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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意의 강조

Dalam dokumen 中國 思想과 文化의 새로운 照明 (Halaman 38-55)

中國史學會 第77回 學術發表會: 中國 思想과 文化의 새로운 照明 32

다.

이상으로 살펴본 바와 같이 소식은 왕희지의 필법의 진수를 이었다고 여긴 인물들 을 중심으로 새로운 書統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안진경 양응식 채양 구양수 등은 당 시의 평가와는 달리 새롭게 주목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특이한 사항이라 하겠다.

蘇軾 題跋에 나타난 書藝 認識과 交遊 (이성배) 33

심료는 젊었을 때 본래 그 집안 사람인 심전사의 글씨를 배웠는데 만년에 그것 을 피하고 스스로 子敬을 배웠다고 말했으니 아마 심전사와 같음을 싫어해서일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意를 내어 새롭게 하여(出私意新之) 드디어 보통 사람과 같지 않았다.14)

소식은 심료가 出私意新之하려는 시도를 높이 평가하였다. 이러한 신의를 추구하 려는 풍조가 당시에 확산되고 있다고 판단된다. 그러면 소식은 자신의 글씨에 대 해 어떻게 보았을 까? <跋王荊公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荊公의 글씨는 無法의 法을 얻었으나 무법을 배울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내 글 씨에서 盡意함은 蔡君謨(1012-1067)와 같게 하고, 점차 得意함은 楊風子(873-954) 와 같게 하며, 更放함은 言法華(?-1048)와 같게 하였다.15)

이와 같이 소식은 자신의 글씨가 여러 서예의 장점을 얻은 兼通으로 보았다. 盡 意, 得意, 更放을 바탕으로 하는 겸통에 자신 글씨의 新意가 있음을 밝힌 것이라 고 본다.

이상으로 살펴본 바와 같이 소식은 신의를 중시하고 이를 중시한 서예와 서예가 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고 판단된다.

品書의 기준

소식은 글씨와 사람됨의 관계를 중시하였다. 이러한 의식은 글씨와 마음의 관계 를 강조한 전통적인 관점과 맥락을 같이 한다. 다음 글을 보면 서예와 서가가 어 떠한 관련이 있는지 밝히고 있다.

여전에 글씨를 논하는 자는 그의 생애를 겸하여 논하였으니 참으로 그 사람됨이 되어 있지 않다면 비록 공교하더라도 귀하지 않을 것이다.16)

그는 글씨와 사람을 분리된 관계가 아닌 밀접한 관계로 보아할 것을 강조한 것 이다. 이러한 의식은 여러 글에서 나타난다. 다음 글을 보기로 한다.

구양솔경의 글씨는 아름답고 긴밀함이 발군이며, 小楷에서 더욱 공교하다. 고려

14) 蘇軾文集69卷,論沈遼米芾書 : 沈遼少時本學其家傳師者, 晩乃諱之, 自云學子敬, 病其似傳師也, 故出私意新之, 遂不如尋常人.

15) 蘇軾文集69卷,跋王荊公書 : 荊公書得無法之法, 然不可學無法. 故僕書盡意作之似蔡君謨, 稍得意 似楊風子, 更放似言法華.

16) 蘇軾文集69卷, 書唐氏六家書後 : 褚河南書淸遠蕭散, 微雜隸體. 古之論書者, 兼論其平生, 苟非 其人, 雖工不貴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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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고구려)에서 사신을 보내 그의 글씨를 구입하는데 당 고조가 탄식하여 말하 기를 “저들이 그의 글씨를 보고서 체격이 크고 뛰어난 사람으로 여긴다.”고 하 였으니 이는 글씨를 모르는 것이다. 무릇 글씨는 그 사람됨을 닮는다.(凡書象其爲 人) 솔경의 모습은 초라하지만 영민하게 깨우침이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났으니 지금 그의 글씨를 보면 강하고 험절하며 모났으니 바로 그의 모습과 같을 뿐이 다.17)

이와 같이 소식은 글씨와 사람과의 관계가 밀접하다는 書象其人論을 언급하였다.

