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idak ada hasil yang ditemukan

懸泉置 지역의 문서전달 노선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居延지역은 최전방 군사기구인 隧가 설치되어 이들 隧 중 일부 기구가 문서전달을 담당했음을 살펴보았다. 특히 관할지역의 문서전 달을 담당하고 있던 部와 部 사이의 거리는 약 20里 정도로 추정되는데17), 이러 한 거리는 秦漢初의 문서전달 전담기구인 郵의 설치거리와 거의 유사하며18), 이

16) 〈驛馬行〉에 대응되는 일반 도보의 문서전달 방식을 무엇으로 부를 수 있는지에 대해 여기서 는 확정할 수 없다. 다만 뒤 懸泉置 인근 지역의 문서전달 노선이 驛馬行, 郵行 등으로 분리되어 있었고, 亭 또한 도보의 문서전달에 종종 이용되었다는 점을 생각해 여기서는 일단 이를 〈郵行 /亭行〉으로 부르고자 한다.

17) 臨木隧에서 當曲隧까지의 거리는 약 76-80里 정도로 추산할 수 있는데, 甲渠河南道上塞에 모두 4개의 部가 설치되었음을 생각한다면, 部와 部 사이의 거리는 약 20里 정도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1部가 6-7개소의 隧로 구성되며, 隧와 隧 간의 평균 간격이 3-4里인 점도 이러한 추정

漢代 문서전달 노선과 郵傳기구의 설치 (오준석)

47

들 모두 도보를 이용한 문서전달기구라는 점에서 이들 변경지역의 部,隧는 內地 에 설치된 郵와 비슷한 급에 해당하는 문서전달기구라고 일단 추정할 수 있다.

한편 甲渠河南道上塞 문서전달 노선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呑遠部에는 ‘呑遠置’

라는 이름의 置가 설치되어 있었으며, 이 呑遠置를 중심으로 呑遠部의 최북단에 위치한 萬年驛, 誠北部 중간 지점에 위치한 武疆驛, 不侵部 중간 지점에 위치한 止害驛 등의 驛이 있어, 驛馬를 이용한 문서전달을 담당하고 있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居延지역의 문서전달기구 설치상황과 비교할 수 있는 곳으로 敦煌郡 效穀縣 懸泉置 주변의 문서전달 노선이 있다. 특히 이 懸泉置는 변경지역에 위치 하기는 했지만, 置의 인근 지역에는 군사기구인 候官이나 部․隧 등이 설치되지 않았고, 懸泉置 자체도 민정계통 행정기관인 敦煌郡 效穀縣의 관할을 받는 郵傳 기구였기 때문에, 이 지역 문서전달 노선의 郵傳기구 배치 상황은 內地와 비슷할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19).

『懸泉漢簡』의 자료를 바탕으로 한, 懸泉置 인근 지역의 郵傳기구 배치상황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당시 敦煌郡 效谷縣에는 懸泉置와 遮要置의 2置, 甘井, 遮 要, 平望, 懸泉의 4騎置가 동서로 배열되어 있었으며, 懸泉置는 다시 동으로 廣至 縣의 萬年騎置, 魚離置 등과 차례로 연결되는 郵路上에 위치해 있었다고 한다20). 또한 懸泉置와 平望騎置 사이에 毋窮亭, 懸泉置 동편 效穀縣 최동단에 臨泉亭, 萬年騎置 서편 廣至縣 최서단에 石靡亭 등의 亭이 설치되어 일부 문서의 전달을 담당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21). 즉 이에 따르면 懸泉置 인근 지역에는 〈置-騎 置-亭〉의 3급으로 구성된 郵傳기구가 체계적으로 배치된 셈이다. 張俊民에 의해 밝혀진 敦煌郡 懸泉置 주변의 郵驛 노선을 정리하면 다음 표와 같다22).

張俊民은 이처럼 상당한 거리의 간격을 두고 대규모 郵傳기구인 置가 위치하 고23), 置와 置 사이에 驛馬를 이용해 긴급한 문서를 전달하는 騎置가 배치되며, 이 置와 騎置의 사이에 일반문서를 전달하는 亭이 설치된 구조가, 敦煌郡과 酒泉 郡을 연결하는 懸泉置 주변 지역 主幹 郵路의 모습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18) 漢初의 律令인 『張家山漢簡』行書律에서는 郵의 설치 간격을 지역에 따라 10,20,30里로 구분 하고 있다. 張家山二四七號漢墓竹簡整理小組 編著, 『張家山漢墓竹簡[二四七號墓](釋文修正本)』, 文物出版社, 2006, 二年律令 行書律, p.45, “十里置一郵, 南郡江水以南至索(?)南水, 卄里一郵. ... 北 隴西, 卅里一郵.”

