를 중심으로 -武梁祠堂樓閣拜禮圖 -
( )
許 明 華 釜山大
.머리말
Ⅰ
제사예술 출현의 사회적 배경 .
Ⅱ
화상석에 반영된 제사예술양식과 .
Ⅲ 상징체계
의 제사예술양식 1.武梁祠堂畵像石
의 상징체계 2.武梁祠堂樓閣拜禮圖
와 의미 .맺음말
Ⅳ
. 머리말
Ⅰ
화상석과 관련된 기존 연구는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되어 왔다. 漢代
먼저 중국과 일본의 경우, 漢代 화상석을 전론한 논저1) 이외에 종교 적인 시각2), 神과 예술의 관계3), 미학적인 관점4)등이 있고 본고와 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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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관련이 있는 武梁祠 화상석의 신화 및 예술적인 연구5)가 있고 다음, 으로 국내의 연구로는 환경 관련,6) 衣食住,7) 신화와 종교,8) 도상학적 접근9) 등이 있다 이처럼 종래. 漢代 화상석에 대한 연구경향은 여러 방면에서 적지 않은 성과를 축적하고 있다 그러나 본고에서 다루는. 제사예술적 측면 특히 그, 樣式에 대한 연구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 은 아니다. 漢代 화상석에 묘사된 祭祀樣式은 漢代人의 내면세계를 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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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상석의 교상교전도 분석‘ ’ - 간의 상호 유기적 이해를 위한 시론-
漢代 畵題
「 」
한국불교미술사학 박아림 한대 하남성 남양화상석 연구 고
( 26, 2006); , 「 」 (
구려연구 23, 2006).
현하고 있다 따라서 이에 대한 연구는 당시의 관념과 사회상을 파악. 할 수 있는 중요한 실마리가 될 수 있다.
그런데 漢代 화상석에 반영된 제사예술양식을 구명할 때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제사예술의 배경이 되는 廟祭에서 墓祭로 변화의 확립 시기 구분의 재검토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전제가 되는. 漢代人의 儒敎官學 등이다 는 이러한 요인
, · , · .
化 孝廉制度祖先崇拜 靈魂不滅 厚葬風俗 漢代
들에 의해 제사가 성행하였고 그것이 화상석을 출현시킴과 동시에 그, 속에 제사예술이라는 독특한 장르를 창출하였던 것이다.10) 그렇다면 어떻게 漢代 화상석에 초세속적인 특성을 지닌 상징주의와 표현주의라 는 제사예술양식이 표현되었던 것인지 표현주의라는, 思潮가 漢代 화 상석에 어떤 의미로 용해되어있는지, 漢代의 화상석의 제사예술양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본고에서는 이상과 같은 기존 연구의 한계와 문제의식에 의거하여 제사의 구조와 내용이 체계적으로 묘사되어 있는, 인
漢代 祭祀圖像 樓
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제사예술양식의 상징체계와 그
閣拜禮圖 漢代
특징을 구명하고자 한다 구체적으로 먼저. Ⅱ장에서는 漢代 畵像石 출 현의 사회적 배경으로서 墓祭의 확립과 靈魂不滅觀을 검토한다 이어. 서 Ⅲ장에서는 武梁祠堂 화상석의 예술양식을 비교 분석하고 나아가· , 제사예술양식의 의미와 특징을 검토하고자 한다 끝으로 이상의 검토. 를 기초로 祭祀圖像인 武梁祠의 樓閣拜禮圖에 대한 분석을 통해서 祭 의 상징을 도출한 이후에 마지막으로 의 예술
祀圖 山東武梁祠堂 画像石
에 반영된 사회적 의미를 究明하고자한다 누각배례도에 반영되어 있.
10) 다시 말하면半抽象의具體藝術로서의 표현주의라는思潮가漢代의 화상석에 고스란히 용해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현대미술의 상징주의와 표현주의를 다룬. 대표적인 논저로는 구체예술의 의미 에 대해서는 송연승' ' , 「쟝 아르프의 배꼽‘ ’ 모티브에 관한연구」 ( 연구논집 29, 이화여자대학교대학원, 1995); 정영목, 「 독일 표현주의와 신표현주의 미술에 나타난 전통성과 시대정신」 ( 서양미술사 학회논문집 ,서양미술사학회, 1992); 김재원, 1980「 년대 신표현주의와 시대정“ 신(Zeitgeist)”-Ausstellung의 미술사적 의미와 한계」 ( 서양미술사학회 논문 집 19, 2003)참조.
는 제사예술의 상징체계에 대한 분석은 漢代人의 사유체계를 이해하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다.11)
제사예술 출현의 사회적 배경 .
Ⅱ
여기서는 漢代에 화상석에 표현된 제사예술 출현의 사회적 배경 내 지 그 전제가 되는 墓祭의 확립과 靈魂不滅觀에 대하여 고찰하기로 한 다 먼저. 墓祭의 확립이다 중국 고대의. 死者에 대한 儀式으로서 葬禮 는 신분에 따라서 喪禮와 祭禮12)가 있었다. 祭禮는 흔히 三禮로 분류 된다. 三禮는 대체로 天禮 地禮 宗廟禮· · 혹은 天禮 地禮 人禮· · 를 가리킨 다.13) 이 가운데 宗廟禮와 人禮가 祖先祭祀를 의미하는 것은 말할 나 위가 없다 게다가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祖先祭祀를 宗廟禮라 고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결국. 先秦시기 조선제사에 廟祭가 존재하였음을 의미한다 실제. 先秦시기에 廟祭가 거행된 것은 다음의 자료를 통하여 알 수 있다.
