞庭郡, 不智(知)何縣署, 令爲錢校券一上謁, …, 已訾其家, [家]
貧不能入, …(里耶發掘報告 (岳麓書社, 2007), p.185). ② J1〔9〕2; …, 陽陵仁 陽士五(伍)…有貲錢八百卅六. …, 己訾責…家, [家]貧不能入, …(위의 책, p.187).
③J1〔9〕3; …, 陽陵下里士五(伍)不識有貲, 餘錢千七百卄八. …, 己訾責其家, [家]貧不能入, …(위와 같음). ④ J1〔9〕4; …, 陽陵孝里士五(伍)衷有貲錢千三百 卌四. …, 己訾責(債)其家, [家貧]不能入, …(위와 같음). ⑤ J1〔9〕5; …, 陽陵 下里士五(伍)鹽有貲錢三百八十四. …, 己訾責其家, [家]貧不能入, …(위의 책, p.188). ⑥ J1〔9〕6; …, 陽陵禔陽上造徐有貲錢二千六百八十八. …, 己訾其家, [家]貧不能入, …(위와 같음). ⑦ J1〔9〕7; …, 陽陵禔陽士五(伍)小欬有貲錢萬一 千二百一十一. …己訾其家, [家]貧不能入, …(위와 같음). ⑧ J1〔9〕8; …, 陽陵 逆都士五(伍)越人有貲錢千三百卌. …己訾其家, [家]貧不能入, …(위의 책, p.189).
⑨ J1〔9〕9; …, 陽陵仁陽士五(伍)…有贖錢七千六百八十. …己訾責…家, [家]貧 不能入, …(위와 같음). ⑩ J1〔9〕10; …, 陽陵戚作士五(伍)勝一有貲錢千三百卌 四. …己訾其家, [家]貧不能入, …(위와 같음). ⑪ J1〔9〕11; …, 陽陵谿里士五 (伍)采有貲, 餘錢八百五十二. …己訾責其家, [家]貧不能入, …(위의 책, p.190).
⑫J1〔9〕12; …, 陽陵□□公卒廣有貲錢千三百卌四. …己訾責其家, [家]貧不能 入, …(위와 같음).
J1〔9〕1-J1〔9〕12 호간 사이에 J1〔9〕6의 上造와 J1〔9〕12의 公 卒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士伍인 것이 확인되고 있는데, 貲錢과 贖錢의 액수가 상당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고 또한 모두 家貧하여 갚을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나있다. 雲夢秦簡이나 二年律令의 율령 규정 에만 의거하면 秦의 국가가 생산과 병역의 원천인 耕戰之民인 士伍에 게 국가가 안정된 토지보유를 재보장해주거나 국가가 토지소유자의 계 승인의 자격으로 전면적인 재조정 해주었다는 유토피아적인 인식도 있 지만,33) 이러한 견해는 里耶秦簡의 貲贖錢에 대한 기록에서 확인되 고 있듯이 ‘탁상공론’에 불과하다. 이런 점에서 雲夢秦簡이나 二年 律令과 같은 출토 법제 중에 묘사된 국가․사회의 모습은 어디까지나 실상의 밑그림일 뿐 법제대로의 세계가 실제로 전개되었던 것이 아니 라는 宮宅潔의 지적은 적확하다.34)
里耶秦簡에 나오는 貲餘錢은 벌금의 미납 부분을 의미하는데,35) 貲餘錢 8,064전을 미납한 자에게 미납분을 노역으로 대신 채우도록 조 치하는 내용이 나온다. 주지하듯이 雲夢秦簡에 의하면 노역으로 채 무나 벌금 등을 대신할 경우 하루 8전으로 계산했다.36) 벌금 11,271전 을 납부해야 하는 사람이 가난해서 벌금을 납부할 수 없을 경우 노역 으로 대신해야 하는데, 하루 8전으로 계산하면 4년에 해당한다. 6전으 로 계산하면 5년이 넘는다. 수십 일이 아니라 무려 5년 이상의 노동에 해당하는 貲錢이 확인되는 것이다. 즉 高價인 노예를 소유한 士伍의 사례가 雲夢秦簡에서 확인되는가 하면, 완전히 몰락하여 경제면에서 엄청난 채무 속에 신음하며 노예처럼 살 수밖에 없는 士伍도 里耶秦 簡에서 확인되고 있는 것이다. 가령 里耶秦簡의 다른 사례, J1〔9〕
6에서는 上造인 徐有의 貲錢 2,688전이 확인되고 그 역시 “家貧不能 33) 李成珪, 秦의 土地制度와 齊民支配 (전해종박사화갑기념 史學論叢, 일조
각, 1979).
34) 宮宅潔, 《二年律令》硏究の射程 -新出法制史料と前漢文帝期硏究の現狀- (史林 89-1, 2006), p.71.
