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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유물론의 보급

Dalam dokumen 中國 思想과 文化의 새로운 照明 (Halaman 68-79)

1925년경에 왕국유는 “중국 근래의 상황을 관찰해 보면, 아마도 공화(혁명)에 서 시작해서 공산(혁명)으로 끝날 것이다.”95)라고 예단하였다. 이에 앞서 1919년 에 왕은 이미 “요사이 세상 형편이 다시 급변하였으니 학술의 필연적 변화는 대 개 언급할 필요조차 없다.”96)라고 확언했었다. 역사학 분야는 어떠할까? 중국 최 초의 마르크스주의자 李大釗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역사는 그 자체의 흐름과 발 전에 따라 반드시 쉼 없이 보완되고, 끊임없이 새로 쓰여 져야만 한다.”97) 근대 중국에서 역사와 혁명은 결코 별개가 아니었다.98) 신해혁명은 물론 공산혁명도 역사기억의 새로운 전유를 요구하였다. 혁명이 조성한 기대지평의 시대적 전환에 따라 그에 걸 맞는 경험공간도 재구성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민국시기에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들은 사적 유물론으로 이자전사를 무장시킨 다음에 다시 강화된 이자전사를 사적 유물론의 보급에 활용한다. 이자전사와 유 92) 王宜昌, 「古文字中所見中國古代部族」, 『理想與文化』 第7期(1944), pp.28-33.

93) 馬敍倫, 「從中國文字上看社會和邦國家族的意義」, 『大學』 第6卷第1期(1947), pp.2-4; 「從文 字上看官吏的由來」, 같은 책 第6卷第3-4期合刊(1947), pp.41-44.

94) 대표적인 사례로, 1938년 이종동은 이자전사법으로 姓氏의 字源을 규명하고, 나아가 고대의 “성 은 토템과 다르지 않다.”라고 결론지었다. 李玄伯, 「希臘羅馬古代社會硏究序」, 『中國古代社會 新硏』, 上海, 上海文藝出版社, 1988年據1949年開明書店版影印, pp.33-41; 許倬雲, 「序言」, 李宗 侗, 『中國古代社會新硏·歷史的剖面』, 北京, 中華書局, 2010年, pp.1-2 참고.

95) 羅振玉, 「『王忠慤公遺書』序」, 『雪堂類稿』, 「乙之1 圖籍序跋」, 「編輯校刊」, p.258.

96) 왕국유, 「심을암선생칠십수서」, 『관당집림』 권제23, 「철림」 1.

97) 李大釗,「史學要論」, 中國李大釗硏究會編注, 같은 책4, p.384. 이는 같은 견해를 여러 글과 강 연에서 반복해 피력하고 있다. 「史觀」; 「硏究歷史的任務」; 「《淸代通史》序」;

98) 중국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기원에 관한 아리프 딜릭의 명저는 표제를 아예 “Revolution and History”로 붙였다. Arif Dirlik, Revolution and History: The Origins of Marxist Historiography in China, 1919-1937, (Berkeley and Los Angeles: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89).

三代靑銅器를 통해 본 商金文의 서예사적 가치 (김수천) 63

물사관의 첫 만남은 오사운동시기 이대조의 붓끝에서 성사된다.99)

이대조는 1918년경부터 마르크스주의를 중국의 현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구세의 메시지로 받아들였다. 1920년에 이는 재직하고 있던 북경대학에서 ‘마르 크스학설연구회’를 조직하였다. 이듬해에 그는 陳獨秀와 함께 중국공산당을 결성 하여 사회주의 혁명의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 당시 그는 수년간 북경대 사학과에

‘유물사관’ 강좌를 개설하여 사적 유물론의 보급에 힘썼다. 강의에서 그가 낯 설 은 유물사관을 청년 지식인들에게 전파하는 일은 녹록치 않았을 것이다. 그는 묘 안으로 그들에게 이미 익숙한 중국 상고사를 활용하는 전략을 세웠다. 상고사의 구체적인 지식은 고문자를 통해 고대사를 들여다보는 이자전사법으로 마련하였 다. 심지어 신해혁명시기 유사배와 양계초의 같은 분야 성과를 대폭 원용하는 것 도 서슴지 않았다.100) 이의 이러한 지적 활동은 강의안으로 남긴 「原人社會于文 字書契上之唯物的反映」(1920)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 글의 구성은 양괄식이다.

