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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전사의 성행

Dalam dokumen 中國 思想과 文化의 새로운 照明 (Halaman 63-68)

“대체로 글자 한 자를 해석하는 것은 곧 한 권의 문화사를 짓는 것이다.”61) 1935년에 역사학계의 거목인 陳寅恪은 새로운 훈고학의 표준을 이렇게 정의하였 다. 진의 규정은 이자전사의 성격과 의미를 더할 나위 없이 간명하게 압축해내고 있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사실 동서를 막론하고 언어학자들도 한목소리로 언어 사와 문화사가 아주 긴밀한 공조관계를 이룬다고 강조하였다.62) 문자/한자의 다 양한 분석을 통해 고대사를 고찰하는 이자전사법은 청말에 유사배에 의해 정립 되어 민국시기에는 크게 성행하게 된다.

신해혁명시기에 문자/한자가 신 사료가 부각되자, 자연히 그것을 역사 연구에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의 창안이 시급한 과제로 떠올랐다. 이 문제는 경고문학의 대가였던 유사배가 나서서 해결하였다. 유가 소학과 사학을 통섭하여

58) 胡厚宣, 「序言」, 『五十年甲骨學論著目』, p.18; 왕우신·양승남 지음, 하영삼 옮김, 『갑골학 일백년』 3, 2011년, p.204.

59) 羅振玉, 「殷虛書契考釋序」, 『羅振玉校刊群書敍錄』 卷上, p.4b.

60) 『설문해자』의 상대화 현상은 역사학은 물론 고문자학 분야에서 더욱 극심하게 나타났다. 顧 實, 「治小學之目的與方法」, 『國學硏究會講演錄』 第1集(1923), p.30.

61) 陳寅恪, 「致沈兼士」 二, 『陳寅恪集·書信集』, 北京, 生活·讀書·新知三聯書店, 2001年, p.172.

62) 王了一, 「新訓詁學」, 葉聖陶 編, 『開明書店二十周年紀念文集』, 北京, 中華書局, 1985年, pp.203-204; E. Sapir, Language, (New York: Harcourt, Brace & World, Inc. 1949), p.207, p.219; L. R. Palmer, 神保格·渡邊繁興·佐藤成 共譯, 『現代言語學紹介』, 東京, 泰文堂, 昭和30년, p.159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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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전사라는 참신한 연구법을 정립해낸 것이다.63) 그의 성공 비결은 전통 사료 관의 혁신에 있었다. 직접 그의 새로운 사료관을 살펴보기로 하자.

대체로 상고시대의 정치를 고찰하자면, 3가지 단서가 있다. 첫째는 서적이다.……둘째는 문자이다.

처음 글자 제작은 蒼頡에게서 시작되었지만 문자의 번다함과 간략함으로 통치와 교화의 높낮이를 살피기에 충분하다.……셋째는 器物이다.……(협주: 애석하게도 중국에서는 고고학을 알지 못한다.

만약 서양인의 방법을 모방해서 시행하면, 반드시 태초의 유물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64) (밑줄강 조-인용자)

유사배의 사료관은 강유위의 의고사학이 견지했던 경전 중심의 전통을 완전히 넘어서고 있다. 유는 상고사 연구에 ‘문헌’, ‘문자’와 ‘기물’이라는 성질이 다른 3가 지 사료를 모두 활용하라고 강조하였다. 이러한 논지는 이른바 ‘삼중증거법’으로 압축된다. 유의 삼중증거법은 민국시기 왕국유가 정립한 “이중증거법”의 남상이 라고 할 수 있다. 심지어 최근의 사료관조차도 삼중증거법의 범주를 그리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듯하다.65) 게다가 ‘서양의 고고학’을 도입하여 ‘태초의 유물’을 찾아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민국시기 신 사학의 진전 방향을 그야말로 정확히 잡아낸 탁견이었다. 훗날 李宗侗은 고힐강을 향해 고대사 논쟁을 종식시킬 유일 한 방법은 근대 고고학으로 “고대인들이 직접 남겨놓은 작품(유물)”을 발굴해 내 는데 달려 있다고 단언하였다.66)1930년 郭沫若도 멀지 않아 중국에 “고고학상의 황금시대”가 도래하여 수없이 많은 문제들이 해결될 것이라고 장담하였다.67)

유사배의 삼중증거법에서 문자는 문헌이나 기물과 어께를 나란히 하고 있다.

문헌은 언제나 불완전하고 기물도 아직은 불충분하기 때문에 사료로서 문자의 가치는 더욱 빛을 발한다. 소학에 능통한 유는 문자가 발하는 빛으로 역사를 밝 혀줄 이자전사의 구체적인 분석 방법을 3갈래로 간명히 제시하였다.

