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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渠候官지역의 문서전달 노선

漢代 변경지역, 특히 漢武帝의 居延지역 군사시설 설치(B.C.102) 이후 확장된 西北 변경지역의 군사조직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居延漢簡』을 이용해 많은 연 구가 이루어졌으며, 이에 따라 그 전모가 어느 정도 밝혀진 상태라고 할 수 있 다5). 이런 연구들에 의해 漢代 張掖郡 居延都尉府 소속 甲渠候官 “甲渠河南道上 塞”의 문서전달 노선이 居延都尉府 및 居延縣을 張掖郡, 肩水都尉府는 물론 더 나아가 長安의 중앙 정부와 연결시키는 노선임이 밝혀졌고, 이 노선에서 문서전 달 을 담 당 한 亭 隧 의 배 치 상 황 도 상 세 히 알 수 있 게 되 었 다 .

3) 이 문제에 대한 최근의 대표적인 연구로는 高榮, 「漢代甲渠候官郵程考」(『史學論叢』2000-9) ; 高榮, 「漢代西北邊塞的郵驛建置」(『簡牘學硏究』3, 2002) ; 高榮, 「秦漢郵驛交通建設與後勤管 理」(『中山大學學報』(社會科學版) 2004-5) ; 王棟梁, 「從懸泉漢簡看漢代的郵驛制度」(『社科縱 橫』2007-6) ; 鷹取祐司, 「秦漢時代の文書傳達方式 - 以郵行․以縣次傳․以亭行 -」(『立命館文 學』619, 2011) 등이 있다.

4) 藤田勝久, 「中國簡牘にみえる文書傳達と交通 - 東アジア資料學の基礎として」, 『資料學の方法 を探る』10, 2011, p.41. 참조.

5) 居延都尉府 및 肩水都尉府의 문서전달노선을 복원하는 연구는 다음 연구에 의해 이루어졌다.

陳夢家, 「漢簡考述」, 『考古學報』1963-1. (『漢簡綴述』, 中華書局, 1980. 재수록) ; 永田英正,

『居延漢簡の硏究』, 同朋舍, 1989 ; 李均明, 「漢簡所見“行書”文書述略」, 『秦漢簡牘論文集』(甘 肅省文物考古硏究所 編), 甘肅人民出版社, 1989 ; 宋會群, 李振宏, 「漢代居延地區郵驛方位考」,

『河南大學學報』(社科版) 1993-1. ; 宋會群, 李振宏, 「漢代居延甲渠候官部燧考」, 『史學月刊』

1994-3. ; 吉村昌之, 「居延甲渠塞における部隧の配置について」, 『古代文化』50-7, 1998 ; 冨谷 至, 『文書行政の漢帝國』, 名古屋大學出版會, 2010.

<지도1. 居延都尉府 관할지역>

殄北候官

居延候官

甲渠候官

卅井候官

<표1. 宋會群, 李振宏 수정 甲渠候官 문서전달 노선>

(不侵部) (呑遠部) (誠北部) (臨木部)

萬年 武疆 ? 甲渠候官

[居延]

收降 當曲 不侵 呑遠 城北 武賢 臨木 卅井

執胡 木中 [卅井]

誠敖北

지금까지의 연구자들이 제시한 甲渠河南道上塞의 문서전달 노선을 통해 다음 과 같은 점은 분명해졌다고 할 수 있다. 첫째, 甲渠河南道上塞는 居延都尉府와 肩水都尉府, 張掖郡 및 더 나아가 중앙인 長安에 이르는 노선을 연결하는 중요 문서전달 노선으로 기능하고 있었으며, 북쪽으로는 居延候官 관할의 收降隧와 연 결되고, 남쪽으로는 卅井候官 관할의 卅井隧 혹은 誠敖北隧와 연결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었다. 둘째, 甲渠河南道上塞는 북쪽으로부터 남쪽에 이르기까지 不侵 部, 呑遠部, 誠北部, 臨木部의 4部가 배치되어 있었으며, 不侵部의 최북단으로 居 延候官 지역과 연결되는 지점에 위치한 當曲隧 및 이 4部의 候長이 위치하고 있 는 각 部 최남단의 不侵隧, 呑遠隧, 誠北隧, 臨木隧가 문서전달 역참으로서의 기 능을 수행하는 亭隧였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문제들은 아직까지 제대로 규명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는 문제들이다. 첫째, 위에서 언급한 5개 亭隧 외에 문서전달의 중간 驛站 으로 되어 있는 武賢, 執胡, 萬年, 武疆의 위치 및 기능에 관한 문제이다. 둘째,

