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맺음말 - 5인의 관계와 성향비교

송경령, 하향응, 진벽군과 허광평이라는 인물들을 살펴보았을 때 나타나는 첫 번째 공통점은 그들의 남편이 오랜 기간 동안 혁명적 성향을 지녔다는 점이다.

손문의 반청혁명운동의 영도 하에서 요중개와 왕정위는 동맹회시기부터 손문 과 함께 혁명을 위해 분투한 동지였으며, 노신은 혁명파는 아니었음에도 그의 작 품 속에서 반청혁명에 따른 새로운 세계를 염원하였던 민주적 인사임에는 틀림 없었다.

장기간의 혁명성을 가진 정치가를 남편으로 두었던 이들 여성들은 마찬가지 로 반청공화혁명 즉 신해혁명, 그리고 국민혁명에 이르는 오랜 기간 동안 혁명에 투신하여 정치적 지위를 제고하였다. 이러한 "동맹회 시기부터 참여한 혁명가"라 는 이미지는 일종의 "정치적 치외법권"을 제공해 주어, 이들 여성들이 정치적 위 협은 받아도 감히 죽이지 못하는 특권을 암묵적으로 받았다. 노골적으로 장개석 을 반대하였던 송경령, 하향응, 그리고 허광평이 암살 위협 속에서도 안전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두번째 나타나는 공통점은 송경령 하향응 진벽군 허광평 모두 국민당 당원이 었으며 이들 모두 근대적인 학식을 지닌 여성지식인이었다는 점이다.

송경령은 미국의 웨슬리언 대학을 졸업하였으며, 하향응은 일본 동경의 사립여 자미술학교를, 진벽군은 페낭의 壁如女校를, 마지막으로 허광평은 북경여자사범 학교를 졸업하였다. 이러한 여성지식인으로서의 면모는 그들 스스로를 良妻賢母 19) 中央文獻硏究室 編, 『鄧穎超文集』, 인민출판사; 吳琴, 『鄧穎超與何香凝』, 華文出版社, 1999.

민국시기 엘리트 여성의 결혼과 사회·정치적 지위의 변화 (김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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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만 가두어 두지 않고 정치적 활동을 할 수 있는 배경을 제공하였다.

마지막으로 진벽군을 제외하고 나머지 세 사람은 모두 남편 사후 활발한 활동 을 하였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진벽군은 남편과 정치적 생명을 같이 하였으 며 이것은 그들 부부의 결혼기간이 정치적 생명이 다할 때 까지 계속되었던 것 과 관계가 있다고 보인다.

놀랍게도 송경령 하향응 그리고 진벽군은 자신들이 국민당 중앙위원회 정치위 원으로 활약하면서도 남편 생전에는 손문부인, 요중개부인, 왕정위부인으로 인식 되는 것이 앞섰다. 허광평의 경우 노신 생전에는 정치적 활동을 아예 하지 못했 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역설적으로 그들의 정치적 아이덴티티를 형성할 수 있 었던 것은 남편 사후 자립을 시도하면서였다. 송경령과 하향응은 정치적 동반자 로서 무한정부시기 국민당 좌파로서, 남경정부 시기 각계구국회, 구국입옥운동, 보위중국동맹의 주도적 위치를 차지하였다. 허광평은 남경정부 시기 송경령과 하 향응의 충실한 보좌관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진벽군의 경우, 왕정위와 오랜 결혼기간동안 정치적 동반자로 활동하였 기에 왕정위의 정치행보와 궤적을 함께 하여, 무한정부시기 국민당 좌파에서 우 파로 선회의 경우나 중일전쟁 시기 남경의 괴뢰정부에 남편과 함께 활동하였다.

이것은 이들 여성 엘리트들이 정치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남편이란 후광이 어 느정도 필요하지만, 자립을 위해서는 "남편의 부재(예를 들어 남편의 죽음)" 라는 전제조건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러지 못했던 진벽군의 경우 왕정위 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했던 것을 보더라도 알 수 있다.

국민당 소속 정치인이었던 하향응 송경령 진벽군 허광평 이들 네 사람은 좌익 과 우익으로 나누는 그래프 선상에서 그들의 성향을 분포시켜 보자.

하향응과 송경령이 가장 좌익에 위치하고, 허광평은 중도좌파, 진벽군은 좌익 에서 우익으로 급선회하는 경향성을 보인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각자의 남편의 영향이라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손문의 경우, 국민혁명 시기 "聯蘇容共"을 슬로건 으로 내세우면서도 진정한 공산주의 편향은 아니라 임기응변적 정치인으로서의 태도를 띠었다. 그의 사후 송경령이 국민당 좌파를 견지하였던 것은 개인의 정치 적 선택이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따라서 이들의 정치적 성향은 남편의 영향과 함께 자신의 정치적 선택이 결합 된 것으로 보인다.

이번에는 전자들과 등영초와의 관계를 살펴보자.

