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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대 지망생과 ʻ 교육 혁명가 ʼ 를 꿈꾸던 전문직 여성

가. 의대에 합격한 대대장의 딸

(1) 군대 울타리 안에서 지냈던 어린 시절

사례 13은 1990년대 후반 함경남도 지역에서 1남 1녀 중 장녀로 출생했다. 당시 아버지는 10년 군복무를 마친 뒤 군관학교에서 “별 을 달고ˮ 군대 간부로 근무하였고, 어머니는 부양가족으로서 해당 군부대의 회계 관련 일을 했다.

사례 13은 만 18세가 될 때까지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포함한 다섯 명의 가족과 함께 장교사택에서 생활하였다. 군부대 울타리 내에서 군대의 일상적인 생활총화, 부업반 활동 등 조직생활에 직간접적으 로 참여한 것이다.

부대에서도 엄마들이랑 보면, 주에 한 두 번 모여서 생활총화 그 비슷한 거 하고, 그 다음 당에서 뭐 이렇게 신문이랑 사설이랑 나오 면 그걸 암송시키고, 그리고 일을 해요. 부업반이라고 있는데 농사 대대 그 아저씨들, 군대아저씨들 이렇게 부업이랑 남새랑 채소, 채 소 그런 거랑 심어가지고 가을김장이요, 강냉이 옥수수랑 심어가지 고 사료나 배급이나 이런 거 본인들이 하고 그러니까 장사를 못해 요. 일단 시간 없어 장사를 못하고, 대대에서 장사도 못하게 하고.

(사례 13 구술녹취록, 2019/3)

위의 묘사에 따르며 군부대에서는 텃밭 등을 활용한 독자적인 경 제활동을 통해 식자재를 조달하면서 고난의 행군 이후 사회에서 광 범하게 이루어지던 장사활동은 ‘공식적으로’ 금지하였다. 울타리 안 의 군부대는 ‘사회’와 격리된 공간이었고, 여기서 생활하는 군인가

족들 또한 동일한 일상규범을 지키며 생활했다.

사례 13의 기억에 의하면 2000년대 초반 당시 군인들에게 하루 750그램, 가족들에게는 450그램 정도의 배급이 이루어졌으나, 운송 도중의 감소분 등 때문에 이보다 훨씬 적은 양의 배급이 이루어졌 다. 실질적인 식량부족을 겪은 것이다.

군대에서 힘들잖아요. 북한은 10년인데, 뇌물을 고이고 뭐 그냥 그렇게 뇌물을 받으면서 그 나머지를 충족시켜요. 그러니까 돈을 가라앉힐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뭐…. 그리고 또 직업이 어떤 거 쥐는가에 따라서 같은 부대 안에서도, 대대 안에서도 직업을 어떤 거 쥐는가에 따라서 그 돈을 좀 쓰고 안 쓰고가 달려 있어요. (중략) 후방 그런… 후방이 그러니까 식량, 피복 뭐 다 쥐고 있어요. 배급 이랑 주는 게 다 후방부에서 하는데, 그 직업을 쥔 사람은 그냥 그 집은 좀 살아요. (사례 13 구술녹취록, 2019/3)

장교들의 경우 일반 사병들이 고이는 뇌물로 생활을 유지할 수 있 었다. 배급을 담당하는 후방부의 경우 담당하는 물자를 일부 나눠 갖는 등의 비공식적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이런 방식 을 통해 중대 및 대대급 장교와 가족들의 경우 일반 사병이나 금방 별을 달고 나온 군관보다 훨씬 여유 있는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구 조가 마련되었던 것이다. 사례 13의 가족들도 대대급 사택에서 풍족 한 생활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장교였던 사례 13의 아버지는 대부분의 시간을 군장교로 생활하 여 사례 13은 어린 시절 아버지와 같이 놀아본 기억이 없다. 아버지 는 “되게 무섭고 정이 없는 사람ˮ으로 기억된 반면, 어머니는 학부형 총회, 등산이나 운동회 등의 행사에 참석하였고, 사례 13의 “인생진

ˮ에 대해서도 ‘이래라 저래라’하는 방식으로 잡아주는 역할을 하

였다고 한다. 사례 13은 군부대 울타리 내에서 엄격한 아버지의 생 활통제를 받으며 10여 분 거리에 있던 학교를 오갈 때만 “사회사람ˮ 을 만났다고 한다.