漢代 문서전달 노선과 郵傳기구의 설치 (오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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不侵과 誠北 사이의 문서전달 노선이 呑遠과 執胡, 萬年으로 나뉘는 문제이다.

李均明의 견해처럼 呑遠과 執胡가 동일한 노선 상에 위치한 각각 다른 亭隧에 불과했는지, 宋會群, 李振宏의 견해처럼 노선을 달리하는 지점에 위치한 亭隧였 는지 아직 분명히 해결되지 않았다. 마지막 세 번째 문제는 宋會群, 李振宏이 居 延新簡 기록에 근거해 甲渠候官에 연결되는 문서전달 노선으로서 추정한 “不侵- 萬年-武疆”의 노선 문제이다. 이 노선은 왜 중심 노선에서 분리되었는지, 그리고 정말 甲渠候官으로 연결되는 노선이었는지 등의 문제는 아직까지 해결이 되지 않고 있는 문제이다. 아래에서는 이러한 문제들을 검토하고 甲渠河南道上塞의 문 서전달 노선을 새롭게 수정하고자 한다.

위 <표1>에 나오는 甲渠河南道上塞의 10개 亭隧 명칭 중 이들 部의 치소를 제외한 일반 亭隧는 當曲, 萬年, 武疆, 執胡, 武賢, 木中의 6개 隧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候長이 위치하고 있는 隧는 각 部의 중심이 되는 중요 亭隧였기 때문에 문서전달을 담당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나머지 6개 隧의 경우 어떤 이유로 인해 문서전달의 기능을 담당하게 된 것일까? 먼저 최남단과 최북단에 위치한 臨木部와 不侵部의 경우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不侵部의 관할구역 중 최남단에는 不侵隧가, 최북단에는 當曲隧가 설치되어 있 었다. 그리고 當曲隧의 북쪽으로는 居延候官의 관할구역이었다. 만약 甲渠河南道 上塞의 문서전달이 部가 설치되어 있던, 즉 候長이 위치하고 있던 亭隧를 통해서 만 이루어졌다면, 甲渠河南道上塞의 최북단 部인 不侵部의 문서전달 거리가 지나 치게 넓어지게 된다. 이런 이유로 인해 不侵에서는 문서를 部의 최북단 亭隧인 當曲으로 전달하고, 當曲에서 다시 居延候官 지역으로 문서를 전달하도록 했던 것이다. 또한 不侵部의 문서전달이 항상 不侵과 當曲 두 亭隧 모두를 거쳐 이루 어진 것을 보면 不侵과 當曲은 같은 문서전달 노선 상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不 侵部 지역에서의 문서전달 거리는 항상 일정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甲渠河南道上塞의 최남단인 臨木部 지역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 다. 臨木部의 경우 不侵部와 달리 部의 최북단인 武賢隧를 통해 문서가 전달될 때도 있고 그렇지 않고 臨木隧에서 직접 誠北隧로 문서를 전달할 때도 있었지만, 武賢隧를 통과하는 노선과 통과하지 않는 노선의 거리가 모두 17里로 일정하며 武賢隧는 臨木에서 誠北으로 가는 노선 상에 위치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 고 武賢이 部의 치소가 아니면서도 문서전달을 담당한 것은 當曲과 마찬가지로 部의 최북단에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한편 『居延漢簡』