이에 고구려 사신은 글씨의 형상과 관련하여 말하고자 하였다면, 당 고조는 그렇 지 않음을 비웃었을 때 소식은 書象其人論의 입장에서 고조의 무지함를 지적한 것이다. 다음 <서태종황제급취장>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蘇軾은 근래에 종남산(섬서성 소재) 태평궁에 이르러 三聖(송태조, 태종, 진종)의 유적을 보았다. 태종이 쓴 急就章 1권은 묘절함이 있었다. 예로부터 英主는 글 씨에 공교하지 않은 이가 적다. 魯君이 송에 가서 垤澤의 문에서 불렀는데 성문 을 지키는 자가 “우리 임금이 아니다. 그런데 어쩌면 그 목소리가 우리임금과 닮았는가?” 하였다. 蘇軾은 글씨에서도 또한 그러하다고 말한다.18)

성문지기가 전혀 모르는 魯君에게서 군주의 기상을 느끼듯이 태종이 쓴 <급취 장>글씨에서도 군주의 기상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 소식의 지론인 것이다. 그는 이러한 품격을 갖춘 글씨를 인정하였다. 글씨에서 그 사람됨을 볼 수 있을까라는 의문에서 약간 주저한다. 다음 <題魯公帖>을 보기로 한다.

그 글씨를 보고 그 사람됨을 얻을 수 있다면(觀其書, 有以得其爲人) 군자 소인(의 사람됨)은 반드시 글씨에 나타나야 한다. 이것은 아마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모습 으로 사람을 취하는 것 또한 오히려 옳지 않거늘 하물며 글씨에서야? 내가 顔公 의 글씨를 보고서 그 풍채를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한갖 그 사람됨을 얻을 뿐만 아니라 늠름히 盧杞를 꾸짖고 希烈을 질책하는 것을 보는 것 같았는데 왜 그런가. 그 이치는 韓非子의 竊斧之說과 다름이 없다. 그러나 사람의 글자와 획 에는 工拙함 외에 대개 모두 意趣가 있어서 또한 그것으로 그 爲人의 邪正의 대 강을 본다고 한다.19)

17) 蘇軾文集69卷, 書唐氏六家書後 : 歐陽率更書姸緊拔群, 尤工于小楷, 高麗遣使購其書, 高祖歎曰:

「彼觀其書, 以爲魁梧奇偉人也.」 此非知書者. 凡書象其爲人. 率更貌寒寢, 敏悟絶人, 今觀其書, 勁險 刻勵, 正稱其貌耳.

18) 蘇軾文集69卷,書太宗皇帝急就章 : 軾近至終南太平宮, 得觀三聖遺迹, 有太宗書急就章一卷, 爲妙絶. 自古英主少有不工書. 魯君之宋, 呼于垤澤之門, 守者曰: 非吾君也. 何其聲之似我君也?

軾于書亦云.

19) 蘇軾文集69卷,題魯公帖 : 觀其書, 有以得其爲人, 則君子小人必見于書. 是殆不然. 以貌取人, 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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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씨의 工拙로 판단하는 것은 사람의 외양으로 군자소인을 판단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여겨 그 상관성에 대해 의심하고 있다. 이것은 竊斧之說과 같이 결론 적으로 판단하는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글씨에 있는 의취가 있어 그 사람됨의 邪正을 볼 수 있다 여겨서 결국은 서상기인의 논지를 일관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書象其人論의 입장에서 技藝와 道를 함께 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跋秦少游書>에서 이르기를

소유는 근일에 초서를 썼는데 東晋의 풍미가 있고, 시를 지으면 奇麗함을 더하였 다. 이에 이 사람이 부지런히 하여 드디어 百技를 겸하였게 되었음을 알 수 있 다. 기예는 진보하는데 도가 진보하지 않으면 불가한데 소유는 技와 道 두 가지 를 병진하였다.20)

라고 하여 秦少游가 技道兩進하였음을 인정하고 있다.

이상으로 살펴본 바와 같이 소식은 글씨와 사람됨의 관련을 중시한 서상기인 의 입장에서 글씨를 논하고 서예가를 논하였다. 글씨로써 사람을 논하기보다 사 람으로써 글씨를 논하려는 評書態度를 볼 수 있다.

自得과 自樂

소식은 서예란 단지 편지를 쓰고 문자를 전하고 기록을 남기거나 감상하는 단계 가 아닌 지극한 경지가 있다고 여겼다. 서예를 통해 마음을 지키는 좀 더 깊은 단계로 끌어들였고 또한 얽매이지 않고 즐기는 태도도 보여 주어서 自得과 遊戱 의 조화를 추구하였다고 본다.