35) 任仲爀, 秦漢律의 벌금형 (中國古中世史硏究15, 2006).
36) 睡虎地秦墓竹簡, p.84.
入”한 것으로 되어있으므로 居貲에 처해질 수밖에 없다. 趙背村에서 발굴된 墓磚에는 4頃이 授田되는 不更이 居貲에 처해지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들이 爵으로 감면받을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里耶秦簡에 서 보듯이 “家貧不能入”하였기 때문임이 확실하다. 里耶秦簡에서도 上造인 徐가 貲錢 2,688錢을 갚지 못하고 있는데, 그는 家貧하여 갚을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37) 만약 爵으로 상환할 수 있다면, 里耶 秦簡에 나오는 上造는 당연히 削爵1級을 선택하여 公士가 되고 채무 를 상환하면 되었을 것이다. 사망자가 속출할 정도로 중노동에 동원된 趙背村의 居貲도 마찬가지이다. 예컨대, 4급 不更이 “奪爵爲士伍” 혹은 奪爵 1級의 형식으로 爵으로 居貲를 대신할 수 있었더라면 이를 선택 하였을 것이다. 이들이 설령 일정 기간 노동을 하여 상환하여 돌아간 다 해도 이들에게는 희망이 없는 미래 밖에 없었을 것이다.
士伍라는 신분은 秦漢의 爵制體系에서만 그 독자성이 인정이 되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高爵者가 누리는 富貴는 徹侯와 關內侯를 그 예 외로 하여 대체로 後子, 2ㆍ3子, 4子 이후에 따라서 대폭 차등적으로 경감된다. 또 그 다음 세대를 거치면서 더욱 낮은 작으로 변화하여 새 로운 공을 세우지 않으면 최종적으로는 거의 모두 士伍가 된다. 즉 二年律令의 爵制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任仲爀씨의 표현대로 士伍로의 수렴시스템이고 이것은 秦律에서도 마찬가지였다고 단정해도 좋을 것이다. 戰國時代 각국은 世卿世祿制를 타파하였는데, 吳起가 楚 國에서 變法을 시행하였을 때, 봉군의 자손이라 해도 3세에 그 爵을 제한해야한다고 되어 있다.38) 二年律令에는 公士에서 司寇에 이르기 까지는 2세에 이르러서는 모두 士伍로 동일하다. 또한 公卒․士伍․庶 人은 모두 無爵의 平民으로 “一夫百畝”의 표준이 되는 編戶民인 것으
37) “卅三年四月…, …上造徐有貲錢二千六百八十八.…家貧不能入…” (湖南省文物 考古硏究所․湘西土家族苗族自治州文物處, 湘西里耶秦代簡牘選釋 , 中國歷史 文物 2003-1, 2003, p.17); 湖南省文物考古硏究所, 里耶發掘報告 (湖南: 岳 麓書社, 2007), p.188).
38) “使封君之子孫三世而收爵祿” (韓非子 和氏).
로 되어 있다.
그런데, 二年律令에는 公卒과 士伍의 차이는 불분명하지만, 公卒․
士伍와 庶人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가령 二年 律令傅律에는 5급인 大夫 이상은 90세가 되면 매달 鬻米 1石씩을 제 공받는 것으로 되어 있고 4급 不更은 91세, 簪裊 92세, 上造 93세, 公 士 94세, 公卒과 士伍는 95세에 각각 鬻米 1石을 매달 제공받는 것으 로 되어 있다.39) 庶人의 경우에는 鬻米 제공의 규정이 없다. 이 점에서 庶人과 公卒․士伍와의 차이가 존재함을 지적할 수 있다. 세역의 반을 경감 받는 睆老의 규정에서 公卒ㆍ士伍는 포함되어 있으나 庶人이 제 외되어 있다.40) 受杖(仗)의 경우도 公卒ㆍ士伍는 포함되어 있으나 庶 人이 제외되어 있다.41) 受杖(仗)은 公卒ㆍ士伍 75세 이상자에게 王杖 을 하사하여 노인들의 권익을 상징하는 표식으로 삼는 것이고, 睆老는 有爵者가 각각의 작위에 규정된 요역의 반만 복역하도록 하고 그 요역 도 邑中의 요역에만 종사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노인들에게 부여되 는 혜택을 庶人에게 부여하지 않는 것이다.42) 반면에 免老 규정에는
‘公卒以下’로 표현되어 있는데43), 任仲爀씨는 免老 규정에는 ‘公卒以下’
로 표현되어 있어 庶人도 포함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고 하지만,44)
二年律令 傅律의 여타 조항에서 庶人이 제외되어 있으므로 이 경우 庶人이 포함되어 있는지는 불분명하다. 庶人의 이러한 성격 때문에 椎 名一雄씨는 二年律令에 근거하여 매우 독특한 견해를 발표하고 있 다.45) 二年律令의 田宅의 給付 규정에 庶人이라는 신분이 기재되고 39) “大夫以上[年]九十, 不更九十一, 簪裊九十二, 上造九十三, 公士九十四, 公卒、
士五九十五以上者, 稟鬻米月一石” (二年律令354簡).
