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리냐노와 예수회의 적응주의 선교정책
李 京 圭 (대구가톨릭대)
Ⅰ. 머리말
Ⅱ. 발리냐노의 생애 Ⅲ. 발리냐노의 적응주의 선교정책
Ⅳ. 맺음말
1. 머리말
명․청시기 동서문화교류사를 연구한 사람은 대부분 마태오 리치가 행한 중국 전통문화와 풍속에 적응하는 선교전략을 알고 그것을 적극 적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이러한 선교전략은 프란치스코 사비에르 (Francisco Xavier, 沙勿略, 1506-1552), 알렉산드로 발리냐노 (Alessandro Valignano, 范禮安, 1539-1606), 미카엘 루지에리(Michele Ruggieri, 羅明堅, 1543-1607)의 창조적인 업적을 계승․발전시킨 것이 었다.1)
*본 연구는 대구가톨릭대학교 2013학년도 교내연구비의 지원으로 연구되었음.
1) 예수회의 적응주의적 선교방침은 창설자인 로욜라의 기본정신과 프란치스코 사비에르의 경험적 권고 및 발리냐노의 선교지침에 기인하고 있다(L. 맘포오 드 저, 김진욱 역, 문명 -그 전망과 해석, 서울: 서광사, 1978), pp.106, 113-115; 프란치스코 사베리오는 처음부터 일본문화의 우수성을 인정하고 그 것에의 적응을 시도했었고, 발리냐노도 일본을 방문할 때마다 사베리오의 그와 같은 적응주의를 확인하였다(최석우 저, 韓國敎會史의 탐구Ⅱ, 한국교회사연 구소, p.474).
하지만 적응성 선교방식은 당시 전체 그리스도교세계에서는 비주류 의 위치에 있었다. 적응성 선교방식은 처음부터 “한 손에 십자가를 들 고 다른 한 손에는 보검을 들고”라는 스페인 출신 선교사들의 전통적 선교방식2)으로부터 압력과 비난을 받게 되어 어느 노선을 따라야 할 지 선택을 해야만 했다. 즉 평화적 방식과 학술적 교류를 특징으로 하 는 중국 예수회선교단의 선교노선은 바로 스페인 식민지배자들이 라틴 아메리카에서 시행했던 선교방식과 비교되는데, 군사적 정복과 정신적 정복이 긴밀히 결합된 모델을 점차 포기하면서 형성된 것이었다.
이러한 선교방식은 당시 그리스도교세계에서 일부 지식층의 찬성과 본보기가 되었을 뿐 아니라 역사적으로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리하여 200년 이상 지속된 전례논쟁에 단서를 제공하였다.
1573년 발리냐노는 예수회 제4대 총장 메르쿠리안에 의해 인도에서 일본에 이르는 예수회 전 교구 사무를 주관하는 시찰원 겸 부주교로 임명되었다. 동방 선교 32년 동안 3차례나 일본을 방문하였고, 6차례에 걸쳐 마카오에 머물면서 교무를 처리하였다. 그리하여 일본과 특히 중 국의 선교 사업에 심혈을 기울였다.
발리냐노는 중국내지로 들어가 선교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움이 따 른다는 것을 인식하고, 선교의 임무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사비에르 신 부의 정신을 계승하고 선교방식에 대대적인 개혁이 있어야 한다는 강 한 인식을 갖게 되었다.
여기서는 기존의 연구성과3)를 토대로 사비에르로부터 시작된 적응 2) 백지선교(tabula rasa)라고 하며, 선교지역의 전통문화와 관습을 깨끗이 없애
고 선교하는 방식
3) 예수회의 적응주의 선교정책에 관한 종합적인 연구서로는 데이비드 E. 먼젤로 지음, 이향만 장동진 정인재 옮김, 진기한 나라, 중국: 예수회 적응주의와 중 국학의 기원 (파주: 나남, 2009; 원전: David E. Mungello, Curious Land:
Jesuit Accommodation and the Orign of Sinology,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85)이 있고, 예수회의 적응주의 선교전략이 수립되는 과정에 대한 연 구서로는 沈定平, 明淸之際中西文化交流史 -明代:調適與會通 (北京: 商務印 書館, 2001); 고노 이다카시 지음 이원수 옮김, 일본그리스도교사 (한국교회 사연구소, 2010; 원전: 五野井隆史 著, 日本キリスト敎史, 吉川弘文館, 2001)
성 선교노선이 발리냐노 때에 와서 어떤 과정을 거쳐 보다 구체적인 선교책략으로 이어지고 실현되어 가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Ⅱ. 발리냐노의 생애
발리냐노는 1539년 2월 20일 이탈리아 나폴리왕국 아브르초 (Abruzzi)주 키에티(Chieti) 마을의 부유한 귀족가정에서 태어났다. 그 의 부친은 그 지역 대주교 지오반니 피에트로 카라파(Giovanni Pietro Carafa)의 절친한 친구였다. 카라파는 후에 로마교황 바오로4세가 되 었다.
발리냐노는 기골이 장대하고 정신력이 활달하며 총명하였다. 만19세 가 되기 전 파도바(Padova)대학에서 법학박사학위를 받았다. 바오로4 세의 총애를 받아 키에티 당국에 의해 카살레(Casale)수도원의 원장이 되었다. 이후 추기경 아르테푸스의 조수가 되어 바티칸교황청에서 여 러 해동안 일했다. 1559년 바오로4세가 서거하자 발리냐노는 후견인을 잃게 되었다.
이 있다. 또한 예수회의 적응주의와 관련한 최근의 연구로는 安大玉, 마테오 리치(利瑪竇)와 補儒論 (東洋史學硏究 第106輯, 東洋史學會, 2009); 2010년 신학대학원 국제학술심포지엄, 동서양 문명의 만남, 도전과 기회 -예수회 선 교사 마테오 리치 서거 400주년을 기념하여 (서강대학교 신학대학원, 2010.9.16-17); 김종건, 예수회의 동방 선교와 적응주의 선교전략의 성립 -프 란시스코 사비에르를 중심으로- (大丘史學 第103輯, 大丘史學會, 2011); 마 테오 리치 지음, 신진호 전미경 옮김, 마테오 리치의 중국견문록 (문사철, 2011; 원전 劉俊餘 王玉川 合譯, 利瑪竇全集 1,2 (利瑪竇中國傳敎史1,2), 輔仁 光啓聯合出版, 中華民國75年) 등이 있다. 또한 발리냐노의 생애에 대해서는 서양자, 중국천주교회사 (가톨릭신문사, 2001); 沈定平, 앞의 책; (프)費賴之 著, 馮承鈞 譯, 范禮安傳 (在華耶穌會士列傳及書目 上冊, 北京: 中華書局, 1995); (프)榮振華 著 耿昇 譯, 范禮安傳 (在華耶穌會士列傳及書目補編 北 京: 中華書局, 1995) 등이 있다. 그리고 발리냐노의 선교방식에 관해서는 심백 섭, 알렉산드로 발리냐노(Alessandro Valignano)와 적응주의 선교 방식 (종 교와 문화 10호, 서울대 종교문제연구소, 2004)가 있다.
1566년 발리냐노는 로마에서 예수회에 가입하고 아울러 로마학원의 학생이 되었다. 그리하여 당시 저명한 수학자였던 클라비우스의 지도 로 수학, 물리, 철학, 신학을 공부했다. 1571년 발리냐노는 잠시 성 안 드레아 소신학원 원장이 되었다. 직무관계로 그 해 가을 젊은 마테오 리치에 대한 시험을 맡게 되었으며, 이러한 인연으로 마테오 리치의 후견인이 되어 그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 되었다.
이후 발리냐노는 1년간 마자라타(馬柴拉塔)학원의 원장이 되었다.
