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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고사관의 위기

Dalam dokumen 中國 思想과 文化의 새로운 照明 (Halaman 55-59)

민국초기에 중국 상고사의 전통적 인식체계는 전면적인 위기를 맞았다. 疑古思 潮가 폭풍처럼 휘몰아친 것이다. 돌이켜보면, 위기의 발단은 이미 청말 경금문학/

공양학의 부흥에서부터 비롯되었다.6)

무술변법시기 공양학파의 최고 권위자 康有爲는 제도개혁의 사상적 무기로

『新學僞經考』7)와 『孔子改制考』 2부작을 발표하였다. 전자의 요지는 고문경의 대부분이 王莽의 新왕조를 위해 劉歆이 위조한 가짜 경전이라는 것이다.8) 후자는 공자가 유교를 창시한 “萬世敎主”9)이고, 六經은 그가 현실정치를 개혁을 하기 위 해 託古한 이론적 산물이라는 것이 핵심이다.10) 양자는 협공하여 기존의 고대사 관을 크게 동요시켰다. 특히 전통적인 상고사관을 뒤흔든 장본은 무술변법전야에 완성된 『공자개제고』였다. 이 책에서 강은 서두부터 전통 상고사 체계의 신빙 성에 대해 일대 의문을 던지고 있다.

우리 중국은 옛날의 이름난 나라로 문명도 가장 앞섰으나 『六經』 이전 (시대는) 다시

4) 최근의 연구로 도중만, 「신해혁명시기 ‘以字詮史’연구법의 중·서 학술적 연원」, 『中國學論叢』

第34輯, pp.1-28; 도중만, 「신해혁명시기 민족주의의 대두와 ‘以字詮史’ 연구법의 형성」, 『역 사와 담론』 제59집, pp.161-186 참고.

5) 오사시기 이대조의 이자전사를 통한 유물사관의 보급은 도중만, 「李大釗의 사적 유물론보급과 淸末의 학술 전통」, 『湖西史學』 第37輯, pp.249-290 참고.

6) 錢基博, 「四版增訂識語」, 『中國現代文學史』, 傅道彬 編校, 『中國現代學術經典: 錢基博卷』, 石家庄, 河北敎育出版社, 1996년, pp.561-562; 余英時, 「五四運動與中國傳統」, 『史學與傳統』, 臺北, 時報文化出版有限公司, 民國75年, pp.93-98; 王汎森, 『古史辨運動的興起』, 臺北, 允晨文化 實業有限公司, 民國82年, pp.52-57 참조.

7) 『신학위경고』는 1891년 강의 고향인 廣州에서 초각본이 나왔다. 그 후 이 책은 1894년, 1898 년, 1900년 모두 3번이나 청정부에 의해 훼판 조치를 당했다. 1917년에 강은 서명을 『僞經考』

로 고쳐 북경에서 중간하였다. 更甡, 「題辭」, 康有爲, 『僞經考』 丁巳年冬萬木草堂叢書本 第1 冊, pp.1a-1b; 康有爲, 「重刻『僞經考』後序」, 같은 책, 第6冊 「附錄」, pp.3a-3b 참조.

8) 康有爲, 「序」, 『僞經考』 卷1, 第1冊, pp.1b-3b; 朱維錚, 「重評『新學僞經考』」, 『求索眞文 明-晩淸學術史論』, 上海, 上海古籍出版社, 1996年, p.221.

9) 康有爲, 『孔子改制考』 卷7, 姜義華 編校, 『康有爲全集』, 上海, 上海古籍出版社, 第3集, 1992年, p.191.

10) 康有爲, 『孔子改制考』 卷10, pp.284-285; 蕭公權 著, 汪榮祖 譯, 『康有爲思想硏究』, 臺北, 聯 經出版事業公司, 民國77年, pp.91-93; 彭明輝, 『疑古思想與現代中國史學的發展』, 臺北, 臺灣商務 印書館, 民國80年, p.38.