(문자가 처음에) 본뜬 형상을 살피는 첫째요, 최초의 뜻을 끝까지 파헤치는 것이 둘째이 며, 한 글자가 여러 의미라면 그 인신과 가차의 연고를 탐구하는 것이 셋째이다.……이것 들은 전부 문자가 역사 연구에 도움이 되는 것이다.……이와 같은 것들은 모두 역사 해석 의 자료가 된다. ……(나 유)사배는 어려서 許愼의 책(『說文解字』)을 공부했는데, 이런 사례를 원용하여 字源을 추적하자 政俗과 예68)제의 여러 단서로 자형과 자의 안에 깃들어

63) 1933년 丁興瀇은 유사배가 중국에서 한자의 字形과 字義에 관한 분석을 통해 고대사회를 고찰 한 최초의 학자라고 주장하였다. 丁興汪, 「文字學上中國古代社會勾沉」, 『學風』 第3卷第6期 (1933), p.23.

64) 劉光漢, 「古政原始論·古政原始總敍」, 『國粹學報』 第1年第4號, 「政篇」,pp.1a-1b.

65) 饒宗頤, 「談「十干」與「立主」」, 『饒宗頤史學論著選』, 上海, 上海古籍出版社, 1993年, pp.21-22; 傅杰, 「三重證據法」, 『聆嘉聲而響和』, 上海, 華東師範大學出版社, 2001年, p.51.

66) 李玄伯, 「古史問題的唯一解決方法」, 『現代評論』 제1권第3期(1924), pp.15-16.

67) 郭沫若, 「《美術考古學發現史》譯者序」, 上海圖書館文獻資料室·四川大學郭沫若硏究室 合編,

『郭沫若集外序跋集』, 成都, 四川人民出版社, 1982年, pp.302-303.

68) 원문에는 ‘體’자이다. 문맥상 ‘禮’의 오자로 판단되어 바로 잡았다.

三代靑銅器를 통해 본 商金文의 서예사적 가치 (김수천) 59 있는 것이 항상 환히 드러날 수 있음을 깨달았다.69)

1904년에서 1908년 사이에 유사배는 이자전사법으로 상고사를 재조명해냈다.

동시에 양계초도 이자전사의 대열에 적극 뛰어들었다. 유·양은 주로 고문자를 다 각도로 분석하여 민족의 기원, 국가의 탄생, 사회의 출현 등 문명의 형성에 대해 새롭게 구명하였다.70) 하지만 그들에게도 여전히 한계는 있었다. 가장 큰 문제점 은 고문자 자료의 주종을 『설문해자』에 국한시켰다는 것이었다. 민국초기에 갑 골문이 ‘사료시대’를 맞이하면서 유·양의 결점은 완전히 극복되고 이자전사는 더 욱 탄탄대로로 나아가게 된다.

청말 민초는 “발견의 시대”였다.71) 왕국유의 말대로, “예로부터 신학문의 흥기 는 대부분 모두 새 발견에서 비롯되었다.”72) 특히 역사학은 새로운 사료를 먹고 자라는 학문이다. 민국초기 왕국유의 참신한 갑골학은 이자전사의 가능성과 중요 성을 충분히 입증하고도 남는다. 왕에게 고문자학과 역사학은 실상 표리관계에 있었다.73) 왕의 학문에 관해 지기였던 라진옥은 이렇게 논평하고 있다. “대체로 선생의 학술은 실로 문자·성운으로부터 고대의 문물제도와 아울러 그 제도를 세 운 소이연을 고찰하였다.”74) 라의 논단에 의하면, 왕의 고대사 연구는 이자전사 의 전형이다. 이번에는 직접 왕에게 이자전사법에 대한 설명을 들어보자.

진실로 (고대의) 역사적 사실과 문물제도를 고찰해서 그 당시의 정황을 알려면, 『시』·

『서』에 근거해 그 문장의 의례를 파악하고, 고대 음을 살펴서 그 의미의 가차에 통달하 며, 청동 기물을 참조해 그 문자의 변화를 검증한다. 이것에서 저것으로 나아가고 갑으로 을을 유추한다면 해석할 수 없던 글자와 통할 수 없던 의미에 대해서도 분명히 간혹 성과 를 얻을 것이다.75)

얼핏 보기에 왕국유의 이자전사는 청말 유사배의 그것과 상당히 닮아있다. 하 지만 곰곰이 살펴보면, 양자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가 분명히 존재한다. 둘의 가 장 다른 점은 고문자 자료의 출처와 운용 면에서 확연하다. 유가 이자전사에 주 로 『설문해자』 등 “紙上의 材料”를 쓴데 비해, 왕에게는 갑골문과 금문이라는 69) 劉師培, 「字詮自序」, pp.17b-18a; p.19b.

70) 청말에 유사배와 양계초가 이자전사 방면에서 거둔 성과는 도중만, 「신해혁명시기 ‘이자전사’

연구법의 중·서 학술적 연원」, pp.1-28 참고.

71) 抗父, 「最近二十年間中國舊學之進步」, 『東方雜誌』 第19卷第3號(1922), pp.33-34; 王國維,

「最近二三十年中中國新發見之學問」, 『學衡』 制45期(1925), 「術學」, p.1 참고.