1573년 발리냐노는 학식이 풍부하고 재주가 많은데다가 기민하고 보는 시야가 넓었던 까닭에 예수회 제4대 총장 메르쿠리안(Mercurian)의 눈 에 들어 정결, 청빈, 순명, 해외선교 등 4대 서원을 하고 그 해 5월 인 도에서 일본에 이르는 예수회 전 교구 사무를 주관하는 시찰원 겸 부 주교로 임명되었다.
1574년 1월 1일 포르투갈 국왕 세바스티앙(sebastiấo, 1557-1578)을 접견하고 선교 사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 “국적을 뛰어넘는 대동주의 채택”건의안을 제출하였는데, 이 건의안은 이후 열렸던 예수 회 성장회의에서 통과되었다. 같은 해 3월 23일 발리냐노는 국적이 다 른 41명의 예수회 선교사들을 인솔해 차지아스(査加斯)호를 타고 리스 본을 출발 9월 6일 고아에 부임했다.
그가 다수의 스페인인과 이탈리아인으로 선교단을 구성한 이유는 다민족으로 구성된 선교사를 인도까지 동반함으로써 민족을 초월한 그 리스도교적 정신을 우선 선교사들 사이에서 실현하려고 한 시도였다.
이와 같은 경험을 통해 새로운 선교지 주민과의 융화를 도모하고 그리스도교 선교활동을 유연하게 추진하려는 의도였다. 또 보수적인 포르투갈 관구의 인도 관구에 대한 강한 영향력을 약화시키려는 의도 를 담고 있었다.4)
이러한 그의 의도는 예수회 총장이 강하게 바라는 것이었으며, 또한 총장의 의향이기도 했다. 그의 두드러진 행동은 당연히 포르투갈 관구 4) 고노 이다카시 지음 이원수 옮김, 앞의 책, p.188.
측의 저항을 받게 되어 포르투갈 관구의 장상들은 그가 많은 스페인 선교사를 동행하는 것에 강하게 반대했다. 그러나 포르투갈의 젊은 국 왕 세바스티앙은 그에게 원조하고 보호할 것을 약속했다.5)
이러한 배경 속에 발리냐노 순찰사는 인도 각지를 시찰하고
印度 諸事摘要
를 기술하였으며, 일본을 시찰하고
日本諸事摘要
를 기술하 였던 것이다.발리냐노는 동방선교 32년 동안(1574.9.6-1606.1.20) 담당한 교회직무 를 보면 인도교구 시찰원 17년, 인도교구 대주교 4년, 중국과 일본교구 시찰원 11년이었다. 그가 인도와 말라카에도 머물렀지만 가장 오랫동 안 머물렀던 지역은 엮시 일본과 마카오였다. 발리냐노는 3차례나 일 본을 방문했으며, 1606년 1월 20일 갑자기 신장질환이 발병하여 숨질 때까지 마카오에 있었다.
Ⅲ. 발리냐노의 적응주의 선교정책
일본과 특히 중국의 교무는 발리냐노가 심혈을 기울였던 최대 관심 사였다.6) 발리냐노는 부임 후 두 가지 조치를 시행하였다. “발리냐노 의 사명은 숭고한 종교열정을 활용해 아시아 대륙의 선교기구를 거듭 새롭게 하고 인력을 확충하는 것이며, 종교 활동에 종사하는 선교인원 의 정비와 선교사들의 새로운 재충전을 통해 인도북부, 말라카해협, 몰 루카군도 그리고 일본 등지에서 독자적으로 선교기지를 세울 때 부딪 칠 수 있는 어려운 문제들을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하는 것이 다.”7) 즉 원래의 선교기구를 정돈하고 선교사를 증파한 것이다. 나아
5) 위의 주와 같음.
6) Edward J. Malatesta, “Alessandro Valignano(1539-1606): Strategist of the Jesuit Mission in China” (Review of Culture, No.21, 2nd Series, English edition, the Instituto Cultural of Macau).
7) (미)僑納森․斯彭斯 著, 王改化 譯, 利瑪竇傳 (原書名은 馬泰奧․里奇的記
가 선교사의 종교열정을 새롭게 하였으며, 그 목적은 동방 전체의 각 예수회 선교단의 실력과 대응전략을 강화하는데 있었다.
또한 그가 떠나오기 전 예수회총장이 맡긴 중임은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중국 해외 선교열정에 불을 붙이고” “넓은 중국을 귀의시키려는 계획”으로 중국내지에 선교사를 파견하는 활동에 박차를 가하라는 것 이었다.8)
1578년 7월 이후 발리냐노는 처음 마카오에 10개월 머물렀는데, 이 곳에서 중국형세를 연구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갖게 되었다. 또한 오 랫동안 멈춰있던 ‘중국행’이라는 불을 다시금 태울 수 있게 되었다.9) 그 가운데 사비에르의 임종을 지켜봤던 안토니(安多尼)와 깊은 대화를 통해 앞서 다녀간 사비에르의 사상과 사적을 알게 되었다. 사비에르는 인도에서 “타미르언어로 십자가, 교리, 하느님, 성모마리아, 참회문을 기록” 이것을 가지고 한 마을씩 찾아가서 현지 토착민에게 가르쳤다.
이렇게 해서 일개월동안 사비에르는 14개 마을을 다녔으며, 만여 명에 게 세례를 주었다.10) 그 과정에서 사비에르는 장차 예수회 선교의 가 장 중요한 선교방침으로 자리잡게 될 적응주의 노선을 형성해나갔 다.11) 사비에르는 진정으로 “다른 종교와 문화를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사람들을 천주와 감춰진 진리에로 나아가게 하는 디딤돌”12)이므로 “지 금까지 사용했던 선교방식에서 벗어나 선교지역의 문명 민족에 적합한
億秘宮, 西安: 陝西人民出版社, 1991), p.51.
8) 何高濟 等譯, 何兆武 校, 利瑪竇中國札記 上冊 (北京: 中華書局, 1983), p.142;
羅漁 譯, 利瑪竇書信集 下冊 (臺北: 光啓․輔仁大學出版社, 1986), p.431.
9) 劉俊餘 王玉川 合譯, 利瑪竇全集 1 (利瑪竇中國傳敎史1, 輔仁 光啓聯合出版, 中華民國75年), p.113; 마테오 리치 지음, 신진호 전미경 옮김, 마테오 리치의 중국견문록 (문사철, 2011), pp.171-172; 빈센트 크로닌 저, 이기반 옮김, 西 方에서 온 賢者 -마테오 리치의 생애와 종교- (분도출판사, 1994), p.48.
10) George E. Ganss, Ignatius of Loyola: The Spiritual Exercises and Selected works (New York :Paulist Press, 1991), pp.47-48.
11) 김기협, 예수회 선교의 적응주의 노선과 중국 일본의 서학 (역사비평 25, 역사비평사, 1994 여름), p.310.
12) 里奧․朶弗爾 著, 盛常在 譯, 聖方濟․沙威傳 (耶穌的伙伴:耶穌會諸聖人及 眞福的靈修簡史 (臺中: 臺灣光啓出版社, 1983), p.203.
선교사의 전형적인 사상과 감정을 배양하는데 중점을 두어야 한다.”13) 고 했다.