[오후] 5~6시면 집에 와서, 전기가 안 왔는데 북한은, 전기가 안 오니까 그냥 배터리 가지고, 아빠가 좀 직업 있었으니까 배터리도 부대 거 내려다봐요. 차 배터리 크다만 거 그냥 내려다보고, 올려 갔다 다른 거 보고 이러는데. TV는 보는데, TV 북한 영화 아니면 소련 영화, 중국 영화밖에 안 봐요. 한국 영화 못 봐요. 그냥 그거 보고. 친구 애들도 못 들어와요, 저희 집에. 대대라서. 친구 애들…

보초소를 딱 통과해서 들어오니까 친구 애들도 못 들어오고, 제가 가끔씩 나가 노는데 아빠엄마가 딱 시간 정해줘요. 언제까지 딱 놀 고 오라 하게 되면 진짜 그때까지 가야 돼요. 그러지 않으면 아빠가 아저씨들 데리러 보내요, 그 집에. 그래서 같이 가요, 그냥 잡혀가 지고. 막 마음은 진짜 중학교 때랑 놀고 싶은데. 그러니까 학교에 서 저희 집까지 한 10분, 15분 이렇게 가까웠어요. 대대에서 가까 웠으니까 바로 데리러 와가지고 가고. 애들끼리 모여 놀다가도 아 빠가 데리러 오면 저는 무조건 와요. 걔들끼리 놀고. 그런데 되게 놀고 싶은데 부모님이 통제했어요. 그 사회 애들하고 접하면 나쁜 물이 든다고. (사례 13 구술녹취록, 2019/4)

위의 구술에 의하면 대대장이었던 아버지의 권력으로 다른 집에 는 부족한 전기를 끌어올 수는 있었으나, 북한 영화나 소련, 중국 영화 밖에 볼 수 없도록 통제가 있었다. 즉 2000년대부터 북한 사회 에서 유행하던 한국 영화를 부모들이 철저히 통제했고, 군부대 내에 서는 수시로 검열이 이루어지므로 “USB를 건사 못해서ˮ 집에서 한 국영화를 볼 기회를 갖지 못했다. 사례 13은 특별한 일이 있어도 저 녁 8시 이후에는 집 밖을 나가지 못했고, 학교의 친구들도 부대 내로

들어올 수 없어서 대부분 학교가 끝나면 집으로 돌아와 생활하는 등 또래집단과의 접촉이 제한되었다. 특히 “사회 애들하고 접하면 나쁜 물이 든다.ˮ는 군 장교집안의 규범에 따라 생활했다. 선군정치의 핵 심인 군 장교집안의 구성원들은 부족하지만 여전히 국가의 배급을 받았으며 군대 내의 독자적인 경제활동을 통해 생산된 물자로 생활 하는 등 고난의 행군을 겪으며 장마당 경제가 확산되고 있던 ‘일반 사회’와 분리된 채 생활하였던 것이다.

(2) 학교의 규율과 저변의 한국 문화

사례 13의 중학교 시절, 학교에서는 학생들의 옷차림과 머리 길이 를 단속하고, 학생들 사이의 연애를 금지하는 등의 규율이 있었다.

학교생활은… 조직생활 너무 싫었어요. 4.15, 2월 16일 진짜 머 리까지 다 저거해요, 머리까지. 이렇게 다 꽁지는 것도 저희 소학교 때 단속했는데, 그냥 꽁지는 거 지금 괜찮은가? 패 따지 않으면 머 리를 이렇게 자르라 해요, 귀 밑에까지 딱. 여기에 어깨 닿지 않게.

머리 자르고, 바지도 청바지랑 못 입고 다녀요. 청바지 저 혜산에서 처음 봤어요. (중략) 학교 때 청바지도 못 입고 다니고. 무주름, 무 주름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나팔에 무주름도 못 입고 딱 주름 세운 바지에다가, 여름엔 딱 치마를 입고 다녀야 되고. 한 겨울에도 치마 를 입게 해요. 겨울에 12월 중순부터는 바지를 입게 해요. 그런데 딱 주름 세운 바지만. 몸의 윤곽선이 다 드러나는 바지는 또 못 입게 해요. 되게 신발도 막 편리화를 신게 하고 구두를 신지 못하게 하고, 화장은 더 말할 게 없고, 단속 되게 심하게 했어요. 규찰대 딱 세워 가지고 정문 앞에서 딱 체크 쳐가지고 들여보내고. 그 다음 좀 이상 하게 하고 다니는 애들은 이름 다 적어가지고 제재를 줘요. 처벌을 주고. 뭐 학교 전교 300명이 모인 앞에서 망신을 주지 않으면… 그 러니까 안 그래요. (사례 13 구술녹취록, 2019/19)

사례 13은 위의 구술에서 여학생들의 머리 모양과 길이를 단속하 고, 가능하면 치마나 몸이 드러나지 않는 ‘무성적인’ 바지를 입도록 하는가 하면, 화장과 구두 착용 등을 금지하는 등 학생들의 몸과 정 신을 훈육하는 학교의 오래된 규범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당시 북한의 중학교에서 통용되던 규율은 ‘자본주의 날라리 풍’을 단 속한다는 점에서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규범이지만, 인신에 대한 구 속이라는 점에서 봉건적이고, 성별에 따라 다른 기준을 적용하는 점 에서 성차별적인 특성을 지내고 있었다.