옛날에는 墓祭가 없었고, 漢의 각 陵에 모두 園寢이 있는 것은 秦이 만든 것을 계승한 것이다 어떤 이가 설명하기를. , “옛날에 宗廟 앞에 廟 를 만들었고 뒤에, 寢을 만든 것은 사람의 거처 앞에 朝가 있고 뒤에, 寢
11) 星野撤은 제사예술이 연구되어야 할 이유에 대하여 제사가 현실 생활에 대' 한 예술이라고 불리는 그 특수한 관점 또는 생활과 밀접한 정서와의 사이에서, 자주 일어나는 보편적인 추이 로 보고 있다' (星野撤, 古代の藝術 祭祀の , 法政
, 1982, pp.166-179).
大學出版局
12) 禮記 卷12, 「王制」, “子七日而殯 七月而葬 諸侯五日而殯 五月而葬大夫士庶 人三日而殯 三月而葬 三年之喪 自天子達 庶人縣封 葬不爲雨止 不封不樹 喪不
.”
貳事 自天子達於庶人 喪從死者 祭從生者 支子不祭
13) 三禮에 대하여 隋書 卷6, 「禮儀志序」에는 “唐虞之世 祭天之屬爲天禮 祭地 라고 하여 로 분류하였고
” , · · ,
之屬爲地禮 祭宗廟之屬爲人禮 天禮 地禮 人禮 淸代
의 · 와 에는 ·
王士禛 池北偶談 「談藝 六 三禮」 楊太史 用賓 致知小語 周禮
또는 라 하고 있다
· · · .
儀禮 大戴禮 天神 人鬼地祇
이 있는 것을 형상한 것이다 라고 하였다” .14)
그런데 위의 사례에서 주목되는 것은 옛날에는“ 墓祭가 없었다 라.”
는 표현이다 이는. 後漢代가 되면 祖先祭祀가 廟祭에서 墓祭로 전환되 었음을 암시한다. 漢代에 墓祭가 성행한 것은 墓祭를 거행하는 장소인 의 건립시기를 통하여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다. 의 건립에 대
祠堂 祠堂
하여는 “文翁이 蜀에서 죽자 吏民이 祠堂을 세워 매년 제사가 끊이지 않았다 지금 파촉 사람들이. 文雅를 좋아하는 것은 文翁의 교화이다 .”15)라는 사례와 張禹의 경우, “張禹가 年老하여 스스로 冢塋을 다스리 고 祠室을 일으켰다.”16)는 기사가 있다 이들 몇 가지 사례를 통하여. 볼 때, 漢代에는 廟祭에서 墓祭로 전환됨과 동시에 그것이 일반화되었 음을 알 수 있다.17)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廟祭에서 墓祭로는 언제 전환되었는가 하 는 점이다 이에 대한 기존의 연구는. 前漢以前說 春秋戰國說( )과18) 後 漢明帝期說19)로 나뉘어 있다.20) 앞서 소개한 後漢書 卷9, 「祭祀志」 14) 後漢書 卷9,「祭祀志」.
15) 漢書 卷89, 「循吏傳」, 59第 「文翁」. 16) 漢書 卷81, 「張禹傳」.
17) 司馬光의 文潞公家廟碑文 에는 “漢代에 公卿 貴人· 은 대부분 묘소에 祠堂을 건립하였다 라 하고 있다 이는” . 北宋代의識者層의 경우 漢代에祠堂이 건립되 었다고 인식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으로 흥미롭다.
18) 전한이전설을 주장한 이는 信立祥이다 그는. 蔡邕 獨斷에서 ‘古不墓祭’에 의거하여 그 변화를 前漢이전으로 추정하고 있다.春秋戰國以前에는墓祭 즉 에서 조선 제사를 지내지 않았고, 는 였으며, 에서 최고지
墓地 墓 不封不樹 庶民
배자에 이르기까지 墓地의 地面에는 아무런 표시가 없었다는 것이다(信立祥 김용성 한대화상석의 세계 학연문화사 참고로
( 譯), , , 1996, p.88). 中國畵像
에는 에서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판명되는 화상 1 10
石全集 ∼ 卷 前漢 元帝 平帝
석이 1988년 산동 濟寧師專院內에서 출토 되었다는 내용도 있다.
19) 後漢明帝期說을 제기한 이는楊寬이다 그는. 顧炎武가 日知錄 卷15, 「墓祭」 에서 명제 때 일반 서민의“ 孝가 성대한 의식이 되었다 는 표현에 동의하면서” , 이것은 사회에서 이미 유행하고 있던 墓祭가 능침으로 옮겨져서 중요한 의식 으로 변화했다고 하였다(楊寬(장인성 임대희 역· ), 중국역대 陵寢제도, 서경, 2005, p.75).
20) 黄曉芬,「漢墓的考古學研究」 ( 漢墓的變遷 ,岳麓書社, 2003)에 의하면 지금,
의 내용 가운데 옛날에는“ 墓祭가 없었고, 漢의 각 陵에 모두 園寢이 있는 것은 秦이 만든 것을 계승한 것이다 라는 표현에서 유추하면” 秦
의 조선 제사는 였음을 알 수 있다.
代 廟祭 21) 그렇다면 廟祭에서 墓祭
로의 전환은 秦漢 교체기 또는 漢의 건국 이후 어느 시점이 된다 그. 러나 현재 이를 알 수 있는 직접적인 자료는 없기 때문에 그 전환 시 점은 명확하지 않다 다만 필자는 종래의 연구에서 전환의 시점으로. 강조되고 있는 후한 명제 시기를 墓祭가 확산 정착된 시기라고 생각된· 다 그 이유는 이것이. 漢代 禮制의 개혁 그 가운데, 祭禮의 개혁과 밀 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선진 시기의 종묘제사는. 禮記 「王制」의 에 보이듯이 천자는 였다 이
"天子七廟 三昭三穆 與太祖之廟而七" 七廟 .
러한 종묘제는 前漢末 元帝때 匡衡에 의해 개혁이 논의되었으나22) 後 초기까지는 기본적으로 유지되었다 그러나 왕망 시기에.