사비에르는 일본에서 가고시마, 히라도, 야마구치, 분고를 내왕하며 다수의 일본인을 귀의시켰으나 미야코에서는 전혀 성과를 거두지 못하 고 학술선교는 물론이고 일본의 대학에 갈 의지조차 상실했다. 따라서 이러한 좌절감은 사비에르로 하여금 과거 선교목표와 정책방법에 대해 깊은 반성을 하게 했고, 새로운 방안을 강구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사비에르는 첫째, 일본문화가 중국에 근원을 두고 있으므로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선교의 중심을 일본에서 중국으로 전환해야 마땅하 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둘째, 지금까지 대규모 군중을 회심시키는 선교방법을 포기하고 학술연구를 통해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은 사람들 과 긴밀한 관계를 맺는 것이 효과가 있다는 새로운 방법을 채택하게 되었다. 사비에르는 1552년 4월 8일 포르투갈 국왕 후안 3세에게 보낸 서신에 “중국은 일본의 맞은편에 있다. 많은 걸출한 인재와 학식이 높 은 학자들이 있어서 그들은 매우 학술을 중시하고 있으며, 학술연구를 영광스러운 일로 여기고 있다. 그곳에는 학식 있는 사람이 중요한 지 위나 권력을 갖고 있다.”라고 하였으며, 그곳으로 가는 선교사는 심오 한 학문, 절정의 총명, 철학에 대한 철저한 이해 및 각종 난제의 핵심 에 대한 답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리하여 “학식 있는 사대 부들과 교제하기 위해서는 학술선교가 가장 효과적인 방법”14)이라고 여겼다.
셋째, 천주교교리를 일본에서 유행하고 있던 종교와 서로 결합하기 위해 시도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즉 언어의 장벽이 그리스도교 교 리를 전파하는데 제약이 되었다. 그리하여 선교지역의 언어와 문자를 얼마나 소통하느냐가 선교의 관건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리
13) (영)裴化行 著, 管震湖 譯, 利瑪竇評傳 上冊 (北京: 商務印書館, 1993), p.47.
14) 裴化行 著, 蕭濬華 譯, 天主敎十六世紀在華傳敎志 (上海: 商務印書館, 1936), pp.69-71; 方豪, 方濟各沙勿略傳 (中國天主敎史人物傳 上冊, 北京: 中華書 局, 1997), pp.61-62.
하여 사비에르는 미래선교의 목표를 중국으로 정하고, 그 전략으로 현 재의 사상과 문화관념을 이용해서 그리스도교를 전하고, 방법으로는 현지 언어문자에 능숙하고 학술선교를 수단으로 채택해야 된다고 깊이 인식하였다.15) 사비에르의 이러한 선교전략에 대한 인식은 그 후 발리 냐노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발리냐노는 일본을 시찰하면서 분고, 아즈치, 나가사키 등에서 선교 사협의회를 개최하고 초기 선교에서의 실적과 반성을 회고하며 새로운 기본방침을 결정하여 선교체계를 확립했다.16) 그 이전 발리냐노 시찰 사는 1573년 9월 6일 고아에 도착한 후 인도각지를 시찰했고, 다음 해 12월 19일 선교사협의회를 개최하여 인도관구 여러 지역의 선교체제를 검토했다. 그가 일본입국 후 증보한
인도제사적요
는 일본도 포함하 는 인도관구의 선교에 대해 새로운 방향을 부여하려는 의도로 쓰여진 것이다. 이 책의 15-17장은 일본선교의 현황, 일본인의 그리스도교 개 종방법과 유지 및 경비 등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17) 그가 일본에 와서 느낀 인상은 1583년 10월 28일 일본순시에서 돌아와 인도의 코친차이 나에서 집필한
일본제사적요
에서 일본의 여러 사정이 매우 신기하 며, 유럽에서 상상할 수 있었던 것과는 몹시 다르다는 것을 거듭 강조 하고 있다. 발리냐노는 당시 일본에 체류하고 있던 선교사들이 일본어 를 충분히 이해할 수 없어 이론인의 국민성과 풍속 습관을 알 수 없었 고, 그들과 내면적인 접촉이 불충분했다고 판단하면서 종래의 선교방 법을 비판했다.18)사실 이러한 결과를 초래한 배경에는 일본의 풍습과 생활양식에 가 15) 沈定平, 앞의 책, p.170; 심정평 저, 이경규 외역, 명청지제중서문화교류사 Ⅵ
(釜山敎會史報 제61호, 부산교회사연구소, 2009), p.91.
16) 五野井隆史 저, 앞의 책, p.113; 고노 이다카시 지음, 이원순 옮김, 앞의 책, p.187.
17) ヴァリニャエノ 著, 高橋裕史 譯, 東インド巡察記 (平凡社, 2004), pp.385 -399; 五野井隆史 저, 위의 책, p.114; 고노 이다카시 지음, 이원순 옮김, 위의 책, p.189.
18) 五野井隆史 著, 위의 책, pp.115-116; 고노 이다카시 지음, 이원순 옮김, 위의 책, pp.189-191.
능한 한 적응하는 선교활동을 추진해 온 토레스 신부의 선교방침이 토 레스의 뒤를 이은 카브랄 신부에 의해 바꾸어진 데 원인이 있었다.19) 그리하여 1580년 6월 24일 日本布敎長規則 을 정하고, 일본을 세 개 의 선교구 즉 시모, 분고, 미야코로 나누어 제각기 교구장을 배치하고, 각 교구에 수도원을 두고, 그것을 중심으로 하여 각지에 사제관을 설 치하기로 했다. 교구장은 담당교구를 매년 순시하고, 일본선교장(포교 장, 준관구장)은 3년에 한 번 전국의 수도원과 사제관을 순시하여야 하였다. 이에 더하여 일본인 수도자의 영적 교육적 수양을 위해 신학 원을, 일본인 청소년을 위한 신학교, 수도자와 사제 양성을 위한 수련 원과 일본에 온 유럽인 선교사의 일본어 학습을 위한 어학교 등의 설 치를 결정했다.20)
발리냐노의 선교방침은 일본포교장규칙 에서 그 윤곽이 분명히 드 러났고, 참신한 적응정책이 전개되었으나 그 적응방침이 일본 예수회 의 선교사들에 의해 실행되기 위해서는 일본에 있는 선교사 전원의 광 범위한 지지를 얻는 것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1580년 7월말 나가사키 에서 예비회의를 열었으며, 같은 해 10월 5일 분고교구의 예수회원이 우스기에 모이고, 이어서 발리냐노는 다음해 3월 상경하여 7월에 아즈 치에서 협의회를 열고, 그 후 나가사키로 돌아온 12월에 그곳에서 시 모교구의 협의회를 개최했다. 26명의 선교사들이 어느 쪽인가의 협의 회에 참가하고, 그들에 의해서 제출된 21개의 의제에 관하여 토의했다.
그 결과 1월 6일자로 결정을 내려, 일본 예수회 회원의 복무규정서 에 기록하여 결정사항을 준수할 것을 명령했다.21)
그리하여 인도로 귀환한 후 1583년 10월 28일자로 30장으로 된
일 본제사적요
를 집필했다. 그리고 자신의 적응주의에 반대하며 일본인 19) 五野井隆史 著, 위의 책, p.116; 고노 이다카시 지음, 이원순 옮김, 위의 책,p.191.
20) 五野井隆史 著, 위의 책, pp.117-118; 고노 이다카시 지음, 이원순 옮김, 위의 책, p.193.
21) 五野井隆史 著, 위의 책, pp.119-120; 고노 이다카시 지음, 이원순 옮김, 위의 책, pp.195-196.