中國史學會 第77回 學術發表會: 中國 思想과 文化의 새로운 照明 50

문서 기록이 없다. 하·은은 증거가 없고 주대의 서적은 이미 사라져서 공화(원년: B.C.841) 이전은 년대로 식별할 수 없다. 진·한 이후에야 비로소 상세한 기록을 얻는다.11)

강유위가 상고사를 부정한 주된 이유는 바로 사료의 부재였다. 강의 주장대로 라면, 『육경』 이전의 시기는 문헌사료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 선사시대에 속한 다. 상고시대 삼황오제에 관한 역사기억은 이제 그 존립의 기반을 상실한 셈이 다. 그 시대의 문헌이 없으니 당연히 인식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결국 강은 자신의 『공자개제고』 첫째 권의 표제마저도 아예 「上古茫昧無稽 考」라 설정하였다. 상고시대는 아득해서 자세히 살펴볼 수 없다는 것이다. 강은 촉한의 초주에서 청대 최술에 이르는 학자들의 전통적인 상고사 연구를 항당 무 계한 것으로 일축해 버렸다.

강유위는 『六經』 안의 상고사 체계도 역사적 사실(Historical truth)이 아니라 공자가 구성해낸 심리적 사실(Psychological truth)에 불과하다고 단호하게 부정 하였다.12) 나아가 강은 제자백가의 저술에 반영된 상고사마저 그 지적 속성은 모 두 전자와 동일하다고 단언하였다. 이는 삼황오제에 관한 사적 자체가 원래 모호 했었기 때문에 가공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그들의 목적은 너나할 것 없이 모두 오직 託古改制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육경』과 제자백가의 서적도 믿을 수 없 다면 상세한 기록에 근거한 역사시대는 진한 이후일 뿐이다. 중국 역사는 이제 2000여년으로 대폭 단축되어 버려서 상고사 전체와 선진시대 대부분이 일거에 실종되는 비운을 맞이한 셈이다.

사실 강유위는 기본적인 성향이 학자라기보다는 사상가요, 개혁가였다. 자신의 사상과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서 그는 서슴없이 “증거를 말살하거나 혹은 증거를 왜곡하였다.”13) 하지만 『공자개제고』는 출판 직후부터 “화산 대폭발”이나 “대 지진”처럼 엄청난 파괴력을 발휘하였다.14) 후폭풍은 전통적인 상고사 체계에도 심각한 손상을 입혔다. 실지로 당시 새로운 상고사 서술에 강의 의고사상이 반영 된 사례가 1904년 夏曾佑가 펴낸 『最新中學敎科書中國歷史』에서 확인된다. 이 책에서는 제1편 상고사의 시대구분을 동주 기점으로 그 이전은 “第1章 傳疑時 代”, 그 이후는 “第2章 化成時代”로 양분하고 있다.15) 저자는 동주(육경)이전 삼 황오제는 물론 하·은·주 3대도 전부 믿을 수는 없는 시대로 보고 있는 셈이다.

11) 康有爲, 『孔子改制考』 卷1, p.2.

12) 彭明輝, 앞의 책, p.41.

13) 梁啓超, 淸代學術槪論, 長沙, 商務印書館, 民國27年, p.128.

14) 梁啓超, 위의 책, p.129. 1928년에 고사변파의 거두인 顧頡剛도 강의 논저가운데 『공자개제 고』의 영향력이 가장 컸다고 주장하였다. 顧頡剛, 「淸代 “經今文學”與康有爲的變法運動」, 『中 國文化』 1990年秋季號(第3期), p.88.

15) 夏曾佑, 「目錄」, 『最新中學敎科書中國歷史』, 上海, 商務印書館, 民國3年, 第1冊, pp.1-4. 이 책은 1933년에 상무인서관에서 서명을 『中國古代史』 고쳐서 재판하였다. 이 판본에서도 제1장 은 傳疑時代(太古三代), 제2장은 化成時代(春秋戰國)로 표기하고 있다. 夏曾佑, 「目錄」, 『(大學 叢書)中國古代史』, 上海, 商務印書館, 民國22年, pp.1-5.