72) 王國維, 「最近二三十年中中國新發見之學問」, 『學衡』 第45期(1925), 「術學」, p.1.

73) 王國維, 「『殷虛文字類編』序」, 趙萬里 校輯, 『觀堂別集』 卷4, 『觀堂集林』 下, 「府錄」, 石家莊, 河北敎育出版社, 2002年, p.871. 이 서문은 上海書店影印本(1996) 『王國維遺書』에 수록 된 『觀堂別集』과 中華書局影印本(1991) 『觀堂集林』의 부록인 『觀堂別集』에 모두 누락되어 있다.

74) 羅振玉 「序」, 『觀堂集林』, 『王國維遺書』 第1冊, 上海, 上海書店出版社, 1996년, p.1b.

75) 왕국유,「모공정고석서」, 『관당집림』 권제6, 예림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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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地下의 새 材料”가 주종을 이룬다. 흥미롭게도 같은 고문자 자료인데 유에게는

“지상의 재료”를 뜻하고 왕에게서는 “지하의 새 재료”를 의미한다. 자료의 신빙 성이 제고되자 왕의 연구법은 더욱 치밀해 졌다. 1925년에 그는 “지상의 재료”와

“지하의 새 재료”를 상호 보완적으로 활용하여 고대사를 증명해내는 소위 “이중 증거법”76)을 정립하였다.

민국초기에 왕국유는 이중증거법에 기초한 이자전사로 고대사를 새롭게 조명 해 눈부신 성과를 올렸다. 이를테면, 복사와 문헌 자료를 근거로 상대 제왕의 위 차를 재구하여 『사기』 「은본기」의 신빙성을 증명하는 동시에 그 오류까지 바로 잡았다. 또한 금문에서 얻은 고문자와 전통 사료를 언어학적으로 다양하게 분석하여 고대 흉노족의 변천사를 복원하였다. 그의 독창적 견해는 「鬼方昆夷玁 狁考」(1915), 「殷卜辭中所見先公先王考」(1917), 「殷卜辭中所見先公先王續考」

(1917), 「殷周制度論」(1917), 『觀堂集林』(1921), 『古史新證』(1925) 그리고

「殷先公先王考附注」(1927) 등 논저로 속속 발표되었다. 이 일련의 수작들은 차 례로 연구사에 길이 남을 금자탑을 한 층씩 한 층씩 쌓아올렸다.

1920년경부터 여러 학자들이 왕국유가 이자전사로 세운 금자탑 아래 모여 들 었다.77) 왕의 금자탑은 그들에게 고대사 연구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공하였다.

그들이 새 패러다임 안에서 고대사를 새롭게 파헤치자 이자전사가 성행하는 국 면이 조성되었다. 민국시기의 이자전사는 청말 상황에 비교해 볼 때 여러 면에서 진전 상황이 확인된다.

먼저 수량적으로 전공자와 관련논문이 늘어났다. 필자의 초보적이고 불완전한 통계에 의하면78), 대표적인 연구자는 적어도 16명가량이 확인된다. 주로 역사학 자와 고문자학자들이다. 이들이 일정한 주제를 전문적으로 다룬 논문은 어림잡아 최소한 24편을 웃돈다.79) 그밖에 고문자의 단어 분석을 통해 미시적으로 고대 문 물제도의 소주제를 논의한 글은 너무 풍성해서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 다.80)

다음으로 연구 방법도 향상되었다. 1923년에 朱希祖가 내세운 방법론은 우리가 경청해 볼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76) 王靜安, 「古史新證」, 『國學月報-王靜安先生專號』 第2卷第8-10號合刊(1927), 「王靜安先生遺 著」 pp.365-366; 王國維先生遺著, 「古史新證」, 『燕大月刊』 第7卷第1-2期合刊(1930), pp.1-2.

1935년에 孫海波는 갑골복사의 체계적인 연구가 왕의 「고사신증」에서 시작된다고 논평하였다.

孫海波, 「讀王靜安先生古史新證書後」, 『考古學社社刊』 第2期(1935), p.51 참고.

77) 고힐강과 郭沫若도 그 대열에 들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顧頡剛, 「我是怎樣編寫『古史 辨』的?(下)」, pp.387-388; 郭沫若, 「古代硏究的自我批判」, 『十批判書』, 重慶, 羣益出版社, 1947年, pp.4-5 참고.

78) 中國科學院語言硏究所 編, 『中國語言學論文索引』, 香港, 三聯書店, 1979年, 「甲編」의 관련 항목을 기초로 필자가 수집한 기타 자료를 추가하였다.

79) 대략 20년대 10편, 30년대 5편, 40년대 9편이다.

80) 가장 전형적인 사례로는 1936년에 진인각이 극찬한 沈兼士의 「「鬼」字原始意義之試探」(『國 立北京大學國學季刊』, 第5卷第3號(1935), pp.49-59.)을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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