이야말로 유럽인의 관습에 적응해야 한다고 강경하게 주장하던 선교책 임자 카브랄 신부를 결과적으로 사임에 몰아넣었고, 1581년 가을에 후 임으로 가스팔 코엘료 신부를 초대 준관구장에 임명했다.22)
그는 이 규칙에서 유럽인 선교사와 일본인과의 문화적 차이를 극복 하고 융화를 꾀하기 위해, 특히 유럽인 선교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일본의 풍속 습관에 적응하기 위해 어떻게 노력해야 하는지 등에 문제 의식을 갖고 양자가 동등한 입장에 있어야 한다는 것, 일본인의 예법 을 배우고 습득하지 않으면 일본에서의 그리스도교 선교 사업에는 빛 나는 미래가 없을 것임을 강조하며 적응방침을 강하게 표방하고 나섰 다.23)
발리냐노는 재차 일본에서 마카오로 돌아온 뒤 “먼저 관심을 가진 일 중 하나는 다양한 중국서적을 적극적으로 수집하는 일”이었으며, 업무 이외의 시간을 “여러 명의 통역관의 도움으로 그 방에 가득 찬 중문서적을 탐독하는데 사용했다”24) 번역 자료와 서적 속의 화보 등을 통해 중국의 역사, 지리, 언어, 풍습, 의약, 건축, 일상생활 그리고 사회 의례에 대해 상당히 이해하게 되었다. 중국에서 간행된 각 지역의 인 문지식이 담겨있는 지도들도 “발리냐노는 대부분 참고했다.”25)
그는 프란치스코 사비에르 전기를 편찬하라는 예수회 총장의 지시 를 계기로 삼아 여러 곳에서 수집한 자료를 통해 “사실과 확실한 근 거”를 원칙으로 진지하게 분석과 고증을 진행했다. 그가 집필한
프란 치스코 사비에르 전기
중에서 중국지리, 정치 그리고 풍속과 관련된 부분은 “대부분 중국현황을 모두 적용했으며, 비록 3백 년 전의 옛 저 서이지만 지금도 인용할만큼 완전하다.”26)22) 五野井隆史 著, 위의 책, pp.120-121; 고노 이다카시 지음, 이원순 옮김, 위의 책, pp.196-197.
23) 五野井隆史 著, 위의 책, p.118; 고노 이다카시 지음, 이원순 옮김, 위의 책, pp.193-194.
24) 裴化行 著, 利瑪竇評傳上冊, p.58 62.
25) 羅漁 譯, 利瑪竇書信集 上冊, p.34.
26) (프)費賴之 著, 馮承鈞 譯, 范禮安傳 (入華耶穌會士列傳, 長沙: 商務印書
어느 날 그는 “마카오학교 창문에서 중국 땅을 바라보면서 큰소리로 바위야!바위야!너 언제 열리려나하고 외쳤다.”27) 그리고 매우 힘든 이 임무를 완성하려면 반드시 사비에르 신부의 정신을 계승하고 선교 방식에 대대적인 개혁이 있어야 한다는 강한 인식을 갖게 되었다. 글 중에서 그는 특출한 사비에르의 품격 두 가지를 언급했는데, 하나는 안목의 원대함이요, 또 다른 하나는 하느님과 함께 한다는 열정이었다.
그는 중국진출이 “선교사 직분 중에서 가장 절박하면서도 고귀한 사명 이 되어야 한다.”라고 하였으며, “중국 선교에 관한 유일한 방안은 과 거 다른 나라에 갔던 선교사들이 따랐던 방식을 피하는 것입니다.”라 고 강조했다.28)
선교방식에 대한 발리냐노의 일대 변혁요구는 과거의 선교폐단에 대한 반성이며 중국문명의 우수성에 대한 인식에 기초한 것임을 알 수 있다.29) 마닐라와 마카오 선교관례에 따르면 “무릇 세례 입교한 중국 인은 모두 포르투갈인이나 스페인인이 되어야 했다. 이름, 복장, 풍습 도 포르투갈과 스페인 두 나라 방식대로 따라야 했다. 발리냐노는 이 같은 방법이 우스운 것일 뿐아니라 아무 쓸모없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하여 “중국인은 원래 중국의 모습대로 두고 서양의 선교사들이
‘중국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30)
발리냐노가 중국문명의 우수성에 대해 어떻게 인식했는지에 관해서 는 그가 편찬한
프란치스코 사비에르 전기
에 잘 나타나 있다. 거기 에서 그는 중국의 우월성 7가지를 1)한 황제가 다스리는 단일 국가로 서 가장 광활한 국가 2)인구가 가장 많은 국가 3)전 세계에서 가장 풍 요로운 국가 4)생산과 물산이 풍족하여 어떤 국가도 비교할 수 없음館, 1938), p.30.
27) (프)費賴之 著, 馮承鈞 譯, 范禮安傳 (在華耶穌會士列傳及書目 上冊, 北 京: 中華書局, 1995), p.20.
28) 裴化行 著, 蕭濬華 譯, 天主敎十六世紀在華傳敎志, p.178.
29) 沈定平, 앞의 책, pp.190-191; 심정평 저, 이경규 외 역, 명청지제중서문화교 류사 Ⅶ (釜山敎會史報 제62호, 부산교회사연구소, 2009), p.95.
30) 裴化行 著, 蕭濬華 譯, 앞의 책, pp.194-195.
5)중국 산천의 장엄함과 국가의 번영을 뒤따를 수 없음 6)백성은 세계 에서 가장 근면함 7)지금까지 발견된 국가중 중국이 가장 평화롭고 통 치가 잘되는 나라 등으로 열거했다.31) 그는 박사학위를 취득한 서양법 학자였던 까닭에 국가통치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특별 히 일곱 번째 항목을 중시하여 관료제의 특성과 장점을 더욱 중점적으 로 고찰했다. 그 장점은 1)관원이 되려면 반드시 과거시험을 통과해야 했으며, 그 과정에서 학술이 중시되고, 각 도시의 장서가 풍부해지고, 자연철학, 윤리철학, 과학 일반에 대해서도 관심이 미치게 된 점 2)보 편적인 질서가 바르게 세워져 있어 지금까지 세계에서 본 정부형식 가 운데 가장 조리정연한 점 3)정책이나 법령의 집행이 엄격하고 신속한 점 4)이 나라에서는 어떤 장애물을 제거할 때에도 항상 신중하고 평화 적인 수단으로 채택한다는 점 5)황족을 지방으로 분산 배치하고 관료 중심 통치를 통해 봉기를 예방한다32)고 하였다. 바로 이와 같은 내용 들이 국가체제 면에서 중국이 유럽에 비해 월등히 앞선다는 인식은 바 로 발리냐노로부터 비롯되었다.33)
또한 신앙의 수용 면에서 중국인이 “하느님에 대한 인식, 자기 영혼 의 복지 그리고 천국의일”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발리 냐노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확신에 차서 “총명하고 성취가 있고 예술연구에 헌신적인 어떤 민족이 똑같은 학식과 품덕을 가진 유명한 외국인이 와서 그들과 함께 거주하자고 하면 쉽게 동의하게 될 것이 다. 특히 그 외래 손님이 중국어와 한자에 능통한다면 더욱 쉽게 그럴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정치체계가 그리스도교가 도움이 되고 손해 를 끼치지 않는다고 한다면 이 민족은 어느날 그리스도교를 기쁘게 영 접할 가능성이 높다.”34)고 지적하였다. 그래서 오로지 중국문명을 존중 31) 沈定平, 앞의 책, p.191; 심정평 저, 이경규 외역, 명청지제중서문화교류사 Ⅶ
(釜山敎會史報 제62호, 부산교회사연구소, 2009), p.95.
32) 沈定平, 앞의 책, p.192; 심정평 저, 이경규 외역, 명청지제중서문화교류사 Ⅶ (釜山敎會史報 제62호, 부산교회사연구소, 2009), p.96.
33) 裴化行 著, 管震湖 譯, 앞의 책, pp.65-71.
34) 何高濟 等譯, 何兆武 校, 利瑪竇中國札記 上冊, p.142.