漢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나는 천명을 받았지만“ 陽九의 재앙을 만나 106 번의 회합으로 국가의 금고<府帑>는 텅 비었고 백성은 궁핍하였는데도, 는 아직 수리되지 않았다 또한. · 에 거듭 제사를 지내어 아
宗庙 明堂太庙
침저녁으로 영원함을 생각하며 감히 편안히 쉬지를 못한다.……”라고 하 였다 무릇. 10여 곳에서 나무와 기와를 취하여 이로써 九庙를 일으켰 다.23)
라고 하여 九廟制로 바뀌고 있다.24) 이러한 명제 시기 예제의 개혁과
까지 학계의 일반적인 관점은 비교적 춘추시기로 기울어져 있고 양관을 대표, 로 하는 소수 논자들이 明帝시기로 주장하고 있다고 한다.
21) 참고로 趙翼은 陔餘叢考 「墓祭」에서 “蓋三代以上本無墓祭 故辛有見被發祭 라 하여 이전에 가 없었다고 인식하고 있다
” , ( ) .
野者 而以爲異 三代夏殷周 墓祭
22) 이 시기의 禮制 改革에 배경에 대해서는 문정희, 秦漢 제례와 국가지배
연세대박사학위논문 참조
( , 2005), pp.44-48 .
23) 漢書 卷99, 「王莽傳」.
24) 九廟에 대해서는 漢書 卷99, 「王莽傳」에 “一曰 帝太初祖廟 二曰帝虞始祖黄 昭廟 三曰陳胡王統祖穆廟 四曰齊敬王世祖昭廟 五曰濟北愍王王祖穆廟 凡五廟不 雲 六曰濟南伯王尊 昭廟 七曰元城孺王尊稱穆廟 八曰陽平頃王戚 昭廟; 九
堕 檷 檷
曰新都顯王戚 穆廟 殿皆重屋 太初祖廟東西南北各四十丈檷 高十七丈 餘廟半之
”라 하 爲銅薄櫨 飾以金銀雕文 窮極百工之巧 帶高增功費數百巨萬 卒徒死者萬數
그 흐름을 같이하고 있는 것이 墓祭의 성행이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 되는 것은 다음의 사례이다.
에 황제가 이하를 거느리고 에 조견하였는
永平 元年 春正月 公卿 原陵
데, 元会仪와 같았다. 李贤이 汉 仪官 에 주석하여 옛날에는“ 墓祭가 없 었다. 秦始皇이 墓 옆에 침을 세웠고, 汉은 이에 연유하여 고치지 않았 다.”25)
위의 내용 가운데 황제가“ 公卿 이하를 거느리고 原陵에 조견하였는 데, 元会仪26)와 같았다 는 표현은” 墓祭를 지냈음을 말해준다 또한. 漢 에는 왕릉 하나를 건립할 때마다 을 건립해야만 했지만, 은
代 廟殿 明帝
임종 때 자신의 神位를 武帝廟에 合葬할 수 있도록 요구하였고 그 이, 외에도 많은 祖先의 神位를 통합해서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太廟에 안치할 것을 명하고 있다.27) 게다가 같은 祠堂의 각각 다른 室에서 供
을 드리며 제사할 수 있는 법을 규정하였다.
物 28) 이러한 陵旁立廟는
가 로 바뀌면서 1 1 의 의의가 없어졌음을 보여준다.
祭 墓祭 帝
庙 庙
이처럼 漢代에는 廟祭에서 墓祭로 전환되었고 특히, 後漢 明帝時期 는 墓祭가 확산 정착된 시기였다· .
다음에는 漢代에 화상석을 중심으로 한 제사예술의 출현 배경으로 서 靈魂不滅觀과 그 결과 성행한 厚葬風俗을 살펴보기로 한다. 漢代 의 영혼불멸관은 廟祭에서 墓祭로의 변화 및 그 확립 그리고 그 결과, 성행한 厚葬風俗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漢代人들은 鬼猶求食이라 하
고 있다.
25) 後漢書 卷2,「明帝紀」.
26) 元會儀는 漢代에 시작하여 魏晋 시기까지 행해졌던 의식으로서 皇帝가元旦 때에 들과 함께 하는 를 말한다.
朝會 群臣 正會
27) 馬小暉 龍華· , 「漢代祭祀喪葬禮俗及縯變」 ( 徐州 育學院學報教 1999年 2 );期 변화와 관련하여 정치사회적 흐름을 잘 파악할 수 있는, , ·
墓祭 巫鴻 「汉明 魏
( :
文的禮制改革與汉 画代 像艺术之盛衰」 禮儀中的美術 巫鴻中國古代美術史文編 를 참조 확인바람
( ) ,上 三聯書店, 2005), pp.274-286 .
28) 同堂異室에 대해서는郭善兵,「漢代皇帝宗廟祭祖制度考論」( 史學月刊 2007 01 )참조.
年 期
여 사람이 죽은 후에 영혼은 생전과 같이 공무를 처리하고 기거하며 음식을 먹는다고 믿었다.29) 바로 영혼불멸관이다 이러한 관념은. 後漢 시기에 조선 제사가 廟祭에서 墓祭로 변화되면서 앞서 언급한 皇家의 형식을 출현시켰다 즉 지방의 부유층 이외에. 은 를
陵旁立廟 吏民 墓祭
지내기 위해 祠堂을 건립하였던 것이다 예컨대. 後漢 山東 東阿縣 薌 에는 가 를 만들어 을 심고 돌을 세 他君祠堂石 柱題記 家父主吏 墓 松柏
우고 祠堂을 건립하여 자식의 도리를 하고 있는 기록이 있다.30) 이는 이라는 영혼불멸관이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事死如事生
이상 고찰하였듯이 後漢 明帝시기에는 墓祭가 확립되었고 아울러, 은 의 영혼이 영원하다고 믿었다 그 결과. 에는
漢代人 死者 漢代 厚葬風
이 사회 전반적으로 확산되었다.
俗 31) 鹽鐵論 「散不足 篇」 에는 “多藏 라는 기사는 당시 의 실태를 반영하고 있다 결국
” .