먼저 <題筆陣圖>를 보면   

필묵의 흔적은 형태 있음에 의탁하니 형태가 있으면 가려지는 바가 있다. 참으 로 無에 이르지 않고서 스스로 한 때에 즐거워하고(自樂), 그 마음을 편안히 두며 (寓心), 늦은 나이에 근심을 잊는다면(忘憂) 오히려 장기나 바둑보다 나을 것이 다.21)

라고 하여 필묵을 통해 自樂, 寓心, 忘憂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보았다. 이 단

猶不可, 而況書乎? 吾觀顔公書, 未嘗不想見其風采, 非徒得其爲人而已, 凜乎若見其誚盧杞而叱希烈, 何也? 其理如韓非竊斧之說無異. 然人之字畫工拙之外, 蓋皆有趣, 亦有以見其爲人邪正之粗云.

20) 蘇軾文集69卷,跋秦少游書 : 少游近日草書, 便有東晋風味, 作詩增奇麗. 乃知此人不可使閑, 遂 兼百技矣. 技進而道不進, 則不可, 少游乃技道兩進也.

21) 蘇軾文集69卷,題筆陣圖 (王晉卿 所藏) : 筆墨之迹, 托于有形, 有形則有弊. 苟不至于無而自樂 于一時, 聊寓其心, 忘憂晩歲, 則猶賢于博奕也. 雖然, 不假外物而有守于內者, 聖賢之高致也. 惟顔子 得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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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는 自得의 단계라 할 수 있지만 도가의 無나 유가의 守內에는 미치지 못는 것 이다.

다음에 소식은 <書舟中作字>에서 외물의 변화에도 흔들리지 않는 경지를 보여 주었다.

장차 곡강에 이르려 하는데 배가 여울위에서 기울어져 지탱하는 자가 손가락이 백이라도 부족할 정도였다. 급히 배를 젓는 삿대소리와 돌에 부딪히는 소리가 매 우 시끄러웠다. 사방은 모두 거친 여울물결이라 士와 人들은 사람의 얼굴빛이 없 었다. 그러나 나의 글씨 쓰기가 조금도 쇠하지 않았으니 왜 그런가. 나는 변고 를 겪은 것이 또한 많았다. 붓을 두고 일어난들 끝내 한 가지 일도 못할 것인데 어떻게 또한 글씨 쓰는 것과 비교하겠는가.22)

이와 같이 위급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태연자약한 것은 그의 수양 정도를 보여 주는 것이다. 이러한 忘我 또는 無我의 경지는 寫經에서도 나타난다.

이 글자의 자획은 똑 고르기가 한결 같아서 고하와 경중과 대소가 없으니 어쩌 면 한결 같을까? 나를 잊은(忘我) 까닭이다. 만약에 나를 잊지 못하였다면 일획 속에서 이미 二相이 나타나는데 하물며 많은 획에서야.23)

覺이 이미 圓寂(열반)을 하자 공 또한 세상을 떠났다. 그 아들 원충이 공을 위해 친히 화엄경 80권을 썼는데 수만 자가 일점 일획도 느슨한 모습을 보이지 않 았다. 사람이 마음을 잡고서 일념으로 고요함에 專一 한다면 곧 무량의 감응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원충의 이 마음은 80권에 다하여 시종일관하였다.24)

사경할 때 고하 대소 없이 한결같고, 수 만자가 일점일획도 느슨하지 않기 위해 서는 忘我와 一念專靜의 경지가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경지는 서예에서 도달할 수 있는 자득의 단계에 이른 것이라 하겠다.

서예에서 수양적 측면을 요구하는 自得의 단계와는 달리 서예를 즐기는 戱書 또 는 自樂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의 <戱書赫蹄紙>를 보면

이 종이는 鑱錢(돈 모양을 그림)하여 귀신제사 지내는데 사용할 만하다. 동파가

22) 蘇軾文集69卷,書舟中作字 : 將至曲江, 船上灘欹側, 撑者百指, 篙聲石聲犖然, 四顧皆濤瀨, 士無 人色, 而吾作字不少衰, 何也? 吾更變亦多矣. 置筆而起, 終不能一事, 孰與且作字乎?

23) 蘇軾文集69卷,書若逵所書經後 : 此字畫, 平等若一, 無有高下, 輕重大小. 云何能一? 以忘我故.

若不忘我, 一畫之中, 已現二相, 而況多畫?

24) 蘇軾文集69卷,書若逵所書經後 : 覺旣圓寂, 公亦棄世. 其子元忠, 爲公親書華嚴經八十卷, 累 萬字, 無有一點一畫, 見怠惰相. 人能攝心, 一念專靜, 便有無量感應. 而元忠此心盡八十卷, 終始若 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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