하고 중국의 언어와 문자에 정통한 토대 위에서 학술교류, 도덕규범의 상호 모방, 그리고 그리스도교가 중국문명을 도와 더욱 완전한 실제적 효과를 전해주는 과정을 거쳐 마침내 중국민중을 귀의시키는 목적을 달성하려고 하였다.35) 따라서 적응성 선교전략의 형성과정을 고찰해 보면, 사비에르가 개창한 사업을 발리냐노가 계승하고 발전시켰으며, 이 두 사람 사이에는 일맥 상통하는 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낙후된 식민지에서 효과를 거둔 유럽의 전통적 그리스도교 선교방 법은 무력시위나 외교사절단의 파견 등 강제 수단을 동원하여 대규모 군중을 귀의시켜서 귀의자들의 생활방식과 문화정서를 완전히 서구화 시키는 것이었다. 사비에르와 발리냐노 같은 선교사도 일찍이 이와 같 은 전통적인 방식을 취하고 있던 주요 관리(사비에르는 교황에 의해 포르투갈령 인도공사로 임명되었고, 발리냐노 엮시 인도총독이 임명한 주일대표였음)였지만, 중국문명을 접촉한 뒤에는 자연스럽게 “한 손에 성경을 들고 다른 한 손에 황제가 하사한 보검을 든” 그러한 선교사가
“동방의 위대한 제국에서는 용인될 수 없다.”36)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비에르는 깊은 학술 소양을 갖춘 선교사를 선발하여 파견하는 등 학술선교라는 새로운 방법을 시행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발리 냐노는 이러한 사비에르의 정신과 방법을 계승 발전시켰다. 즉 마카오 성바오로학원에 유사한 단체를 만들어 중국인 청년들을 받아들여 교육 하였다. 여기에서 중국인은 서양인의 풍습을 반드시 따를 필요가 없고, 도리어 서양선교사들이 반드시 중국 풍습을 익히고 존중해야 했다. 이 와 동시에 높은 문화와 수양을 갖춘 민족에 대해서는 오로지 똑같은 학식과 품성의 소양을 가진 외국인이라야 비로소 그들의 신임을 얻을 수 있고 중국에 거주할 기회를 갖는다고 발리냐노는 믿었다.37) 때문에 35) 유승상, 예수회 中國活動의 成果인 天主聖敎實錄 初探 (2010년 신학대학 원 국제학술심포지엄, 동서양 문명의 만남, 도전과 기회 -예수회 선교사 마테 오 리치 서거 400주년을 기념하여, 서강대학교 신학대학원, 2010.9.16-17), p.64.
36) 裴化行 著, 蕭濬華 譯, 앞의 책, p.320.
37) 晏可佳, 中國天主敎簡史 (宗敎文化出版社, 2001), p.35; 崔韶子, 韓國과 中
발리냐노는 중국선교는 과거 방법에서 벗어나 서양선교사의 ‘중국화’가 필수불가결한 전제 조건이 됨을 명확하게 지적하였다.
발리냐노는 선교의 중점을 보통의 민중들로부터 문인학자들로 옮겨 야 하고, 강제적인 선전과 주입식 방법 대신에 지식을 수단으로 하는 선교방법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사비에르의 “위대 한 계획의 진정한 실천”은 “발리냐노 신부가 과감하게 추진한 뒤에 나 왔다.”38)
그러면 발리냐노가 어떤 조처를 취해서 예수회 선교단이 중국에 들 어갈 수 있는 초보적인 성공을 거둘 수 있게 되었을까? 연구에 의하면 중국에 들어갈 선교사들의 조직적 선발과 양성 및 파견, 중국 언어와 문자의 세심한 학습지도, 중대 문제에 대한 전체적인 정확한 결정을 거친 선교단체의 초기 성공의 보증, 다방면의 자금조달 활동을 통한 선교단체의 자금수요 충족 등 대략 4가지 방안이 포함되어 있었다.39)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첫째, 중국에 들어갈 선교사를 조 직적으로 선발, 양성하고 파견했다. 발리냐노는 중국에 들어가는 것이 선교사에게 “가장 절박하고 고귀한 일”이라는 사명을 확인한 뒤,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인재를 모집하고 이 중임을 능히 담당할 선교사를 물색하는 것이었다. 중국에서의 선교의 성공을 위하여 높은 소양을 갖 춘 인재가 필요했다. 그리하여 루지애리와 마테오 리치 신부를 파견하 게 되었고, 동시에 마카오 성바오로학원을 창설하여 4-5명의 현지 청 년을 수도사가 되도록 권했으며, 이 학원이 중국과 일본교무의 중심이 되었다.
또한 발리냐노는 마침 파견되어 일본교무를 주관하던 경험이 많은 카브랄(Cabral)에게 마카오회가 맡고 있는 중국선교 교무를 관리하게
國 天主敎會史의 比較史的 검토 (한국천주교회창설 200주년 기념 한국교회 사논문집 Ⅰ, 한국교회사연구소, 1984), pp.87-88.
38) 裴化行 著, 管震湖 譯, 앞의 책, p.47.
39) 沈定平, 앞의 책, p.197; 심정평 저, 이경규 외역, 명청지제중서문화교류사 Ⅶ (釜山敎會史報 제62호, 부산교회사연구소, 2009), p.99.
했다. 그리고 마카오 수도원장은 성바오로학원에서 공부하던 중국청년 을 모두 내쫓았기 때문에 고아로 소환되었다. 루지애리, 마테오 리치가 중국에 진입한 후 선교사업을 도운 알메이다(Almeyda), 상드(Sande), 페트리(Petris) 신부 그리고 2명의 중국국적 수사 종명인(鐘鳴仁)과 황 명사(黃明沙)는 모두 발리냐노가 직접 선발해 중국내지로 파견한 사람 들이었다.
두 번 째, 그는 선교사들에게 중국언어와 문자를 열심히 익히도록 지시했으며, 중국어로 교리를 저술하고 중국서적을 서양어로 번역하도 록 독려했다. 그가 발탁한 루지애리도 일찍이 “중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중국문자로 교리 등 책을 저술하는 것이 그들을 귀의시키는 데 반드시 필요한 단계이다.”40)라고 했으며, 롱고바르디(Longobardi)도
“선교를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중국문자에 통달하는 것이 중 국인을 신앙으로 인도하는 길이다.”41)라고 하였다.
발리냐노의 숭고한 성품, 탁월한 안목 그리고 올곧은 정신이 루지애 리와 마테오 리치 등이 중국어 학습에 전념할 수 있도록 보장해 주었 을 뿐만아니라 선교사는 반드시 중국어를 학습해야 한다는 원칙을 세 웠고, 그 기초를 마련해 주었음을 알 수 있다. 주목해야 할 일은 루지 애리, 마테오 리치가 중국어학습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게 된 뒤 한걸 음 더 나아가 그들에게 중문으로 천주교교리를 저술하고, 중문경전을 서방문자로 번역하는 임무를 부여하였다는 것이다. 그 결과 1581년 최 초로 루지애리는 마카오신학원 원장 고메즈(Gomez)와 합작으로 라틴 어로 쓰여진
세계기원간사(世界起源簡史)
라는 한 권의 교리문답을 중국어로 번역하여 천주교교리를 소개하는 지침서로 삼으려 했다.42) 루지애리가 광주에 거주할 때 이 책을 중국어로 번역해서 인쇄 발행했 는데, 중국학자들로부터 매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583년 루지애리가 중국어를 학습한 지 3년이 되어 기초가 세워지자 시찰원 신부는 다른 40) 羅漁 譯, 利瑪竇書信集 下冊(附錄), p.427.41) 羅漁 譯, 위의 책, 하책, p.544.
42) 羅漁 譯, 위의 책 상책, p.43.
신부의 뜻에 따라 중국어로 천주교교리를 선전하는 여러 권의 소책자 를 찬술했다. 이후 발리냐노의 지지아래 4년동안 시간을 들여 중국어 로 천주교 교의를 체계적으로 소개한
신편천주실록(新編天主實錄)
을 편찬했다. 이 책은 시찰원과 다른 신부들의 심사에서 문제가 없다고 인정을 받아 바로 간행되었다.43)또한 발리냐노는 1593년 마테오 리치가 광동 소주(韶州)에 새 예수 회수도원을 건립하였을 때 그에게 두 가지 지시를 내렸는데, 하나는 계속해서 중국문학을 심화 학습할 것, 다른 하나는 중국
사서(四書)
를 라틴어로 번역하고44) 교리문답을 중국어로 다시 편찬하라는 것이 었다.이로 볼 때 선교사는 반드시 중국어문에 정통해야 한다는 발리냐노 가 확립한 방침은 분명히 전략적인 안목을 갖춘 것이었다. 그것은 선 교사가 중국에 들어가 중국 사회 각 계층 사람들과 교제하는 것과 동 서문화교류를 촉진하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도구가 되었다.