器用如生人 厚葬 明
시기 의 확립과 당시 일반화된 영혼불멸관 그리고 그 결과 확, 帝 墓祭
산된 厚葬 풍속은 화상석이라는 새로운 미술의 한 장르로서의 제사예 술을 탄생시키게 되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출토된. 漢代 畵像石 가운데
정도가 와 에 제작된 것이다
90% 後漢 中期 末期 .32) 이는 後漢 명제 시 기가 畵像石의 전성기였음을 잘 말해준다고 하겠다.
화상석에 반영된
. 祭祀藝術樣式
Ⅲ
29) 信立祥(김용성 譯), 앞의 책, p.91.
30) 山東 東阿縣 薌他君祠堂石 柱題記“……家父主吏……負土成墓 列種松柏 起立
··· .”
石祠堂… 財立小堂示有子道 差於路食
31) 漢武帝시기 단행된儒學의官學化로 유교적인禮制가 국가의 근간이 되었다. 게다가 前漢이 되면 유가사상은 讖緯說과 합류하면서 내부적으로 변화가 발생 하였고 그 결과 사회는 신비주의가 전반적으로 풍미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 사회적 변화는 후장 풍속이 출현하게 된 요인이 되었다.
32) 中國畵像石全集編輯委員會, 中國畵像石全集 1 10∼ 卷 (山東美術出版社, 2000).
화상석의 제사예술양식
1. 武梁祠堂
이 비록 15년이라는 짧은 통일제국을 이룩했지만 그 국가의 秦始皇
규모는 최대였고 그의 영혼불멸의 상징으로 빚어낸, 秦始皇의 兵馬俑 작품들은 土偶(terra cotta)로 만든 것이었다 이는 결국. 漢代 이전에는 돌의 장식에 대하여 그다지 관심이 없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漢代가 되면 특수한 예술 형식으로 화상석이 등장하고 그 提題도 다양하였다. 이 출토된 곳의 대부분은 경제와 문화가 번영된 곳으로 부근의 画像石
가 많은 · · · 몇몇 지역에 집 石料 河南山東陝西 山西 四川江蘇 安徽省 等
중되어 있다.33)
현재 중국에서 발굴된 漢代 畵像石의 분포 범위는 ①山東省(嘉祥 外
곳 곳 곳
30 ), 江蘇省 徐州 外( 15 ), 安徽省 淮北 外( 3 ), 河南省 永城 外( 3 곳 지역) ②南陽市를 중심으로 한 河南省 서남부와 湖北省 북부지구,
북부와 서부지역 과 의 북부지구
陝西省 山西省 四川省 雲南省
③ ④ ⑤
지역의 5지역으로 나뉘고 그 규모는, 200 , 석궐이 20여쌍 화상,
洛陽 基
석사당이 10 ,채 총수는 10,000점 이상이다.34)
이상을 토대로 하여 화상석이 祭祀 예술로서 자리매김을 하게 된 과정을 서술하고자한다 중국. 美術史에서 祭祀藝術은 B.C.4천년경 동 부 해안의 문화전통에서 생겨났다.35) 彩陶도 仰韶文化 시기부터 神에 게 祭祀지낼 때 祭器로 사용되어 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이. 들 祭器에는 鸟兽鱼虫 花草 叶 日月星辰, 树 , 과 같은 紋樣 등이 새겨져 있다 이는. 天 地 人· · 에 제사를 지내면서 祭物을 바치고, 神을 기쁘게 하기 위해 祭器에 紋樣을 그렸을 것으로 생각된다 다시 말해 제사를. 지내기 위해 인류가 처음으로 회화라는 형식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는. ' '祭 字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36) 본래 ' '祭는 神
33) 中國畵像石全集編輯委員會, 앞의 책 참조.
34) 信立祥, 中 漢代国 画像石の研究 (同成社, 1996), pp.5-11.
35) 巫鴻(김병준 譯), 순간과 영원-중국고대의美術과建築 (아카넷, 2003), p.81.
에게 복을 구하는 전통 예속 의식으로서 로 인식되었다 그 결.
靈 吉禮
과 漢代人은 祖先神靈을 기쁘게 하기위해서 祭物 뿐만 아니라 음악과, 미술을 통해 자손들이 祖先의 신령을 즐겁게 하기 위해, 祭祀樂이나 제사미술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 예술품을 창작하였다.
따라서 漢代 화상석의 제사예술은 바로 시대적 정신에 의한 내면적 이고 구체적인 표현으로 漢代의 石刻畵라는 독특한 기념비적 祭祀 미 술작품으로 출현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화상석의 그 예술적 특징은. 웅장하고 화려한 색채 회화였으며 이는 당시 사회적 기능과 관련되어, 있다 또한 황실능묘는 조정의 정치적 종교적 중심이 되었고 일반인들. · , 은 가족묘지에서 연회나 음악회 혹은 미술전시회를 열었다.37) 漢代 화 상석은 주로 豪族 및 백성들의 祠堂, 墓의 공간에 디자인되어 있는 祭 예술품이었다. 에 표현한 화상석 중에 제사예술을 대표로
祀 漢代 祠堂
꼽을 수 있는 것은 山东 武梁祠堂 画像石이다.
화상석의 주제와 그 속에 내포되어 있는 특징은 독특한 형태 山东
를 띠고 있다. 古代文化가 발달한 지역이기 때문에 山东 画像石의 주 제는 다양하고 내용도 풍부하다 이는 그 성격에 따라. ①현실 사회생 활이 반영된 내용으로 地主莊園과 手工业 작업장, 农业 渔猎, , 手工业 근로현장 통치자의 생활을 표현하는, 车骑出行 聚, 会, 饮宴, 战争, 庖厨,
및 , , , 등 와 을 묘사한 것으로 고
舞 禽 虫 ② 史故事 史人物
乐 兽 鱼 历 历
대 帝王, 将相 聖賢, , 高士 烈女, , 孝子 등 ③신화전설 및 祥瑞物 伏羲, ,
, , 등 , , ,
女娲 东王公 西王母 ④日月星辰 山草 木 自然景物 装树 饰图案 등38) 크게 4가지로 분류된다(<그림9>) 이러한畵題로 가득찬 武梁祠 36) 「 」祭 의字形에 반영된 本義는 당연히 귀신에게 살생의 피비린내를 바치는 것 이었고 후대에 이르러 일반적인, 祭祀를 가리키는 것으로 되었다(雷漢卿, 說
, , 2000, pp.88-95).
