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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과 사회를 먹여 살리는 ʻ 부양가족 ʼ 여성들

Dalam dokumen 북한 여성의 일상생활과 젠더정치 (Halaman 133-149)

가. 장사로 가족 부양하다가 김정은 시대에 이혼한 여성 (1) 교사인 어머니 덕분에 유복했던 어린 시절

사례 7은 1980년대 중반에 자강도에서 출생했다. 광산노동자였던 아버지와 중학교 교사였던 어머니 덕분에 상대적으로 부유한 생활 을 했다고 기억한다. 교원활동으로 새벽에 나가서 밤늦게 돌아오는 어머니 대신 아버지가 집안일을 거두었고, 사례 7은 유치원을 다니 던 일곱 살 때부터 밥을 하는 등 집안일을 도왔다. 1990년대 중반부 터 시작된 식량난으로 사례 7이 인민학교를 다니던 때 북한 사회 전 역은 살기가 어려웠다.

우리 집은 [집안일을] 아버지가 했어요. 네, 아버지가…. 어머니 는 이렇게 나와서 버는 수입이 조금 있어요. 교원이니까 학부형들 도 이렇게 뭐 명절 때마다 이렇게 뭘 해 주고 해 주고 이렇게 들어 오는 게 많죠. 아버지가 그런 걸 이해했죠. 엄마가 교원이니까 바 빠서 이런다 하고. 아버지가 먼저 와서 밥도 하고 우리들도 돌보고.

또 어떤 때는 엄마가 아침에 식사도 못하고 가는 거예요, 어머니는.

아침 6시 반이면 출근하죠, 식사도 못하고. 밥만 해놓고서 나가면 또 아버지가 우리를 다 챙겨서 학교도 보내고 또 그랬어요. 보게

되면 우리 집안에서 아버지가 세간살이도 하고 나가서 일도 하고 아버지가 많은 역할을 했어요. (사례 7 구술녹취록, 2019/22~23)

중학교 교사였던 어머니는 수업 외에도 학교 일 때문에 항상 학교 에서 아버지보다 늦게 귀가하였다. 학교에서 주는 실질적인 배급이 줄어든 반면, 학부모들이 명절 등에 주는 비공식적인 수입이 있었 고, 개인지도를 원하는 학생에게 따로 수업을 주면 좀 더 많은 일을 하는 동시에 ‘버는 수입’이 늘어나기도 하였다. 이런 사정을 아버지 가 “이해하고ˮ 자녀 등교준비나 밥 챙겨 먹이기 등을 포함하여 전반 적인 집안 세간살이를 담당하였다고 한다. ‘남자는 하늘이고 여자 는 땅’이라는 북한 사회에서 여성들이 교사, 의사 등 합법적인 사회 배치를 통해 배급을 받고 실질적으로 돈을 버는 경우 부부관계에서 도 ‘실용적인 가사분담’이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다. 사례 7은 어 린 시절부터 어머니의 사회활동과 돈벌이로 유지되는 생활을 경험 하였다.

그런데 어머니가 돈을 벌어오고 아버지가 ‘세간살이’를 분담하기 는 했으나 원칙적으로 어머니는 아버지의 결정에 순종하고, 자신의

‘권력’으로 남편에게 투자하였다고 한다.

우리 어머니나 아버지나… 네, 집에서도 그랬죠. 아버지가 암만 집 세간살이 한다 해도,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이렇게 아버지한테 미안한 감을 가지고 아버지한테 막 이렇게 투자했어요, 아버지한 테. 그래가지고 아버지가 엄마 덕에 입당도 좀 하고 그랬어요. 엄 마가 교원 하다나니까 학부형들이, 간부자녀들이 많았어요. 그러 니까 그거 발판으로 해가지고, 간부들 자녀들 해가지고 이렇게 조 금 많이 신경을 써줬죠 (중략) 그런데 대부분 보게 되면 하늘과 땅 차이에요, 남자여자 보면. 여자들이 값이 없어요. (사례 7 구술녹 취록, 2019/26)