40) “不更年五十八, 簪裊五十九, 上造六十, 公士六十一, 公卒、士五六十二, 皆爲 睆老” ( 二年律令357簡).
41) “大夫以上年七十, 不更七十一, 簪裊七十二, 上造七十三, 公士七十四, 公卒、士 五七十五, 皆受杖(仗)” (二年律令 355簡).
42) “睆老各半其爵徭員, 入獨給邑中事” (二年律令 407簡).
43) “大夫以上年五十八, 不更六十二, 簪裊六十三, 上造六十四, 公士六十五, 公卒以 下六十六, 皆爲免老” (二年律令356簡).
44) 任仲爀, 앞의 글, pp.173-174.
그것이 公卒․士伍라 하는 無爵者와 함께 같은 田宅이 給付되고 있는 데, 二年律令의 傅律의 규정을 보면 庶人만이 그 기재가 보이지 않 고 있다. 이 점에 주목하여 庶人이 傅(요역․병역의 의무)에서 제외된 신분층으로 단정하고 있다.46) 二年律令에 규정된 庶人은 요역과 병 역의 의무에서 제외 되었던 七科讁과 유사하다는 것이다.47) 庶人에 대 한 二年律令의 규정은 앞서 보았듯이 田宅의 지급규정은 士伍와 동 일하고 鬻米의 제공, 睆老의 규정, 受杖(仗)의 경우에 있어서 士伍는 포함되어 있으나 庶人이 제외되어 있다. 二年律令에 규정된 庶人은 椎名一雄씨의 지적처럼 매우 특수한 신분으로 흔히 말하는 百姓과는48) 다른 존재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예컨대, 司寇․隱官의 子는 상식적 으로 이해하자면 庶人이 되어야 하지만 二年律令 傅律의 규정에 의 하면 士伍로 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49) 椎名一雄씨의 지적처럼 秦 漢律에 있어서 庶人은 매우 특수한 규정을 받고 있어서 우리가 흔히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庶人을 일반 평민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 그러 나 椎名一雄씨의 지적처럼 그렇다고 해서 이를 七科讁과 연결시켜 이 해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雲夢秦簡 魏戶律에 의하면,50) 假門, 逆旅, 贅壻, 後父는 戶를 형성할 수 없고, 田宅이 給付되지 않고, 3대까지는
45) 椎名一雄, 張家山漢簡二年律令に見える爵制 -庶人の理解を中心として (鴨 台史學 6, 2006).
46) 椎名一雄, 위의 글, p.75.
47) 椎名一雄, 위의 글, pp.76-79.
48) 雲夢秦簡을 살펴보면, 百姓은 編戶齊民으로써 ‘면노’의 대상이었던 것이 확 인된다. “•百姓不當老, 至老時不用請, 敢爲酢(詐)僞者, 貲二甲; 典 老弗告, 貲各 一甲; 伍人, 戶一盾, 皆䙴(遷)之. •傅律” (雲夢秦簡, p.143). 그러나 庶人은 二年律令에서 확인되듯이 免老의 대상에서 제외되어 있다.
49) “不更以下子年卄歲, 大夫以上至五大夫及小爵不更以下至上造年卄二歲, 卿以上 子及小爵大夫以上年卄四歲, 皆傅之. 公士、公卒及士五、司寇、隱官子, 皆爲士 五” (二年律令364簡-365簡).
50) “•卄五年閏再十二月丙午朔辛亥, ○告相邦: 民或棄邑居壄(野), 入人孤寡, 徼人 婦女, 非邦之故也. 自今以來, 叚(假)門逆呂(旅), 贅壻後父, 勿令爲戶, 勿鼠(予)田 宇. 三枼(世)之後, 欲士(仕)士(仕)之, 乃(仍)署其籍曰: 故某慮贅壻某叟之乃(仍)孫”
(雲夢秦簡, p.293).