文 示部 字與神靈祭祀考「 」 巴蜀書社 37) 巫鴻 (김병준 譯), 앞의 책, p.299.
38) 이곳의 화상석은 구체적으로 고대제왕·聖賢을 주제로 한 것(三皇五帝 夏禹, ,
, , , , , , , , , , , , ,
夏桀伏羲 女媧 祝融 神農 黄帝 顓頊 堯 舜 禹 帝辛 文王 武王 周公 老
및 등 를 주제로 한 것
, , ), ( ,
子 孔子 孔子見老子 孔門弟子 忠臣義士 荆軻刺秦王
, , , , , ,
聶政刺韓王 蔺相如 範睢與須賈 豫讓刺襄子 要離刺慶忌 曹沫刺桓公 侯贏朱 등), 를 주제로 한 것( , , , , 亥劫魏師 列女 京師節女 梁節姑姊 無鹽醜女 齊義繼母
화상석은 앞서 언급한 다섯 지역 중에서도 가장 많이 출토되었다. 武 의 위치는 의 쪽 15km외곽 < >
氏祠堂 山 省东 嘉祥县 城南 紫雲山 武宅山 남쪽기슭에 있다.39) 규모는 武氏家族 일가의 墓地祠堂이다.40) 武氏墓
기록에 따르면 건립 시기는 , (147 群碑刻 武氏石祠 後漢 桓帝 靈帝时期
이며 복원되어 현존하고 있는 은 곳인데
189 )年 , 祠堂 3 , 武梁祠 元嘉元(
∼
와 이다 이 가장 일찍 발굴되었
151 ) , .
年 年 武 祠 武 明祠荣 开 武梁祠 画像
기 때문에 흔히 ‘武梁祠’라고 하였고, 武氏 家族의 祠堂 3곳 모두를 가 리키게 되었다. 武梁祠에는 前石室과 左石室이 있는데, 武氏 家族墓葬 이며, 雙闕 3개 石祠의 石刻裝飾畫가 있으나 현존하는 석각은, 40여 점 이다. 武氏 石闕과 武梁碑에 기재된 내용에 따르면 창건한 시기는, 桓
(147) 전후이다.
帝 元年 41) 漢代 화상석에서 석공들의 이름을 새겨 넣 은 곳은 거의 없으나 무량사의 석공의 경우는, 石工<孟孚 李第卯 孫, , 등 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여기에> , “ ”라고 기록되
宗 良匠衞改雕文刻畫
어있다 이들의. 畵像 내면에는 통치 질서를 강조하는 충효 사상이 뚜 렷하다. 忠臣 士义 와 효자열녀 画像의 전체에 보이는 주인 부모 부부의· · 모습은 그들을 선양하거나 충절을 다하는 杀身成仁의 뜻이 담겨있다. 즉 윤리도덕을 받드는 後漢 시기 '三 五常纲 '의 당시의 사회를 엿볼 수
를 주제로 한 것
, , ), ( , ,
秋胡妻 朱明妻 王陵母 孝子 閔子騫 老萊子斑衣娛親 丁蘭刻 등 으로 분류되고 이외에
, , , ) , ,
木奉親 董永賣身葬父 伯 悲親 邢渠哺父榆 義漿羊公 등도 있다
, , ( ,
泗水撈鼎 柳惠 顔叔 中國畵像石全集編輯委員會 中國畵像石全集 1 3 ,∼ 卷 山東美術出版社, 2000).
39) 현재 濟寧市 武宅山이다. 東西石闕畫像의 내용에는 神仙 車馬人物, 과 관련된 가 있다. , , 세 명의 중에서 의 규모가 비교적 故事 武梁 武班 武荣 石祠 武梁祠
작고 방의 구조로 되어있다, . 武班 武 祠, 荣 의 규모는 대체로 큰 편이고 중문에, 기둥이 세워져 있으며 방의 후벽에는 감실 구조로 되어있다 각각의, . 石祠畫 에는 , , 등의 이 분포되어 있고 맨 윗 부분에는 내용에는, 像 神仙 靈異 祥瑞 圖像
의 의미가 담겨 있다 ( ,앞의 책, 1 ).
天降祥瑞 中國畵像石全集編輯委員會 卷
40) 武氏祠 前 石室2 에는武榮祠 神仙靈異神話聖賢行旅故事( 등 화상석이 있으며) ,
에는 와 의 ,
漢武氏前石室 畫象 題字 漢 武榮祠 人物 車騎畫像殘 題字 武榮祠畫并 관련 이 있다 또한 에 보면
( ) .
像 聖賢故事 前石室 東壁 上部 孔門弟子出行畫像 이 있다 이에 대해 상세한 내용은. 中央研究院 歷史語言研究所의 中國畵像石全
와 참조
(http://www.ihp.sinica.edu.tw) 1 2 .
集編輯委員會 中國畵像石全集 ∼ 卷
41) 蕭潚,「漢代武氏祠畫像石藝術思想研究」 ( 科教文匯 2008 07 ), p.269.年 期
있다.
의 작업 방식과 구도를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자.