등영초와 가장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였던 여성은 하향응이었다. 그들은 국민혁 명시기 국민당 부녀부 활동을 함께 하며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이후 남경정부

시기 항일운동 당시 하향응, 송경령과 비밀리에 접촉하였는데, 하향응의 비서였 던 허광평 역시 등영초와 관계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진벽군과는 이렇다 할 관계설정이 보이지 않으며, 오히려 중일전쟁시기 에는 서로 적대적 관계를 형성하였다. 이것은 다른 엘리트들 즉 송경령, 하향응 그리고 허광평도 마찬가지였다.

정치적으로 보아 국민당 좌파인 하향응과 공산주의자인 등영초간의 밀접한 관 계는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 물론 하향응의 딸인 요몽성, 아들인 요승지가 1927 년 이후 공산주의자가 되었기에 등영초와의 관계가 더욱 밀접해 질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항일운동이라는 대명제 하에서 등영초와 송경령, 하향응, 허광평은 의식을 공유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등영초의 공산주의관, 여성운동관이 이들에게 영향을 주었으리란 추론은 합리적이라 생각한다.

이번에는 개인적 성향을 비교하여 보겠다.

가장 과단성 있고 성격이 괄괄한 사람들이 하향응과 진벽군이며 허광평은 그 다음에 속하고 송경령은 가장 내성적인 성향을 보인다.

그 중에서 하향응은 자신의 성향을 밖으로 표출하여 실천하였던 반면, 진벽군 은 강한 성향에도 불구하고 실천방면에 있어서는 앞에 나서지 않고 뒤에서 조종 하는 방법을 채택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가장 내성적이었던 송경령이 급진적인 노선을 택하였다는 점은 재미있는데, 이 는 외유내강의 성향과 함께 오랫동안 학습과 경험을 통해 얻어진 결단성이 그 까닭이 아닐까 한다. 하향응 송경령 허광평이 남편의 사후 독자적 활동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나, 그 중에서 남편의 후광을 가장 많이 입은 사람 은 송경령이었다. 그녀가 끝내 재혼하지 않고, 손문유지의 계승자로 자처하였다 는 사실은 많은 사람들의 존경의 대상이 될 수 있었으며 그녀의 입지를 높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반면 허광평은 노신의 본부인이 아니었던 까닭에 남편의 후광을 얻을 수는 있 었지만 존경까지는 가능하지 않았던 것 같다. 오히려 노신과 결혼 이전의 활발했 던 학생운동과 교육활동, 정치 활동이 10년간 끊겼다가 노신 사후에 다시 부활하 였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하향응은 남편의 영향력도 상당하였지만, 동맹회 시절부터 오래된 혁명당원이 었으며 국민혁명시기에 정부의 각료로서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는 개인적 명성 또한 존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자녀가 없었던 위의 두 사람과는 달리 저명한 공산주의자로 발전하였던 요몽성 요승지라는 자녀를 두었다는 점 또한 그녀의 명성에 일정정도 작용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민국시기 엘리트 여성의 결혼과 사회·정치적 지위의 변화 (김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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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동맹회시절에는 독자적인 혁명 활동을 하였으나 왕정위와 결혼한 이 후에는 철저하게 현모양처의 겉모습을 띠었던 진벽군을 살펴보자. 그녀의 면면은 놀랍게도 좋은 곳에 시집을 가려고 하였던 당시 지식여성들의 모습과 일치하였 다. 일단 결혼 후에는 정치국 위원의 신분을 가졌음에도 자신의 독자적 활동보다 는 남편을 통해 야망을 달성하려 하였다. 현모양처의 봉건적인 현실과 그들이 배 웠던 근대적 지식간의 괴리로 인해 불만이 쌓여 긍정적이지 못한 면으로 작용하 였던 것이 그것이다.

송애령, 송미령의 모습이나 진벽군의 모습에서 유사성이 나타나는 것은 바로 이 까닭일 것이다.

이상으로 근대적인 지식을 접하였던 혁명시기의 여성들은 결혼 전까지 개인의 성취를 이룰 수 있었으나 결혼 이후에는 남편의 배후에서 좌절을 경험하며 남편 사후에 그의 후광을 이용해 적극적인 활동을 벌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은 경우, 남편과 정치생명을 함께 하며, 그것을 자신의 성취인양 대리만족을 하였던 것이 아닌가 싶다. 상대적으로 공산주의자였던 등영초는 주은래와 가장 평등한 부부관계를 유지하였으며 그녀의 개인적 정치 활동 또한 남편에 비해 독자적인 면모를 띤다. 그럼에도 남편의 후광을 배제하였다고는 볼 수 없다.

송경령, 하향응, 허광평, 진벽군 그리고 등영초의 개인적 성취의 차이는 남편 의 후광이라는 공통분모 속에서, "남편의 부재 유무" "자본부의와 공산주의의 사 상의 차이" 그리고 "개인의 정치적 선택"이라는 변수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 것 으로 보인다.

오 준 석 (경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