관리가 될 수 없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이에 비하여 二年律令에서 庶人은 “一夫百畝”의 田宅이 給付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고 戶를 형 성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으므로 공통점이 없다. 筆者는 庶人 의 실체는 七科讁보다는 오히려 商君書境內에 나오는 庶子에51) 가 깝다고 보았다. 이에 대해서 任仲爀은 부정적 입장을 취하였고,52) 朴健 柱는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53)
商君書 境內에 의하면 庶子는 無爵者로 되어 있다. 無爵者로는 二年律令에는 公卒․士伍․庶人이 있다. 商君書境內에 나오는 庶子 가 庶人이 아니라면, 二年律令에 의하면 庶人을 제외한 나머지 無爵 者로는 公卒과 士伍 밖에 없다. 그러나 公卒과 士伍는 국가의 公民으 로 兵役과 徭役의 對象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有爵者가 使役할 수 있 는 對象에서 公卒과 士伍를 除外하고 나면 그 대상은 庶人일 수밖에 없다. 爵位가 높을수록 名田의 數量이 많았고, 이에 따라 勞動力의 需 要는 증가할 수밖에 없다. 于振波는 庶子가 실제로는 爵位가 없는 農 民이었고, 井田制 下의 庶人이 변화한 것으로 이해한다.54) 그들이 有爵 者에게 노동을 제공하는 것은 井田制 下의 庶人이 ‘公作’을 한 흔적이 었다는 것이다. 다른 점은 有爵者의 名田은 公田과 私田으로 구분되지 않고 庶子의 토지는 有爵者의 名田에서 분할하여 주는 것이 아니라 官 府로부터 지급을 받는다는 점이라는 것이다.55)
秦漢律에서 士伍는 有爵者에서 세대를 거쳐 단계별로 강등되었거나 혹은 司寇․隱官에서 1세대를 거쳐 上向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다만 庶人의 자식이 士伍가 되는 문제는 약간의 고찰을 필요로 한다.
즉, 二年律令 364ㆍ365簡에 “公士、公卒及士五、司寇、隱官子, 皆爲
51) “其有爵者乞無爵者以爲庶子, 級乞一人. 其無役事也, 其庶子役其大夫, 月六日:
其役事也, 隨而養之” (高亨 注譯, 商君書注譯, 北京: 中華書局, 1974, p.145).
52) 任仲爀, 秦漢律의 庶人 (中國古中世史硏究22, 2009).
53) 朴健柱, 秦漢 法制上의 刑盡者 ․ 免隸臣妾 과 公卒、士伍、庶人 (中國 學報 58, 2009), pp.215-216.
54) 于振波, 簡牘所見秦名田制蠡測 , “简帛研究网站”(2004-01-11).
55) 위와 같음.
士五”라고 하여 士伍가 될 수 있는 신분을 열거한 것에 庶人을 전후해 서 모든 신분이 열거되어 있지만, 유독 庶人만 빠져 있다. 단순히 庶人 아래에 위치하는 司寇、隱官의 子가 士伍가 된다고 하여 庶人의 子가 士伍가 되었을 것이라고56) 단정하기는 어렵다. 또 의도적으로 생략했 다고 이해하기도 어렵다. 이런 관점에서 筆者는 二年律令 364ㆍ365 簡에 “公士、公卒及士五、司寇、隱官子, 皆爲士五.”라고 하였을 때는 이 규정을 그대로 庶人의 子는 士伍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 히 한 것으로 보았다.57) 이를 테면, 二年律令의 여타 규정에 士五、 司寇、隱官을 언급하면서 중간에 庶人을 빠트린 사례가 있다든가, 혹 은 이처럼 불분명하게 표현한 것이 있다면, 그와 같은 추론을 허용할 수도 있지만, 이제까지 二年律令을 독해한 경험으로는 二年律令의 규정들은 매우 명확하기 때문에 이렇게 추론을 허용하는 사례는 없다 고 보았다. 즉 庶人의 아래에 위치하는 司寇․隱官의 子도 庶人이 되 는 것이 아니라 곧바로 士伍가 되는 것으로 나타나있기 때문에 庶人의 子는 당연히 士伍가 되어야할 것 같지만, 상기의 二年律令에 “公 士、公卒及士五、司寇、隱官子”라고 그 대상이 公士, 公卒, 士五, 司寇, 隱官의 子로 명백히 지정된 이상 庶人의 子는 士伍가 되지 않았음을 명백히 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58)
任仲爀씨는 公卒과 士伍, 庶人의 개념과 그 구분을 명백히 하고 있 는데, 작위도 없는 無爵者層을 굳이 3가지로 구별해 놓은 이유는 3자 의 내원을 본인 대까지는 구별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즉, 庶人은 노비와 죄수에서 유래한 자, 士伍는 원래 士伍였던 자, 公 卒은 不更ㆍ簪裊ㆍ上造 등 有爵者에서 하강한 자라는 구별이 필요했던 것이다. 만약 노예와 죄수가 사면되어 庶人이 되었더라도 문제가 발생 했을 때는 群盜의 사례처럼 원래의 신분으로 복귀시키는 근거가 되었
56) 任仲爀, 秦漢律의 耐刑 -士伍로의 수렴 시스템과 관련하여- (中國古中世 史硏究, 2008), p.174.
57) 林炳德, 秦․漢時代의 士伍와 庶人 (中國古中世史硏究20, 2008), p.334.
58) 위와 같음.
다는 것이다.59)
어쨌든 庶人의 子가 任仲爀씨의 견해처럼 士伍가 되는지 아니면 筆 者의 주장처럼 庶人이 되는 것인지는 사료에 나와 있는 것은 아니다.