武氏祠 像画 武氏祠
은 단계별로 그 격식을 달리하는 구도 방식으로 되어있는데, 1단 画像
계에는 다양한 인물과 서로 다른 이미지로 되어있으며 복잡한 것처럼, 보이나 대칭 구도이며 그윽하고 강한 장식의 효과를 지니고 있다, . 武 의 은 으로 처리되어있는데, 이 먼 氏祠 画像石 雕刻 方法 凸面线刻 石工 저 石面을 갈아서 평면을 만들고 다시 화가가, 物像을 스케치하여 묘 사한 후, 物像 주위를 조각해내는 방식이다. 画面에 올라온 부분의 테 두리를 陽刻 처리하고 마지막으로 양각위에, 阴线을 따라 세밀하게 조 각하여 완성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화면위에 장중하면서도 깔끔하고. 소박한 상징적인 특색의 작품의 화상석 예술을 창작했을 것으로 짐작 된다.
이러한 武氏祠 画像石은 대부분이 가로 세로를 경사지게 한 문양과, 대각선과 底線으로 표현되어있다 이에 대해. 周松林은 인물 형상은 구 상예술이 아니고 추상예술도 아니라고 하면서 중국 회화예술의 전통, 적 정서의 傳神의 뜻이 포함된 서정적인 ‘意象예술 로서 신을 닮은’ 美
을 지니고 있다고 하였다.
感 42) 또 褚滨의 미적 표현을 살펴보면 武氏 에 표현된 예술적인 아름다움을 조각미 역량미 리듬미, , , 祠 画像石刻线
장식미 율동미 가지를 예술적 가치로 평가하고 있다, 5 .43) 예컨대 그는, 그림 작품을 리듬 있는 미적 표현으로 보았고
< 1> ,
孔子 老子 武氏
「 见 」
제 실에 있는4 <그림2>은 의 으로 祠 左石室 「荆轲刺秦王」 生命力 承 性传 꼽고 있다 또한. 刘肃의 지적처럼 武氏祠 汉画像石 画面의 여러 비유 적인 형상의 예술에 대해 일종의 예술 사상과 예술구상 이 서로 어우‘ ’ 러진 형식을 표현하였다 아울러. 武氏祠 画像石은 균형적인 배치, 透视 구도와 分层의 배치가 긴밀하게 호응하여 서로 융합되고 현양되는 대 칭구도를 지니고 있어서 공통적인 미학적 가치가 있을 뿐만 아니라 이
42) 周松林, 「武梁祠畫像石的藝術風格」 ( 藝術理論 2008 07 ), p.153.年 期 43) 褚濱,「武氏祠漢畫像石線刻的審美內涵」 ( 濟寧師專學報 2001 04 ).年 期
러한 미술 구도는 풍부한 내용의 圖鑑 연구로 교학적인 계시를 제공했 다고 한다.44) 필자는 앞서 언급했듯이 이를 구체적인 표현과 시각 전 달의 내용을 살리는 구체 내지 표현주의 예술 로 파악하였다 이는‘ ’ . 武 를 짓기 위해 이들이 노력한 내용에 그들이 표현하고자 했던 당시 氏祠
의 심정이 잘 드러나고 있다. 武氏祠 石闕銘 기록에는
월 경술 에 일 동안 에 제사를 지냈다 효자
3 4 .
建和 元年…… 朔日 丑 武
과 아우 · · 은 · 에게 이 기둥을 세우게 하 公 绥宗景兴 开朗 石工孟孚 李弟卯
였는데 비용은, 15만 전이었고 손주, 宗이狮子를 만들었는데 비용은 만, 4 전이었다. 开明의 아들 宣张은 济阴에서 벼슬하였는데 나이는 25세였다. 은 에 천거되어 에 임명되었는데 질병으로 요절하여, 曹府君 孝廉 敦煌 史长
재능을 떨치지 못하였으니 아 슬프다 남녀 모두 이를 애처로워 한다, . .45)
라 하고 있다 위의 명문에는 사당을 짓기 위해 세운 기둥의 비용이. 이나 들었다고 하고 있다 년 에 옛 주인이
15萬 錢 . 漢 高祖 6 (B.C.201)
었던 點이 媚를 붙잡아 奴婢로 戶籍에 올리고 大夫 祿에게 만 천1 6 錢 에 팔았다46)는 내용에서 유추하면, 漢代의 15만 전은 노비 9 10∼ 명을 고용할 수 있는 액수이다 이는 무씨의 자손들은 사당을 짓기 위해 막. 대한 액수를 사용했음을 말해준. 또한 위의 기사에는 “효자 무공 은……효렴에 천거되어 라는 표현이 있다 이는” . 武氏의 자손들이 당시 의 효렴제도의 영향으로 화려한 사당을 짓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을 가 능성을 시사한다 이상을 종합하면. , 武氏祠 画像은 당시 사회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신령을 즐겁게 하기 위한 예술품으로, 서 작가는 묘주의 意思를 반영하여 영혼도 함께 불어 넣었을 것으로 44)劉肅,「武氏祠漢畫像石布局對美術構圖教學的啓示」 ( 中國新技術新産品 2008
10 ), p.149.
年 期
45) 「武氏祠石闕銘」, "建和元年 大歲在丁 三月庚戌朔 四日祭醜 孝子武始公 弟 綏宗 景興 開朗 使石工孟孚 李弟卯造此閥 直錢十五萬 孫宗作獅子 直四
.
萬 開明子宣張仕濟隂年二十五 曹府君察 孝廉 除敦煌長史 被病夭沒 苗秀不遂舉 ."
嗚呼哀哉 士女痛傷
46) 신성곤, 「簡牘 자료로 본 중국 고대의 奴婢」 ( 한국고대사연구 54, 2009), p.186.
판단된다.
또한 武氏祠 画像은 표현기법에서도 예술적 가치가 높을 뿐만 아니 라 제사예술의 내면적 정서로 시대적 정신을 표현하고 있다 이것을, . 가장 잘 알 수 있는 것이 바로 본고가 주목하고 있는 樓閣拜禮圖이다 (<그림3>).