101.26簡에 의해 알 수 있듯이, 臨木部에서는 臨木과 武賢隧 이외에 木中隧長을 통해 郵書가 전달된 사례가 보인다. 하지만 해당 簡文의 문서전달 기록을 보면 卅井城敖北隧長이 전달한 문서를 木中隧長이 받아 城北助隧長에게 전달하고 있 다. 즉 이 문서전달 기록에서 木中隧를 거치는 노선은 또 하나의 새로운 문서전 달 노선이 아니라 동일한 노선 상에서 臨木隧가 해야 할 문서전달 임무를 木中 隧長이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상식적으로 卅井城敖北隧長이 甲渠河南道

上塞의 최남단에 있는 臨木隧를 지나쳐 木中隧까지 가서 문서를 전달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점을 생각하면, 당시 무언가의 이유로 인해 臨木隧에 와 있던 木中 隧長이 臨木隧의 문서전달 임무를 대행했다고 생각하는 편이 훨씬 자연스러운 추정이다6). 木中隧長이 臨木隧에 있었던 이유는 잘 알 수 없지만 당시 候長 및 隧長의 유고상황이 빈번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7), 인근에 있던 木中隧長이 臨木 隧長의 유고로 인해 그 직무를 대행하고 있었고, 이 때 卅井候官지역으로부터 전 달된 문서를 전달하는 임무 또한 대행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臨木部의 경 우 臨木만을 경유하거나 혹은 臨木 및 武賢을 함께 경유하는 노선 외에 다른 노 선은 없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誠北部에 소속된 隧 가운데 문서전달을 담당한 隧로는 誠北隧와 執胡隧 가 있다. 執胡隧의 위치는 명확히 알 순 없지만 候長이 위치한 隧가 아니면서 문 서전달을 담당한 不侵部의 當曲, 臨木部의 武賢이 모두 관할 지역의 최북단 隧임 을 생각할 때, 執胡隧 또한 誠北部의 최북단 隧라고 생각할 수 있다. 執胡隧의 경우 북쪽의 不侵隧로부터 문서를 전달받아 남쪽의 誠北隧에 전달하고 있는데, 誠北部와 북쪽으로 인접하고 있는 呑遠部가 아닌, 呑遠部 북쪽에 있는 不侵部로 부터 직접 문서를 전달받은 것을 보면 執胡隧는 誠北部의 최북단에 위치했다고 보는 편이 자연스럽다.

呑遠部에는 呑遠, 次呑, 呑北, 萬年, 平虜, 逆胡의 6개 隧가 있었음을 알 수 있 으며, 이들 隧 외에 呑遠部에는 倉, 廐, 置 등의 기구가 설치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 ●呑遠倉建昭三年二月當食案 穀出入簿8) (2) ●呑遠倉建昭五年七月己丑以□...9) (3) ●呑遠廐甘露元年十月出食□...10) (4) ...□□呑遠置圍中茭腐敗, 未以食□...11)

倉의 경우 甲渠候官의 다른 部에도 적당한 거리마다 설치되어 있던 기구이지 만, 置와 廐는 呑遠部 외에 다른 지역에 설치되었다는 기록이 전혀 보이지 않으 며, 置의 경우 대규모의 종합 郵傳기구로서 기본적인 문서전달의 기능 외에도 使 臣 등 출장 관원의 접대를 담당하기도 했으며 또한 대량의 말을 사육하고 있어 변경방어의 거점이 되는 중요한 지점이 되는 기구였다12). 呑遠倉과 呑遠廐, 呑遠 6) 『懸泉漢簡』의 기록을 통해서도, 懸泉置의 문서전달 업무를 인근에 있던 臨泉亭長이 대행한 경 우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畑野吉則, 「敦煌懸泉漢簡の郵書記錄簡」, 『資料學の方法を探 る』10, 2011, p.88. 참조.)

7) 金慶浩, 「居延漢簡《元康五年詔書冊》의 內容과 文書傳達」, 『中國古中世史硏究』16, 2006, pp.55-61. 참조.

8) 『居延漢簡釋文合校』p.228, 136.48簡.

9) 『居延漢簡釋文合校』p.310, 198.3簡.

10) 『居延漢簡釋文合校』p.276, 174.17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