三代靑銅器를 통해 본 商金文의 서예사적 가치 (김수천) 51

하의 상고사관은 강유위의 견해와 일맥상통한다. 경고문학 진영에서 유사배가 나 서서 전력을 다해 반격을 꾀했지만 여의치는 않았던 듯하다. 민국시기에 고사변 운동에 열중이던 고힐강은 훗날 하증우의 이러한 상고사 서술이 자기보다 더 과 격했다고 논평하였다.16)

강유위의 의고사관은 5·4 신문화운동시기에 사제지간인 호적과 고힐강에게 계 승되어 한층 더 학구적으로 강화되었다. 물론 전통적인 상고사관의 위기는 더욱 만회할 수 없는 국면으로 치달았다.

“거의 예외 없이, 새로운 패러다임의 근본적인 창출을 이루어낸 사람들은 아주 젊다든가 아니면 그들이 변형시키려는 패러다임 분야에 아주 새롭게 접한 사람 들이다.”17) 호적이 그렇고 고힐강도 마찬가지였다. 27살의 호적은 1918년 북경대 학에서 개설한 중국철학사 과목에서 첫 강의를 『시경』시대로부터 시작하였 다.18) 호보다 한살 어린 26살 늦깎이로 수강생 틈에 끼어 있던 고힐강은 엄청난 지적 충격을 받았다. 고는 그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다.

(북경대학) 철학과에 중국철학사 과목이 있었는데……두 번째 해에는 (담당 교수를) 바꿔 胡適之선생을 초빙해 모셔서 가르치도록 하였다.……그가 오셔서는 이전의 수업을 상관치 않고 다시 강의를 짰다. 맨 처음 장은 ‘중국철학의 태동시대’였는데, 『시경』으로 시대적 설명을 하고는 唐·虞·夏·商을 빼버리고 곧바로 周의 宣王 이후부터 강의하기 시작하였다.

이번 개선은 삼황오제로 머릿속이 꽉차있던 우리 반 수강생들에게 느닷없이 엄청난 충격 을 주어서 교실의 전 학생들은 놀라서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상고사는 믿을 수 없다 는 나의 생각은 『(공자)개제고』를 읽고 난 뒤에 또 이렇게 한 차례 숙성을 거쳤다.19)

고힐강을 경악시킨 호적의 첫 강의는 의도가 명확하였다. 호의 상고사관에 의 하면, “지금은 우선 고대사를 이삼천년으로 단축시켜서 『시』 300편으로부터 시 작한다.20) 장차 금석학과 고고학이 발달해 과학의 궤도에 오른 다음에 지하에서 발굴한 사료를 이용하여 동주이전의 고대사를 천천히 늘려 나간다. 동주이후의 사료에 대해서도 반드시 엄밀하게 비판해야 한다.”21) 호의 주장은 대략 청말 강 16) 顧頡剛, 「我是怎樣編寫『古史辨』的?(下)」, 『中國哲學』 第6輯, 「資料與回憶」, p.391.

17) 토마스 S. 쿤 지음, 김명자 옮김, 『과학혁명의 구조』, 서울, 동아출판사, 1995년,

18) 호의 강의안은 1919년3월에 『中國哲學史大綱』으로 출판되어 북경대학총서에 선정되었다. 초 판이 2달 안에 매진되어 바로 재판을 내고 1922년까지 8판을 거듭 출간하는 호황을 누렸다. 호 는 자신의 철학책이 이렇게까지 호평을 받을지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라고 자백하였다.

胡適, 「再版自序」, 『(北京大學叢書之一) 中國哲學史大綱』 卷上, 上海, 商務印書館, 民國8年, p.1; 耿雲志, 『胡適年譜』, 香港, 中華書局香港分局, 1986年, p.53.

19) 顧頡剛, 「自序」, 『古史辨』, 臺北, 藍燈文化事業公司, 民國76年, 第1冊, p.36.

20) 고힐강은 호의 새로운 상고사관을 충실히 받아 들였다. 고는 1929년 가을에 燕京大學의 요청으 로 개설한 “中國上古史硏究”란 과목의 첫 강의를 호와 마찬가지로 『詩經』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그 이유는 “우리가 (현재) 믿을 수 있는 가장 옛날 책은 『시경』”이라고 설명하였다. 顧 頡剛, 『中國上古史硏究講義』, 北京, 中華書局, 1999年, pp.1-3.

21) 호는 “차라리 ‘疑古’하다가 실수할지언정 ‘新古’하다가 실수해서는 안 된다.”라고 단호히 주장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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