19) 藤田勝久, 「中國簡牘にみえる文書傳達と交通 - 東アジア資料學の基礎として」, 『資料學の方 法を探る』10, 2011, p.36.

20) 張經久,張俊民, 「敦煌漢代懸泉置遺址出土的“騎置”簡」, 『敦煌學輯刊』2008年 第2期, p.70 ; 畑 野吉則, 「敦煌懸泉漢簡の郵書記錄簡」, 『資料學の方法を探る』10, 2011, p.89.

21) 張俊民, 「敦煌懸泉漢簡所見的“亭”」, 『南都學壇』, 2010-1.

22) 張俊民, 「敦煌懸泉漢簡所見的“亭”」, 『南都學壇』, 2010-1, p.20, <圖4> 참조.

23) 懸泉置의 방대한 규모와 조직은 발굴 초기부터 큰 주목을 받았다. 懸泉漢簡 簡文에 의하면 懸 泉置에는 置丞 외에 置嗇夫, 廐嗇夫, 倉嗇夫, 廚嗇夫, 少內嗇夫, 都田嗇夫, 傳舍嗇夫, 司空嗇夫 등 이 설치되어 있었다고 한다.(柴生芳, 「敦煌漢晉懸泉遺址」, 『邊境出土木簡の硏究』(冨谷至 編), 朋友書店, 2003, p.176. 참조.)

이러한 도식이 당시 懸泉置 주변 郵傳기구의 설치 상황을 반드시 정확히 반영한 다고는 할 수 없다.

<표3. 懸泉置 주변 문서전달 노선도[1]>

敦煌縣 效谷縣 廣至縣

西門亭 中部都尉

樂望 亭

安民 亭

甘井 騎置

亭 遮

要置 亭 平望 騎置

毋窮 亭

懸泉 置

臨泉 亭

石靡 亭

萬年 騎置

亭 魚

離置

50里 40里

140里

위의 노선도에 보이는 것처럼 置와 騎置 사이에 설치된 亭은, 懸泉置와 萬年騎 置 사이의 石靡亭과 臨泉亭, 懸泉置와 平望騎置 사이에 설치된 毋窮亭의 존재만 확인할 수 있을 뿐이며, 현재까지 공개된 『懸泉漢簡』簡文을 통해서는 魚離置와 萬年騎置, 遮要置와 平望騎置, 遮要置와 甘井騎置 사이 亭의 존재는 확인할 수가 없다. 물론 張俊民이 생각한 것처럼 置와 騎置 사이마다 문서전달을 담당하는 亭 이 배치되었을 것이란 예상은 충분히 가능한 것이지만, 이러한 생각은 지나치게 도식적이란 느낌을 가지게 하며, 실제 상황이 반드시 이런 도식과 부합했다고 생 각하기는 어렵다. 즉 위 표에 따르면 置와 騎置 사이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떨어 져 있는 경우에만 亭이 설치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24), 平望騎置에서 甘井騎置 사 이의 거리는 平望騎置에서 萬年騎置 사이의 거리보다 훨씬 짧기 때문에 平望騎 置와 遮要置, 遮要置와 甘井騎置 사이에 亭이 설치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또한 『懸泉漢簡』簡文에 의하면, “騎置”는 “驛” 혹은 “亭”으로도 불려지고,

“亭”의 경우 “驛”으로도 불려지고 있어 騎置와 置 중간에 반드시 亭이 설치되어 야만 郵傳기구 배치가 완결된다고 볼 수는 없다. 즉 萬年騎置의 경우 “亭長”이 소속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萬年亭”으로도 불렸고, 臨泉亭의 경우 “驛騎”가 배 치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臨泉驛”으로도 불렸던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騎置 와 亭이 모두 ‘驛’ 혹은 ‘亭’으로 불리는 상황 속에서, 반드시 위 도식처럼 魚離置 와 萬年騎置, 遮要置와 平望騎置, 遮要置와 甘井騎置 사이에 亭이 존재했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24) 이와 달리 懸泉置와 臨泉亭의 경우는 동일한 지역이나 서로 가까이 인접한 지점에 설치되었다 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懸泉漢簡』에는 懸泉置와 臨泉亭 사이에 문서가 전달된 사례가 전 혀 보이지 않으며, 오히려 이 지점을 통과하는 문서가 懸泉置를 거치는 경우와 臨泉亭을 거치는