위의 구술에 의하면 평생 교사로 일을 하고 돈을 벌어 가족 생계를 꾸리는 역할을 했던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미안한ˮ 마음을 가지고 있 었을 뿐만 아니라 사실상 가족 내에서 행해지는 중요한 결정권은 아 버지에게 있었다. 이것은 남편의 사회적 지위가 가족 전체에 대한 인 정과 결합된 반면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가족에 대한 인정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북한사회의 가부장적인 질서를 보여준다. 이런 사정 을 잘 아는 어머니는 자신이 아는 학부모들을 통해 형성된 ‘관계’를 이용하여 남편의 입당을 성사시키는 등 남편의 사회적 지위를 향상 시키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어머니가 김정일 ‘당 자금’을 만드는 회사의 창고장을 했던 사례 8의 경우도 ‘고난의 행군

’을 모르고 지낼 정도로 어머니의 경제력으

로 살았지만, 어머니와 가족들은 “아빠가 앉으라면 앉고 서라면 서 는

ˮ 복종생활을 하였다(사례 8 구술녹취록, 2019/12). 북한에서

1960~70년대에 출생한 부모 세대의 경우 ‘남성에게 절대 복종하는 여성’이라는 규범이 부부사이에 관철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 만 6년 군복무 후 입당 가방만 메고 제대

2000년대 초반에 중학교를 졸업한 사례 7은 군에 입대하여 만 6 년을 복무했다. 인민학교 시절부터 고난의 행군을 겪은 사례 7은

“군대 나가서 입당을 해서 간부가 되겠다.ˮ는 희망을 가지고 군대에

지원했다. ‘평백성’들이 온갖 육체노동을 해도 생계를 잇지 못하는 반면, 간부들은 ‘말로 먹고사는’ 현실을 고려하여 부모들이 고된 ‘군 입대’를 추천하였다. 사례 7의 가족이 딸을 대학에 보낼 수 있을 만 큼의 권력과 재력을 가지지 못했으므로 군입대를 통해 당이나 군부 대 간부로 배치되기를 기대하고 내린 결정이었다.

그런데 사례 7이 입대했던 당시는 고난의 행군 직후로, 군대에서

도 ‘영양실조’를 겪어야 할 정도로 여전히 혹독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군대 나가서는 조금 힘들었어요. 그러니까 집에서는 조 금 부유하게 살았는데, 군대 나가서 보니까 다 모든 게 보급이 안 되고, 우리 여성들은 특히 이게 좀 많잖아요. 그러니까 비누도 많 이 써야 되고, 이게 생리대도 많이 필요하고 그렇잖아요. 그런데 생리대 걱정은 안 해요. 그러니까 군대 나가니까, 이 영양이 딸리 니까 그런 건 또 안 하는 거예요. 네, 한 달에 10개…. 생리대 여기 서 대동강생리대 그거 가지고 나왔어요. 군대들만 딱 보급해 주는 게 있어요. 그거 하나씩 줬거든요. 한 달에 하나씩. 그런데 이거를 안 하다나니까 그걸 계속 모으는 거예요. 모아가지고 배고프면 그 걸 또 사택에다 가져다 팔고 또 먹을 걸 사먹고. (사례 7 구술녹취 록, 2019/6)

충분한 영양섭취를 하지 못한 채 고된 군사훈련을 받았던 여성들 대부분이 생리가 끊어지는 경험을 했다. 군대에서만 특별히 지급되 던 “대동강 생리대ˮ를 사용할 필요가 없어진 여성들은 다른 경로로 생리대를 팔아서 먹을 것을 보충해야 하는 생활을 했다. 그런데 2005년부터 군사력을 강화한다는 명목으로 모든 대대장들이 남자 로 교체된 후 군대 내에서 ‘비사회주의현상’이 다수 발생하였다. 장 교들이 여성군관들을 희롱하는 일들이 빈번히 발생했고, 많은 경우 여성들만 생활제대를 당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사례 7은 2007년 만 6년의 군 생활을 무사히 견디고 입당하였다. 그러나 입당 가방 메고 돈 한 푼 없이 집으로 돌아와 보니 이전보다 집안 형편이 나빠졌고, 집도 광산에서 농촌 시골로 이사한 상태였다.