표제에 주목하면서 서언과 결론을 조응시키면, 이자전사와 유물사관의 관계가 드 러난다. 먼저 서언부터 보기로 하자.

원시사회의 경제상황은 항상 원시사회의 文字書契에다가 분명하고 두드러지게 반영해 놓 았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고대의 사회상황을 연구하자면 매번 문자의 파생과 변화의 자취로부터 확실한 증거를 확보할 수 있다.101)

마르크스주의 언어관에 의하면, 중국의 고대 “상형문자는 실재의 자의적으로 조작된 표상이 아니라 실재의 발현이었다.”102) 사적 유물론의 세례를 받은 이대 조도 초기 한자의 상형성에서 유물적 특징을 포착하였다. 그의 「原人社會于文字 書契上之唯物的反映」이라는 제목은 ‘원시사회가 문자서계에 유물적으로 반영되 어 있다’는 사실을 압축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는 거꾸로 문자서계를 통하여 원 시사회의 모습을 복원할 수도 있게 된다. 실제로 그는 본론에서 이자전사법을 능 숙하게 구사하여 상고시대의 경제상태, 사회상황 그리고 문화양상을 재조명하였 다.103) 이어서 그는 결론을 이렇게 내리고 있다.

99) 이의 이자전사와 유물사관 전파에 관한 논의는 주로 졸저, 「李大釗의 사적 유물론 보급과 淸 末의 학술 전통」, 『湖西史學』 第37輯, pp.249-290에 근거한다. 해당 내용에 한하여 일일이 주 를 달지 않는다.

100) 1914년에 라진옥과 왕국유가 공저한 『流沙墜簡』도 인용되어 있다. 李大釗, 「原人社會于文 字書契上之唯物的反映」, 『守常文集』 卷上, 廣州, 北新書局, 1949年, p.31 참고.

101) 李大釗, 「原人社會于文字書契上之唯物的反映」, p.23.

102) 베네딕트 앤더슨 지음, 윤형숙 옮김, 『상상의 공동체』, 서울, 나남출판, 2002년, p.35. 앤더슨 의 역사 유물론적 성향은 닐 데이비슨 지음, 정종수 옮김, 「민족주의의 기원과 전파- 베네딕트 앤더슨 《상상의 공동체》 비평」, 『마르크스 21』 제7호, 「현대 진보사상의 조류」, pp.279-287 참고.

103) 구체적으로 소개하면 추상관념의 기원, 문자의 생성, 화폐의 출현과 종류, 필기구의 발전, 모 계제, 성씨와 토템제도․ 여권의 몰락 그리고 혼인제의 변화 등을 화제로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특히 화폐의 출현과 종류에 관한 내용은 전체 지면의 30%를 차지할 정도로 비중 있게 다루었

中國史學會 第77回 學術發表會: 中國 思想과 文化의 새로운 照明 64

이상으로 논증한 바가 비록 엉성하여 체계는 없지만, 분명 문자언어상으로부터도 고대 사 회생활의 遺迹을 고찰할 수 있고, 아울러 그 시대 사회생활의 배경이 실로 당대 사회의 경제상황에 있었던 것도 고찰할 수 있다는 점을 증명하기에는 충분하다.104)

유물사관에 관한 대목은 맺음말의 말미에 등장한다. 그것은 바로 “그 시대 사 회생활의 배경이 실로 당대 사회의 경제상황에 있었다.”라는 이른바 ‘토대와 상부 구조론’이.105) 요컨대, 「原人社會于文字書契上之唯物的反映」은 이대조가 유물사 관의 핵심원리를 중국 상고사연구에 도입하고자 시도한 최초의 논문이다.