庶人의 子는 庶人이 되었다고 판단하는 근거의 하나로 筆者가 주목한 것은 二年律令戶律에 ‘庶人律’이었다.60) 이 庶人律은 庶人에 관한 독 립된 律로 해석할 수 있다.61) 즉 秦漢律에서 별도의 ‘庶人律’이 있었다 는 것은 庶人이 특별히 규정된 별도의 신분으로 庶人의 子가 士伍가 아닌 庶人으로 되는 근거의 하나로 제시하였다.
二年律令傅律에는 稟米, 受杖, 睆老, 免老의 4가지 事項을 規定하 고 있는데, 각 부문에서 庶人이 빠져있다. 다만, 免老의 경우만 “公卒 以下”로 되어 있어 庶人이 包含되어 있는 것인지 除外된 것인지 斷定 하기 어렵다. “公卒以下”에 대한 해석도 필자와 任仲爀씨는 견해를 달 리하였다. 任仲爀은 “公卒以下”에 庶人이 포함된 것으로 보았는데,62) 필자는 제외된 것으로 보았다. 이 점 역시 이를 명백히 확인해줄 사료 는 없다. 필자의 주장은 公卒․士伍와 다른 庶人의 특수성을 강조하고 자 한 것이라면 任仲爀씨의 所說은 차이점은 있으나 그 차이점이 그다 지 크지는 않다는 것이다. 어쨌든 筆者의 입장에서 다시 강조하자면,
“公卒以下”에 庶人을 包含시킬 경우 稟米, 受杖 규정에 庶人이 除外된 것을 納得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各各의 爵位에 規定된 徭役의 半만 服役하도록 하고 그 徭役도 邑中의 徭役에만 從事하게 하는 睆老 規定 에 庶人이 빠진 것을 설명하기 어렵기 때문에 “公卒以下”에 서인은 포 함된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사실 “公卒以下”의 免老
59) 任仲爀, 秦漢律의 庶人 (中國古中世史硏究22, 2009), p.173.
60) “□□廷歳不得以庶人律未受田宅者, 鄕部以其爲戸先後次次編之, 久爲右” (二 年律令, 318簡). 二年律令 318簡의 “□□廷歳不得以庶人律”에 대해서는 彭 浩․陳偉․工藤元男은 “亡逃卒歲不得以庶人律代戶□”일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 다(彭浩․陳偉․工藤元男 主編, 앞의 책, pp.325-326).
61) 曹旅寧, 秦漢法律簡牘中的“庶人”身分及法律地位問題 (咸陽師範學院學報 22-3, 2007), p.14.
62) 任仲爀, 秦漢律의 庶人 (中國古中世史硏究22, 2009), p.211.
에 士伍․庶人을 비롯하여 심지어 司寇․隱官․隸臣妾․鬼薪白粲․城 旦舂 등이 모두 포함된 표현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만약 이렇게 해석 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이 免老는 田宅給付의 대가로 輪番으로 행하는 徭役․兵役의 免除를 意味하는 것이 아닌 글자 그대로 隸屬民을 包含 한 모든 “公卒以下”의 勞役을 免除받는 年齡인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필자가 七科讁과 유사하다는 椎名一雄의 견해와 달리하였지만, 庶人 이 傅(요역․병역의 의무)에서 제외된 신분층으로 단정한 椎名一雄의 견해에 대하여 비판하지 않은 것은 확실히 필자의 오류였다고 생각한 다. 二年律令에 규정된 庶人은 有爵者의 子인 公卒, 無爵者인 士伍와 同一한 方式의 徭役、兵役을 負擔하였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商君書境內에 나오는 庶子의 역할을 지적하는 것으로 庶人의 역할을 설명하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설명이었다고 생각한다.
Ⅳ. 女性과 庶人
庶人이 傅(요역․병역의 의무)에서 제외된 신분층으로 단정한 椎名 一雄의 견해와 관련하여 이와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는 것이 秦漢時期 의 女性의 徭役 徵發 문제이다. 秦漢 시기에 女性의 徭役 徵發의 문제 는 이미 오랫동안 논쟁이 되고 있었는데, 肯定的으로 보는 代表的인 硏究者로 山田勝芳이 있다. 그는 1970년대63) 이래 계속해서 女性의 徭 役 徵發을 주장하였다. 이에 대하여 楠山修作은 女性의 徭役 징발을 否定하였다.64) 가장 최근 山田勝芳은 江蘇省天長縣出土戶口簿․筭賦에 대한 分析을 통하여 半 정도가 事算 對象者로 事算 중에 女子를 除外 하면 인구 언벨런스 狀態에 直面하기 때문에 여기에 보이는 事筭의 事 라 함은 兩性 15歲 이상 56歲 以下를 對象으로 하는 算賦라고 解釋해 63) 山田勝芳, 漢代の算と役 (
東北大學敎養部紀要
28, 1978).64) 楠山修作, 漢代女性力役不課論 (中國史論集, 朋友書店, 2001).