(3) 결혼과 함께 시작된 혹독한 ʻ 부양노동 ʼ

사례 7은 돈을 빌려서, 중국 밀매로 외화벌이를 하는 친구에게 약초를 대주는 장사를 시작하였다. 일 년 장사로 돈을 벌어서 결혼 할 살림살이를 마련하였다. 뇌출혈로 쓰러진 아버지의 병세가 심해 져서 “딸 시집가는 거 못보고 죽겠다ˮ는 상황이 되자, 아버지가 급 하게 중매한 남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이를 받아들여 혼인식을 하였다.

연애는 이렇게 하다가 갈라지면 끝이고, 또 중매는 모르는 사람.

자기가 그 사람에 대해서 모르잖아요. 모르면서 사는 률이 더 많거 든요. 네, 중매가 많거든요 (중략) 결혼은 중매. 연애결혼도 하고 하는데, 기본 제가 말하는 거는 중매결혼이 더 많다 이거죠 (중략) 제가 그 사람을 봐서 싫어도 또 부모들이 요구하면 할 수 없이 사는 거죠. (사례 7 구술녹취록, 2019/13)

위의 구술에서는 사례 7은 여전히 북한 사회에서 중매에 의한 결 혼이 일반적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사례 7이 결혼했던 2000년대 중 반에 지방의 젊은 사람들 사이에 연애하는 일이 많았지만, 결혼은 집안을 아는 사람들의 중매를 통해 성사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결혼 후 사례 7은 시어머니와 시동생, 제대 군인이었던 남편과 시 집에서 생활하며 시동생 두 명을 수발하고 집을 얻어 장가를 보내 고, 시엄마의 비위를 맞추며 집안 살림을 살아야 하는 고된 생활을 하였다. 동시에 부양가족의 의무인 여맹과 인민반에서 요구하는 각 종 동원과 ‘외화벌이

’에 참여하거나 대신 돈을 내야하는 고통에 시달

렸다.

남성들은 나가서 직장 일을 하면 되는 거고. 그런데 이렇게 북한

에선 배급도 제 정량을 안 주고 하다나니까 한 달 배급이 열흘도 못 먹는 거예요. 네, 그러니까 집안 살림 책임진 우리 가정부인들 이 그 자리를 메꿔야 되는 거예요. 네, 자식도 키울래, 세대주도 뒷수발을 해줄래. 아 그러다나니까 장사도 하고 농사도 하고 하는 데, 또 그게 반면에 인민반 생활 또 하고 여맹생활도 하고. 그게 조직생활이 간단치 않은 거예요. 네, 계속 내라 하고, 계속 어디 건설장 동원이 되고. 네, 그러니까 북한에서는 진짜 여성들이 뭐랄 까 막 기를 못 펴고 항상 그 먹고 살기 위한, 남성들보다 여성들이 그런 생각을 많이 하죠. 그런 고생을 많이 하죠. (사례 7 구술녹취 록, 2019/2)

사례 7과 사례 8은 모두 결혼하여 남편의 ‘부양가족’으로 등록하 였으나 실질적으로 온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아침부터 밤까지 노동 하였다. 남편 직장의 배급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은지 오래된 상태이므로 여성들이 농사와 장사 등을 해서 돈을 벌면서 각종 집안 일을 하는 중노동에 시달리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부양자들을 대상 으로 한 인민반과 여맹의 동원노동과 각종 ‘지원’을 위해 할당된 돈 을 메워야 하는 상황이기도 했다. 형식상으로는 남편이 부양하는 가 족이 된 일반 기혼여성들이 실질적으로는 가족부양과 국가부양의 역할을 동시에 책임지고 있는 현실인 것이다.

처음 음식장사로 두부와 술을 만들어 팔던 사례 7은 친구의 도움 으로 약초장사를 하여 돈을 모으기 시작하였다. 약초를 수집하고 중 개하기 위해 각 지역을 돌아다니는 생활을 하게 되면서 남편 및 시어 머니와 갈등이 생겼다.

그전에는 집 살림 하면서 음식장사도 하고, 계속 제가 집에 붙어 있었잖아요. 그런데 이제 제가 조금 눈이 터가지고, 야, 이렇게 해 가지고 내가 돈을 못 벌겠다 해가지고 동무 방조로 해가지고 이렇

Dalam dokumen 북한 여성의 일상생활과 젠더정치 (Halaman 133-1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