이대조의 뒤를 이어서 본격적으로 이자전사란 배를 타고 유물사관을 나침판삼 아 중국고대사회로 나아가는 새로운 항로를 개척한 역사학자는 곽말약이다. 곽은 제1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진 1924년 봄에 河上肇의 『社會組織與社會革命』을 완 역하면서 “마르크스주의의 철저한 신도”106)로 거듭났다. 마르크스주의로 무장한 곽은 “문예운동의 진영”에서 “혁명운동의 戰線”으로 뛰어들었다.107) 사적 유물론 은 그 후 곽의 모든 역사인식에 길잡이가 된다. 1927년에 국공합작이 결렬되고 장개석이 백색테러를 자행하자 바로 다음해 곽은 일본으로 도피하였다.108)

1928년부터 망명지 일본에서 곽말약은 사적 유물론에 기초한 이자전사법으로 중국고대사와 갑골문을 새롭게 해석하기 시작하였다.109) 곽은 겨우 2년 만에 두 전공에서 모두 혁혁한 성과를 거두었다. 고대사분야는 『中國古代社會硏究』

(1930)라는 걸작을 선보였다.110) 갑골학영역도 『甲骨文字硏究』(1931)와 『卜辭 通纂』(1933)이라는 2권의 명저를 연이어 내놓았다. 특히 『중국고대사회연구』

와 『갑골문자연구』는 거의 동시에 저술된 자매편이다.111) 후자는 전자의 사료

다.

104) 李大釗, 「原人社會于文字書契上之唯物的反映」, p.36.

105) 토대와 상부구조론은 칼 맑스 지음, 최인호 옮김, 「정치 경제학의 비판을 위하여」, 『칼 맑 스/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제2권, 서울, 박종철출판사, 1997년, pp.477-478 참고.

106) 郭沫若, 「孤鴻」, 『創造月刊』 第1卷第2期(1926), p.129.

107) 郭沫若, 「《社會組織與社會革命》序」, 上海圖書館文獻資料室·四川大學郭沫若硏究室 合編,

『郭沫若集外序跋集』, p.235. 그 후 곽은 1925년 5·30운동이 발발하자 반제선언문을 발표하고, 이듬해 몸소 北伐전쟁에도 참가하였다. 일본 망명 후에는 마르크스·엥겔스의 『政治經濟學批 判』과 『德意志意識形態』를 차례로 번역하여 마르크스주의 보급에 힘썼다. 郭沫若, 「四川旅滬 學界同志會五三十案宣言」, 『晨報副刊』 第1224期(1925), pp.6-8; 郭沫若, 「五十年簡譜」, 『抗 戰文藝』 第7卷第6期(1942), p.391 참고.

108) 1927년 5월경에 장개석은 곽말약에 대해 긴급 체포령을 내렸다. 「通緝郭沫若案」, 『廣東行 政周刊』 第22期(1927), 「軍事」, pp.18-20 참고.

109) 이욱연은 “갑골문과 중국 고대사에 관한 곽의 연구를 저변에서부터 추동한 것은 중화문화의 저력에 대한 자부심이었다.”라고 지적하였다. 이욱연, 『곽말약과 중국의 근대』, 서울, 소나무, 2009, pp.48-49.

110) 1928년에 곽은 이미 『중국고대사회연구』의 출판 계획을 끝냈다. 처음 서명은 『殷虛書契中 的古代社會』였다. 杜頑庶, 「中國社會的歷史的發展階段」, 『思想月刊』 第4期(1928), p.8 참조.

두완서는 곽의 필명이다. 곽은 이 논문을 수정하여 『중국고대사회연구』의 「導論」으로 삼았 다.

