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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자의 사료화

Dalam dokumen 中國 思想과 文化의 새로운 照明 (Halaman 59-63)

30) 顧頡剛, 「自序」, 『古史辨』, 第1冊, pp.44-45.

31) 이야기하는 시간과 이야기되는 시간에 관하여는 폴 리쾨르 지음, 김한식·이경래 옮김, 『시간과 이야기』 2, 서울, 문학과 지성사, 2005년, pp.128-167 참고.

32) 顧頡剛, 「自序」, 『古史辨』, 第1冊, p.52.

33) 顧頡剛, 「自序」, 『古史辨』, 第1冊, p.52.

34) 顧詰剛, 「中學校本國史敎科書編纂法的商榷」, 『敎育雜誌』 第14卷第4號(1922), p.11.

35) 顧頡剛, 「我是怎樣編寫『古史辨』的?(下)」, p.390. 고힐강은 당시 30을 갓 넘긴 나이로 막 역 사학계에 데뷔한 상황이었다. 훗날 그는 자신도 이렇게 거대한 ‘戰果’를 거두리라고는 생각지 못 했다고 회고하였다.

36) 논쟁의 구체적인 전개 양상은 劉起釪, 『顧頡剛先生學述』, 北京, 中華書局, 1986年, pp.102-112 참고.

37) 고사변운동의 학술적 성과는 1926년에서 1941년 사이에 모두 350편의 글을 모아 『顧史辨』

총 7권으로 출간되었다. 각 권의 요지와 출판 경위는 顧頡剛, 「我是怎樣編寫『古史辨』的?(

下)」, pp.392-398 참고.

38) 顧頡剛, 「自序」, 『古史辨』, 第1冊, p.81.

39) 顧頡剛, 「自述整理中國歷史意見書」, 『古史辨』, 第1冊 上編, p.81.

中國史學會 第77回 學術發表會: 中國 思想과 文化의 새로운 照明 54

강유위에서 고힐강으로 이어지는 의고사학은 수 천년동안 계승된 상고사 전통 을 일거에 전복시켰다. 최대 화근은 직접적인 사료의 부재와 결함이었다. 신 사 학의 태두 양계초의 말대로, “사료는 역사의 조직세포이다. 사료가 구비되지 않 거나 부정확하면 곧 역사의 복원은 언급할 수 없다.”40) 모름지기 대안적 상고사 의 재정립은 무엇보다도 새로운 사료의 발굴여부에 그 성패가 달려 있었다. 청말 부터 신 사료로 문자/한자가 떠오르고 민국시기에는 그 사료화가 완성단계에 진 입한다. 이제 문자/한자가 말을 전달하는 2차적 가치를 넘어 그 자체가 사료화되 는 새 지평이 열린 것이다.

문자/한자가 얼마나 신빙성 있는 사료로 유용할까. 흔히 “언어문자는 현재까지 여전히 살아있는 고대유물”41)로 간주된다. 특히 문자의 발명으로 인류는 미개사 회에서 문명사회로 건너갈 수 있었다.42) “문명을 열어준 문자는 자기의 등 뒤에 장구한 미개의 세계를 짊어지고 있다. 상형문자인 한자는, 이른바 문명 이전의 오랜 집적 위에 성립한 문자이다. 구전으로나 기록상으로도 나중에는 사라져버린 먼 과거의 세계가 한자에 잔영을 드리우고 있다. 그것은 화석처럼 스스로 말을 하지 않지만, 우리는 고대 문자의 배경에 존재하는 고대를 발굴할 수 있다. 마찬 가지로 고대 문자의 성립기반이 되는 그 사회의 실태를 확인할 수도 있다”43) 한 자는 곧 “중국 문화의 原點”으로 들어가는 “역사의 통로”44)가 되는 셈이다. 신해 혁명시기 ‘史界革命’의 주역이었던 유사배와 양계초는 문자/한자의 이러한 역사/

문화적 특성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유와 양에 의해서 고문자45)/한자는 사료화라 는 새로운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20세기 문턱에서 장병린과 함께 경고문학계의 쌍벽이었던 유사배는 강유위의 의고사학에 맞섰다.46) 유는 특히 강이 『공자개제고』의 첫째 권에서 제시한 “上 古茫昧無稽論”을 결코 용납할 수가 없었다. 상고사 연구에 고문자/한자가 분명히 믿을 만한 사료가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유의 주장을 경청해 보자.

