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식은 흔히 書聖으로 불렸던 왕희지와 그의 글씨를 주목하였다. 그러나 당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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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왕희지의 진적을 보기 어려웠다. 이에 대해 다음 글을 보기로 한다.
<난정>․<악의>․<동방선생> 삼첩은 모두 묘절하다. 비록 모사한 것으로 여러 번 전하였으나 여전히 옛사람이 용필한 意趣가 남아있다. 유교경에 비교하면 차이가 있 다.2)
소식이 주목했던 왕희지 三帖들은 당시에 模寫본으로 전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모 사본 <난정>․<악의>․<동방선생> 삼첩은 순화각첩에 왕희지 글씨로 수록된 <유교 경>과는 차이가 있었다. 소식은 삼첩의 용필 의취를 올바른 것으로 보았고, 이와는 다 른 <유교경>에 대해 위작 가능성을 지적하고 있다. 그는 삼첩이야말로 왕희지의 온전 한 용필을 전하고 있다고 여긴 것으로 보인다.
그는 왕희지의 삼첩의 의취를 올바로 이은 후인으로 안진경을 꼽았다. 안진경을 잘 이해한 황정견은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안노공 글씨는 비록 자성일가하였지만 곡절히 그 필의를 따져보면 모두 右軍 부자의 필 법에 부합된다.
황정견은 또 다른 곳에서
안노공의 글씨를 보면 구양순, 우세남, 저수량, 설직이 우군의 깊은 경지에 이르지 못하 였음을 안다.
라고 하여 왕희지 필법의 의발을 제대로 전수 받은 이가 안진경임을 말하고 있 다. 왕희지 필법을 전수한 안진경은 왕희지를 벗어나 스스로 일가를 이루었다.
소식은 그 경지에 대해 표현하기를,
일찍이 평하기를 안노공 글씨와 두자미 시의 경지가 유사하여 한 번 출현한 이후로 이 전 사람의 詩書가 모두 폐하였다.3)
라고 하여 두보와 유사한 경지의 성취를 이룬 것으로 평하였다. 소식은 안진경의 어떤 점을 주목한 것인가? 다음 글에서 그 단서를 찾아 볼 수 있다.
어제 장안의 安師文이 소장하던 안노공이 정양군왕에게 보낸 초서 편지 몇 장을 내 놓았는데 안노공의 다른 편지에 비하여 더욱 기이하고 독특하였다. 참으로 자연스러워 서 움직임에 자태가 있으니 이에 瓦로 따르는 것이 황금으로 따르는 것 보다 나음을 알 수 있으니 비록 공이라도 오히려 면하지 못할 것이다.4)
2) 蘇軾文集69卷,題逸少書三首 : 蘭亭․樂毅․東方先生三帖皆妙絶. 雖摹寫屢傳, 猶有昔人用筆意 思. 比之遺敎經則有間矣.
3)『蘇軾文集69卷,記潘延之評予書 : 嘗評魯公書與杜子美詩相似, 一出之後, 前人皆廢.
4)『蘇軾文集69卷, 題顔魯公書草 : 昨日長安安師文, 出所藏顔魯公與定襄郡王書草數紙, 比公他書,
蘇軾 題跋에 나타난 書藝 認識과 交遊 (이성배) 31
그는 안진경 초서는 기이하지만 마치 질그릇으로 물을 따르듯이 편안하고 자연 스러움을 특징으로 한다고 여겼다. 안진경의 필법은 후인이 제대로 계승하지 못 하다가 오대 양응식에 이른다. 이에 대해 다음 글을 보기로 한다.
안진경 유공권이 죽고서 필법이 쇠퇴하고 끊겼으며, 당말에 혼란이 가중되어 인물이 다 하고 소멸했으며 오대에는 풍류문풍이 땅을 쓸 정도로 소진되었다. 오직 양응식의 필적만 이 웅걸스러워 이왕과 안진경․유공권의 유풍이 있었다. 이는 참으로 글씨의 호걸이라 할 수 있으며 시세에 매몰되지 않았다 하겠다.5)
오대에는 양응식만이 안진경의 뒤를 이은 인물로 여겨졌다.
소식은 송대에서 주목되는 인물로 채양을 꼽았다. 채양은 이미 구양수도 거론할 정도였다.
歐陽文忠公이 글씨를 논하며 이르기를 “蔡君謨는 당세에 독보적이다”라고 하니 이는 지론이다. 6)
소식은 채양이 당세에 독보적이라는 구양수의 지론7)을 굳건히 수용하고 있었다. 그 러나 당시에는 소식의 견해에 도두 동조한 것만은 아니어서 불평하기도 한다.
나는 글씨를 논할 적에 君謨를 당세 제일로 여기는데 대부분이 그렇지 않다고 여긴다.
그렇지만 나는 끝까지 이 설을 고수하겠다.8)
소식은 불편한 마음을 토로했지만 끝까지 자신의 견해를 굽히지 않았다. 소식이 또 주목한 사람은 구양수였다.
이 수십 장은 모두 문충공이 입에서 나오는 대로 손을 방종하게 움직여서 이룬 것이지 처음부터 의도한 것은 아니다. 그 문채와 자획은 모두 자연스럽고 뛰어난 자태가 있으니 진실로 천하의 기이한 묵적이다.9)
구양문충공은 뽀족한 붓과 乾墨(먹물을 적게 사용함)을 사용하여 모나게 만들고 글자 를 넉넉하게 썼으며, 신채가 뛰어나고, 윤택함이 무궁하여 후인이 그것을 보면 마치 맑은 눈동자에 살진 뺨을 갖고 환하게 뛰어 다니는 듯하다.10)
소식은 구양수로부터 학문적인 영향이 컸으며 또한 서예관에 대해서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인지 구양수 글씨를 傳神의 경지로 평가하는 등 평가가 남달랐다고 본
尤爲奇特. 信乎自然, 動有姿態, 乃知瓦注賢于黃金, 雖公猶未免也
5) 蘇軾文集69卷,評楊氏所藏歐蔡書 : 自顔․柳氏沒, 筆法衰絶, 加以唐末喪亂, 人物雕落磨滅, 五代文 采風流, 掃地盡矣. 獨楊公凝式筆迹雄傑, 有二王․顔․柳之餘, 此眞可謂書之豪杰, 不爲時世所汨沒者.
6)『蘇軾文集69卷,論君謨書 : 歐陽文忠公論書云:蔡君謨獨步當世. 此爲至論.
7) 歐陽文忠公集卷131,試筆.
8) 蘇軾文集69卷,跋君謨書 : 僕論書以君謨爲當世第一, 多以爲不然, 然僕終守此說也.
9)『蘇軾文集69卷,跋劉景文歐陽帖 : 此數十紙皆文忠公衝口而出, 縱手而成, 初不可意者也. 其文采字 畫, 皆有自然絶人之姿, 信天下之奇迹也.
10)『蘇軾文集69卷,跋歐陽文忠公書 : 歐陽文忠用尖筆乾墨, 作方闊字, 神采秀發, 膏潤無窮, 後人觀 之, 如見其淸眸豊頰, 進趨曄如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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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이상으로 살펴본 바와 같이 소식은 왕희지의 필법의 진수를 이었다고 여긴 인물들 을 중심으로 새로운 書統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안진경 양응식 채양 구양수 등은 당 시의 평가와는 달리 새롭게 주목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특이한 사항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