동시에 발리냐노의 숭고한 성품, 탁월한 안목 그리고 올곧은 정신이 루지애리와 마테오 리치 등이 중국어학습에 전념할 수 있도록 보장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선교사는 반드시 중국어를 학습해야 한다는 원칙 을 세웠고, 그 기초를 마련해 주었음을 알 수 있다.45)
세 번 째, 그는 전면적이고 중대한 문제에 대한 정확한 대책을 통해 선교단에게 초기의 성공을 보장하였고, 그 미래의 발전방향을 명확하 게 제시하였다. 만일 마카오에서 처음 인재를 모아 선교단을 조직하고 조경(肇慶), 소주, 남창(南昌), 남경(南京) 등 교회거점의 건립을 거쳐 마테오 리치가 북경에 자리를 잡고 일정한 선교자유를 얻기까지의 과 정을 중국에서 적응성 선교전략이 획득한 성공의 과정이라고 한다면, 43) 羅漁 譯, 위의 책 하책, p.457.
44) 마테오 리치는 시찰원 바리냐노의 명령에 의해 1591년 사서(四書)를 라틴어 로 번역하기 시작하여 1593년 11월에 번역을 완성하였다(蔣東元, 利瑪竇與中 西文化交流, 中國曠業大學出版社, 2008, p.143).
45) 沈定平, 앞의 책, p.201; 심정평 저, 이경규 외역, 명청지제중서문화교류사 Ⅶ (釜山敎會史報 제62호, 부산교회사연구소, 2009), p.102.
이 과정에서 거의 매번 전체적인 중대한 문제와 관련된 결정에는 모두 발리냐노의 심혈과 지혜가 묻어있었다. 선교열정이라는 점에서 보면 그는 “모든 주의를 기울여 그들로 하여금 중국에서 보다 높은 명성을 얻을 수 있는 어떤 새로운 방법을 찾아내도록 했다.”46) 효능이라는 점 에서 보면 “그의 종교지도자로서의 오랜 경험이 그로 하여금 상황에 적합한 명령과 계율을 활용해 형세를 극복하고 통제할 수 있게 하였 다.47) 아래에서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첫 사례는 적응성 선교전략에 관한 것이다. 1580년 일본에서 개최된 3차 종교회의에서 ‘승려들의 모든 관습과 의례를 준수하는 것이 적합 한가의 여부’에 대해 회의에서 긍정적인 답변이 내려진 뒤, 발리냐노는 저서
일본사물개람(日本事物槪覽)
(1583)에서 선교전략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나타났다. 여기에서 그는 일본에 와서 활동하는 선교사들이 마 땅히 현지 백성의 문화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은 새로운 관점이라고 할 수 있지만 교회와 예수회를 위해서도 장점이 있어서 제출되었다는 점 을 인정하였다.48)발리냐노는 선교사가 주재국의 문화 풍습을 익혀야 한다는 총체적 인 원칙은 세웠지만, 중국 선교사의 손발과 창의성을 속박하고 싶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그는 선교사들에게 중국에서 장 기 거주를 위해 취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자세히 강구하라고 지시했 다.49)
처음 중국에 들어갈 때 불교세력의 영향력을 이용하려면 온통 승려 복장을 갖추는 게 유리하나 유림계층과 교제하는 데는 불리하다는 것
46) 何高濟 等譯, 何兆武 校, 利瑪竇中國札記上冊, p.208.
47) 何高濟 等譯, 何兆武 校, 위의 책 上冊, p.188.
48) 沈定平, 앞의 책, p.203; 심정평 저, 이경규 외역, 명청지제중서문화교류사 Ⅶ (釜山敎會史報 제62호, 부산교회사연구소, 2009), p.104.
49) Edward j. Malatesta, “Alessandro Valignano(1539-1606): Strategist of the Jesuit Mission in China” (Review of Culture, No.21, 2nd Series, English edition, the Instituto Cultural of Macau); 維特克, 着眼于日本 -范禮安及澳門 學院的開設 (文化雜誌 中文版, 澳門, 文化司署出版, 1997春季).
을 알고, 1592년 곧 머리와 수염을 길러 유림의 의관으로 바꿔야 한다 는 요구를 하게 되었다. 선교사의 복장과 습관이 유림화되면서 유가학 설과 특히 공자와 조상에 대한 제사를 받아들일 것인지에 대한 문제가 필연적으로 뒤따르게 되었다. 발리냐노의 숭고한 위덕과 덕망으로 인 해 마테오 리치에게 중국의 제례의식을 받아들이라는 훈령은 그 후 여 러 차례 중국선교지 주요 회의 상에도 모두 이렇게 처리하도록 비준됨 으로써 그것이 모두가 준수해야 할 원칙으로 확정되었다.50)
두 번째 사례는 중국대륙에서의 선교사업 추진에 관한 것이다. 발리 냐노의 지지아래 루지애리는 마카오 주교대표의 신분으로 여러 번 양 광총독(兩廣總督)을 만났고, 지속적인 교제와 선물공세를 통해 마침내 총독의 허락을 얻어 조경에 거주하게 되었다. 조경에서 예수회선교단 이 봉착한 어려운 처지와 불운 때문에 발리냐노는 전력을 다해 선교사 들이 중국에서 기반을 굳게 확립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찾지 않으 면 안 되었다. 발리냐노는 “만일 황제로부터 그들의 거주를 허락받게 된다면 이 사업은 좋은 기반을 얻게 되겠지만, 성공하지 못하면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다.”라고 여겼다. 그래서 그는 마테오 리치의 건의를 수 용하여 “신부 한 분을 교황사절로 정해 중국황제를 알현하도록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며, 이러한 사절단 파견방법을 활용해 교황의 서신을 징표로 삼고 예물을 갖추어 간다면 그들은 아마도 중국에서 영 구거주권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51)라고 했다. 그리하여 발리냐노 는 곧 중국선교의 자초지종을 잘 알고 있는 루지애리를 유럽으로 보내 교황청에 가서 중국황제에게 사절을 보내야 하는 이유를 자세하게 설 명하게 했다.
세 번째 사례는 중국선교단의 지도권에 관한 것이다. 원래 규정에 의하면 처음에 중국선교단은 마카오교회의 지도를 받았다. 그러나 마 카오 일부 수도회가 계속적으로 중국선교단을 방해하자 때마침 인도교 50) 沈定平, 앞의 책, p.204; 심정평 저, 이경규 외역, 명청지제중서문화교류사 Ⅶ
(釜山敎會史報 제62호, 부산교회사연구소, 2009), pp.104-105.
51) 何高濟 等譯, 何兆武 校, 위의 책 上冊, p.208.