야 하고 따라서 女性이 徭役에 徵發된 것이 立證이 되었다고 주장하였 다.65) 그러나 鷲尾祐子는 山田勝芳과 똑같은 시기에 江蘇省天長縣出土 戶口簿․筭賦에 대한 견해를 발표하였는데, 여기에서 그는 이 木牘의 事라 함은 徭役、兵役과 算賦 가운데 算賦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여 기에서 나오는 ‘復’이 算賦의 免除를 意味하는 것이고 徭役、兵役의 義 務를 免除하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그 결과 男性만이 徭役、兵役의 對象이었고 女性은 그 對象이 아니었음이 確認이 되었다고 본다.66) 任 仲爀도 女性이 요역에 징발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67) 筆者는 여성은 원칙적으로 요역 징발의 대상이 아니라는 보고 있는데, 이와 관련하여 주목해야할 것이 戶籍에서의 연령의 기재라고 생각한다. 戶籍에서의 연령의 기재는 “獻公立七年, 初行爲市. 十年, 爲戶籍相伍” (史記 秦始 皇本紀)에 의하면, 秦獻公10년(기원전 375년)에 실시된 것으로 나타나 고 있다. 그 후 “十六年九月, ……初令男子書年” (史記 秦始皇本紀)
“라고 하여 秦王政의 16년(紀元前 231년)에 처음으로 男子에게 年을 기재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할 사실이 初令男子書年 이다. 初令男子書年 은 적어도 최초에는 男子에 한해서 연령을 파악 하고자 했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은 이 당시 徭役이나 兵役은 남자 가 그 대상이었음을 보여준다.68) “初令男子書年”에 따라 모든 남자의 나이를 기록한 年細籍 , 군역과 요역의 대상인 성인 남자를 별도로 파악한 傅籍 , 그리고 傅籍 에 기초해서 구분한 成人 男性을 第1欄, 未成年 男性을 第3欄에 파악한 里耶의 戶籍簡은 당시의 국가의 요역과 군역의 대상이 17세 이상의 성인남성이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국
65) 山田勝芳, 前漢武帝代の地域社會と女性徭役 -安徽省天長市安樂鎭九十號漢墓 木牘から考える- (集刊東洋學97, 2007), p.3.
66) 鷲尾祐子, 出土文字にみえる秦漢代戶籍制度 -湖北省里耶古城出土秦名籍と江 蘇省天長縣出土戶口簿․筭賦- (東亞文史論叢 2007, 東亞歷史文化硏究會, 2007), pp.36-37.
67) 任仲爀, 秦漢律의 庶人 (中國古中世史硏究22, 2009), p.215.
68) 林炳德, 里耶秦簡을 통해서 본 秦의 戶籍制度 (東洋史學硏究 110, 2010), pp.26-29.
가가 성인남성의 파악을 매우 중요시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필자는 徭 役․兵役에 있어서 여성은 前漢 초기 漢書 惠帝紀의 사례를 예외로 하고, 원칙적으로 요역에 징발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戍邊刑이 男性 에 한정되어 있었다는 사실도69) 이를 뒷받침하며 成人의 男性이 傅 籍 이나 年細籍 , 戶籍 의 第1欄에의 기록을 통하여 중층적으로 거 듭 확인되고 있는 것도 요역과 병역의 주요대상이 성인남성이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한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戶籍上 秦漢初의 여성이 남성 성인의 호적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엄밀하게 파악된 증거가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동원에 필요한 제도의 완비도 찾아 볼 수 없다. 요 역과 군역에서 여성이 제외되었는가의 여부를 떠나 어쨌든 국가가 확 보하고자 하는 가장 중요한 노동력이 丁男이었다는 것은 확실하다.70) 秦律에는 小隸臣의 노동력의 크기를 “可使者”의 경우에 工人 1명의 20%로 규정하고 있는데,71) 위에서 키 5척 이하의 小隸臣이라면 “不可 使者”에 해당한다.72) 그런데, 장정 1인으로 贖免할 수 있는 대상으로 免老에 해당하는 隸臣, “不可使者”에 해당하는 小隸臣과 隸妾을 等値 하고 있다. 즉 아직 勞役을 시킬 수 없는 小隸臣이나 免老에 해당하는 隸臣과 可使者 隸妾을 같은 가치로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隸妾의 贖 免에 관한 규정에서도 官婢인 隸妾을 남성의 戍邊 5년으로 맞바꿀 수 있다고 되어 있다.73) 秦漢律에서 ‘女性’이 徭役의 대상 與否는 庶人의 徭役 與否를 이해하는 端緖가 될 수 있다. 雲夢秦簡에 百姓이 빌리 기를 원하면 隸妾을 빌려준다는 규정도74) 여성 형도의 勞動力의 活用 69) 宮宅潔, 秦漢刑罰體系形成史への一試論 -腐刑と戍邊刑- (東洋史學硏究
60-3, 2007), p.26.