미래를 살피는 일은 맨 먼저 간직된 과거에 의지하는 것이다. 지나온 궤적을 살피지 않고 어찌 다가올 길을 알겠는가.……정치·풍속의 변화와 禮制의 가감은 하·은 이전에는 기록이 결여되어 틈이 있으니 그 숨은 바를 천명하고자 하면 오직 문자에 의지할 뿐이다.47)

40) 梁啓超, 『中國歷史硏究法』, 上海, 商務印書館, 民國17年 p.66.

41) J. D. Bernal(貝爾納) 著, 吳况浦 等譯, 『歷史上的科學』, 北京, 科學出版社, 1983年, p.39.

42) 모오건 지음, 최달곤·정동호 옮김, 『고대사회』, 서울, 현암사, 1979년, pp.27-28, p.46 참고.

43) 白川 靜, 『漢字の世界Ⅰ-中國文化の原點』, 東京, 平凡社, 1982年, pp.51-52.

44) 白川 靜, 『漢字の世界Ⅰ-中國文化の原點』, pp.9-10, p.41 참고.

45) 고문자는 대략 예서가 성숙되기 이전의 한자를 통칭한다. 범위는 주로 상대 갑골문, 주대 청동 기명문, 전국시대 문자를 포괄한다. 裘錫圭, 『文史叢稿-上古思想, 民俗與古文字學史』, 上解, 上 海遠東出版社, 1996年, p.139; 高明, 『中國古文字學通論』, 北京, 北京大學出版社, 1996年, p.1 참 고.

46) 「論孔子無改制之事」

47) 劉師培, 「字詮自序」, 『左盦集』 卷4, 戊辰3月北京隆福寺修綆堂藏板本, 第2冊, p.17b.

三代靑銅器를 통해 본 商金文의 서예사적 가치 (김수천) 55

유사배에게 고문자/한자는 하·상대 이전 “중국 문화의 원점”으로 직접 들어갈 수 있는 “역사의 통로”였다. 유는 경고문학의 기초인 소학에 정통했었다. 그는

“중국의 형성 각 글자는 그 편방을 관찰하면 고대 사회[人羣]의 상황을 알 수 있 다.”48)라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유가 내린 결론의 타당성은 아이로니컬하게도 강 유위의 수제자였던 양계초가 입증해 주었다.

요사이 역사의 초안을 잡고 있어서 先民의 생활 정도와 진화의 단계를 명상하고 그들의 사상 변화의 자취를 고구해서 이 사상을 표현하는 언어문자를 반복해 조사하니 손톱자국 처럼 찾아낼 수 있는 것들이 있어서 전율하였다.49)

“언어문자” 가운데 특히 양계초를 지적으로 전율시킨 주역은 바로 ‘會意字’였 다. 훗날 양은 『說文解字』에 “회의자가 이미 이렇게 많으니 우리가 사회학적 시각으로 연구하면 선사시대의 상황을 적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문자학 상의 대사업이다.”50)라고 굳게 믿었다. 그는 확신에 차서 후학들에게 이 방면의 연구에 적극적으로 뛰어들 것을 강력히 촉구하였다.

요컨대, 청말 유사배와 양계초의 상고사관에서 고문자/한자가 새로운 사료로 부각되는 현상이 뚜렷하다. 민국시기에 들어서면 고문자/한자의 사료화는 더욱 가파른 상승곡선을 타게 된다.

신해혁명전후에 갑골문의 연구와 발굴이 본격화되면서 고문자/한자의 사료화는 급진전되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라진옥과 왕국유는 민국초기 갑골문연구를 선도하였다. 1910년 라진옥이 처음으로 갑골문이 현존하는 은/상대의 직접적인 사료라는 사실을 밝혔다. 라는 갑골의 출토지가 殷墟[하남성 안양 소둔촌]라는 것을 확인51)하고 난 뒤 다시 이렇게 논단하고 있다.

또한 (갑골에) 새겨진 글 안에서 은 제왕의 이름과 시호 10여개를 얻고 이에 홀연히 卜 辭란 것은 실로 은 왕조의 유물임을 깨달았다. 그 문자가 비록 간략하나 史家의 과실을 바로 잡고 소학의 원류를 고찰하며 고대의 卜法을 탐구할 수 있다.52)

48) 劉光漢, 「古政原始論·古政原始總敍」, 『國粹學報』 第1年第4號, 「政篇」,p.1a. 장병린은 유 의 견해와 성과를 극찬하였다. 「章太炎與劉申叔書」, 『國粹學報』 第1年第1號, 「撰錄」,p.5b 참조.

49) 梁啓超, 「國文語原解」, pp.31-32.