구 대주교로 승진한 발리냐노가 “마카오신학원의 중국교단 관할권을 취소하고 오로지 자기 자신과 일본교구장의 지도만 받도록 했다.”52) 이는 선교는 현지에 있는 수도원이 담당해야 한다는 발리냐노의 인식 에서 비롯되었고, 따라서 중국선교는 현지의 선교사가 맡아서 처리해 야 한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예수회의 중국과 일본의 부성구(副省區) 설립을 결정한”53)이후 중국성이 마카오수도원의 관할에서 벗어나 독립 되었으며, 이에 따라 마테오 리치가 본성의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한편 마테오 리치는 북경을 떠나 남방수도원은 순시할 수 없었고, 발리냐노 도 또한 마테오 리치의 성 회장의 직책을 그만두게 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마카오수도원의 원장이었던 디아즈(Diaz)를 남방 3개 수도원인 남경, 남창, 소주의 원장으로 임명하고 마테오 리치와 책임을 분담하게 하였다. 발리냐노는 오랫동안 관할을 통해 주도적으로 중국 선교단의 권력을 직접 마테오 리치에게 넘겨주었고, 마침내 중국선교 지를 마카오수도원에서 벗어나 독립하게 했다. 이 모두가 선교사업의 순리적 발전과 조직상의 보증을 제공했다는 것은 분명하다.54)
그 다음으로 일정한 기간 중국문화와 풍습 종교 상황에 대한 이해 를 통해 발리냐노는 머리와 수염을 기르고 옷차림을 바꿔야 한다는 마 테오 리치의 요구를 수용했다. 사실 여기에는 단순히 외부의 복장과 생활습관의 변화만이 아니고 그 가운데 전략적 의도의 변화가 내포되 어 있다. 즉 예수회선교단이 사회적 지위가 낮은 중국 승려와의 관계 를 단절하기로 결정한 것은 의식적으로 권력을 가진 사대부계층으로 가까이 다가선 것이고, 주류사회로 융화되어 들어갔다는 것을 의미한 다. 특히 발리냐노가 마테오 리치의 중국의례와 관련된 훈령에 대해 비준함으로써 그리스도교 교리와 유교사상의 조화와 교류에 직접적인
52) 何高濟 等譯, 何兆武 校, 위의 책 上冊, p.189.
53) (이)德禮賢, 著, 方豪 譯, 利瑪竇年報 참조(심정평, 앞의 책, p.208 재인용).
54) 沈定平, 앞의 책, p.208; 심정평 저, 이경규 외역, 명청지제중서문화교류사 Ⅶ (釜山敎會史報 제62호, 부산교회사연구소, 2009), p.108.
조건을 만들었으며, 적응성 선교전략의 기반을 마련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동시에 여러 차례의 실패경험과 교훈을 거치면서 발리냐노는 선 교단으로 하여금 중국에서 든든히 입지를 세우고 신망을 얻게하는 선 교방침은 바로 북경에 선교중심지를 건립하고 황제의 호감과 지지를 얻도록 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55)
네 번째, 발리냐노는 자신의 높은 지위와 신망을 충분히 활용하여 다방면으로 적극적인 모금활동을 전개함으로써 중국선교단의 날로 증 가하는 방대한 경제비용을 기본적으로 충족시켰다. 중국선교단이 마카 오에 세워져서 중국으로 진입하던 초기의 소요경비는 포르투갈 및 여 러 나라 상인들의 후원금으로 이뤄졌으며 고정된 자금원이 없었다. 발 리냐노와 루지애리가 마카오 성바오로학원을 건축할 때 그 비용도 이 탈리아의 한 상인이 기부한 것이었다. 일상생활 비용도 “모두 상인들 의 후원금에 의존하였다.”56) 또한 루지애리가 마카오에서 광동으로 들 어갈 때마다 그 경비는 모두 포르투갈의 부유한 상인과 다른 사람들의 사재를 털어 나온 도움의 손길에 의지했다. 루지애리와 마테오 리치가 조경에 정착한 뒤에는 오랫동안 도움을 받지 못해 빚더미에 앉게 되었 다. 선교단이 이처럼 곤궁했던 원인은 당시 수도원은 그때까지만 해도 고정된 수입이 없었을 뿐 아니라 선교사에게 외부의 서방국가들이 선 교비용을 제공하는 원칙이 있었기 때문이다.57) 즉 당시까지는 선교비 용이 주로 서방국가의 기부에 의존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발리냐노는 자신의 지위와 영향력을 이용하여 고정된 수 입이 없었던 중국선교단에 확실히 보장된 지원금을 얻을 수 있게 해 주었을 뿐 아니라 외부자금으로 선교를 돕는다는 원칙이 오랫동안 집 행될 수 있도록 관철시켰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로 확인된다. 1578년
55) 沈定平, 앞의 책, pp.208-209; 심정평 저, 이경규 외역, 명청지제중서문화교 류사 Ⅶ (釜山敎會史報 제62호, 부산교회사연구소, 2009), p.108.
56) 羅漁 譯, 利瑪竇書信集 下冊(附錄), p.432.
57) 沈定平, 앞의 책, p.209; 심정평 저, 이경규 외역, 명청지제중서문화교류사 Ⅶ (釜山敎會史報 제62호, 부산교회사연구소, 2009), p.109.
발리냐노가 처음 마카오에 도착해 마카오와 일본간 상업무역에서 새로 운 상업협의세칙을 제정해서 이로써 동방예수회 선교 사업을 지원하기 시작하였다. 즉 당시의 마카오 무역상들은 3명의 대리인을 선출해 중 국에서 생사를 구매하는 업무를 관리 감독케 하였다. 피선된 3명의 대 리인 가운데 한 명은 항상 예수회선교사였다. 그래서 발리냐노는 동방 교무시찰원이라는 특수한 신분을 이용 매년 1600담(擔) 중국생사의 총 물량중 50담을 따로 선교사들에게 떼어주도록 허락받았고, 마카오 자 문회의가 동의한 부칙에 예수회가 투자한 화물은 경영활동중 어떠한 우발적 사태로 손실이 발생하더라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상 세하게 설명을 덧붙여 놓았기 때문에 그들은 가만히 앉아서 수입을 확 보할 수 있었다.58)
발리냐노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마카오 밖으로부터 재정자금을 조달할 새로운 방안을 찾았다. 즉 그가 인도교구 대주교로 부임한 지 2년이 지나 “인도총독 메네세스(Meneses)를 통해 발리냐노는 천주교 국왕의 이름으로 하달하는 연금을 받아 중국선교단을 지원하도록 빌려 주되 이 보조금은 중국에서 가장 가까운 말래카(馬六甲)은행에서 지출 되도록 조치했다.”59) 이른바 ‘천주교국왕의 이름으로 내려진 연금’은 실제로는 스페인국왕이 비준한 통관세 분배협의의 결과물이었다. 1585 년 발리냐노와 인도총독은 영구적 협정을 체결하여 스페인국왕 필립2 세의 재가를 받았다. 이 협정에서는 중국에 있는 모든 선교사들이 매 년 금화 100개와 미사에 사용할 포도주 몇 병을 얻을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이러한 배급량은 말래카해협을 지나는 상선들의 통관세로부터 떼어낸 것으로 매년 3월과 10월 두 차례 무역회의에 참가하는 포르투 갈인들이 중국예수회 선교회에 전달했다.60) 이처럼 16세기 80년대 이 후부터 중국선교단은 제도적으로 비교적 고정된 재정수입을 갖게 되었
58) 沈定平, 앞의 책, pp.210-211; 심정평 저, 이경규 외역, 명청지제중서문화교 류사 Ⅶ (釜山敎會史報 제62호, 부산교회사연구소, 2009), pp.110-111.
59) 何高濟 等譯, 何兆武 校, 위의 책 上冊, p.189.
60) (미)僑納森․斯彭斯 著, 王改化 譯, 利瑪竇傳, pp.240-241.
다. 하나는 마카오 비단무역의 배당금이었고, 다른 하나는 말라카 통관 세에서 나온 배당금이었다. 이 밖의 수입가운데는 스페인, 포르투갈 왕 실에서 직접 나온 보조금도 있었다.