111) 먼저 출간된 『중국고대사회연구』에 이미 『갑골문자연구』의 가제목이 보인다. 곽은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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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음집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곽말약의 논저 가운데 가장 주목받은 화제작은 단연 『중국고대사회연구』이 다. 이 책의 구성은 「自序」와 「解題」 외에, 「導論」과 본문에서 이미 발표 한 논문 3편과 미간 원고 2편, 총 5편112)을 결집하여 편집되었다. 서문과 본문의 내용을 전체적으로 종합해 볼 때, 연구방법은 청말 孫飴讓113)에서 유사배를 거쳐 라진옥·왕국유로 이어지는 이자전사 전통의 으뜸줄기를 이어받았다. 특히 라·왕 의 성과를 고대사 연구의 출발점으로 삼았다.114)

곽의 언어관에 의하면, “은대 문자는 아직도 창조되는 과정 중에 있었다. 그 상형글자가 본뜬 사물은 분명히 당시에 실재했던 것들이다.”115) 만약 갑골문이 상대의 실물과 실상에 근거해 만들어 졌다면, 당연히 반대로 갑골문을 통해 그 시대의 실물과 실상을 복원해 낼 수도 있다. 곽은 실지로 갑골복사를 다각도로 분석해 상대의 실물과 실상을 재구성하였다. 『중국고대사회연구』의 「第三篇 卜辭中之古代社會」에는 전형적인 사례가 아주 많다. ‘漁獵’과 ‘牧畜’에 관한 내용 을 하나만 보기로 하자.

고대사회연구』 초판 「導論」의 “請參看拙著 『甲骨文釋』解釋辰字下”란 구절을 1954년판 증정 본에서 “參看『甲骨文字硏究』「釋支干篇」辰字下”로 고쳤다. 또 「해제」에도 같은 사례가 보 인다. 『甲骨文釋』은 바로 『갑골문자연구』의 가제이다. 郭沫若, 『中國古代社會硏究』, 上海, 聯合書店, 1930年, p.2, p.8; 郭沫若, 『中國古代社會硏究』, 香港, 三聯書店, 1978年, p.1; p.8; 郭沫 若, 「重印弁言」, 『甲骨文字硏究』, 郭沫若全集著作編輯出版委員會 編, 『郭沫若全集: 考古編』

第1卷, 北京, 科學出版社, 1982年, p.7 참고.

112) 발표된 논문은 「中國社會的歷史的發展階段」(1928), 「周易的時代背景與精神生産」(1928),

「詩書時代的社會變革與其思想上的反映」(1929) 3편이다. 이 글들은 책에 수록할 때 모두 제목과 내용에 수정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미간 원고는 「卜辭中的古代社會」와 「周代彛銘中的社 會史觀」 2편이다. 재판부터는 부록으로 「追論及補遺」가 추가되었다.

113) 1933년 곽말약은 갑골학이 손이양에서 창안되어 왕국유로 계승되었다고 호평하였다. 이듬해에 고문자학자 唐蘭도 손이양의 이자전사 성과는 “(그것들을) 합치면 사회의 진화를 증명할 수 있 고, 나누면 한 글자의 역사를 고찰할 수 있다.”라고 높게 평가하였다. 郭沫若, 「述例」, 『卜辭 通纂』, 北京, 科學出版社, 1983年, p.3; 樓學禮, 「<<契文擧禮>>校點記」, 孫飴讓 遺著, 樓學禮 校點, 『契文擧禮』, 山東, 齊魯書社, 1993年, p.4; 唐蘭, 「序」, 孫海波, 『甲骨文編』, 臺北, 藝文 印書館, 民國52年, p.6a 참고.

114) 郭沫若, 「自序」, 『中國古代社會硏究』(1930), p.4.

115) 郭沫若, 「自序」, 『中國古代社會硏究』(1930), p.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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