50)

51) 羅振玉, 「殷虛古器物圖錄序」, 『羅振玉校刊群書敍錄』 卷上, 揚州, 江蘇廣陵古籍刻印社據民國 刊本影印出版, 1998年, p.9a 참조.

52) 羅振玉, 「『殷商貞卜文字考』序」, 蕭文立 編校, 『雪堂類稿』, 「乙之1 圖籍序跋」, 「甲骨 學」, 沈陽, 遼寧敎育出版社, 2003年, p.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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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에 왕국유도 라진옥의 탁견에 적극적으로 동의하고 나섰다.

書契文字가 洹水의 남쪽에서 출토되었다. 그 지역은 엣 날의 은허이고, 그 문자 안에서 은 대 先公·先王의 명칭이 많이 보이니 그것이 은대 사람의 문자임은 믿을만한 증거가 있 다.53)

은/상왕조가 신화전설의 시대에서 역사 세계로 첫발을 내딛는 순간이다. 결정 적인 계기는 역시 갑골문이라는 새로운 사료의 발굴과 연구에서 마련되었다. 라 진옥은 갑골복사가 은대 국사의 일부분으로 『상서』와 『춘추』에 비견될 정도 로 귀중하다는 평가를 내렸다.54) 왕국유도 갑골문은 “비록 상형의 글자이지만 아 마 위로는 하대로도 이어진다.”55)라고 언급하였다.

라진옥과 왕국유는 갑골의 출토 지점과 복사의 왕명 해석을 교차시켜 은/상대 의 사료로 확정하였다. 일반적으로 고대 사료에서 국호, 왕명, 관명, 지명, 족호, 인명 등과 같은 고유명사는 고착성이 아주 강한 속성을 지니고 있다. 그것들은

‘지상의 고고유물’로 통하며, 학술적 가치도 ‘지하의 고고학적 자료’와 등가를 이 룬다. 라와 왕은 이점에 착안하여 복사속의 왕명 판독으로 갑골문의 단대설정에 성공한 것이다. 실로 1899년 갑골문이 처음 발견된 지 겨우 10여년 만에 올린 놀 라운 개가였다.

흥미롭게도, 중국의 갑골문 해독과 비슷한 에피소드가 19세기 초반 서구의 고 대사학계에서도 보인다. 당시 프랑스의 장 샹폴리옹(J. Champollion)은 이집트 로 제타(Rosetta) 석비의 해석에 열중해 있었다. 샹폴리옹도 결국 비문에서 파라오 명칭과 클레오파트라는 고유명사를 판독하여 고대 이집트의 문명 세계로 직행할 수 있는 길을 찾아냈다.56) 그는 현재 이집트학의 비조로 추앙받고 있다. 동서양 을 막론하고 고문자는 고대 문명의 비밀을 풀 수 있는 열쇠가 되었던 것이다.

1910년대부터 라진옥는 왕국유의 도움에 힘입어 복사 자료의 편찬과 해독에 매진하였다.57) 라는 『殷商貞卜文字考』(1910), 『殷墟書契』(1911), 『殷墟書契考 釋』(1914), 『殷墟書契後編』(1916), 『殷墟書契續編』(1933) 등 일련의 저작을 53) 王國維 代撰, 「『殷文存』序」, 『雪堂類稿』 「乙之1 圖籍序跋」, 「古文字學」, p.110. 이 서 문은 왕국유가 나진옥을 대신해 지은 글이다. 羅繼祖 撰, 蕭文立 編校, 『雪堂類稿』, 「附: 永豊 鄕人行年錄」 卷中, 沈陽, 遼寧敎育出版社, p.65; 袁英光 等著, 『王國維年譜長編』, 天津, 天津人 民出版社, 1996年, p.210 참조.

54) 羅振玉, 「『殷虛書契前編』序」, 『雪堂類稿』, 「乙之1 圖籍序跋」, 「甲骨學」, p.57.

55) 王國維, 「『殷文存』序」, p.110.

56) 劉朝陽, 「十九世紀後半期之西洋史學」, 『國立第一中山大學語言歷史學硏究所週刊』 第1集第6 期(1927), p.132; .레슬리 앳킨스·로이 앳킨스 지음, 배현철 옮김, 『문자를 향한 열정』, 서울, 민 음사, 2012년, pp.222-232, pp.237-245 참고.

57) 라·왕의 갑골문을 둘러싼 학술적 관계는 羅振玉 遺著, 「雪堂自傳(四)」, 『古今』 第4期(1942), pp.39-40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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