70) “隸臣欲以人丁粼者二人贖, 許之. 其老當免老、小高五尺以下及隸妾欲以丁粼者 一人贖, 許之” (睡虎地秦墓竹簡, pp.53-54).
71) “冗隸臣妾二人當工一人, 更隸妾四人當工【一】人, 小隸臣妾可使者五人當工一 人” (睡虎地秦墓竹簡, p.74).
72) “隸臣·城旦高不盈六尺五寸, 隸妾、舂高不盈六尺二寸, 皆爲小; 高五尺二寸, 皆 作之” (睡虎地秦墓竹簡, p.49).
73) “百姓有母及同牲(生)爲隸妾, 非適(謫)罪殹(也)而欲爲冗邊五歲, 毋賞(償)興日, 以免一人爲庶人, 許之” (睡虎地秦墓竹簡, p.91).
이 매우 制限되어 있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限定된 勞役에만 이용할 수 있는 女性을 男性처럼 정기적인 徭役에 동원하였다고 볼 수 는 없다. 필자는 徭役에 있어서 여성의 징발 사례는 前漢 초기 漢書 惠帝紀의 사례를 예외로 하고,75) 원칙적으로 요역에 징발되지 않았다 고 생각한다. 여성의 역할과 관련하여 주목해야할 것이 二年律令의 다음의 규정이다.
庶人 以上, 司寇․隸臣妾인 자가 城旦舂․鬼薪白粲 이상의 罪가 없는 데도, 관리가 故意로 경중을 달리하였거나 과오에 의해서 肉刑을 집행하 였다면, 모두 隱官으로 한다. 女子庶人은 算賦․徭役을 면제하여 ‘自尙’으 로 한다.76)
이 문장에서 京都大 주석에서는 위의 해석대로 無實의 죄로 형에 처해진 女子庶人에게는 算賦ㆍ徭役을 면제한다고 하였다.77) 整理小組 도 筭(算)을 算賦로, 事를 徭役으로 해석한다.78) 가장 큰 문제는 ‘女子 庶人’이다. 京都大 주석과 整理小組는 女子庶人을 글자 그대로 女子庶 人으로 해석한다. 이에 대하여 二年律令與奏讞書의 주석에서는 “女 子以爲庶人”으로 해석하고 있다.79) 그런데 이 부분을 專修大學 二年
74) “妾未使而衣食公, 百姓有欲叚(假)者, 叚(假)之, 令就衣食焉, 吏輒柀事之” (睡 虎地秦墓竹簡, p.48).
75) “三年春, 發長安六百裏內男女十四萬六千人城長安, 三十日罷” (漢書 卷2 惠 帝紀 , p.89); “春正月, 復發長安六百裏內男女十四萬五千人城長安, 三十日罷” ( 漢書 卷2 惠帝紀 , p.90).
76) “庶人以上, 司寇․隸臣妾無城旦舂․鬼薪白粲罪以上, 而吏故爲不直及失刑之, 皆以爲隱官; 女子庶人, 毋筭(算)事其身, 令自尚” (二年律令 124簡, p.25). 自 尙; 龍崗秦簡에 ‘自尙’으로 奏讞書에는 ‘自常’으로 나오는데, 구체적으로 그 뜻을 살펴보기는 어렵다. 형도를 해방할 때의 법제상의 특별한 용어로 해석된 다. 專修大學 二年律令硏究會에서는 奏讞書에 의거 재산․가족이나 생활 등을 판결 전의 상태로 돌리는 것으로 해석한다 (專修大學 二年律令硏究會,
張家山漢簡 二年律令譯注(三) -具律- , p.178).
77) 江陵張家山漢墓出土 二年律令 譯注稿(2) (東方學報 77, 2004), p.10.
78) 張家山二四七號漢墓竹簡整理小組, 張家山漢墓竹簡〔二四七號墓〕(釋文修訂 本)(北京: 文物出版社, 2006, p.26).
79) 二年律令與奏讞書, p.142.