漢代 문서전달 노선과 郵傳기구의 설치 (오준석)

49

하지만 騎置가 亭으로 불린다고 해서, 騎置와 亭이 사실상 같은 기구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25). 騎置의 경우 “亭” 혹은 “驛”으로 불릴 수 있었지만, 亭의 경우 “驛”으로만 불릴 뿐 “騎置”로 불린 예가 없다는 것을 생각할 때, 이들 기구 가 일반적으로 문서전달을 담당하는 소규모 기구의 이름인 “亭” 혹은 “驛”으로 통칭될 수 있었음을 의미할 뿐, 亭이 “驛”이자 곧 “騎置”라고는 할 수 없다. 또한 騎置를 이용한 문서전달의 상황을 보면 소량의 문서가 빠른 속도로 전달되고 있 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騎置의 驛騎를 통해 전달되는 문서는 중요문서와 急書 로 한정되어 있었음을 분명히 말하는 것이다. 이에 비해 亭을 통해 전달되는 문 서나, 置에서 置로 바로 전달되는 문서는 대부분 대량의 일반 문서가 步行의 속 도로 전달된 것인만큼, 置에서 置, 亭에서 亭으로 전달되는 문서와 騎置에서 騎 置로 전달되는 문서는 분명히 구분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平望騎置, 萬年騎置 등의 騎置가 “平望亭”, “萬年亭” 등으로 불린 것 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騎置가 소규모의 문서전달 기구로 “驛馬行” 문서를 전담하는 소수의 인원만 배치되어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 면, “騎置”와 “亭”이 분명히 별도의 역할을 가진 다른 기구였음을 알 수 있다. 만 약 騎置가 바로 亭이며, 騎置와 동일한 지점이나 인근 지역에 亭이 따로 설치되 어 있지 않다고 하면, 騎置의 인원만으로 急書뿐만 아니라 대량의 일반문서까지 전달한 셈이 되어 버린다. 이것은 急書의 빠른 전달을 위해 설치된 騎置의 설립 목적 자체를 부정하는 꼴이 되는 것이며, 1건 혹은 2건의 急書가 騎置를 통해 빠 르게 전달되는 것을 보여주는 『懸泉漢簡』簡文 속 상황과도 부합하지 않기 때 문에 이런 식으로는 생각할 수가 없다. 즉 “萬年騎置亭長”이나 “萬年亭驛騎”라고 하는 簡文의 내용은 驛騎가 설치된 ‘萬年亭’이 ‘萬年騎置’와 동일한 지점 혹은 인 근 지역에 별도로 설치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26). 또한 이는 魚離置, 懸 泉置, 遮要置 내부에 설치된 것으로 보이는 魚離騎置, 懸泉置騎置, 遮要騎置 등의 경우를 통해서도 입증할 수 있는 사실이다. 置와 騎置의 규모를 비교할 때, 置의 다른 이름이 騎置였다는 식으로는 절대 생각할 수 없으며, 廐, 廚, 傳舍 등과 마 찬가지로 置 내부에 騎置가 설치되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데27), 騎置와 亭의 관계 또한 이와 비슷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다만 騎置와 亭은 그 규모가 비슷하므로 어느 한 쪽의 소속 관계로 보기보다, 동일한 지점에 두 기구가 함께 설치된 것으로 보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다.

25) 拙稿, 「秦漢代의 郵傳기구와 문서전달체계」, 『東洋史學硏究』109, 2009, pp.123-124.

26) 張俊民의 경우 粟出入簿에 臨泉亭, 毋窮亭, 平望亭이 함께 등장하는 것을 들어 平望騎置 부근 에 平望亭이 함께 설치되어 있었다고 주장하였다.(「敦煌懸泉漢簡所見的“亭”」, 『南都學壇』, 2010-1, p.17. 참조.) 이처럼 亭과 騎置가 함께 설치되는 현상은 平望騎置와 萬年騎置 뿐만 아니 라 모든 騎置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현상이었을 것이다.

27) 郝樹聲, 張德芳, 『懸泉漢簡硏究』, 甘肅文化出版社, 2009, p.30. 〈懸泉置內設機構示意圖〉참조.

여기서는 懸泉置 내부 설치기구로 懸泉廐, 懸泉廚, 懸泉傳舍, 懸泉騎置 외에 懸泉驛을 들고 있지 만, ‘驛’과 ‘騎置’가 구별된 기구인지는 분명치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