의 상징체계와 의미 3. 武梁祠堂 樓閣拜禮圖
에 누각의 높이는 대부분이 으로 되어있다. · ·
漢代 三層 闕樓 市樓 望樓
등은 모두 漢代에 응용된 樓閣 形式이다. 漢代 皇帝는 神仙方術을 신 봉하였고 건축구조도 높은 누각을 건조하여 그곳에 오르게 되면, 仙人 이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武帝 때 建造된 井幹樓는 五十丈47)
높이로 지어졌다고 한다.48) 이처럼 누각은 漢代人의 사상적 상징이기 도 하였다 이러한 누각에서의 배례는 감사의 의미 내지 공경의 예로. 서 행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의 은 바로 이라는
武梁祠堂 樓閣拜禮圖 祭祀 像图 事死如事生 漢代人 의 영혼관과 유가 사상을 토대로 하기 때문에 당시 사회적 의미를 파 악하는 데에 중요한 畵像이다. 武氏祠 画像 누각배례도(<그림3>과 그림 에 보이는 여러 상징에 대하여 고찰한 이는 이다 그는
< 6>) 巫鸿 .
이것을 ‘君權의 표현 으로 분석하였다 특히 도상에 보이는 배례자 뒤’ . 에서 패(笏板)를 들고 있는 상징에 대해서 이는 황제들을 알현할 때 관원들이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상징하는 배례도 장면을, 朝라 고 하면서 이것이 바로, 君權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하였다.49) 패는 고 대 신하들이 군왕을 알현할 때 손에 쥐고 있는 것으로, 玉石 象牙· 혹
47) 고대의 1丈은10尺으로서 약 3.33m이고, 五十丈은 약 166.5m이다. 48) 중국고대 樓閣의 建築 類型은 宮殿壇廟 民居園林 寺廟道觀, , , 祠堂陵墓 등으
로 나눌 수 있으며 대부분이 나무로 지어졌다 이러한, . 木構架 建筑技術은 藝 과 측면에서도 독특한 구조기법으로 되어 있다 ( ,
術 技術 馬曉 中國古代木樓閣
, 中華書局, 2007, p.93).
49) 巫鴻, 武梁祠-中國古代畫像藝術的思想性- (三聯書店, 2006), p.213.
은 竹 木· 의 手板이 있다 또한 이 패는. 儀禮 「士相見禮」에는 “上大夫 이라고 하여 상대부 등이 들었던 것으로 되어있으나
” , , ·
相見以羔 唐 賈
에는 이라고 하여 에 회합이 있으면
· “ ” ,
公彦 疏 常朝及餘會聚皆執笏 朝堂
신하들이 모두 패를 쥐고 나갔음을 알 수 있다 또. 禮記 「玉藻」에는
은 이고 년 이후에는 이상이
“笏長 2 6 (60.6cm)尺 寸 ,唐代武德 4 5品官 象
을 들었고, 6 이하 은 과 으로 만든 을 들었다고 하
牙笏 品 官員 竹 木 笏
였다.50) 明代 規定에서는 5品 以上의 官員이 象牙笏을 들었으며 그 이, 하는 笏을 들지 못했다고 한다. 清朝에 이르면 笏板은 폐지되었다고51) 한다 또한. 晉書 卷52, 「輿服志 第」 15,52)에 보면 옛사람들은 귀천을 막론하고 모두 홀을 쥐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고대에 관원이. 上朝할 때는 長方形笏板을 들었고, 百笏 百條 黃金( ; )을 든 경우도 있다.53) 이 처럼 지위에 따라 다양한 홀을 쥐었으므로 무량사의 누각배례도에 보 이는 홀을 가지고 군권을 단정하기는 무리이다 다만 무영의 벼슬이. 까지 올랐으므로 이 묘사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무량사의 누.
中 笏
郎
각배례도의 경우에는 朝堂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기는 어렵고 홀, 의 크기도 두드러지게 표현되지 않고 단지 중간층에서 묘주가 배례를, 받는 장면에서 배례를 묘사했을 뿐이다.
특히 배례 받는 자가 군왕으로 단정할 수 없는 부분으로 여러 화상 석 畵題54)에서 특히樓閣拜禮圖(<그림4>)의 표현은 배례 받는 인물의 50) 禮記 「玉藻」, “笏 天子以球玉 諸侯以象 大夫以魚須文竹 士竹本 象可也 見 於天子 與射 無說笏 入大廟說笏非古也 小功不說笏 當事免則說之 旣搢必盥 雖 有執於朝 弗有盥矣 凡有指畫於君前 用笏 造受命於君前 則書於笏 笏 畢用也 因
.”
飾焉 笏度二尺有六寸 其中博三寸 其殺六分而去一
51) 中國漢語大詞典編輯委員會, 羅竹風 主編, 漢語大辭典 (漢語大詞典出版社, 1994).
52) 晉書 卷52,「輿服志 第」 15, "笏古者貴賤皆執笏其有事則搢之於腰帶所謂搢
. .
紳之士者 搢笏而垂紳帶也 紳垂長三尺 笏者 有事則書之 故常簪筆 今之白筆是
. , , , , , ,
其遺象 三臺五省二品文官簪之 王 公 侯 伯 子 男 卿尹及武官不簪加內侍位
. . , ,
者乃簪之 手版即古笏矣 尚書令 僕射 尚書手版頭復有白筆 以紫皮裹之 名曰 ."
笏
53) 笏字를 대신하여 條字로 쓰인 경우도 있으며, 笏의 크기는 “以表其量兼狀其
을 표준으로 하고 있다 앞의 책
” ( , , ).