그리하여 발리냐노가 중국선교단의 적응성 전략의 위대한 식견을 갖춘 기획자요 조직자61)였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만약 발리냐노가 없 었다면 마테오 리치도 없었을 것이요, 리치의 다른 어떤 동료 회원들 도, 어떤 한역 서학서도 없었을 것이다.62) 따라서 발리냐노에 대한 마 테오 리치의 한없는 존경심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는 발 리냐노를 “일본과 중국의 문호 즉 마카오선교의 촉진자”라고 칭송했으 며, 또 “중국 선교교구의 아버지”63)라고 하였다. 그리고 적응성 선교전 략이라고 하는 선교 패러다임의 변화는 휴머니즘의 대두와 함께 확산 되기 시작한 대학과 인문학의 보편적인 연구를 통해 세상과 인간을 새 롭게 인식한데 따른 것이다.64) 즉 교회가 이방민족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가는 원심적인 선교방식으로 방향을 전환하였는데, 이는 르네상스 를 거치면서 달라진 인간문화에 대한 가치의 재발견이 토착문화에 대 한 새로운 인식의 변화로 이어졌기 때문이다.65) 그리하여 선교지의 토 착 언어에 대해 자연스럽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무엇보다도 엘리트 계층을 상대로 한 대화에서는 토착 언어는 필수적인 것이고, 나아가 그 지역의 문화, 역사, 철학, 문학, 예술 등에 대한 이해도 필요한 것이 61) (프)榮振華 著 耿昇 譯, 范禮安傳 (在華耶穌會士列傳及書目補編 北京: 中
華書局, 1995), p.696.
62) 심백섭, 앞의 문장, p.235.
63) 羅漁 譯, 利瑪竇書信集 上冊, p.133; 下冊, p.319; 김기협은 사비에르가 ‘고 행하는 성자’의 이미지, 그리고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빌어온 것 같은 힘과 능 력으로 후세사람들의 마음에 남아있다면, 발리냐노는 인간의 지혜와 정력과 책 랴을 최대한 행사한 ‘풍운속의 거인’의 이미지를 남겼다고 하였다(김기협, 앞의 문장, p.313).
64) 김혜경, 16-17세기 동아시아 예수회의 선교정책 -적응주의 배경을 중심으로 - (2010년 신학대학원 국제학술심포지엄, 동서양 문명의 만남, 도전과 기회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 서거 400주년을 기념하여, 서강대학교 신학대학 원, 2010.9.16-17), p.226.
65) 위의 주, p.227.
었다.
Ⅳ. 맺음말
예수회가 아시아를 중심으로 펼친 적응주의 선교정책은 대화의 차 원에서 진행된 근대적인 선교방식이다. 이런 방식은 남미에서의 선교 와는 정반대로 이민족을 향한 인간적이고 지적인 깊은 이해와 존중을 배경으로 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이런 선교방식이 가능해진 것은 휴 머니즘과 르네상스의 영향에 힘입어 오랜 기간에 걸쳐 다져진 철학적 신학적 인간학적인 고찰이 지리상의 발견과 함께 토착문화에 대한 인 식을 새롭게 했기 때문이다.66)
발리냐노는 사비에르의 뒤를 계승하여 예수회의 동아시아 선교노선 을 적응주의로 정하고, 규칙적인 발전을 보장할 만한 수도회의 선교조 직을 모색하였다. 그가 동아시아 예수회의 시찰원으로 있던 1574년부 터 마카오에서 세상을 떠나는 1606년까지 적응주의 노선에 입각한 아 시아 선교를 위한 초석이 닦아졌다고 할 수 있다. 또한 1582년 루지애 리와 마테오 리치에게 내린 지시문에도 문화전교의 방식을 채택하겠다 는 것, 현지의 사회 문화 풍속을 존중하겠다는 것, 토착문화를 사용하 여 현지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로 볼 때 발리냐노의 문화적 적응 정책은 오늘날에는 당연한 것 으로 볼지 모르지만 당시로서는 가히 선구적인 것이었고 혁명적이라고 까지 할만한 것이었다.67)
특별히 발리냐노는 자신의 지위와 영향력을 이용하여 고정된 수입 이 없었던 중국선교단에 확실히 보장된 지원금을 얻을 수 있게 해 주 었다. 즉 마카오와 일본간 상업무역에서 새로운 상업협의세칙을 제정 66) 위의 주, p.228.
67) 심백섭, 위의 문장, p.239.
해서 이로써 동방예수회 선교 사업을 지원하기 시작하였다.68) 즉 당시 의 마카오 무역상들은 3명의 대리인을 선출해 중국에서 생사를 구매하 는 업무를 관리 감독케 하였다. 피선된 3명의 대리인 가운데 한 명은 항상 예수회선교사였다. 그래서 발리냐노는 동방교무시찰원이라는 특 수한 신분을 이용 매년 1600담(擔) 중국생사의 총 물량 중 50담을 따 로 선교사들에게 떼어주도록 허락받았고, 마카오 자문회의가 동의한 부칙에 예수회가 투자한 화물은 경영활동 중 어떠한 우발적 사태로 손 실이 발생하더라도 영향을 받지않는다는 사실을 상세하게 설명을 덧붙 여 놓았기 때문에 그들은 가만히 앉아서 수입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 렇게 하여 중국선교단에 안정적인 경제적 기반을 제공했던 것이다.
이로 볼 때 발리냐노의 적응성 선교전략은 사비에르의 선교전략을 계 승한 일면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선교의 경제적 자립을 추구 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방대한 일본교회를 유지할 수 있었고, 나아가 중국에서의 선교활동을 전개하는데도 확실한 도움을 줄 수 있었던 것 이다.
그리하여 동아시아 예수회의 선교 상황을 살펴볼 때 사비에르가 적 응성 선교전략의 씨를 뿌렸다면, 발리냐노는 그것을 연구하여 체계를 세워 가꾸었고, 마테오 리치는 현실에 적용하여 실질적인 결실을 거두 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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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文提要)
范禮安與耶穌會的適應主義傳敎政策
李 京 圭
耶穌會以亞州爲中心的適應主義傳敎政策是在對話的維度進行的近代 的傳敎方式. 這樣方式是和南美傳敎正相反, 爲了異民族沒有人間的ㆍ智的 理解和尊重不可能. 這樣傳敎方式的背景因爲有倚賴人本主義與文藝復興 的影嚮長期堆積哲學的ㆍ神學的ㆍ人間的考察和地理上找到對本土文化新 的認識.
范禮安繼承沙勿略把耶穌會在東亞的傳敎路線選適應主義, 謀求保障規 則的發展的修道會傳敎組織. 他以東亞耶穌會視察員自1574年至在澳門逝 世的1606年立足適應主義路線的亞州傳敎根據基石. 而1528年他告訴羅明 堅與利瑪竇要選定文化傳敎的方式, 同時要尊重本土的社會ㆍ文化風俗, 利 用本土文化把福音傳到當地人.
特別, 范禮安利用自己的地位和影嚮力來給沒有固定的中國傳敎團拿到 絶對保証資金. 就是, 在澳門與長崎之間的商業貿易制定新的商業協議細 則, 開始支援東方耶穌會傳敎事業. 當時澳門貿易商選出三名代理人來監督 生絲購買業務. 被選的代理人三名中一名一定是耶穌會傳敎士. 所以范禮安 利用東方敎務視察員的特殊身分把每年1600擔中國生絲中50擔給耶穌會傳 敎士. 在澳門資問會議同議的附則中有耶㷌會投資的貨物隨然經營活動中 偶發事態發生損實沒有影嚮的相細說明. 因此給中國傳敎團提供安定的經 濟基盤.
總的來說, 觀察東亞耶穌會的傳敎情況時, 可以說沙勿略播種適應性傳 敎政策, 范禮安硏究他自成體系, 利瑪竇應用到現實收穫實際成果.
주제어: 예수회, 발리냐노, 적응주의, 선교정책, 선교단재정수입 중문주제어: 耶 會. 范禮安, 適應主義, 傳敎政策, 傳敎團的財政收入
영문제목: Valignano and adaptable missionary work policy of society of Jesus (원고접수: 2013년 8월 21일, 심사완료 및 심사결과 통보: 2013년 10월 14일, 수정
원고 접수: 10월 15일, 게재 확정: 10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