그런데 사례 13이 군대 바깥의 사회에서 통용되는 문화를 접할 수 있었던 유일한 기회는 학교에 가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정확히 말하 면 학교와 군대의 ‘사이 공간

’이라고 할 수 있다. 사례 13은 적당한

수업시간에 빠져서 가까운 애들 집에 가서 놀기도 하는 등의 기회를 통해 처음 “한국 노래ˮ를 들었다고 한다.

제가 거기서 처음 총련애들 노래라고 들었는데, 여기 와서 보니 까 한국 노래에요. 일본에서 들어와… 그냥 경기장에서 춤이랑 추 는 거 있는데, 알판 한창 돌 때 CD알, 그걸로. “야, 우리 집에 알 완전 신기한 게 있어.ˮ 수업시간에 좀 재미없는 수업이, 아니면 그 냥 빠져도 될 수업이면, 샘 그냥 눈감아줄 선생이면 그냥 빠져서 걔네 집에서 “야, 보자보자.ˮ 애들 막 데리고 가요. 가서 문 걸고 보고, 이러고. 되게 신기하고, 노래가. 좀 북한 노래는 박력 있고 이렇게 꼿꼿한데, 생활적인 노래도 나오고 되게 막 좀 신기했어요.

그래서 그 노래를 그냥 따라 듣고 그랬는데, 여기 와서 보니까 그게 한국 노래에요. (사례 13 구술녹취록, 2019/5)

위의 구술에 의하면 사례 13이 중학교를 다니던 2000년 중반에 북한 학생들은 한국 노래를 일본 조총련에서 들여온 노래라고 하며 몰래 접했다. 사례 13은 졸업식 준비나 농촌동원을 한 달씩 나가게

될 때, 공식적인 자유 시간을 가지며 집안의 통제 없이 친구들과 함 께 한국 문화와 놀이를 즐겼다. 평소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한국 노래를 “꽁꽁 닫아걸고ˮ 듣고, “증폭기를 켜놓고 아이들이 모여서 그 냥 춤만 추고 노는

ˮ 생활을 공유하기도 하였다. 사례 13은 당시 들었

던 한국 노래를 “생활노래ˮ라고 표현하였다. ‘생활적인 노래

’의 가사

를 통해, 북한 사회에서는 “여자는 어디까지나 고백을 받지 고백할 수 없다.ˮ는 생각이 박혀 있는 반면, 한국 노래에는 “야, 너 좋아해.ˮ 라는 표현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있음을 짐작하였다고 한다.

생활노래. 되게 가고 싶고…. 북한은 그걸 표현을 못해요. 예를 들어 누구를 좋아한다면 그걸 표현하는 데 한국은

야, 너 좋아해.ˮ 이렇게 말하잖아요, 자유니까. 그런데 그걸 되게, 뭐랄까 여자가 고백하는 게 아니라 남자가 고백해야 된다, 이런 관점에서 여자는 어디까지는 고백을 받지 고백을 할 수 없다는 이런 종이에 딱 박혀 있어요. 그러니까 되게 좀… 내가 쟤를 좋아하는데 말할 수도 없고, 좀 자유가 없어요, 보니까. 여기하고 대비해 보면 자유가 없어요.

(사례 13 구술녹취록, 2019/5)

사춘기였던 사례 13은 한국 노래의 가사를 음미하며 그 속에 녹아 있는 사랑에 대한 관념을 북한 사회의 그것과 비교하며 사적인 감정 을 표현할 수 있는 ‘자유’의 부재를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위의 텍 스트에 등장하는 “여기하고 대비해 보면 자유가 없어요.ˮ라는 판단 은 그 이전의 경험을 현재 한국에서의 생활을 바탕으로 평가한 것이 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사례 13은 여자들의 경우 짝사랑을 넘어 좋아 하는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 일반적이고, 서로 사귀다가도 부 모들이 중매하여 “너 쟈네 가문이랑 살아야 된다면, 그냥 좋아해도 갈라지는 률이 많은

ˮ 북한과 달리, 개인의 결정이 중요한 ‘바깥세계’