形 中國漢語大詞典編輯委員會 羅竹風主編
표현 기법부터 다르다 즉. 墓主를 두드러지게 표현해야 하기 때문에 특정 인물을 부각시켜서 관찰자가 주요 인물이 누구인지를 한눈에 알 수 있게 하였다. 樓閣拜禮圖의 인물 비례는 투시 비례에 맞지 않고 묘, 주의 신분에 따라 크기를 묘사하고 있다. 山東費縣潘家疃 樓閣圖(<그
림5>)는 鳥瞰焦點透視法을 사용하여 입체 공간을 분명하게 나타내고
있다 이. 焦點透視法은 화면상에 있는 인물 건축과 같은 여러· 物象을 하나의 통일된 삼차원적 시각 공간으로 들어오게 하여 等距離散點 투 시 구도법에서 항상 나타났던 시각적 모순을 해결하는 작품이다 이와. 같이 樓閣拜禮圖의 구도와 표현은 시각 전달의 의미 표현으로서 그 내 면의 관념을 담고 있는 것이다.55)
누각배례도에서는 배례 받는 인물 이외에도 제사예술의 상징들이 표현되어 있다 이와 관련하여 특히 주목되는 것은 무씨화상석에서. 樓
그림 에서 하단의 중간층에 있는
(< 6·7>) ‘ ’, ‘ ’
閣拜禮圖 車馬出行圖 扶桑樹
와 상단에 있는 ‘西王母’ 화상이다. 거마출행도
1)
의 (상여차 는) 또는 라고도 하며, 하기 위해
漢代 柩車 靈車 挽車 葬送
거마를 출행 하는 것이다 또. 漢代에 사용된 喪輿車는 輪車56)라고도 하였다.
본고에서 주목하는 武氏祠 像画 의 樓閣拜禮圖에 보이는 거마출행도 는 상여차의 출행이 아니라 효성스런 묘주의 거마출행도라는 데에 그 특징이 있다 먼저 수레. (<그림3>의 下段)와樓閣拜禮圖(<그림6·8>)에 54) 漢代 화상석 소재는 ①禮敎 관련 歷史故事 ②지주층 관련의 인물 ③위대한 공적을 이룬 인물 ④지주층의 생활방식 ⑤신앙과 관련된 神話 ⑥민간의 생산 활동과 그 생활 등으로 분류된다 (中國畵像石全集編輯委員會, 中國畵像石全集
1 3 ,∼ 卷 山東美術出版社, 2000).
55) 樓閣拜禮圖에는 그 표현 기법이 餘他화상석과는 달리 현대 미술에서 나타나 는 현상으로 작가와 祠主의 내면의 생명 즉, 自我와 영혼의 주관적 표현을 추 구하는 감정 표출의 제사예술로서의 表現主義 혹은 내면의 관념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한 具體藝術의 요소가 있다.
56)王風娟,「總山東畵像石看漢代送葬與祭祀禮俗」( 山東濟南, 2004 4 ), p.8.年 期
탄 주인공의 인물을 보면 무씨 가족묘지의 네 종류 비문 가운데 오직, 에만 무영이 생전에 거친 관직이 기술되어 있다 이것은 전석. 武榮碑文
실 제 종의 거마출행도 가운데 주요 인물 제기의 관직과 서로 부합된2 다 무영이 생전에 거친 관직은. 武榮碑 비문에는 “主簿·督邮·五官掾·郎
으로 되어 있다.
中 57) 누각배례도에 보이는 거마출행도는 祠主인 무영 일생의 벼슬 경력을 표현하고 있다(<그림3>). 누각배례도의 하단의 거 마출행도에는 왼쪽 끝에 한명의 笏을 잡은 관리가 허리를 구부리고 서 서 오른쪽에서 오는 거마출행 행렬을 영접하고 있다 따라서 이 거마. 출행도에 출행 주인공으로 수레에 앉아 있는 인물은 무영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거마출행도는 측면 등거리산점투시법을 사용해 진행 중. 인 사주거마출행임을 표현하였다 이는 무량사당의. 祠主受祭圖와 祠主 거마출행도는 일찍이 漢代에 이미 시간차가 있는 여러 폭의 화상을 동 일사건 발달 과정으로 표현하는 예술 표현 수법이 출현한 것임을 말해 준다 이러한 표현수법에 대해서 김병준은. 橋上交戰圖 분석 에서 실“ 제로 여러 화제가 적어도 동일한 화면에 함께 그려져 있다면 그것들 사이에는 일정한 논리가 담겨 있었을 것 이라고 하였다” .58) 김병준이 지적했듯이 한 화상에 구성상 긴밀한 연결성을 나타내는 여러 화제들 을 묶어 설명하기 위해서 그 각 화제가 갖는 의미의 상관관계를 살펴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동시성을 지닌 화상을 보면 사당 후벽 누각배. 례도 화상의 하층에 짐을 푼 수레 말과 마부도상은 사주 부부가 목적,
57) 「武榮碑」에는 “學優則仕 爲州書佐 郡曹史主簿 督郵 五官掾功曹 守從事 年卅 六 汝南蔡府君察 孝廉舉 □□郎中 遷執金吾丞 遭孝桓大憂 屯守玄武 戚哀悲憧 加遇害氣 遭疾隕靈□□□□君 即吳郡府卿之中子 敦煌長史之次弟也 廉孝相承 亦世載德 不忝□□□□ □命 不竟臺颱衡 蓋觀德於始 述行於終 於是刊石勒銘 垂 示無窮 其辭曰 天降雄彦 資材卓茂 仰高鑽堅 允文允武 內幹三署 外 師旅□ □勒 屯守 奮威 武 旌旗絳天 雷震電 敷赫然 陵帷哮虎□ 舉 當遂股肱 □之元輔 天何不 吊 降此□咎 痛乎我君 仁如不壽 爵不副德 位不稱功 咸懷傷愴 遠近哀同 身沒□
라고 되어있다
.” ( ( ); ,
萬世諷誦 武榮碑 碑拓本 金玲 漢故執金吾丞武榮碑
□ 「 」
, , 2008).
補證 東方博物
58) 김병준, 「漢代 화상석의 교상교전도 분석‘ ’ -畵題간의 상호 유기적 이해를 위 한 시론- (」 한국불교미술사학 26, 2006), p.1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