律令硏究會에서는 “女子․庶人”으로 끊고 庶人을 庶人以上으로 보고
“隱官으로 된 女子와 庶人以上은……”으로 해석한다.80) 이 점에 대하 여는 張榮强도 女子庶人을 女子와 庶人으로 해석한다.81) 그런데, 二年 律令與奏讞書의 주석처럼 女子庶人을 “女子以爲庶人”으로 해석할 경 우 그 의미가 불분명해진다. 일반적으로 여성에게 徭役이나 軍役을 면 제해주는 대신에 算賦를 부과한 것으로 이해한다면 二年律令 具律의
‘女子庶人’은 “隱官으로 된 女子와 庶人은 算賦、徭役을 면제해준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즉 원래는 여자에게는 徭役을 면제해주는 대신에 算 賦가 부과된 것이었는데, 徭役과 算賦를 모두 면제해준다는 것이다. 그 렇다면 적어도 二年律令 具律에서 隱官으로 된 女子와 庶人이 算 賦、徭役을 면제받은 것이 확실하고 二年律令 亡律에서의 私屬과 庶 人도 算賦와 徭役이 면제된 것이 분명하다. 二年律令 傅律에서는 庶 人이 傅(요역․병역의 의무)에서 제외된 신분으로 나타나고 있다. 따라 서 算賦ㆍ徭役을 면제하는 대상은 ‘女子庶人’이 아니라 女子와 庶人으 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자면, 算賦ㆍ徭役을 면제하는 대 상이 여자 가운데서도 특별히 ‘女子庶人’에만 한정되어 있었다고 이해 되기 보다는 女子와 庶人, 즉 여자 전체가 그 대상이었다고 생각된다.
庶人은 자유인과 달라서 算賦와 徭役을 징수하지 않는다고 보는 견해 에 대해서는 다수의 연구자가 동조하고 있다.82)
Ⅴ. 맺음말
二年律令의 田宅의 給付 규정에 庶人이라는 신분이 기재되고 그
80) 專修大學 二年律令硏究會, 張家山漢簡 二年律令譯注(三) -具律- , p.178.
81) 張榮强, 二年律令與漢代課役身分 (中國史硏究2005-2), pp.33-34.
82) 張榮强, 二年律令與漢代課役身分 (中國史硏究 2005-2), pp.33-34; 袁延勝, 天長紀莊木牘《算簿》與漢代算賦問題 (中國史研究 2008-2), pp.111-112; 王 彥輝, 從張家山漢簡看西漢時期私奴婢的社會地位 (東北師大學報(哲學社會科 學版 2003-2), p.18; 二年律令與奏讞書, p.156.
것이 公卒、士伍라 하는 無爵者와 함께 같은 田宅이 給付되고 있는데,
二年律令의 傅律의 규정을 보면 庶人만이 그 기재가 보이지 않고 있 다. 이 점에 주목하여 椎名一雄,은 庶人이 徭役․兵役․士官에서 제외 된 身分으로 斷定하고 있다. 또한 그는 二年律令에 규정된 庶人은 徭役․兵役의 義務에서 除外되었던 七科讁과 類似하다고 주장하였 다.83) 二年律令에 규정된 庶人은 椎名一雄씨의 지적처럼 매우 특수 한 신분으로 흔히 말하는 百姓과는 다른 존재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 다. 예컨대, 司寇․隱官의 子는 상식적으로 이해하자면 庶人이 되어야 하지만 二年律令傅律의 규정에 의하면 士伍로 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84) 필자는 庶人이 徭役․兵役․士官에서 제외된 자라는 椎名一雄 의 說에 동조하였는데,85) 필자가 七科讁과 유사하다는 椎名一雄의 견 해와 달리하였지만, 庶人이 傅(요역․병역의 의무)에서 제외된 신분층 으로 단정한 椎名一雄의 견해에 대하여 비판하지 않은 것은 확실히 필 자의 커다란 오류였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庶人이 公卒이나 士 伍와 같은 방식의 番役의 徭役․兵役에 종사하였다고는 보기는 어렵 고, ‘庶子’와 같은 방식의 노역에 종사하였다고 생각하지만, 단지 ‘庶子’
와 같은 방식의 노역에 종사하였다는 것만으로 庶人의 勞役을 설명해 서는 곤란하다. 이런 점에서 庶人의 勞役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서술 의 필요성을 느낀다. 二年律令에는 公卒․士伍․庶人․司寇․隱官이 徹候에서 公士까지의 爵位의 序列에서 連續해서 나타난다. 鷹取祐司는 公卒․士伍․庶人․司寇․隱官은 爵位를 指標로 하는 身分序列의 延長 線上에 位置하는 爵制的 身分의 하나라고 한다.86) 즉 庶人이 爵制的 身分에서 벗어난 別途의 獨立된 獨自的 身分이 아니라는 것이다. 더욱 決定的인 것은 二年律令에는 田宅을 所有하는 것은 ‘戶’를 구성한 자 83) 椎名一雄, 앞의 글, pp.76-79.
84) “不更以下子年卄歲, 大夫以上至五大夫及小爵不更以下至上造年卄二歲, 卿以上 子及小爵大夫以上年卄四歲, 皆傅之. 公士、公卒及士五、司寇、隱官子, 皆爲士 五” (二年律令364簡-365簡).
85) 林炳德, 秦․漢時代의 士伍와 庶人 (中國古中世史硏究22, 2009).
86) 鷹取祐司, 秦漢時代の刑罰と爵制的身分制 (立命館文學608, 2008), p.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